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 - 시민 종교를 거부하는 참된 예배와 증언, 어린 양을 따라 새 창조로 나아가다
마이클 J. 고맨, 박규태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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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마지막 권인 요한계시록은 읽기 어렵고 위험한 책으로 알려졌다. 계시록의 내용을 근거로 말세, 종말, 대환난, 심판, 666, 적그리스도 등의 말이 유포되고 있다. 유사 이래 늘 그랬지만 요즘 들어 특히 본격화하고 있다. 신약 신학자 마이클 고먼(Michael J. Gorman; 1953 - )의 ‘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는 시민 종교를 거부하는 참된 예배와 증언을 부제로 하는 책이다. 시민 종교란 세상 권력을 섬기는 종교를 말한다.(2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시민 종교는 이전의 제국, 초강대국 행사를 하는 나라, 보통 국가 심지어 가난한 개발도상국에서도 발견된다.(114 페이지) 저자는 자신의 책이 적그리스도의 정체 또는 주님이 재림하실 날을 놓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 말한다. 아울러 휴거 때 뒤에 남겨질질 모른다는 두려움을 조장하거나 자기 도취적인 종말 대비를 강화하는 식으로 요한계시록을 읽어내는 태도에 맞설 대안을 찾는 이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고 말한다.(30 페이지) 


Reading Revelation Responsibly라는 수식어가 눈에 띈다. 요한계시록 책임감 있게 읽기라는 의미다. Re로 시작하는 세 단어가 나란히 들어선 것이 경쾌하게 여겨진다. 요한계시록을 책임감 있게 읽는다는 말은 요한계시록을 미래를 위한 극본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극본으로 읽는다는 의미다.(351 페이지) 저자는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살아 있는 말씀으로서 시대 정황이 달라져도 늘 신선한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으나 요한계시록의 경우에 어떤 해석들은 다른 해석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기독교에 부합하지도 않고 건강하지도 않다고 지적한다.(26 페이지)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로마의 아시아 속주(屬州)에 자리한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형식의 경전이다. 일곱 교회란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이다. 


저자는 에베소가 출발점인 이유는 그곳이 요한이 유배당하기 전 그의 사역 거점이었기 때문이요/ 이거나 그곳이 유배지인 밧모섬과 가장 가깝기 때문일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의 제목 후보들 가운데 ‘어린 양을 따라 새 창조로 나아가다‘란 부제를 가장 선호한다고 말한다.(53 페이지) 저자가 말했듯 요한계시록의 장르를 결정하기는 쉽지 않다. 여러 다른 문학 양식의 특징을 모두 가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묵시(默示)는 저항 언어이자 저항 문학이다. 미국의 신약 학자인 리처드 호슬리는 유대 묵시 문헌 저자들은 세상 종말이 아닌 제국의 종말을 고대했다고 말한다. 호슬리에 의하면 그들은 사람들이 예상한 우주 용해(溶解; 우주가 녹아 없어짐)라는 그늘에 살지 않고 이 땅이 새롭게 되어 인간 사회의 삶이 새로워지기를 고대했다.(58 페이지) 


신학자 미첼 레디쉬(Mitchell Glenn Reddish)는 요한계시록 언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은 정보를 전달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요한이 체험한 것을 체험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 중요한 점은 ’상징 언어를 어떻게 볼까?‘이다. 상징 언어는 뭔가를 일깨워주며 풍부한 의미를 표현한다. 상징 언어는 산문이 쓰는 언어가 아닌 시가 쓰는 언어다. 상징은  비록 초월성을 지녔더라도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을 가리킨다. 즉 상징들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허구가 아니며 상징이 지시하는 언어는 문자와 딱 들어맞지 않아도 실존하는 세계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는 사람들조차 요한계시록의 상징을 상징으로 여기면서도 메뚜기는 헬리콥터요, 뿔이 열 개 달린 짐승은 다시 뭉친 로마 제국인 유럽 연합을 가리킨다는 식으로 해석한다고 지적한다.(67 페이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언에 대해 바르게 아는 것이다. 저자는 성경의 전통을 살펴보면 예언은 오로지 미래에 있을 일만을 천명하거나 미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한다. 저자에 의하면 예언은 그런 것을 천명하고 미리 이야기하는 것을 아예 주된 내용으로 삼지도 않는다. 오히려 예언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구체적 역사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거나 그들에게 도전을 던지는 말을 이야기한다. 선지자들은 위기 때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한다.(72 페이지) 이사야 6장, 에스겔 1장처럼 구약 선지자들은 때로 환상을 체험하는 상황 가운데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이 이들을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시는 것이었다. 요한도 주의 날에 체험한 환상(요한계시록 1장 9 – 20절) 중에 그가 본 것을 기록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새 바벨론(로마) 관원들은 분명 요한의 신실한 증언을 문제삼아 그를 밧모섬에 유배했다.(71 페이지) 종교 업무와 정부 업무를 맡은 관원들은 요한의 증언은 신을 모독함으로써 정치 질서와 사회 체제에 위협을 가하는 것으로 보았다.(7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요한계시록에서 중요한 점은 예배 문학이요 예전(禮典) 문헌이고 저항 문학의 성격은 한 단계 아래다.(75 페이지) 요한도 골로새 사람들과 에베소 사람들에게 서신을 보낸 다른 사도처럼 순수하게 서신 형식만을 따를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이 도미티아누스 치세기 말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라 말한다. 3장에서 저자는 요한계시록이 가진 예전(禮典)과 신정(神政) 차원에 대해 논한다. 이 두 차원은 고대의 초강대국을 비판하는 고전 텍스트의 구성 요소이자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특히 이 시대 세계 초강대국인 나라 안에 또는 그 나라 가까이 사는 이들에게 전하시는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이다.(85 페이지) 


이교도 불신자들은 예수를 주라 고백하면서 그리스 – 로마에서 이루어지던 종교, 사회 정치 활동과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들을 애국심이 없고 신을 섬기지 않는 행위로 보았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동업자에게 따돌림 당했고 정부 관원에게 조사를 받기도 했다. 요한계시록 2장에는 버가모의 안디바가 폭도 손에 또는 공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기록이 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비판하는 대상은 제국의 우상 숭배(시민 종교)와 불의(군사와 경제와 정치와 종교 쪽의 억압), 특히 로마의 우상 숭배와 불의다. 그러나 십중팔구 요한계시록은 국가의 조직적 핍박이나 대중이 그리스도인에게 광범위하게 자행하고 있는 부당한 대우에 대한 반응이 아니다.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일상적인 제국 즉 매일 우리가 씨름하는 여러 악, 불의 그리고 그릇된 충성에 대한 반응으로 읽어내는 것이 더 낫다. 


요한계시록에서 중심이자 중핵을 이루는 환상은 요한이 하나님과 어린 양을 본 환상 특히 하나님과 어린 양을 예배하는 환상이다.(90 페이지) 요한계시록은 첫 번째 계명을 신실히 지키라는 예언자의 요구로서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요구이자 거짓인 모든 신을 버리라는 요구다. 요한계시록 본문에는 수많은 찬미와 예배 노래들을 표현해놓은, 신학시(神學詩)가 지닌 에너지가 힘차게 고동친다.(91 페이지) 송영(찬양) 본문들과 환호라 불리는 것들도 있다. 요한계시록은 예전을 따라 축도와 마지막 아멘으로 끝을 맺는다. 요한계시록은 환상과 기도의 융합체다. 요한계시록은 하늘에서 지금도 이어지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동참하라는 요구인 동시에 예배로 드려지는 거룩한 드라마를 펼쳐 보인 텍스트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이야기, 하나님의 선교를 시작하라는 소환장이기도 하다. 


요한계시록은 단순히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사실을 모르면 어느 누구도 요한계시록을 읽을 수 없다. 요한계시록은 겹치고 동시성을 띠고, 서로 뒤엉켜 연결되어 있는 몇몇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요한계시록의 내러티브는 다섯 가지다. 창조와 재창조, 구속(救贖), 심판, 증언, 승리 등이다. 요한계시록은 로마라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로마를 하나님 백성을 대적하는 큰 원수인 도시 바벨론으로 비유하여 묘사한다. 황제 숭배는 도시 종교 또는 시민 종교의 핵심이었다. 로마의 평화 즉 팍스 로마나는 무력을 앞세운 정복, 노예 삼기, 다른 형태의 폭력에 의존한 로마의 통치권 확립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황제 숭배는 소아시아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교회들이 자리한 도시들에 널리 퍼져 있었다.(105 페이지) 


에베소와 서머나에는 황제를 숭배하는 중요 신전이 있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는 어떤 식으로든 황제를 숭배했다. 요한계시록은 신정적인 텍스트다. 이 책은 누가 참 하나님이신지, 그리고 하나님과 사회 정치질서 사이에 존재하는 옳고 그른 관계들을 놓고 여러 가지 주장을 제시한다. 요한계시록은 제국의 정치 신학과 이 정치 신학의 바탕이 되는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도전한다. 아울러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과 어린 양만이 참 주권자며 모든 복의 근원이시며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심을 분명히 밝힌다. 더욱이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진정 누가 주권자이신지뿐만 아니라 참 하나님이 행사하시는 주권이 어떤 종류인가 일러준다. 그 주권은 많은 이들이 폭력 및 강압과 거리가 먼 어린 양의 권세라고 불러온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어디에서나 또 어떤 식으로든 폭압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세상 권력을 비판하는 책으로, 특히 사람들이 신성하다고 여기고 섬기며 충성하는 세상 권력을 비판하는 책으로 읽는 것이다.(111 페이지) 저자는 최근 미국이 베네수엘라, 그린란드를 대하는 방식에도 참고가 되는 이야기를 한다.(’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가 나온 것은 2014년이다.) 저자는 미국의 체제를 세속 칼뱅주의로 규정하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속 칼뱅주의는 부지런한 노동과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적절한 너그러움이 결합하면 반드시 훨씬 더 큰 자유와 번영을 얻으며 이 자유와 번영을 하나님이 복을 베푸시는 표지로 간주하지만 이면에 군사력 만능주의와 신성한 폭력이라는 신화가 존재한다고 말한다.(117 페이지) 


이런 신화는 곧 미국이 역사 속에서 예외적 존재이자 메시아 역할을 할 위치에 있다 보니 평화로운 수단이 바람직하지 않거나 소용없을 때는 미국이 폭력을 사용해도 좋다고(원주민들을 죽이거나 어떤 나라를 침공하거나 전쟁을 벌이거나 다른 식으로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고)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확신, 심지어 폭력을 사용하라고 명령하셨다는 확신을 말한다. 신성하다고까지 말하는 이런 폭력은 다양한 세력 팽창의 정당성을 제공해 주었고 요 근래에는 자유와 정의를 보호하고 증진한다는 메시아적 사명의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예전(禮典) 텍스트이면서 신정(神政) 텍스트로 규정한다. 한 분이신 참 하나님,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대안(代案)이기에 필연적으로 세상 권력에 중점을 둔 정치적 믿음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126 페이지) 전통적인 우상이 아프로디테, 아스클레피오스, 디오니소스, 마르스, 카이사르 등이라면 오늘날의 그것은 성(性), 건강, 건강하고 단단한 몸, 쾌락, 전쟁, 힘, 안녕을 비롯한 것들이다. 


저자에 의하면 슬프게도 이런 우상을 따르는 이들 대부분이 교회에 속해 있다. 요한계시록은 우상 숭배를 회개하고 그로부터 돌아서기를 요구한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없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실제로 재림하시기 전에 그 예비 조치로서 은밀히 교회를 하늘로 들어 올리시리라는 말이 없다고 말한다.(133 페이지) 요한계시록은 현실에 순응하는 교회에는 도전을 던지고 핍박 받는 교회에게는 위로를 전한다. 요한계시록은 신학시적이고 신정적인 텍스트로서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이루어질 하나님과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의 통치, 제국과 시민 종교를 겨눈 강력한 비판, 그리고 신실하게 저항하고 삶으로 예전을 표현하며 복음을 전할 소망을 가진 공동체 안에서 어린 양을 따르라는 도전을 던지는 권면을 '영감이 넘치는 환상'에 담아 우리에게 전해준다.(134 페이지) 


저자는 자신의 책이 과거나 미래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요한계시록이 현재 교회에 주시는 말씀이라는 데 초점을 맞춘 책이라 말한다.(15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요한계시록 바르게 읽기'는 세부사항보다 큰 그림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의 의도는 시험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어 이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끝까지 신실함을 지키면서 헌신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160 페이지) 저자는 자신이 요한계시록의 환상을 드러내는 구절을 인용하지 않은 것은 여기 저기서 한 구절씩 인용한다 해도 요한계시록의 환상이 기진 힘이나 그 환상들이 제시하는 신학적 주장의 완전한 의미는 물론 그런 환상들이 통합하여 한 책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미치는 효과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161 페이지) 


저자가 제시하는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일곱 가지다. 1) 보좌. 2) 현실로 존재하는 악과 제국. 3) 우상 숭배와 부도덕으로 유혹함. 4) 언약에 신실할 것과 저항을 요구함. 5) 예배와 다른 시각. 6) 신실한 증인;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모범. 7) 임박한 심판과 구원/ 하나님의 새 창조 등이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은 1세기 그리스도인이 1세기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고 1세기의 문화 도구와 이미지를 사용하여 기록한 경전임을 기억하라고 말하며 그렇기에 21세기에 실제로 존재할 것들을 특별히 이미 알려주지는 않으나 우리 시대와 연관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는 요한계시록이 우리 시대에도 중요한 거울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히는 대목이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죽음과 파괴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심판과 정화를 상징한다고 말한다.(168 페이지) 


일곱 교회에 주는 메시지에는 패턴이 있다. 1) 교회의 사자에게 하시는 말씀. 2) 대부분 여는 환상으로부터 가져온 ‘그리스도를 묘사한 말’. 3) 칭찬. 4) 꾸지람. 5) 도전; 권면/ 경고. 6) 이기는 이들에게 주시는 종말의 약속. 7) 성령에 귀를 기울이라는 권면 등이다. 이를 줄이면 1) 인정. 2) 바로잡음. 3) 동기를 불어넣는 약속이다. 교회는 두 가지 당면한 과제 앞에 있었다. 여러 종류의 협박, 현실에 순응하라는 강력한 유혹이다. 요한은 여러 잡신에게 바친 희생제물을 먹은 교회 사람들에게 영적 음행, 간음을 했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경우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책망을 받은 라오디게아 교회이다. 라오디게아 근처에는 히에라폴리스 온천이 있었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은 사람을 즐겁게 하고 이롭게 한다. 미지근한 물은 맛도 역겹고 건강에도 좋지 않다. 본문은 두 극(예수를 따르는 뜨거움과 예수를 거부하는 차가움)의 중간 입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교회는 중용을 따른 교회가 아니라 현실에 철저히 순응하고 타협하는 교회로서 살아남는 데 필요하다면 현실에 순응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그 시대 지배층과 권력자들이 따르는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모조리 받아들인 교회다. 


나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으니라는 말을 들으며 차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무관심 또는 떠남을 의미하는데 그리스도께서 그런 의미의 말을 하셨으리라 생각하기 어려웠었다. 일곱 교회를 아우르는 과제는 타협하느냐 마느냐였다.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 18장 4절을 보자.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거기서 나오라는 말씀이 있다. 요한계시록이 무책임하게 순교를 칭송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1세기에 순교자란 말은 증인을 의미했다. 순교자가 신앙을 지키다가 죽은 증인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은 그 후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주신 일곱 메시지는 죽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를 더럽히는 모든 것을 멀리하는 일을 포함하여 제자의 갈 길을 가라는 것이다.(194 페이지) 


저자는 요한계시록 4장 8절에 나오는 우주의 중심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주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을 언급한다. 네 생물, 24명의 장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정체가 아니라 그들이 찬송과 예배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인(印)을 떼기에 합당하신 분 그리고 그 뒤에 그 두루마리를 열어 마지막 심판과 구원을 시작하실 분은 바로 신실함을 지키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부활, 승천하셔서 승리하신 주님이다.(216 페이지) 이 부분을 읽지 못하는 요한계시록 읽기는 문제적이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필요하면 무력도 불사하는 신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경책이 된다.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신실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나타낸다는 것은 역설이다.(219 페이지)


요한은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란 말을 한다.(요한계시록 5장 6절) 요한은 우상을 숭배하는 죽음의 문화인 강력한 바벨론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라 말한다.(요한계시록 17, 18장) 억압과 죽음뿐인 바벨론이 무너지고 새 예루살렘, 새 하늘과 새 땅, 온전함과 생명이 어우러진 새 문화가 대신 들어선다.(요한계시록 21, 22장) 요한계시록의 세 주인공 중 첫 번째는 하나님이다. 알파와 오메가,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다. 두 번째는 어린 양이요 신실한 증인이신 그리스도다. 인상적인 말은 요한은 밧모섬에 있지만 성령 안에 있다는 표현이다.(요한계시록 1장 10절, 4장 2절, 17장 3절, 21장 10절) 


요한계시록이 펼쳐보이는 우주 차원의 묵시극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연이시고 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엇비슷하게 하나님 - 그리스도- 성령을 패러디하여 거룩하지 않은 삼위일체를 이룬 사탄과 두 짐승이 주연에 맞서는 상대역으로 등장한다.(238 페이지) 짐승은 666이라는 특별한 숫자를 가졌다. 사람들은 통상 이 짐승을 적그리스도라 부르지만 요한계시록에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없다. 짐승은 지배계급이냐 아니냐를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 짐승의 표를 받고 경제 활동에 참여하라고 요구한다. 짐승의 표는 제국을 나타내는 슬로건이나 인장, 이미지일 수 있다.(241 페이지) 666은 완전함을 상징하는 777의 패러디일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지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신실한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요한은 (입에는) 달콤하지만 (배에는) 쓴 두루마리를 먹는 환상을 본다. 유배당한 요한은 하나님이 다른 이들도 증인으로 부르셨음을 깨닫는다. 증인이 되라는 소명은 어렵고 위험하지만 이 소명에는 지금도 하나님이 보호해주신다는 약속과 장차 하나님이 보상해주시리라는 약속이 함께 따른다.(254 페이지) 요한계시록은 이런 보호를 고대 관습인 인(印)을 찍음이라는 상징으로 표현한다. 이 인과 대립하는 것이 짐승의 표다. 하나님이 교회를 보호하신다는 것은 교회가 시험과 고난을 모면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런 시험과 고난이 불가피한 현실이 되어도 이에 굴하지 않고 보호해준신다는 의미다. 저자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은 과거나 지금이나 카페테리아 스타일의 기독교와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257 페이지) 


요한계시록은 6장부터 20장까지 줄기차게 전쟁, 기근, 역병, 죽음, 불공정한 시장 행태, 반역을 묘사한다. 이는 모두 우주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기보다 인간이 저지르는 악이다.(265 페이지) 미국의 성서학자 브루스 메츠거는 우리는 흰 말, 정복자의 입에서 나오는 칼, 죽은 천사들의 살을 포식하는 새들을 보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이들은 철저하게 상징이다. 이 환상들의 1차 목적은 두려움을 불어넣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뿐 아니라 제국을 동원하여 잠자는 자들을 깨우려는 데 있다. 요한계시록의 말 탄 네 사람, 어린 양이 연 두루마리의 일곱 인 중 첫 네 인은 인류 역사에서 아주 잘 알려진 사건들을 상징한다. 정복, 평화의 붕괴, 전쟁과 죽음, 불공정한 경제 체제, 기근과 질병 등이다. 이는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지만 근원은 결국 죄가 낳은 결과다.(269 페이지)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내리신 벌이기도 하다. 


저자는 요한계시록 19장 13절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저자는 그의 적들과 싸우기 전에 이미 옷이 피에 젖었으니 이는 그리스도가 흘린 피라고 말한다.(272 페이지) 오늘 서구 세계에서 우리 개인, 우리 가정, 우리 교회를 형성하는 것은 복음의 본질에 어긋나는 소비만능주의, 하나님과 인간을 거스르는 가치들이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에 폭력이 많음을 지적하며 그러나 폭력을 완화시키는 일곱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말한다. 1) 제국이 몰락을 자초하는 것은 정의가 작동함을 뜻한다. 2) 자비가 파멸을 누그러뜨린다. 이는 회개에 목적이 있음을 말한다. 3) 죽임을 당하셨다가 하나님이 일으키신(다시 살리신) 어린 양의 모습에서 생명을 주고 폭력을 쓰지 않고 로마에 맞섬으로써 승리를 얻으신 하나님의 방법을 본다. 4) 어린 양이 거둔 최종 승리는 군사적인 행동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이기는커녕 도리어 다른 이들을 위하여 죽은 이로부터 나온 계시와 설득과 심판의 말씀의 형태로 다가온다. 5)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들이 회개를 거부할 때에 비로소 다가온다. 6) 요한계시록을 아우르는 강령은 구원이지 복수심에 불탄 파괴가 아니다. 7) 하나님의 백성은 제국을 폭력으로 뒤엎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과 신실한 삶으로 제국에 맞서라는 소명을 받는다. 


저자는 특정한 재해를 하나님이 일부러 쏟아내신 진노요 심판으로 해석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속속들이 안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는 오만이라 말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을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진노하시는 분이 아니라 냉혹하다 할 만큼 정의로우신 분으로 묘사한다.(299 페이지) 저자는 요한이 새 예루살렘을 사각형으로 묘사하다가 육각형으로 묘사했다고 말한다. 당시 사람들이 사각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고 지성소가 육각형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여러 나라에서 모인 사람들을 보여주는 환상에서 출발해 모든 나라가 와서 예배하리라는 약속을 거쳐 구속(救贖)받은 인류를 보여주는 환상을 향해 나아간다. 그곳에서는 혼돈과 악을 상징하는 바다가 없어졌고 죽음이 없다. 눈물, 애통함, 곡함이 없다. 악하거나 부정하거나 저주받은 것들/ 사람들이 없다. 성전이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 양이 새 예루살렘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해나 달이나 다른 발광체가 없으며 별도 없다. 닫힌 문이 없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물리적 세계에 변형이 일어난다는 의미다. 


요한계시록 21, 22장이 제시하는 각본을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회 정의, 개인 구원과 상관없는 사회 정의를 일러주는 환상 정도로 축소하여 읽으면 안 된다. 요한계시록은 도피주의 종말론도 허용하지 않지만 하나님이나 개인 구원과 상관없이 사회정의나 이야기하는 본문으로 보는 흔한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다.(325 페이지) 우리는 짐승과 어린 양, 제국의 힘과 어린 양의 권세를 동시에 섬길 수 없다. 하나님과 어린 양을 예배하면서 동시에 시민 종교를 섬길 수 없다.(335 페이지) 저자는 정치권력, 경제력, 군사력을 삼위일체 거짓 신이라 부른다.(338 페이지)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고(요한계시록 3장 3절) 입은 옷을 늘 깨끗하게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요한계시록 22장 4절) 


성경의 어느 한 책이 말하는 영성이 성경 전체가 들려주는 증언을 대신할 수 없듯 요한계시록도 분명 성경에서 유일한 책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의 영성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은 정경의 나머지 부분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들려주는 묵시 – 예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오직 요한계시록만이 일으킬 수 있는 어렵고도 아주 예리한 질문을 던지지 못할 수 있으며 요한계시록만이 아주 분명하게 계시하는 것들을 깨닫지 못할 수 있다.(348 페이지)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보고 들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예배하고 증언하라고 말한다. 이어 나와서 저항하라고 말한다. 이어서 따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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