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7219 - DMZ에서 나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배웠다
이상철 지음 / 시공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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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전방 GOP 중대장을 거쳐 2019년 연천, 철원의 제 5사단장으로 부임해 DMZ 유해 발굴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뒤 중장으로 전역해 현재 한양대 특임 교수로 재직 중인 이상철 저자의 책이다. 제목인 38.17.21.9는 강원도 철원 화살머리고지의 북위(北緯)를 지칭한다. 그런데 동경(東經; 127.06.34.2)까지 명기해야 정확할 것이다. 동경은 큰 글씨로 표시된 북위 아래에 작은 글씨로 기록되어 있다.


화살머리고지는 백마고지 서쪽 3km 지점의 고지로 한국전쟁의 격전지였다. 한국전쟁 당시 화살머리고지는 프랑스 군대가 용감히 사수한 진지였다. DMZ 유해발굴이 성사된 것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의 2018년 4.27 판문점 선언과 9.19 군사합의에 따른 결과다. DMZ는 말이 비무장지대이지 불발탄, 지뢰, 전쟁 후 수거해 가지 못한 물품들로 가득한 위험지대이자 중무장지대다.


DMZ 안에서 이루어진 작업이기에 투입 병력은 방탄복과 방탄 헬맷을 착용해야 하고 방탄판도 착용해야 한다. 거기에 개인 화기(火器)와 장비 등을 휴대해야 하니 20kg이 넘는 무게를 이고 지고 올라가야 한다. 남방한계선 철책을 지키는 초소를 GOP(general outpost)라 한다. 비무장 원칙을 어기고 남북은 DMZ 안에 감시초소인 GP(guard post)를 운영한다. GP에 들어가려면 남방한계선 철책에 있는 통문을 열고 DMZ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한 번 배치되면 2~3개월을 기다려야 나올 수 있다. 군 병력이지만 GP 밖으로 한 걸음도 다닐 수 없다. DMZ 유해발굴이라 하니 굉장히 한가로운 작전으로 비칠 수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인 DMZ 내에서의 극한 난이도의 작업이다. 휴전선(군사분계선)에 철책이 없고 1292개(유엔이 주관하는 696개+ 북한이 주관하는 596개)의 표지 기둥이 있다. 그러나 DMZ 내에는 추진철책이 있다.


앞으로 진출해 GP를 짓고 그 GP를 지키기 위해 철책을 설치한 것이다. GP에 들어가는 인력을 우리는 민정경찰, 북한은 민경대라 부른다. 군사작전이 아니라 치안유지 작업을 수행한다는 일종의 편법인 셈이다. 1973년 육군 3사단의 3.7 완전작전이 유명하다. 표지 기둥 보수작업을 하던 우리 군사를 북한군이 총격 도발하자 박정인 사단장이 북한 GP에 포격을 명령해 북한군 GP를 초토화 시켰다. 당시 북한군 GP 병력 29명 전원이 사망했다.


화살머리고지에서 북쪽으로 13km 지점에 북한의 780고지인 고암산이 있다. 일명 김일성 고지다. 한국전쟁 당시 그 산에 김일성이 올라 전투를 진두지휘했다는 설이 있다. 처음에 남과 북이 합동으로 유해를 발굴했지만 곧 중단되었다. 군사분계선에서 국군과 만난 북한군 여단장이 악수를 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해 총살된 뒤로다.


작업은 이렇게 진행한다. 지뢰 제거반이 들어가야 하고 공병대가 투입돼야 한다. 유해 발굴단이 투입되는 것은 물론이다. 기초적인 발굴 작업을 진행하는 장병들이 있어야 하고 유해 흔적을 발견하면 전문 발굴팀이 들어가 세부 작업을 진행한다. 언제 어디서 돌발적인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 작업 과정 시작부터 끝까지 발굴팀을 보호하는 경계 병력이 있어야 한다. 의료 지원 병력, 통신 지원 병력, 식사와 간식을 보급하는 병력까지 있어야 한다. 작은 부대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대규모 작전'이다.


발굴팀은 크게 둘로 나뉜다. 기초 발굴 팀과 정밀 발굴 팀이다. 오렌지색 헬멧을 쓴 기초 발굴팀은 호미와 야전삽을 들고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의 토양을 초벌로 걷어내는 작업을 수행한다. 유해가 다칠 수도 있기 때문에 아주 조심스럽게 진행한다. 유해가 발견되면 검정 조끼를 입은 정밀 발굴팀이 투입된다. 이번에는 붓으로 조금이라도 긁힐세라 굉장히 신중하게 발굴 작업을 이어간다.


유해 하나를 완전히 발굴하는데 몇 주 혹은 몇 개월이 걸리기도 한다. 발굴한 모든 유해는 오동나무로 만든 작은 관에 넣는다. 충격에 부서지는 것을 방지하고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유해 조각을 일일이 한지로 감싸 차곡차곡 관 안에 넣는다. 조각을 채우면 관 뚜껑을 덮고 그 위에 명정(銘旌)까지 만들어 얹는다. 붉은 천에 흰 글씨로 만든 명정에는 6 25 전사자의 관이라는 글을 적는다.


유해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 없는 경우에는 관을 흰 천으로 두르고 국군으로 추정되거나 확신하는 경우에는 관 위에 태극기를 씌운다. 약식 차례를 치른다. 아군이 분명한 경우에는 사단장이 직접 제례를 주관한다. 간단히 제례 음식을 준비해 관 앞에서 경례와 묵념을 하고 술을 따르는 의식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망자에 대한 예를 갖추려 최대한 노력한다. 제례를 마치면 복장을 단정히 갖춘 병사가 관을 목에 걸고 차량으로 이동한다.


봉송 차량이 지나는 길목에 장병들이 일렬로 도열해 경례하는 것으로 고인이 떠나는 길을 배웅한다. 육십여 년 만에 고지를 떠난 원혼들이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 군종 장교들이 나와서 각각의 종교의식에 따라 망자의 영혼을 위로해준다. 그렇게 땅 속을 벗어난 유해는 국방부 감식소로 보내진다. 자신의 이름을 되찾기 위한 기나긴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야 한다.


영영 이름을 알지 못하는 유해가 거의 대부분이다. 매년 11월 말이 되면 유해 발굴 작전을 마감한다. 땅이 얼어 유해 발굴 작업을 계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1945년 유엔이 창설된 이래 유엔군을 편성한 처음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전쟁이다. 한국전쟁은 남쪽 끝까지 밀렸다가 북쪽 끝까지 밀고 올라갔으나 38선 인근에서 고착된 전쟁이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란 작품이 생각난다.


’DMZ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배웠다‘란 부제처럼 저자의 시선은 따뜻하고 반듯하다. 저자는 유해가 발견된 자리에 작은 비석을 세웠다고 말한다. 이름이 적히지 않은 묘비였다. 그렇게 그들은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죽은 자에게 지켜야 할 예의를 끝까지 지키려 노력했다. DMZ 유해 발굴 작전은 망자에 대한 예의, 사람에 대한 예의, 군인에 대한 예의, 선대에 대한 예의를 절로 배우는 작전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인간으로, 전후로, 핏줄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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