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예찬 - 위대한 사상가들의 실패에 대한 통찰
코스티카 브라다탄 지음, 채효정 옮김 / 시옷책방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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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자이자 철학자인 코스티카 브라다탄의 ‘실패 예찬‘은 그노시스주의(영지주의)의 한 가르침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에 따르면 우주는 원초적 실패의 산물이다. 그 실패의 우주를 만든 존재는 데미우르고스다. 마르키온과 대조를 이루는 신이다. 그노시스파 인류학에서 인간은 나머지 피조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구조적 결함, 불완전, 결핍을 공유한다. 전통 형이상학에서의 좀 더 어려운 질문은 왜 세상만사는 무(無)가 아니라 유(有)인가?이다. 이를 실존주의자의 언어로 바꾸면 나는 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 하는가?이다. 


저자는 실패는 우리가 존재할 이유가 없음에도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자각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잠복 상태의 끝없는 위협이라 말한다. 실패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우연의 산물이자 조악함의 성화, 잠깐의 깜빡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저자에 의하면 실패는 무서울 정도의 솔직함으로 모든 자아실현에서 결정적인 기능을 하는 각성을 수행한다. 저자는 실패보다 더 나쁜 것은 실패의 부재라 말한다. 실패는 우리를 찌르고 그러는 가운데 우리를 현실과 접촉시킨다. 


저자는 20세기 초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노동운동가로 활약했던 시몬 베유를 주된 논의 대상에 올린다. 태어난 이듬해 중병으로 11개월을 투병한 끝에 얻게 된 평생의 허약 체질을 가진 그녀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깊이 공감해 주변의 괴로움을 자신의 것처럼 느꼈다. 25세인 1934년 직접 몸으로 괴로운 현실과 접촉하기 위해 공장 일을 했다. 베유는 현대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것을 결단한 학자로서 공장에 들어갔다가 본격적인 신비주의자가 되어서 나왔다.(7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가톨릭 개념에 지적으로 공감하고 공장에서 우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했음에도 베유는 자기 생이 끝날 때까지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심각할 정도로 꺼림칙하게 여겼다. 베유는 성육신의 고유함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일축하는 한편 예수는 이 세상 범죄와 고통이 있는 곳 어디에나 현존한다고 제안했다. 베유는 죽기 얼마 전 “나는 항상 믿었다. 죽는 순간이 삶의 핵심이자 목적이라고..... 그것 말고는 나 자신을 위한 좋은 일을 나는 결코 바라지 않았다.”고 썼다.


저자는 말한다. 실패의 경험에 대한 겸손은 치유의 약속이며 겸손은 우리가 치유에 신경쓴다면 우리를 치유할 수 있다고. 저자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되는 것은 함께 사는 문제에 관한 한 당신이 당신 옆 사람보다 더 나을 것도 똑똑할 것도 없다는 걸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를 죽였을 때 아테네인들은 기존 기준을 따랐고 재판도 흠이 없었으므로 완벽히 민주적으로 행동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민주주의가 아테네인들 내부에 중대한 변혁을 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변화는 외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125 페이지) 


간디는 자신의 실수는 볼록렌즈로 보고 다른 사람의 실수는 그 반대로 보아야만 두 사람을 정당하게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고 썼다. 간디는 자신의 내면에는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사람들이 뭔가를 억지로 하게 만드는, 심지어 불가능한 일마저 시도하게 만드는 잔인성이 있다고 썼다. 저자는 타인의 죽음에 대한 오만한 태도, 자기의 싸움터에 다른 사람들을 배치하고 늘상 제대로 설명해주지도 않은 명분을 위해 순교자로 만들 때의 무사태평함을 간디의 가장 특징적인 실패라 정의한다. 


저자는 공포의 시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서 탄생했고 그들이 테러리스트가 된 이유는 그들이 열정적인 자선가였기 때문이라 말한다.(155 페이지) 이를 감안하면 저자가 말하는 실패란 한계(限界), 오류(誤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혁명의 폭력성에 관해서라면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보다 더 상징적인 인물을 찾기는 어렵다. 미라보는 그에 대해 이 자는 자기가 하는 말을 죄다 믿기 때문에 큰일을 낼 것이라 말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을 도덕적으로 순수하다고 간주하며 직접 혁명 프랑스의 도덕적 순수함을 책임지는 직무를 맡았다. 


로베스피에르가 애호한 해결책은 공포였다. 조지 오웰은 술, 담배 등을 성자가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성자되는 것 또한 인간이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디는 철도가 전염병을 퍼뜨렸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철도가 기근을 더 자주 발생시켰다고 말했다. 앞의 말은 이해 할 만하지만 뒤의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는 인도 농부들이 곡물을 팔지 않고 그대로 둘 수 있다면 기근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이동 수단 시설이 있어서 곡물을 팔아 기근을 겪게 되었다는 의미다. 간디는 1869년생이다. 영국(1825년)에 이어 영국 식민지 인도에 기차가 다니기 시작한 것은 1853년으로 간디 나이 16세 때이다. 


저자는 유토피아의 문제점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이질적이라는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실패는 우리를 겸허하게 만들며,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더 가깝다는 중요하고 단순한 교훈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고 말한다. “완벽하고 모든 것이 되려고 노력하다 보면 우리는 실제로 우리 손이 닿을 수 있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저자는 실패자라는 것은 당신이 누구냐의 문제이지 당신이 무엇을 하느냐, 말하느냐, 생각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말한다.(209 페이지) 마치 당신이 그렇게 될 운명인 것처럼 실패는 떨쳐버릴 수 없는 아우라다. 


에밀 시오랑은 실패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칼뱅은 어떤가. 그는 예정설이 포함된 TULIP 교리의 창시자이다. 칼뱅의 관심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전적으로 신에 있었다. 시오랑은 인간혐오자였던 만큼 루저에 대해 끝없는 이해심을 가졌다. 저자에 의하면 시오랑의 반우주적 사고에는 뚜렷한 그노시스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시오랑은 이 세상의 신은 무능하다고 썼다. 새로운 신들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그의 작품 원제는 사악한 데미우르다. 


저자에 의하면 자살은 종종 실패와 연관되어 있고 자살자는 루저로 간주된다.(307 페이지) 시오랑은 평생 우주를 꾸짖고 자기 소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정작 때가 되었을 때는 자살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그 실험을 설정하고 그것을 거친 사람이 있다. 장 아메리다. 그는 자살이 아니라 자유 죽음이라 말했다. 저자는 실패는 다른 어떤 경험보다 눈이 떠지는 경험이라 말한다.(377 페이지)


물리적 세상에서 삶이 발생한 덕분에 우리는 존재의 구조와 우리 자신의 내면에 생긴 균열을 보기 시작한다. 실패는 인간 역사가 타인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제거하려는 지속적인 분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저자는 이야기가 내 삶을 구원할 수 있을까? 라고 묻는다. 답은 무엇일까? 그렇다, 가능하다이다. 실패는 우리가 누구인지의 중심에 놓여 있기에 우리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 읽는 이야기들과 마찬가지로 일차적으로 실패의 이야기다.(38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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