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의 삶과 양자역학으로 본 주자학
주종옥 지음 / 동방문화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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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朱熹)의 존칭인 주자에서 이름이 유래한 주자학(朱子學)은 공자의 유학(儒學)을 중심으로 노장(老莊) 사상 및 불교사상을 통합한 동아시아 철학의 정수이며 생활 패턴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새 학문이다. 주희는 1130년에 태어나 1200년에 타계한 사상가이자 개혁가였다. 송(宋)은 북송(960년-1127년)과 남송(1127년 -1279년)으로 나뉜다. 송이 이렇게 두 시기로 나뉘는 것은 여진족이 이끄는 금나라의 침공으로 인한 것이다. 주희의 부친은 주송(朱松)이고 모친은 축오랑(祝五娘)이다. 축(祝)은 빌다, 축원하다, 베를 짜다 외에 박수 무당을 뜻하기도 한다. 


병중의 주송은 주희에게 적계(籍溪) 호헌, 백수(白水) 유면지, 병산(屛山) 유자휘 등 자신의 세 친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으라고 당부했다. 유면지는 주희를 친자식처럼 교육시켰고 자신의 딸(유청사; 劉淸四)을 주희에게 출가시켰다. 유자휘는 주희에게 과거 공부를 하도록 독려했다. 조광윤(趙匡胤)이 세운 송(宋)의 수도는 개봉(開封)이었다. 남송 시대의 유학은 진시황의 분서갱유로부터 당나라, 오대 십국시대를 거치면서 쇠퇴할 대로 쇠퇴하였고 오랜 내우외환으로 빈곤과 사회의 불안감이 쌓이고 쌓여 도덕은 사라지고 욕망만이 넘쳐나고 있었다. 


중원이 함락되고 전쟁과 농민봉기로 백성들은 이리저리 피난을 다니면서 전통유가의 문화적인 가치와 규범을 상실한 채 새로운 시대정신과 문화를 주도해줄 성인을 고대하고 있었다. 송은 과거제도를 활성화하고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된 관료들에 의한 문치주의를 실시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기 시작하였다. 1147년 주희는 우수한 성적으로 과거를 통과했다. 과거의 수석 합격자뿐 아니라 대부분의 상위 합격자들은 금나라와의 강화조약 체결을 지지했으나 주희는 강화에 반대했다. 주희는 19세에 과거 시험을 통과한 후 20대 초반에 여러 지방의 명유(名儒) 및 현자(賢者)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가르침을 쉽고 빠르게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불교와 도교를 넘나들며 폭과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경지에 도달했다. 


유교 경전을 비롯해 불교 경전, 도교 경전들을 탐독하며 푹 빠져 지냈다. 주희의 학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연평(延平) 이통(李?)이다. 주희 부친 주송과 수십년 교제한 이통은 몇 구절의 가르침으로 주희를 불교와 도교로부터 유학으로 돌아오게 이끌었다. 주희가 이통으로부터 받은 가르침 중 이일분수(理一分殊)를 빼놓을 수 없다. 일에는 크고 작은 것이 있지만 이치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다는 의미, 천도의 본말은 하나로 관통한다는 의미(26 페이지)다. 


주희는 사회의 부패와 모순을 일소하기 위해 애썼다. 주희는 주부(主簿) 직무를 수행하며 틈나는 대로 학문의 진흥에 심혈을 기울였다. 주희는 학생들에게 의리로 마음을 기르고 과거 공부에서 벗어나 도를 배우고 뜻을 세우며 장구(章句)의 학문에서 성의 정심을 추구하도록 지도했다. 이러한 리학 교육의 종지를 살려 학교에 법제를 제정하였으며 강의하고 토론하는 방법을 수립하여 시행하였다. 아울러 친히 재생들에게 강의하고 감독하며 재생들을 격려하였다. 주희가 경학을 전수하고 학문을 강론하자 수십 명의 제자들이 한꺼번에 배출되어 새로운 학파를 이루게 되었다. 


당시는 한(漢), 당(唐)의 장구(章句)를 위주로 한 훈고학과 불교와 도교의 흥행으로 공자, 맹자가 인(仁)을 중추로 삼아 세웠던 극기 복례와 인본적 윤리체계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주희의 리학은 공자 맹자의 인(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서 리를 중추로 삼아 격물치지의 인식론, 성의 정심의 도덕관, 수제치평(修齊治平)의 인생관을 삼위일체로 하는 인본 윤리 체계였다. 주희는 계속되는 사회 혼란으로 무너진 풍속을 바로잡는 근본이 예(禮)에 있다고 보고 주례, 의례 등을 참고로 제례와 혼례의 표준을 만들어 가르쳤다. 


1163년 11월 6일 주희는 등대(登對)하여 황제에게 격물치지와 현실에 대응하는 방안에 대해 이통의 리학을 바탕으로 상세히 설명하면서 효종이 군주로서 저지른 허물을 지적하고 조정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주자가 효종의 면전에서 세 차례 차자(箚子)를 읽어 내려가면서 강화 논의를 강하게 비판하자 황제가 얼굴에 노기를 띠면서 언짢아 하였다. 11월 12일 주희를 몹시 달가워하지 않던 효종은 결국 주희를 무학박사(武學博士)에 제수(除授)하였다. 무학박사는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국자감에서 병서, 궁마, 무예를 가르치는 직책으로 유학자를 이 직책에 임명하였다는 것은 조정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했다.


효종은 주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164년 11월 금과의 관계를 숙질로 하고 매년 세공을 바치는 것으로 강화를 맺었다. 주희는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효종이 유학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분명해지자 그 해 12월 12일 도성 임안을 떠났다. 그때 마침 스승 이통이 별세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에 핑계를 대고 서둘러 떠났다. 1175년 7월 주희는 노봉(蘆峰) 운곡(雲谷)에 새로운 거처인 회암(晦庵)을 짓고 저술에 몰두했다. 주희는 세 성인 역 즉 복희(伏羲)의 역, 문왕(文王)의 역, 공자(公子)의 역을 탐구하여 역의 역사를 거꾸로 올라가 본래의 뜻을 밝히고 정이(程?)의 의리역과 소옹(邵雍; 소강절)의 상수역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였다. 


1193년 무렵 주희가 큰 선비라는 명성이 금나라에까지 전해졌다. 북방의 금나라 통치자와 조정에서는 유학을 높이면서 주희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남송은 매년 원단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금나라에 보냈다. 그해 초에도 사절단이 금 나라로 갔다. 금나라 조정에서 남송으로부터 파견된 대신에게 뜻밖에 남조 주선생님께서는 요즘 어떤 일을 하시느냐고 물었다. 그 대신이 이를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 대신들이 앞 다투어 주희를 천거하여 산중에서 내려오게 하였다. 1193년 11월 주희는 지담주 호남 안무사에 제수되었다. 주희는 담주에 도착하자마자 병비를 정돈하고 지방행정을 맑게 하고 학풍을 바로잡는 세 방면의 개혁을 전개하였다. 


이어서 악록서원을 복원한 후 서원의 규모를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주학을 선풍처럼 일으켰다. 1194년 즉위한 영종은 간사한 신하들의 권력농단을 폭로하고 황제에게 성의정심의 공부가 부족하다고 책망하는 주희에 대해 분노해 주희를 40여일만에 도성에서 쫓아내버렸다. 반도학파들은 조정에 있던 도학자들을 온갖 죄상을 씌워 유배 보내고 마침내 1197년 정월 도학의 영수인 주희도 여러 가지 죄상을 나열하여 탄핵한 후 파직하였다. 1198년 반도학파들은 주희를 포함한 위역당적(僞逆黨籍) 59인의 명단을 열거한 후 도학을 위학으로 규정하고 위학을 금지한다는 조칙을 세상에 공포하였다.


당적에 포함된 도학자들은 정신적인 억압과 곤경 속에 울화병이 들어 하나씩 죽었다. 주희가 그토록 아끼던 채원정(蔡元定)도 유배지에서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주희 사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우상화와 신격화 운동이 일어났다. 1209년 문(文)이라는 시호가 하사되어 주문공(朱文公)으로 높여졌다. 주희의 사서집주가 국학으로 채택되었고 태사(太師)에 추증되었으며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와 함께 다섯 도통의 성인의 지위에 올랐다. 1335년 주희를 제국공(齊國公)으로 봉하고 문묘(文廟)를 세우게 하여 공자와 같은 반열에 올리고 봄, 가을로 공자와 같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1712년에는 강희제(姜熙帝)가 조서를 내려 주희를 공묘십철(孔廟十哲)의 반열에 배사토록 승격시키고 주희의 위패를 대성전 안으로 들였으며 주자전서, 성리정의를 편집한 뒤 전국에 반포하게 했다. 주희가 구축한 방대한 인본주의 주자학 체계는 선(善)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윤리이성으로 동양의 정신문화와 전통을 대표하고 현재까지도 우리들 마음속에 깊이 흐르고 있다. 1175년 주희는 여조겸과 함께 송나라 성리학자인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의 어록과 문집에서 정수가 되는 말을 편찬하여 근사록(近思錄)을 만들었다. 근사록이란 논어 자장 편에 나오는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여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부터 생각하면 인(仁)은 그 가운데 있다(박학이독지 절문이근사 인재기중의;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주희는 그 중 모든 학문사변의 일인 박학, 독지, 절문, 근사에 종사하면 마음이 밖으로 달아나지 않고 존양할 수 있어 자연히 인(仁)이 그 가운데 있게 된다고 했다. 주자학은 위진 남북조 시대 이래 도교와 불교의 현실탈피 정신을 비판하고 현세에 가치를 두며 유교 본래의 예교주의를 부활시키는 것을 기치로 내걸고 일어났다. 주자학은 도교사상이 지닌 우주론과 불교의 심오한 심성론 등 철학 이론을 흡수하여 종전의 유교에는 없던 우주론, 존재론, 심성론, 인식론 등을 갖춘 종합적인 철학 체계를 확립하였다. 주자학은 도교나 불교처럼 내면주의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사물에 대한 주지적이고 합리적인 탐구를 중시하며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인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제시하였다. 


명은 원(元)대를 거쳐 한족이 다시 천하를 통일하여 민족주의 고취와 함께 중국 고유의 사상을 부활시킬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주자학은 그에 가장 적합한 학문으로 여겨졌다. 송대 주자학에서 형이상학이 발전하게 된 것은 불가의 공(空)과 도가의 무위(無爲)에 답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우주론과 형이상학을 건설해야 했으므로 태극(太極), 리(理), 기(氣) 등의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였다.(99 페이지) 그러나 명초에는 불교나 도가의 도전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고조되지 않았다. 


주자학적 자연법의 특징은 존재와 당위를 일치시켰다는 점이다. 즉 존재가 당위가 된다. 이것을 주자학적 용어로 말하면 존재의 근거 또는 원리인 소위연지고(所以然之故)는 존재의 규범적 양태 또는 존재가 실현해야 할 규범인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과 등치라는 것이다. 이것을 주자는 모두 리로 나타내었다. 그러므로 주자학에서 리는 이중 구조를 갖는다. 청대의 대표적인 도학자인 안원(顔元)은 송의 도학자들이 한(漢), 진(晉)의 불교, 도교의 집대성자일 뿐 요순, 주 공, 공자의 전통 계승자는 아니라고 여겼다. 


안원은 기를 우주의 근본으로 여기며 만물의 성은 리가 부여된 것이고 만물의 기질은 기가 응결된 것이라고 하면서 리와 기는 하나로 융합되어 있어 천명지성과 기질지성으로 나눌 수 없고 도심과 인심을 나눌 필요도 없다고 보았다. 주자학은 군자와 성인을 논하고 천하를 논하지만 그 출발점은 자기 자신의 일상생활에 둔다. 일상생활에서 자기 자신의 삶을 꾸준히 향상시키는 가운데 자신의 인격이 완성된다. 자신의 삶이 완성되면 저절로 가족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로 확충되어가는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문이다. 


또한 주자학은 경험적 반성을 통해 올바른 삶의 방향을 인식하고 반드시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문이다. 뿐만 아니라 주자학은 국가의 전례와 사회와 가정의 종법제도, 관혼상제 등 제반 의식과 절차를 개량하고 건전한 풍속을 조성해 나감으로써 조선시대 전반의 생활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쳤다. 주자학은 조선에서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정치체제와 개인의 사유체계에서 제일의 동력원이 되었고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알게 모르게 그 영향이 지속되고 있다. 


상(商) 나라 때부터 유자(儒者) 계층이 비로소 육체노동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독립적으로 전문화되어 갔다. 그들은 각종 의례를 주관하면서 복잡하고 번거롭고 산만했던 기존 의례의 수준을 높이고 규범화했다. 상당수의 유자들은 장례만 주관하던 천민이었지만 이때부터 전문 지식계층으로 신분 상승했다. 나아가 단순히 상례, 장례, 제례 사무만 보던 유자들이 국가의 중요한 전례와 종교 행사 및 민간의 각종 문화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에 따라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되는 특수한 계층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주(周) 나라에 와서 천(天)은 상나라 때의 권위적인 천인관계를 넘어 윤리적 색채가 더해져서 화복(禍福)을 관장하는 존재가 되었다. 천은 화복을 집행하는 권위자일뿐 아니라 덕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도덕적 존재이기도 했다. 기원전 1046년경에 상을 멸망시킨 주나라는 호경(鎬京)으로부터 낙읍(洛邑)으로 도읍을 옮기고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서주 초에 주공(周公)이 예악을 정하였다. 이는 주례라는 엄격하고 치밀한 예절규범으로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강화되었다. 의식주를 비롯해 모든 생활방식이 신분에 따라 정해진 절차와 제약을 따르게 하는 독특한 중국의 예문화가 만들어졌다. 


유교를 창시한 공자는 주나라의 관제와 예법을 꾸준히 공부하면서 학생을 받아 제자로 가르쳤다. 시(詩), 서(書), 역(易), 악경(樂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등 6경을 정리하였고 상, 주 이래 전통적인 고대의 천명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 고대 유학에서도 부분적으로 태극이나 음양이론에 대해 논하였지만 이를 우주론이나 존재론으로까지 천의무봉하게 엮어내지는 못하다가 남송의 주희에 이르러 비로소 치밀하게 다듬어져 이론화되었다.


자연현상을 근거로 탄생한 음양개념은 노자에 이르러 도와 함께 존재의 근원을 설명하는 개념이 되었다. 복희씨 팔괘도는 대립적 위치에 있는 괘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하늘과 땅이 서로 교감하여 만물을 낳고 못의 기운이 산으로 올라가 구름과 비가 되며 물과 불은 상극관계이면서도 서로 감응하여 유기적인 관계를 상징한다. 복희씨 팔괘도는 주역이 그리는 이상적인 자연계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현실세계의 모습과는 다르다. 현실세계는 언제나 조화, 부조화, 균형, 불균형이 공존하기에 이런 현실을 반영하여 나타낸 것이 문왕 팔괘도다. 


이 괘도에서는 감괘(坎卦)와 리괘(離卦)를 제외한 모든 괘가 서로 부조화 상태에 있다. 복희씨 팔괘도가 자연세계의 공간적인 구조를 설명한 것이라면 문왕 팔괘도는 자연의 시간적 변화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복희씨 팔괘도가 현실화되기 이전의 이상세계를 그린 것이라는 의미에서 선천도라 할 수 있고 문왕 팔괘도는 현실 세계를 그린 것이라는 의미에서 후천도라 할 수 있다. 복희씨와 우임금이 팔괘를 만들고 문왕이 64괘로 나누고 괘사를 붙였으며 그의 아들 주공이 효사를 지어 완성하였고 공자가 십익(十翼)을 붙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음양이 우주 발생의 기원을 설명하는 추상적 개념이라면 오행은 자연과 우주를 이루는 다섯 가지 원소를 인간생활과 밀접한 구체적인 물질로 설명하는 개념이다. 한(漢)의 동중서는 천(天)이 말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음양오행의 자연적 요소로 재변을 일으켜 인간에게 상벌을 주는 존재라는 천인감응설을 주장하여 의지의 천, 주재자로서의 천 개념을 부활시켰다. 황노(黃老; 황제, 노자) 계열 학맥을 잇는 회남자(淮南子)의 저자들은 도의 무위의 특성을 강조하여 자연감응설을 제기하였다. 


서주(西周)가 몰락하고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자 크고 작은 수많은 나라들이 출현하였고 그들 간의 전쟁 횟수가 1,200회를 넘는 등 전쟁으로 인하여 사회가 극도로 혼란에 빠져 고대에서 이어져온 오랜 천관의 변화를 재촉하였다. 주희는 북송 오자 각자가 조금씩 연구한 개념들을 종합하고 다듬어서 주자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틀을 제시하였다. 주희는 인의 개념을 정성스럽게 다듬어서 사람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덕성이며 사랑의 리라고 정의하고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성선설까지 연결시키면서 윤리 도덕의 원천으로까지 높였다. 


지구는 시속 1,700km 속도로 자전하면서 시속 107,000km 속도로 공전한다. 태양계는 시속 80만 km의 속도로 은하중심을 한 바퀴 도는데 2억년 정도가 소요되고 지금까지 23번 정도 돌았다고 한다. 우주가 폭발한 지 30만년쯤 되었을 때 우주의 온도가 내려가고 전자들이 원자핵과 결합하면서 우주가 투명해졌고 빛과 물질이 분리되면서 빛이 빠져나왔다. 시간이 흐르고 우주가 계속 팽창하면서 이 빛은 매우 약하지만 우주 전체를 채우고 있다. 이 빛의 온도는 영하 273도 정도다. 이 빛은 마이크로파여서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다. 이 빛을 우주배경복사라 한다. 


우주배경복사는 빅뱅의 가장 강력한 증거이자 우주 초기의 여러 정보를 알려주는 가장 귀중한 유물이다. 우주가 팽창을 거듭함에 따라 온도가 내려갔고 우주에 남아있던 빛의 파장이 길어져 적외선이 되면서 우주가 캄캄해졌다. 이 빛의 스펙트럼은 에너지를 전부 흡수하거나 방출할 수 있는 흑체 스펙트럼과 같다. 온도 차이는 위치에 따라 10만분의 1 정도다. 현재까지 우주의 팽창을 고려한 우주의 크기는 420억 광년 정도다. 공간은 물질이 있는 곳에, 시간은 사건이 있는 곳에 존재한다. 물질과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의 시간과 공간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시간과 공간이 얽혀 있다는 의미의 시공간을 이야기한다. 장회익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우주는 138억년전에 빅뱅으로부터 급격한 팽창과 함께 출현했는데 이 최초의 순간에 공간과 시간을 포함해 모든 것이 크기를 헤아릴 수 없는 아주 작은 점에서 출발했다. 그 안에는 어떤 것도 구분할 수 없고 대칭 상태이며 완전한 혼돈 상태로 이러한 상태를 무극(無極)이라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 한편으로 그 안에 앞으로 우주만물을 생성시킬 수 있는 기본원리와 소재 원형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로 잠재되어 있는데 이를 태극(太極)이라 한다. 무극이면서 태극이란 말이 가능하다.’(‘자연철학강의’ 503 페이지) 


닐스 보어는 동양의 태극과 음양이론이 양자역학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선언했다.(155 페이지) 조셉 니덤은 ‘아마도 가장 현대적인 유럽의 자연과학의 이론적 기초는 노장과 주돈이, 주자와 같은 인물들의 은혜를 입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이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란 말을 했다. 아인슈타인, 칼 세이건, 호킹, 파인만 등은 우주의 구조를 심도 있게 연구해보고 그 신비로움에 경의를 표하면서 우주 자체는 신이라고 언급했다. 


무극은 기가 무한대로 펼쳐져 있는 상태 즉 물리학에서 허용하는 측정범위를 넘어선 양자요동이 끝없이 펼쳐진 상태라 보면 좋다. 태극은 우주를 운행시키는 모든 리(理)의 총화이다. 무극과 태극은 절대 분리될 수 없는 단일체로 이것이 바로 우주라는 의미다. 무극과 태극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주희는 동정무단(動靜無斷), 음양무시(陰陽無始)의 우주를 말하였다. 리(理)는 원래 옥(玉)에 나타나는 무늬를 이르던 말로 후에 철학적 개념이 부여되어 사물에 내재하는 원리, 우주의 근본 도리 등을 지칭하게 되었다. 


주희가 언급한 태극은 천지만물의 리다. 주희의 이일분수 사상은 이통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주희의 핵심 개념은 이선기후(理先氣後)다. 주희는 인간도 우주만물이 유행하는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유기체적 세계관을 제시했다. 그는 이런 세계관에 윤리적 의미를 부여하여 자연과 인간의 윤리를 통합시키는 독창적인 철학을 개발하였다. 유기체적 세계관에서 리는 우주 만물을 통합적으로 연결하는 네트워크망이면서 네트워크망에 있는 조직의 패턴이다. 


주자학의 리는 음양오행의 기를 능동적으로 주재하여 우주 만물을 운영하며 존재론적 당위성과 윤리적, 도덕적 의미까지 부여하였다. 데카르트는 신으로부터 철학을 독립시켜 자연의 실체를 사유(思惟)의 실체와 연장(延長)의 실체로 나눔으로써 근대철학을 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사실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는다. 잠재의식의 보강작업을 거쳐 조작된 것이란 의미다. 두뇌는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하여 시야에 들어오는 정보 중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은 스쳐 지나가고 저장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저자는 현대 양자역학적 용어로 주자학의 기는 넒의 의미에서 에너지로, 리는 정보로 정의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의존할 수 있는 기가 없으면 리가 발현될 수 없지만 리가 없으면 기도 무용지물이 된다. 주희는 정이가 말한 성즉리(性卽理)의 관점을 받아들여 성을 형이상의 도덕본체로 설명한다. 형이하의 측면에서 심은 기의 핵심이지만 심 가운데 부여된 리는 형이상의 심이다. 주희는 성(性)은 태극과 같고 심은 음양과 같다고 말했다. 텅 비어 있고 밝으면서도 만물에 감응하는 것이 심이고 만물에 감응할 때 그 속에 들어 있는 도리가 성이며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정이다.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아직 발동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이미 발동하였지만 모두 정당한 법도에 들어맞는 상태를 화(和)라 한다. 주희의 성즉리 체계에서 성은 천리가 사람과 사물에게 품수(稟受)된 것이다. 리일분수는 전체 또는 일반을 가리키며 세계의 통일성을 대표한다. 분수(分殊)는 부분 또는 개별을 가리킨다. 세계의 다양성을 대표한다. 전자 크기의 10만배 크기가 원자핵 크기이고 원자핵 크기의 10만배 크기가 원자 전체의 크기다. 


몸의 다른 세포는 다 바뀌어도 뇌세포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197 페이지) 핵심은 뇌세포는 변함없이 존재하므로 항상 나는 나라는 것이다.(김대식 지음 ‘인간을 읽어내는 과학' 95 페이지) 우리의 뇌는 진화적 계층이 켜켜이 쌓여 있는 고고학 박물관이다. 아래로부터 뇌간(파충류의 뇌), 해마(현재의 뇌), 대뇌피질(미래의 뇌)의 구조다. 나의 본질은 정보다. 생명은 정보 자체가 유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주자학뿐 아니라 중국 고대철학에서 우주와 자연은 천(天)이라 불렸다. 천은 무극이자 태극을 달리 부르는 명칭으로 태극이 음양을 낳는 까닭을 도(道)라 하고 자연의 이법과 모든 사물들에게 부여하는 속성을 리(理)라 하였다. 


주희가 태어나기 전 북방에서 일어난 거란이 성장하여 국호를 요(遼)로 바꾸고 송을 압박했고 여진 세력도 금(金)을 세우고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송은 금과 연합하여 요를 멸하였으나 금에게 송의 수도 개봉(開封)이 함락되고 황제 휘종과 흠종이 금에 끌려갔다. 1127년 5월 남경에서 고종이 즉위하면서 남송시대가 시작되었다. 남송은 주화파 진회의 주도로 금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화친하며 명운을 연장하고 있었다. 주희는 백약이 무효한 관료들의 부패로 썩어빠진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황제를 교육하면서 백성들의 도덕을 바로잡아 북방의 옛 강토(疆土)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실천을 바탕으로 한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새로운 학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주희는 법가를 공리주의에 빠진 형이상학이 없는 사상으로 보았다. 주자학이 다른 철학이나 학문과 확연하게 다른 부분은 학자는 국가나 사회 또는 백성들을 위하여 도심을 실현하고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한 데 있다.(223 페이지) 양자역학에서는 파동함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양자들의 행동을 알 수 없다. 양자들은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하다가 우리가 관찰하거나 측정하면 파동함수가 붕괴해 한 가지 상태로 결정된다. 


주자학은 1313년 원나라 인종 때부터 1912년 청나라 말까지 600년간 중국의 관료선발 기본교재 및 교육과정으로 지정되었다. 주희는 고종, 효종, 광종, 영종 등 네 황제에게 국가 당면 현안을 해결할 정책을 제안하는 봉사(封事)를 수차례 올리고 시강을 하고 직접 주대하여 직언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관직에 있을 때는 토지 경계를 바로잡았고 조세제도를 개혁하였고 재난이 닥쳤을 때 부세를 경감하였고 사창(社倉)을 지어 백성들을 구제하였고 지방 호족들의 탈세를 막고 불법을 탄핵하는 등 과감한 개혁정책을 펼쳤다. 각종 의례가 인간의 감정을 솔직하고 적절하게 표출할 수 있도록 절차를 간략하게 하고 음식을 검소하게 하는 등 풍속을 바로잡았다. 항상 거친 음식과 의복으로 검소한 생활을 몸소 실천하였다.(246 페이지) 


주자학의 유기체적 세계관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자학의 유기체적 세계관에서 리는 우주만물을 통합적으로 연결하는 네트워크이면서 이를 유지하고 운영해나가는 정보다. 유기체적 세계관을 양자역학적으로 장(場)이론이라 할 수 있다. 우주 전체는 힉스장 즉 부단(不斷)한 양자요동으로 춤춘다. 우주 공간 자체는 소립자들과 상호작용하면서 부단히 역동적으로 생성, 소멸한다. 도덕은 단순한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행동하는 것, 헌신하는 것이다. 주자학은 정신, 육체의 일원론이다. 주자학은 실천을 우선하는 실용주의다. 주자학이 우리 시대에 유용하게 활용될 여지는 크다. 이런 점에서 주종욱의 책은 주목할 만하다. 궁금증은 주자학을 근본으로 한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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