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 방주에 새끼 공룡들을 태웠다고? - 기독교인이면서 진화를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
자네트 켈로그 레이 지음, 노동래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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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방주에 새끼 공룡들을 태웠다고?'의 저자인 자네트 켈로그 레이(Janet Kellogg Ray)는 진화와 우주의 나이를 받아들이는 과학교육자이자 생물학자인 한편 교회에 출석하는 헌신적인 그리스도인, 복음주의 교회의 신실한 교인,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信經)의 모든 단어를 믿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설명한다. 저자가 인용하는 자연과학 교사인 존 클레이튼의 주장이 주목할 만하다. 클레이튼에 의하면 창세기 1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은 날짜가 특정되지 않았고 시간 표시가 없는 구절이다. 즉 이 구절로 지구 나이 6000년을 뒷받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는 어느 때에는 과학을 창세기에 맞추려고 하고, 또 다른 때에는 창세기를 과학에 맞추려고 한다고 말한다. 두 경우 모두 엄청난 지적 곡예가 요구될 수 있다. 책의 제목인 '노아 방주에 새끼 공룡들을 태웠다고?'는 기독교인들의 시대착오적 인식을 일깨우는 제목이다. 물론 이때의 기독교인들이란 지구 역사가 6000년에 불과하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공룡이 등장한 것은 228백만년전이고 멸종한 것은 6600만년전이다. 지구 역사가 6000년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을 젊은 지구론자라 한다. 이런 지질학적 연대상의 문제뿐 아니라 다른 문제도 발생한다.

 

즉 성경에 의하면 노아는 모든 종류의 육상 동물 두 마리씩을 방주에 태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창조론자들은 홍수 때 50~60종의 공룡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므로 모든 종류의 육상동물 두 마리 및 정결한 짐승 일곱 쌍, 그리고 100~120 마리의 공룡을 방주에 실어야 했다는 답이 나온다. 거기에 그 모든 육상동물들과 1년의 항해에 대비한 식량 및 물, 사람들을 위한 물과 식량이 탑재되어야 한다. 제목에 나오는 새끼 공룡들이란 말은 바로 이런 물리적 공간 확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저자는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이론이란 용어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에 의하면 이론이란 법칙들과 사실들을 짜서 논리정연한 전체로 만든다. 즉 과학 이론이란 법칙이나 사실보다 위에 위치한다. 저자는 과학은 단순한 사실 수집 이상이며, 과정이며, 우리가 자연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라고 설명한다. 과학은 또한 스스로를 교정하며 진리를 추구한다. 과학은 이기기 위해 어떤 입장을 옹호하지 않는다. 과학은 실재를 알고자 한다.

 

다윈 시대에 사람들은 생물이 정태적(靜態的)이라고 생각했다. 즉 모든 생물이 약 6000년전에 하나님에 의해 현재 형태로 특별하게 창조되었다고 생각했다. 다윈은 최초로 어떻게 변화가 일어났는지에 관한 아이디어를 진척시킨 인물이다. 다윈은 생명이 진화했다고 제안한 유일한 사람도 아니고 최초 인물도 아니다. 다윈은 자연선택을 최초로 제안했고 수백만년에 걸친 종의 진화를 의미하는 딥 타임(deep time) 개념을 편입시켰고 모든 생명은 서로 관련이 있다는 의미의 계통수 모델을 제안했다.

 

중요한 사실은 자연선택이 완벽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적자생존은 최적자가 아닌 생존하고 짝을 찾고 후손을 남기기에 충분한 자의 생존이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무작위적이지 않다. 유전자의 돌연변이는 무작위적이지만 어느 집단에서 돌연변이가 시작될지는 확실히 무작위적이지 않다. 종들은 그것들이 지닌 특질들이 그것들을 환경에 적합하게 만들기 때문에 진화한다. 자연선택은 주사위 던지기의 명제인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다. 환경은 생물들에게 있어서 진화적 변화의 강력한 동인이다.

 

어류, 포유류, 파충류를 보자. 세 동물 모두 해양 생활이라는 환경상의 압력을 받는다. 공기역학적으로 물속을 이동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면 유선형의 신체를 지니게 된다. 물속에서 빠르게 헤엄치고 신속하게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는가? 그러면 지느러미와 물갈퀴를 지니게 된다. 진화는 다른 세 동물에게서 유사한 문제(해양 환경에서 사는 것)에 대한 해답을 유사한 방식(유선형 신체, 지느러미와 물갈퀴)으로 풀었다. 상어, 돌고래, 어룡의 신체의 유사성은 공통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의 신체적 유사성은 공통적인 환경상의 압력 때문에 생겨났다. 물론 세 동물에게는 아주 오래전에 공통의 척추동물 조상이 있었지만 그것들의 공통 조상은 유선형 신체, 지느러미, 물갈퀴를 지니지 않았다.

 

오래된 지구 창조론자들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라는 두 계시 모델을 통해 과학적 증거에 접근한다. 하지만 과학과 성경 사이에 충돌이 생기면 그들은 성경편을 든다. 오래된 지구창조론자들은 과학적 증거가 궁극적으로 성경과 일치할 것이라고 믿는다. 가령 그들은 창세기에 수록된 창조하다라는 단어의 의미가 과학의 빅뱅 묘사와 일치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생명의 공통 조상에 관한 증거를 거부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구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각각의 모든 종을 수십억번 기적적이고 개별적으로 만드셨다고 믿는다. 즉 그들은 생물학적 진화의 모든 측면을 거부한다. 지적 설계는 창조론 견해들과 별도의 견해가 아니라 그런 견해들을 방어하는 방법의 하나다. 그들은 공통 조상의 가능성을 허용하지만 계통은 설계된 것이지 진화의 결과가 아니라고 가정한다. 우라늄 238의 원소들은 불안정하다.

 

우라늄 238은 좀 더 안정적인 원소인 납 206으로 변할 때까지 입자들을 떨쳐낸다. 우라늄 238의 반감기는 엄청나게 긴 45억 년이다. 우라늄 238과 납 206을 함유한 암석의 연대를 추정하기 원하면 납 236에 대한 우라늄 238의 비율을 측정하면 된다. 이 비율을 알면 우리는 방사성 연대 측정법을 사용해서 그 암석의 나이를 추정할 수 있다. 좀 더 무거운 돌들이 맨 먼저 가라앉고 좀 더 고운 모래가 그 다음에 가라앉고 좀 더 고운 실트가 그 뒤를 따르고 마지막으로 가장 고운 점토가 가라앉는 것을 지질학에서는 상향 세립화라 부른다.

 

홍수 물이 물러갈 때 우리는 홍수 물에 의해 쌓인 토양의 층들에서 상향 세립화 순서를 관찰한다. 즉 바닥에는 입자가 조악한 층들이 나타나고 꼭대기로 갈수록 입자가 점점 더 고와지는 것이다. 교대하는 층들 중 일부는 다른 층들보다 크다. 그리고 우리가 큰 홍수 뒤에 진흙층을 보리라고 예상하는 그랜드 캐니언의 윗부분에서는 그런 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랜드 캐니언의 윗부분은 이암이 아니라 홍수 퇴적물에서 관측된 적이 없는 점토암, 사암, 석회암층들이다. 그랜드 캐니언에 있는 암석들은 방대한 시간에 걸쳐 여러 번의 퇴적이 이루어졌고 그 중간에 여러 번의 침식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한다.

 

더구나 그랜드 캐니언에 있는 모든 퇴적물이 평평한 수평층으로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지역에서 우리는 뒤틀리고 갈라지고 단층이 진 층들을 목격한다. 이는 다른 종류의 힘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암석을 밀고 당기고 암석에 압력을 가한 역사를 증거한다. 홍수 지질학자들은 그랜드 캐니언의 형성시간 틀을 노아의 홍수가 일어난 해 또는 홍수 기간 중으로 제한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 증거를 거부한다. 대신 홍수 지질학자들은 암석 변형의 원인을 홍수에 의해 새롭게 쌓인 부드러운 퇴적물의 접힘에 돌린다. 석회암은 대개 연체동물이 살다가 죽어서 껍데기 조각들과 골격잔해를 남기는 얕은 바닷물에서 형성된다. 그랜드 캐니언에 있는 가장 큰 절벽 전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계적으로 얕은 바닷물에서 석회암이 형성되는 많은 예가 있다. 석회암은 격렬한 홍수 물에서 형성되지 않는다.

 

21세기의 창조론자들은 홍수에 의한 분류 설명을 확장해서 체중과 이동성 외에 동물의 행태와 지능을 포함시킨다. 해양 무척추동물은 무겁고 느리기 때문에 가장 이른 화석층들에서 발견된다. 어류는 좀 더 이동성이 있기 때문에 해양 무척추동물들 위의 암석층들에서 발견된다. 다른 동물들은 그것들이 행태 면에서 얼마나 유연한가에 따라 다른 층들에서 발견된다. 가장 지능이 낮은 양서류가 먼저 발견되고 이어서 파충류와 조류가 발견되고 마지막으로 포유류가 발견된다. 가장 지능이 높은 생물들은 높은 곳으로 올라갔고 궁극적으로 거기서 죽었다. 그래서 창조론자들은 지능이 높은 인간이 가장 새로운 암석층 즉 꼭대기 층에서 발견되는 것에 놀라지 않는다.

 

흔히 진화는 갑작스러운 사건으로서 진화를 통해 어류가 양수를 낳았다거나 파충류가 포유류를 낳았다거나 유인원이 인간 아이를 낳았다고 오해된다. 그것은 진화에 대한 오해일뿐만 아니라 기초 생물학에 대한 오해이기도 하다. 진화가 참이라면 우리는 화석 기록에서 거대한 도약이 아니라 연속체를 불 것이다. 화석 기록에서 점점 더 복잡한 신체 형태가 최초로 출연한 후에도 가장 덜 복잡한 형태들이 사라지지 않는다. 화석 기록의 추세들이 있지만 원시적인 형태들이 좀 더 복잡한 형태들과 더불어 계속 살아간다. 가장 오래된 암석들에 나타나는 생명은 원시적이고 단순하며 이후의 층들에서는 변이, 다양성, 복잡성이 증가한다.

 

과도기종들은 인어나 원숭이- 다람쥐 - 물고기 같은 기괴한 뒤죽박죽이 아니라 원시적인 특성들과 진보된 특성들의 혼합이다. 과도기종들은 종의 진화를 증명한다. 닐 슈빈은 최초의 네 발 동물들이 나타나는 암석의 나이를 알았다. 그는 진화가 참이고 공통 조상이 사실이라면 수생 동물과 육상 동물 사이의 과도기 동물들은 중간 나이의 암석들에서 발견되리라고 예측했다. 화석 기록에서 공룡에서 새로의 진화는 아주 매끄럽다. 공룡에서 새로의 진화는 매우 잘 입증되어서 현대의 분류 체계는 이제 새들을 좀 더 넓은 파충류 그룹 안에서 공룡 분지(分枝)에 위치시킨다. 특히 새들은 수각룡 분지에 속한다. 현대의 많은 생물학 책들과 교과서들은 새들을 조류 공룡으로 부르고 전통적인 공룡들을 비조류 공룡으로 부른다.

 

진화는 한 조상으로부터 현대의 종까지 시간상으로 곧게 행진하는 직선이 아니다. 대다수 지적 설계 옹호자들은 소진화에 동의하지만 대진화를 부인한다. 소진화는 종에서의 작은 변화들로 새들에서 나타나는 부리 행태 같은 적용을 허용한다. 대진화는 공통 조상으로부터 종들의 유래를 의미한다. 진화는 수선장이다. 자연은 검소하다. 진화는 무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원숭이들이 인간으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주위에 여전히 원숭이들이 존재한다. 원숭이들은 원숭이인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인간으로 진화하지 않는다. 아무도 내게 만일 당신과 당신의 8촌들이 모두 당신의 고조부의 후손들이라면 왜 당신에게 여전히 8촌이 존재하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내가 태어났을 때 내 8촌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8촌들은 그들의 삶을 살았고 그들 자신의 가계도를 발전시켰다.

 

인간은 대형 유인원과 공통 조상을 공유하며 침팬지와 가장 가깝다. 좀 더 가까운 인간의 친척들이 과거에 살았지만 지금은 모두 멸종했다. 침팬지가 살아있는 동물 중 우리와 가장 가까운 진화상의 친척이다. 하나의 빠진 고리를 요구하는 것은 진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오해한 처사다. 인간의 진화에서 변화는 하나가 다른 종류로 변하는 직선적인 과정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진화는 서서히 퍼지고 가지가 갈라져서 궁극적으로 점점 더 다양해지는 과정이다. 수천 년에서 수백만 년 동안 많은 가지가 죽어서 계통수의 끝이 죽은 가지를 구성한다. 다른 가지들은 생존해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현대의 종이 된다.

 

마지막 챕터인 12장의 제목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창조론을 떠나기이다. 아무도 물의 순환이 성경이 강수에 관해 말하는 내용과 모순되다고 다투지 않는다. 아무도 과학을 창세기에 맞추기 위해 물리적 창고 모델을 옹호하지 않는다. 아무도 바람이 만들어질 때 기압과 기온 차이의 과학을 부인하지 않는다. 아무도 성경 기상학을 고집하지 않는다. 현대 과학 중 생물학, 지질학, 천체물리학만 의심을 받는다. 그것도 그 학문들이 기원 문제에 적용될 때 그렇다. 젊은 우주론자들은 항공학과 우주여행, 현대 공학의 모든 영역에서 물리학과 화학 및 수학을 신뢰하면서 바로 그 과학이 우리에게 지구와 우주의 나이를 말해줄 때는 그것들을 불신한다.

 

창조론자/ 지적 설계 운동의 표어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에 틈새가 있는 곳마다,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수수께끼가 있는 곳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단계나 구조가 있는 곳마다 그들의 기본적인 대답은 하나님이다. 생화학 과정에서 설명되지 않는 과정들은 매우 복잡한 설계 탓으로 돌려지고 자연은 결코 그것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고 설명된다.

 

본문에는 두 가지의 그렇게 보이게 만들어졌다는 말이 등장한다. 하나는 젊은 지구론자들이 한 말로 아담과 하와가 성인으로 창조되었듯 지구와 우주가 완전히 성장한 상태로 창조되었으며 빛, 암석, 얼음, 나무, 호수 바닥들이 모두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창조되었다는 것(115 페이지)이고 다른 하나는 지적 설계론자들이 한 말로 멸종된 동물들과 현재 살아 있는 종들 사이에 실제로 관계가 있는 듯 하게 보이는 것은 단지 그렇게 보이는 것일뿐이라는 것(200 페이지)이다.

 

우리가 생명이 어떻게 출현했는지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오늘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우리가 내일에도 답을 가지고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생각해 보라. 생명의 복잡성이 모두 설계자만 아는 설계에 따라 갖춰지도록 설계자에 의해 이루어진 선택이라면 우리가 무언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생명의 복잡성이 자연 과정을 통해 설명될 수 없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연구하는가? 어떤 과학 이론이든 그것의 강점은 새로운 지식을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다. 설계자에게만 알려지고 설계자에 의해 이루어진 선택들은 과학의 막다른 종점이다. 아무것도 예측될 수 없다.

 

창세기를 읽을 때 우리는 현대 과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것을 배운다. 성경은 누가, 왜 창조했는지에 대한 답을 준다. 과학은 언제, 어떻게 창조되었는가에 대해 답한다. 인간이 묻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은 과학을 통해 답변될 수 없다. 진화는 우아하다 진화는 창의적이다. 진화는 계속 창조하는 창조 세계를 낳았다. 진화가 본질적으로 불경한 것은 아니다. 진화는 만물의 창조자와 유지자로서의 하나님을 작아지게 하지 않는다. 진화에 관한 어느 것도 우리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는"(사도행전 1728)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배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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