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
김갑동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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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동의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하다‘는 36개의 파트로 이루어진 책이다. 각 파트당 두 인물을 대비시킨 책이다. 1부 고대 속으로, 2부 고려 속으로, 3부 조선 속으로, 4부 근.현대 속으로로 이루어졌다. 각 매치업에는 제목이 붙었다. 가령 왕건과 견훤에 대해서는 ’지도자가 갖춰야 할 자질과 덕목은 무엇인가’가 붙었다. 첫 편에서는 고국원왕과 근초고왕이 만났다. 장수왕의 증조부 고국원왕과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근초고왕이 붙은 것이다. 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이 만난 챕터에는 경상도와 전라도는 언제부터 앙숙이었을까란 제목이 붙었다. 


백제는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실시하자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성왕은 수도를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겼다. 백제의 뿌리를 찾아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 하였다. 신라 진흥왕의 한강 하류 점령과 관산성(충북 옥천) 전투는 오랫 동안 이어온 양국의 동맹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고구려의 히틀러 연개소문이란 명명이 눈에 띈다. 보장왕은 허수아비에 불과할뿐 고구려의 실권자는 연개소문이었다. 원효와 의상은 나와 다름을 받아들이기란 이름으로 만났다.


원효는 진덕여왕 4년(650년) 불교를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의상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나 요동에서 고구려군에게 붙잡히는 고초를 겪고 겨우 돌아왔다. 이후 문무왕 원년(661년)에 백제가 멸망하여 서해안 통로가 열리자 의상과 함께 중국 유학을 시도하였다. 당항성으로 가던 도중 오늘날의 충남 직산 부근을 지나다가 심한 폭우를 만났다. 두 사람은 우연히 찾은 토굴에서 하룻밤을 편히 쉬었는데 아침이 되어 보니 토굴이 아니라 무덤이었다. 계속된 폭우로 하루를 더 머물러야 했는데 귀신이 나오는 듯 하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왜 같은 장소인데도 어제는 편안하였고 오늘은 이렇게 불안하고 무서운가? 


이로부터 원효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의상은 무열왕 8년(661년) 원효와 헤어져 중국으로 건너가 화엄종의 대종사인 지엄에게 화엄교학을 전수받았다. 의상은 완고한 골품제 사회 속에서 평등을 강조하였으며 민중들의 고통을 덜어주려 하였다. 원효는 617년생, 의상은 625년생이다. 원효는 6두품 출신이었고 의상은 진골 출신이었다. 원효는 세속적인 사랑을 하기도 했으나 의상은 단아한 수행자의 자세를 지켰다. 원효는 불교뿐 아니라 노장사상이나 의술에까지 관심을 기울였으나 의상은 화엄학의 본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 배척하지 않았다. 필요할 때는 같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면서 배움을 같이 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의 좋은 점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했다. 


견훤의 성은 이씨였으나 후에 견(甄)씨라 하였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경주에서 비장(裨將; 부지휘관)이 되었다. 견훤은 900년 완산주(전주)에 순행하여 그 곳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후백제왕이라 칭했으며 모든 관서와 관직을 정비하였다. 왕건은 877년 송악에서 태어났으나 20세까지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왕건은 후삼국시대에 궁예가 한반도 중부 지방을 석권, 철원에 도읍을 정하자 아버지와 함께 귀순하여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왕건은 궁예 밑에서 충성을 다해 군사활동을 하여 큰 공을 세웠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왕건의 남진정책과 후백제 견훤의 북진정책은 나주 일대에서 충돌했다. 견훤의 세력이 날로 강성해지자 신라는 왕건과 연합하여 대항하고자 하였다. 왕건은 신라를 도우려다가 공산전투에서 신숭겸이 왕건과 옷을 바꿔 입고 대신 죽는 것에 힘입어 겨우 목숨을 건졌다. 왕건이 승기를 잡은 것은 고창(古昌; 현 안동) 전투다. 왕건은 고창전투에서 견훤을 대파한 후 신라를 무력으로 접수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귀순해 오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심지어 자신을 사지에 몰아넣었던 견훤도 받아들였다. 왕건은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언제나 공명정대했다.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국으로 인정하여 유민들을 받아들이는 한편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교류를 끊었다.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란 제목으로 만난 최승우 vs 최언위 편이 재미 있다.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3 최가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다. 최승우는 견훤의 휘하에 들어갔고 최언위는 왕건 휘하에 들어갔다. 두 사람의 실력 대결은 태조 10년(927년) 공산전투가 끝나고 왕건과 견훤 사이에 오고간 국서를 통해 알 수 있다. 공산전투에서 크게 이긴 견훤은 그 해 12월 왕건에게 국서를 보내 자신의 우위를 과시하면서 왕건을 은근히 위협하였다. 이 국서는 최승우가 중국에서 배운 해박한 지식과 문장력으로 쓴 글이다. 


왕건은 태조 11년(928년) 정월 후백제에 답신을 보내어 자신의 건재함과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중국의 여러 고사를 예로 든 것이나 문장의 구성력 등을 보면 최언위 외에는 쓸 수 없는 것이다.(118 페이지) 국서를 주고받은 뒤 치른 고창전투에서 왕건은 대승을 거두었다. 최언위의 글이 신라인들에게 공감을 얻으면서 그들이 왕건을 도운 덕택이었다. 최언위는 민심의 동향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지도자에게 전달했다. 


의를 따르는 길, 이익을 따르는 길에서 만난 사람은 박술희와 왕규다. 박술희는 충남 당진 면천(沔川) 출신이다. 면천은 복지겸의 고향이자 해상 무역의 요지였다. 그러므로 같은 해상 출신인 개성의 왕건이나 태조의 왕비 나주 오씨와 친밀해질 수 있었다. 박술희는 태조 왕건의 장남인 무(武)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무의 어머니의 집안은 측미(側微)했다. 신분적으로 미천하고 권력이나 군사력이 부족하다는 의미다. 왕규는 무(武; 혜종)의 장인이자 외조부였다. 태조는 정치적으로 우세한 왕규의 딸을 무와 맺어줌으로써 무의 측미함을 보완해주려 했다. 


성종 대에 거란 소손녕과 담판을 지으러 간 사람은 합문사 장영이었다. 소손녕은 미관말직에 있는 자를 자신에게 보냈다며 화를 냈다. 이에 서희가 낙점되었다. 소손녕은 “그대 나라가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다. 그런데 그대 나라가 우리 땅을 점령하였고 우리의 국경을 접하였는데도 바다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 그런 고로 우리가 친히 출병한 것이다. 만일 땅을 베어서 바치고 조공을 하면 무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서희는 “아니다. 우리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났으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수도를 세운 것이다. 땅의 경계로 본다면 그대 나라의 동경도 우리 경내에 있는데 어찌 국경을 침범하였다 하는가? 압록강 안팎도 우리의 경내인데 여진이 그 사이를 막아 조공을 바치지 못했다. 여진을 쫓고 우리 옛 땅을 되찾아 요새를 쌓고 도로를 이으면 왜 수교하지 못하겠는가. 장군께서는 나의 말을 당신 나라 임금에게 전하시오”라고 말했다. 고려가 평양에 수도를 세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서희가 몰라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평양을 제2의 수도로 삼았다는 의미거나 소손녕이 고려의 사정을 잘 모르리라 생각해서 한 말일 것이다.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쓰고 송과의 외교를 끊기로 하였다. 대신 압록강 이남의 강동 6주를 얻는 실리를 챙겼다. 요나라 장군 소손녕과 비교했을 때 약소국의 대신 서희는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80만 대군 속에 단신으로 뛰어들어 승리한 것은 서희였다. 그는 풍부한 지식과 조리 있는 말로 대군을 물리치고 피 한 방을 흘리지 않고 압록강 동쪽 땅을 얻었다. 


고려 대량원군(현종)은 태조의 손자인 경종이 죽은 후 태조의 아들 안종 욱(郁)과 경종의 네 번째 비(妃) 헌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안종은 경종의 숙부다. 성종의 아버지는 ‘대종; 戴宗’ ' 욱; 旭’이다.) 한편 경종의 세 번째 비이자 헌정왕후의 언니인 헌애왕후(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자신의 아들인 7대 임금 목종 다음의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 이에 걸림돌이 된 대량원군은 헌애왕후에 의해 개성 숭교사로 유폐되었다가 삼각산 신불사로 옮겨가게 되었다. 헌애왕후가 천추태후라 불리는 것은 아들 목종을 대신해 섭정을 했기 때문이다. 


헌애왕후가 사람을 시켜 대량원군을 죽이려 했으나 대량원군은 승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나이를 먹으면서 태조의 손자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 대량원군은 “백운봉에서 흘러내리는 한 줄기 시냇물/ 만경창파 먼 바다로 향하는구나/ 졸졸 흘러 바위 밑에만 있다고 말하지 마라/ 용궁에 도달할 날 그리 멀지 않았으니“ 같은 시를 썼다. 1백년 가까이 지켜온 왕실을 어머니와 외척 김치양 사이에서 나온 아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생각한 목종은 강조(康兆)를 불렀다. 목종에게 미움을 사 외직으로 쫓겨나 있던 위종정, 최창 등이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강조를 죽이기 위해 거짓 왕명으로 부른 것이라 속였다. 죽은 줄 알았던 목종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강조는 뒤늦게 온 것에 대해 문책을 면할 길이 없자 정변을 단행하여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현종으로 옹립했다. 목종은 충주로 가는 중 파주 적성현에 이르러 강조가 보낸 자에게 시해당했다. 강조의 정변으로 고려는 거란의 침입을 맞게 되었고 현종은 나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묘청과 김부식은 개혁과 보수의 갈림길에서란 제목으로 만났다. 인종 대에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했다. 임금이 황제를 칭하여 추락한 왕권을 회복해야 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성을 높이고 불손한 금나라를 정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도를 서경으로 옮겨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표 인물이 묘청이다. 서경 사람 정지상이 그들의 말을 믿었다. 묘청은 서경 천도가 어려워지자 무장 봉기를 감행했다. 그들은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였다. 군대 이름은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였다. 


김부식이 우두머리로 한 토벌군이 편성되었다. 김부식이 정지상을 묘청의 당으로 지목하여 죽인 것은 정지상의 문장과 재주에 대하여 시기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종의 외척인 이자겸을 내내 견제해왔던 김부식은 마침내 이자겸이 사라지자 새롭게 인종의 외척이 된 임원애와 손을 잡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이런 마당에 인종이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간다면 이는 자신의 권력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묘청 등의 주장을 묵살하였고 마침내 토벌군의 대장이 되었다. 


서경으로 출동한 김부식의 토벌군은 1년여 만에 평양성을 점령하고 묘청 일당을 제거하였다. 이는 ‘고려사’에 근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인데 저자는 묘청이 금의 압력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서경을 중심으로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주장을 한 것으로 본다. 저자에 의하면 묘청은 일종의 현실개혁운동가다. 묘청이 개혁의 중심지로 서경을 택한 것은 그가 서경 출신이기 때문이었겠지만 서경이 옛 고구려의 수도로 고려 초기 이래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금과 사신 왕래가 빈번하여 서경 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경제적 피해가 컸고 과중한 역과 별공의 상납에 시달렸던 탓도 있었으리라. 묘청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은 신채호가 처음이다. 그는 이 사건을 낭(郞), 불(佛) 대 유가, 국풍파 대 한학파, 독립당 대 사대당,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으로 보고 조선 1천년 이래 제일 큰 사건이라 평하였다. 묘청은 전자의 대표,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라 하였다. 


공민왕은 왕비(노국대장공주)의 신뢰에 힘을 얻어 반원개혁정치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불법적인 인사행정의 온상이었던 정방(政房)을 혁파하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토지와 인민의 탈점을 시정토록 하였다. 변발과 호복을 풀고 고려식 복장을 하여 고려의 부흥을 도모했다. 공민왕 재세시는 원이 쇠망해가는 시대였다. 공민왕은 기황후를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두르던 기철 등의 권문세족을 일망타진하였다. 고려의 내정간섭기관이었던 정동행성을 혁파하고 동북면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였다. 


원나라의 연호도 폐지하고 관제도 문종대의 것으로 복구하였다. 원과 권문세족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홍건적이 고려를 침략했다. 홍건적의 두 번째 침입에 개경이 함락되고 왕은 안동으로 피난했다. 환궁하던 공민왕은 흥왕사에 머무르다 원과 결탁한 김용 일당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공민왕은 왕비를 잃은 슬픔과 상실감에 정사에 뜻을 잃고 불교에 귀의했다. 이때 신돈이 등장했다. 공민왕은 세상을 떠나 독립한 사람을 얻어 크게 써서 폐단을 고치려 하였다. 신돈은 공민왕에게 서경 천도를 건의하기도 했다. 


신돈은 자신이 5도의 사심관이 되어보고자 삼사의 관원을 시켜 그 제도를 부활시킬 것을 건의하게 했다. 공민왕은 ”충숙왕이 심한 가뭄을 당했을 때 각 도의 사심관을 폐지했더니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 내가 선왕의 뜻을 잊겠는가?“ 하고는 상소문을 불태웠다. 그 뒤에도 계속 건의가 올라오자 공민왕은 ”무슨 도적 무슨 도적 해도 제일 큰 도적은 각 고을의 사심관이다.”라며 일축하였다. 공민왕은 사심관의 폐해가 컸음을 알고 있었다. 신돈은 공민왕을 제거하려 하였다. 발각되어 신돈은 결국 처형당했다. 공민왕과 신돈의 관계는 7년만에 끝났다. 공민왕은 왕위에 오른 지 23년만에 자제위 소속의 홍륜과 내시 최만생에게 살해당하였다. 신돈의 이야기는 ‘고려사’반역전에 실려 있다. 


최영의 본관은 철원이다. 홍건적의 두 번째 침입에 고려는 안우를 상원수로 삼고 김득배를 도병마사로 삼아 이를 방어하였으나 개경이 함락당하고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을 갔다. 최영은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 이성계 등과 더불어 20여만의 병력으로 개경을 되찾았다. 김용은 공민왕이 세자 시절 원에 있을 때 모셨던 공으로 대호군에 오른 인물이었으나 원의 기황후 세력과 손잡고 공민왕의 임시행궁인 흥왕사를 습격하였다. 이때 최영은 자신의 직속 군대를 거느리고 행궁으로 가 난을 진압하였다.


신돈이 막강한 권세를 부리던 시절에 최영은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돈이 집권하던 초기에 계림부윤으로 좌천된 것을 비롯 신돈의 모함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최영은 우왕의 장인이 되었다.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회수하고 철령위를 설치했다. 고려는 박의중을 사신으로 보내 철령위 설치를 중지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아무런 소식이 없자 요동 정벌에 나섰다. 최영은 이성계의 반대를 일축하고 우왕을 움직여 정벌을 단행하였다. 최영은 늙었고 왕의 장인이었기에 평양에 머물렀고 이성계와 조민수만 출정하여 압록강의 위화도에 이르렀다. 


최영은 이성계의 회군으로 고봉에 유배되었다가 창왕 즉위년에 참수되었다. 최영이 대체로 권문세족의 이익을 대변했다면 이성계는 신진사류들과 뜻을 같이 했다. 최영은 성공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명나라에 굽히지 않고 오히려 정벌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확고한 자주성과 용맹성을 높이 살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부패하고 모순된 현실을 개혁하려 하지 않았으며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을 갖지 못했다. 


정도전 일파는 폐가입진의 논리를 세웠다. 우왕과 그 아들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것에 근거한 지침이었다. 정도전이 있었기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고, 이성계가 있었기에 정도전도 그의 뜻을 펼칠 수 있었다. 정도전과 이성계의 돈독한 관계는 세자 책봉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정도전은 이방원 편에 선 하륜을 외직으로 쫓아내고 이방원을 제거하려 하였다.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있었다면 이방원에게는 하륜이 있었다. 정도전은 신하들이 주체로서 국가를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주 일인이 좌지우지하는 전제적인 체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206 페이지) 


하륜은 허약한 군주보다 강한 추진력을 가진 군주가 어렵게 세운 나라를 지킬 수 있고 그래야만 신하도 그를 도와 일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210 페이지) 정도전과 하륜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주역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갈라선 것은 국가와 지도자에 대한 생각의 차이 때문이었다. 중종과 조광조는 섣부른 개혁은 화를 부른다는 제목으로 만났다. 조광조는 17세 때 함경남도 영변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한훤당 김굉필을 만났다. 조광조는 무오사화로 죄를 받고 귀양 와 있던 김굉필을 통해 글과 학문을 배웠다. 


김굉필은 길재와 정몽주의 학풍을 이어받은 도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후일 조광조가 도학정치를 실현하려 한 것은 그의 학풍과 깊은 관련이 있다. 조광조는 인물이 수려하였지만 엄격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하루는 외방에 나갔다가 날이 저물어 어느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 집 여주인이 그를 사모하여 둘만 있는 틈을 타 비녀를 뽑아 그에게 주었다. 당시 비녀를 뽑아주는 것은 남자에게 모든 것을 허락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는 비녀를 받아 말없이 벽 틈에 꽂아두고는 그 길로 그 집을 나와버렸다.(224 페이지)


조광조는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할 것을 주장했다. 정치를 개혁하고 부패한 구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참신한 인재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226 페이지) 종래의 타락한 과거제도로는 참다운 인재를 뽑을 수 없으므로 중앙이나 지방에서 유능한 사람을 천거하면 왕이 이를 시험하여 인재를 뽑는 것이다. 과거는 하루의 재주로 시취하는 것이고 문장에 치중하는 폐단이 있다. 그러나 천거제는 덕행이 단정한 자를 뽑아 다시 시험하는 것이니 만큼 재행을 겸비해야 한다. 어떤 이는 불공평하게 잘못 천거할까 우려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천거하므로 하나 둘 불공평한 이가 섞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천거제를 막는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지난날 김굉필 같은 유학자는 부패한 과거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이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현량과 실시로 홍경주, 심정, 남곤 등 기성세력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갈등과 대립, 위기의식은 위훈삭제(僞勳削除) 사건으로 폭발하였다. 반정(反正)으로 즉위한 중종은 유교적인 개혁을 실시하려 했다. 좋은 신하를 얻어 공정하고 불편부당한 정치를 하고자 했다. 그런 이유로 조광조를 발탁한 것이다. 그러나 조광조는 지나치게 급하고 과격한 개혁을 추구했다. 원칙과 이상에만 치우쳐 기성세력을 무시하면서 모든 것을 다 바꾸려 하였다. 


시에 인생을 담다라는 제목으로 만난 황진이와 허난설헌의 매치업은 재미 있다. 중종 19년(1524년)이 황진이의 출생년이다. 황진이는 당대의 석학 서경덕을 사숙(私淑)했다. 황진이는 소세양과 헤어진 후에도 그를 그리워하며 사모하는 마음을 시로 읊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도려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시는 밤이면 굽이굽이 펴리라..” 허난설헌은 명종 18년(1563년) 태생이다. 황진이가 자연을 읊고 명사들과의 사랑에 빠진 것에 비해 허난설헌은 여인들의 고된 삶에 눈을 돌리기도 하였다. 


이황과 이이는 학자로서의 참된 자세는 무엇인가란 제목으로 만났다. 주자(朱子)는 이기이원론을 주장했다. 우주의 근원이 되는 이(理)와 기(氣)는 서로 떠날 수 없는 관계이나 섞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황은 주자의 설을 그대로 따랐지만 이와 기를 둘로 나누어 보는 데에 중점을 두어 이와 기가 서로 섞일 수 없음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기의 활동의 근거로서 기를 주재하고 통제하는 실재이다. 그러므로 결국 주리적인 입장에 선 것이다. 이황 이후 주리파는 유성룡, 김성일 등의 제자가 영남학파로서 계통을 이었다. 


주기설의 선구적 존재는 서경덕이었다. 주기설을 대성시킨 이가 이이였다. 이이는 이와 기를 이체이물(二體二物)로 규정하는 주자 및 이황의 순수이원론에 반대하였다. 이와 기는 일체양면적인 것이어서 이를 분석하면 둘이되 양자의 관계에서 보면 동전의 양면처럼 일물(一物)일뿐이라는 것이다. 이(理)는 일반적인 것, 무활동적인 것, 추상적인 것이어서 이를 외부로 표출하여 현실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는 활동적인 기의 작용을 필요로 한다. 이황은 정치적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학자의 본분에 충실했다. 이이는 마음 공부를 중시하면서도 정계에 나아가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경세제민을 실천하려 하였다. 


송시열과 윤증은 독단적인 학문 추구의 종착지는 어디인가란 제목으로 만났다. 송시열은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그러나 1년만에 스승을 여의고 스승의 아들 김집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송시열은 동기로서 친밀하게 지내던 윤선거와 조금씩 사이가 벌어졌다. 백호 윤휴의 경전 해석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되었다. 송시열은 여러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한 윤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윤휴는 이이의 학설을 비판했다. 윤선거는 경전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전에 대한 주자의 해석만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송시열과 윤선거의 입장 차이는 후일 윤선거의 아들 윤증에게 이어져 노론, 소론으로 갈라지는 한 요소가 되었다.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은 회니시비로 불린다. 회니는 송시열이 살았던 회덕(懷德)의 회와 윤증이 살았던 니성(泥城)의 니를 딴 이름이다. 윤선거는 학문과 사상에 있어 비판의 자유를 주장하여 윤휴를 두둔했고 예송논쟁에서도 송시열에게 동조하지 않고 윤휴를 옹호하였다. 윤증은 송시열에게 가서 아버지 윤선거의 묘명(墓銘)을 지어달라고 했다. 송시열은 성실하지 못한 비문을 지어보냈다. 송시열은 개찬(改撰) 요청에도 성실하게 임하지 않았다. 


윤증은 비명을 요청할 때 기유의서(己酉疑書)를 가지고 갔다. 윤선거가 죽기 4년전(1665년)에 쓴 것으로 윤휴, 허목 등에게 혹 잘못이 있다 해도 같은 사류이므로 이들을 너무 배척하지 말고 차차 등용하여 쓰는 것이 옳다고 송시열에게 충고하는 내용이었다. 신유의서(辛酉疑書; 1684년)는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쓴 것으로 송시열의 학문은 그 근본이 주자학이라 하나 그 기질이 편벽해 주자가 말하는 실학을 배우지 못하였고 송시열에 내세우는 존명벌청(存明伐靑)은 방법을 말로만 내세우고 실익이 없다는 것이다. 


윤증은 이 의서를 먼저 박세채에게 보였다. 박세채는 이를 보내지 말 것을 권고하였다. 그런데 박세채의 사위이면서 송시열의 손자인 송순석이 몰래 가져가 송시열에게 보여주었다. 이때부터 송시열과 윤증이 절의(絶義)하고 노소분당을 굳힌 것으로 본다.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론과 윤증을 영수로 한 소론은 여러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여 대립하였다. 송시열은 학문적으로 주자절대주의자였으며 정치적으로 숭명반청을 고집하였다. 윤증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였으며 현실에 입각한 정치를 주장하였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는 쇄국과 개방의 줄다리기란 제목으로 만났다. 민비와 대원군은 나름대로 정치철학을 가지고 개혁을 하려 했다. 그러나 각자의 정책은 음모와 방해로 번번이 좌절되었고 서로 발목을 잡는 꼴이 되어 뜻대로 이를 수 없었다. 조선은 결국 준비 없는 개방을 하여 마침내 한일병합이라는 비극을 맞이했다. 


식민사학의 내용은 1) 타율성론, 2) 반도적 성격론, 3) 정체성론으로 이루어졌다. 1)에 의하면 단군 조선의 존재는 부정되고 기자동래설은 인정된다. 타율성론의 또 다른 갈래는 만선사관이다. 만주사를 중국사와 분리해 한국사와 더불어 한 체계 속에 넣어야 한다는 만선사관은 침략적 목적에 의한 것이다. 2)는 한국사의 성격을 부수성, 주변성, 다린성(多隣性)으로 규정하고 그 원인을 반도라는 지리적 조건에서 찾은 이론이다. 3)은 한국이 왕조 교체 등 사회적 변혁에도 불구하고 사회 경제 구조에 아무런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으며 특히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봉건사회를 거치지 못하여 전근대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 역시 정치적 목적이 있다. 한국이 전근대적인 상황에 멈춰 있기 때문에 한국을 근대화하기 위해서는 이웃 나라인 일본이 간섭해야 한다는 논리가 되었다. 그러나 식민사학에 대해 당시 양심 있는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것의 허구성을 타파하고 극복하려 하였다. 그 한 일파가 민족의 혼과 정신을 일깨우려 한 민족주의 사학이고 다른 일파가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한국사의 발전성을 강조하려 한 사회경제사학이었다. 전자의 대표자가 신채호이고 후자의 대표자가 백남운이다. 


여운형과 박헌영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초래한 비극이란 제목으로 만났다. 박헌영과 같은 사회주의 계열이면서도 좌나 우를 가리지 않고 통일된 조국을 만들려 한 이가 여운형이다. 여운형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공산주의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 중 하나였다. 따라서 공산주의만 절대적으로 신봉하지 않고 때로는 우파와의 연합도 서슴지 않았다. 박헌영은 달랐다. 그는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다. 해방 이후 박헌영이 벌인 활동도 오로지 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운동의 일환이었다.


여운형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박헌영은 가난한 서자로 태어났다. 여운형은 만일의 사태를 위한 방패막이로 일본의 몇몇 요인들과 친교를 맺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일본이 패망하자 그들은 여운형에게 제일 먼저 찾아와 행정권 이양 교섭을 벌였다. 여운형은 이를 수락하고 건국동맹을 모태로 하여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시켰다. 여운형은 남한에 남아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 1947년 7월 19일, 괴한의 총격으로 숨을 거두었다. 위치가 너무 컸기에 그는 좌익과 우익 양측에서 모두 꺼리고 두려워 하는 인물이었다. 


박헌영은 철저히 공산당으로서 활동을 벌였으나 여운형을 따라갈 수 없었다. 해방 후에도 친미에서 반미로 변신하면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하려 했으나 항상 여운형의 그늘 아래 있었다. 그가 북으로 간 것은 신변의 위협과 더불어 그의 한계를 인식하였기 때문이었으리라. 


김갑동의 '옛사람 72인에게서 지혜를 구하다'는 고대, 고려, 조선, 근현대 등으로 구성된 책이다. 나의 경우 고려, 조선에 많이 관심을 기울여왔고 고대, 근현대에는 상대적으로 등한했음이 드러난다. 마지막 챕터인 김구와 이승만편은 읽지 않았다. 문제적 인물에게서도 교훈 거리를 얻어야겠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과거의 문제적 인물을 모리(謀利)적 의도로 거듭 불러내는 세태가 싫다. 물론 저자의 이승만 논의는 김구와 비교해 나름의 교훈을 얻으려는 의도임을 모르지 않는다. 식민지근대화론과 부일(附日)로 어수선한 이 때에 오래 전에 나온 저자의 책을 읽는 것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일뿐이다. 좋은 경험이었다. 발전을 위해 근현대에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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