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개념 - 고대에서 현대까지
박준영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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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를 만나면서 우리는 사유의 수준이 어떤 다른 국면으로 넘어감을 감지하게 된다.“(이정우 지음 ‘세계 철학사 1 ’93 페이지) 박준영의 ‘철학. 개념’의 서주부(序奏部)에서 파르메니데스를 만난다. 그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말을 했다. 존재만 가능하고 비존재 즉 무(無)는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운동을 부정했다. 풀어 이야기하면 파르메니데스는 고정불변하는 있음만 인정하고 운동은 인정하지 않았다.(2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파르메니데스 방식의 사유로는 고양이가 거실에서 안방으로 움직인 것이 없어졌다가 있게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26 페이지)


파르메니데스가 단 하나의 있음을 인정했다면 플라톤은 모든 개별자들 위에 존재하는 이데아를 주장했다. 플라톤은 감각보다 관념을 실재적이라 생각했다. 가령 커피의 실재성은 감각적 맛에 있지 않고 씀(bitterness)이라는 관념적 본질에 있다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은 흐른다는 말을 했다. 그는 우리는 같은 강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도 했다. 저자는 세상이 변하는 만큼 우리도 변하고 그 가운데 우리는 존재한다 또는 존재를 겪어간다는 말을 한다.(37 페이지) 우리는 유한성 한가운데서 어떤 목적을 이루려 하고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작은 성취감에 감사하고 또 다른 목적을 설정하고 거기에 몰두한다.(38 페이지) 헤라클레이토스는 변증법의 시조로 볼 만하다. 당시에는 변증법이란 용어보다 로고스(명사이기보다 셈하다, 말하다 등의 동사)란 용어가 있었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생성의 대우주는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는다. ”감각을 믿을 때 세계는 다자(多者)와 운동으로 다가온다. 무수한 사물들이 존재하고 그 사물들은 늘 어떤 식으로든 운동한다. 그것이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경험이 아닌가.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오로지 논변을 통해서만 사유할 때 다자와 운동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감각을 통한 그런 경험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이정우 지음 ‘세계 철학사 1’126 페이지) 철학사의 적자는 파르메니데스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제자들을 스토아학파라 한다. 저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야기를 한다. 두 사람 모두 존재를 생성보다 우위에 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플라톤의 이데아에 해당하는 개념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형상(에이도스)이다. 에이도스는 사물이나 사태의 내적 형식이며 전형이다. 모르페(morphe)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아이온은 변화무쌍하며 언제나 움직이는 생성의 시간이고 크로노스는 변하지 않고 멈춘 존재의 시간이다.(49 페이지) 아이온은 차이 나는 것의 반복이고 크로노스는 동일한 것의 반복이다. 이 두 시간은 대립적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조작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같기도 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두 시간 사이에 어떤 탁월한 인간의 의지를 새겨놓고자 했다. 바로 카이로스다. 크로노스의 규칙성과 아이온의 우발성을 연결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시간을 다루는 기술을 에우카이리아(적기; 適期)라 불렀다. 저자에 의하면 칸트가 자칭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스스로에 대한 오인의 결과다. 그가 이성을 비판한 것은 사실이지만 존재론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인간 주체의 이성적 능력에 대한 과도한 확신으로 철학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칸트 이후 인간은 눈에 보이는 세상 만물보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회의적 질문에 먼저 답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불교의 윤회는 동일한 것들이 되돌아오는 것이고 영원회귀는 차이 나는 것들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에는 법칙적 요소들이 없고 다만 힘의 증감, 그 과정의 반복만이 있다.(55 페이지) 니체의 생성은 차이 나는 생성이다. 원(原)은 물이 흘러나오는 샘을 형상화한 글자다. 첫번 째 장소를 의미한다. 기슭 엄과 샘 천의 결합어다. 철학은 신화가 아닌 합리적 이론, 유용성이 아닌 탐구 자체의 가치에 초점을 두는 학문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의 철학과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의 철학이 엠페도클레스에 의해 거칠게나마 종합되었다. 고대의 원리와 근대의 원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고대의 원리는 질료적이고 물질적인 원소였고 근대인들에게 원리는 법칙 즉 로고스였다.(96 페이지) 


현대철학에서 원리와 원인은 더 이상 중차대한 문제가 아니다. 대상을 인식하는 우리의 파악 작용도 감응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이것이 어떤 원리나 원인에 의한 것인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감응이란 처음부터 파악 주체와 그 대상이 명확하게 구분되거나 정해져 있지 않는 상태의 과정이다.(99 페이지) 감응의 과정에서 유일한 것은 애매모호한 직관 같은 것이다. 카메라의 초점이 불분명한 채로 이 세계에 놓여 있다. 이때 어느 것이 원인이며 결과인지 정해지지 않는다. 무엇인가가 명확해지고 경계가 설정되면 제한되는 때는 감응의 과정이 지각과 지성의 작용으로 이행할 때다. 지성은 비로소 주체가 되며 화병 안의 꽃은 대상이 되어 서로 인과관계를 형성하거나 주체의 원리나 대상의 원리로서 자리잡는다.(99 페이지)


이렇게 보면 원인이나 원리는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생성된다. 즉 파생되는 질서다. 이 파생되는 인과적 질서의 한쪽 면에 주체가 자리잡는다. 그리고 저쪽에 객체가 놓인다. 이렇게 현대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고유한 특성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주-객 이분법도 파생된 질서에 불과하다. 바슐라르적인 의미에서 과학자 또는 철학자는 모든 것을 애초에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주체가 아니라 실험과 조작의 과정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주체다. 이를 과정 속의 주체라 할 수 있다. 이 주체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106 페이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능동적으로 지식을 추구하지만 그 안에서 늘 불안정을 견딘다. 우리는 우리의 능동성 안에서 불안하다. 저자는 바야흐로 철학이 과학과 긴밀하게 갈마드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한다.(111 페이지) 


닐스 보어는 전자 자체에서는 빛을 방출하지 않고 제 궤도에서 이탈하여 다른 궤도로 진입할 때 빛을 방출한다는 대담한 가설을 세웠다. 궤도를 점프해서 들어가는 운동에너지가 빛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112 페이지)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전자가 일정한 궤도를 도는가, 또 그것이 왜 점프하는가, 하는 문제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자가 일정한 궤도를 도는 것은 무시하고 왜 점프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드브로이는 빛이 입자와 파동이라는 이원성을 가진다면 전자도 그럴 것이라 가정했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전자가 일정한 정수값을 가지는 궤도를 도는 이유가 드러난다. 파동이란 늘 주기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나에 대한 아주 오래된 논의는 파르메니데스로 거슬러 올라간다.(126 페이지) 


파르메니데스에게 하나란 생성 없는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운동을 긍정하면 존재를 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운동한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고 변화하는 것은 하나의 존재자가 A에서 B로 둘이 된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파르메니데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생성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온전한 한 종류의 것이고 흔들림이 없으며 완결된 것으로서 그것은 언젠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있게 될 것도 아니라는 말을 했다. 플로티노스는 자신의 세계관을 마련해놓고 인간이 도달해야 할 목표를 정한다. 일자와의 합일이다. 감각적인 세계를 벗어나 초감각적이며 세계를 하나로 아우르는 일자로 올라가는 상승의 이미지가 여기서 탄생한다. 


기독교 철학자들이 플로티노스 사상에서 가장 큰 매력을 느낀 지점도 바로 여기다. 기도와 선행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최종적인 지복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창조의 의지는 신의 존재에 속해 있는 선성(善性)이다. 존재의 상태가 무의 상태보다 선하다는 것은 서양 사상에서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는 생각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분이 선하셔서 우리가 존재하고 우리는 존재하는 그 만큼 선하다고 말했다. 하나를 거부하고 여럿을 긍정한 고대 사상에서 스토아주의를 빼놓을 수 없다. 스토아 철학 사상은 당시의 그리스 로마인들의 영혼과도 같았다. 기독교인들이 플라톤 사상에서 교리의 철학적 내용을 따왔다면 스토아 사상에서는 실천적 풍모를 카피했다. 


스토아주의자들에게 세계는 로고스의 표현이다. 이 세계관은 헤라클레이토스의 것이기도 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만물유전의 강에 운명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는 세계의 법칙, 다수의 물체들이 운동하는 물리적인 경과를 의미한다. 스토아주의자들은 보편자(본질)를 개별적인 것(개쳬)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놓았을뿐 부정하지는 않았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보편적인 개념으로서의 인간에 상응하는 것은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대개의 철학자들은 철학의 근본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일(一)과 다(多) 즉 하나와 여럿의 문제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다.(155 페이지) 데카르트는 감각적 다양성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생각하는 나(코기토)의 획실성만을 진리의 근거로 보았다는 점에서 일원론자라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인간과 그 이성적 능력을 중시하긴 했지만 데카르트와 달리 그것을 모든 것의 토대로 특별하게 취급하지는 않았다.(157 페이지) 그래서 이들에게는 인간보다 자연 또는 세계의 모습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라이프니츠와 유사하게 스피노자에게서도 하나는 곧 여렷이다. 신 즉 자연이 그 예이다. 신이라는 일자는 곧 자연이라는 다자와 같다는 의미다. 스피노자에게 세계는 실체, 속성, 양태라는 근본적인 세 개념으로 갈무리된다. 실체는 개별자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립하는 하나의 존재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바 실체란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이 신조차 자연의 다양성 안에 놓이면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스피노자에게 자연은 신적인 실체가 변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실체의 변용이다. 


물론 변용한다 해도 실체는 그대로 남는다. 실체는 양태로 변용된다. 양태는 사물들의 모양새 즉 갖추어진 꼴이다.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지각에 해당하는 매개체가 속성이다. 지성이 대상을 지각할 때 대체로 우리는 그 대상의 공간적 속성 즉 연장(延長; extention)을 파악한다. 리쾨르는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를 의심의 세 대가(大家)로 불렀다. 동일성이라는 큰 이념을 의심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동일성이란 하나의 모습을 항구적으로 유지하는 것이고 차이란 여러 모습으로 생성, 소멸하는 것이다.(169 페이지) 생성이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차이 나는 것이다. 동일한 것은 하나의 동일성을 의미하고 차이 나는 것은 여럿의 다양성을 의미한다. 들뢰즈의 사유에서 어떤 것들이 대립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에 비해 거리가 멀다, 성기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대립을 사물의 본질로 보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재현(representation)된 것 즉 우리 인간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뿐이다.(179 페이지) 실제 사물들의 세계는 그렇게 대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작은 차이들과 큰 차이들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들뢰즈는 모든 것을 차이로서 긍정하지만은 않았다. 들뢰즈에게 대립은 없지만 적대는 존재한다. 들뢰즈의 사유가 적대하는 것은 동일성의 사유, 노예적 사유, 재현적 사유다. 이 셋은 공히 어떤 큰 범주 또는 큰 대상에 의존하는 부자유한 사유의 이미지라고 들뢰즈는 부른다. 부정하기의 반대인 거리두기는 긍정의 역량으로서 우월한 힘이며 부정이 아니라 적대를 인정한다. 들뢰즈에게 하나와 여럿은 이분법적으로 대립한다기보다 여럿으로서 하나를 펼쳐내고 하나로서 여럿을 함축하는 긍정과 적대의 운동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대립하는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들과 어울려 펼쳐지고 함축하면서 긍정하고 적대하는 관계다. 변증법의 대립이라는 성긴 그물은 차이의 조밀한 그물보다 열등하다.(173 페이지) 신유물론은 의심의 대가들에 이어 차이의 대가들을 계승한다. 들뢰즈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아 실재의 본모습을 바라보고자 하는데 이분법을 극복하고 거기에 차이들의 운동이라 할 수 있는 횡단성(transversality)을 도입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서로 함축하고 함축되는 운동이 횡단성이다. 여기에는 어떤 위계도 없고 오로지 실재하는 것들의 아나키한 활동들이 있을뿐이다. 이 관계는 인간 ? 기계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기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에 제한받는 수동적 존재다. 신유물론은 중심적인 하나를 인정하지 않음은 물론 연결되지 않는 여럿도 인정하지 않는다. 연결 즉 관계 이전에 홀로 서 있는 어떤 주체나 객체도 인정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고 했다면 실재는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하나/ 여럿이 된다. 철학에서 무한은 infinitude보다 정해지지 않음이라는 의미의 indeterminate라는 의미로 더 많이 쓰인다. 아페이론은 무규정, 비결정이란 의미다. 무질서는 아페이론이고 질서는 페라스가 된다. 페라스는 한계라기보다 규정성을 의미한다. 고대철학자들의 무한은 외적으로 무한히 뻗어나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적으로 무한히 분할가능하다는 의미다.(202 페이지) 제논의 역설은 스승인 파르메니데스가 다(多)와 운동을 부정한 데 대해 그것을 옹호하기 위해 개발한 논변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은 피타고라스에 반대한다. 피타고라스는 많음을 설정하는데 이 많음은 불연속적이다. 기하학적으로 수를 나타내는 점들 사이에 텅 빈 공허가 있듯 수의 계열에 있어서 하나의 단위에서 다른 또 하나의 단위로 가는 데는 갑작스러운 도약이 존재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는 기본적으로 기하학적 연속성을 전제한다. 그것은 꽉 차 있으며 어디서든 단속되지 않고 연속적이다. 


스피노자에게 신 = 실체 = 자연이라고 할 수 있다. 무한한 것이 유한한 곳 안에 속속들이 펴져 있다. 양태들은 실체인 신의 표현이며 이 표현 안에서 무한한 것은 유한한 것과 화해한다. 이를 변용이라 한다. 무한자로서의 신은 연장(延長; 물질)과 사유(思惟; 지성)로 변용된다. 연장으로 변용된 것이 세상 만물이며 사유로 변용된 것이 지성이다. 실체 일원론에 따르면 이 두 가지는 분리되어 있을 수 없다. 스피노자는 이 두 가지를 한갓 자연으로 본다. 중요한 것은 자연은 유한한 양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은 무한하다. 무한한 신이 유한한 자연에 내재할 때 모든 것이 소진되지는 않을 것이다. 스피노자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신적인 무한은 무한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중 극히 일부인 연장과 사유가 이 세계에서 표현될뿐이라고 말했다.(209 페이지) 저자는 비단 철학자나 수학자가 아니라도 일상인으로서의 우리는 스스로의 유한성을 늘 깨달으면서도 어떤 무한한 존재, 무한한 사유가 가능하다는 것을 느낀다고 말한다.(215 페이지) 


근대를 지나 포스트 근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제 자연 자체의 무한이 아니라 문명 도는 기술의 무한성에 당혹감을 느낀다. 무한 즉 아페이론에는 법칙을 벗어나는 우발적 사태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며 유한 즉 페라스는 한도를 정하는 법칙적인 필연성을 요청한다.(219 페이지) 소크라테스 이전 자연철학자들에세 그것은 로고스와 모이라로 대표되었다. 로고스는 자연의 질서 내지 운동을 가리켰다. 모이라는 불가피하고 불수의한 힘으로서의 운명이다. 스토아학파는 운명을 필연성으로 생각했던 철학 학파였다. 초기 스토아 철학자들이 활동했던 시기를 헬레니즘기라 부른다. 스토아 철학은 헬레니즘기뿐 아니라 로마 제국 말기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시간 동안 이어졌다.(224, 225 페이지)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의 사망에서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 이르는 헬레니즘기의 주류 철학은 스토아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이었다. 이 시기를 지나 두 학파는 기독교에 의해 오랜 시간 사장되었다. 스토아철학의 핵심인 존재론은 잊히고 앙상한 도덕철학만이 남았다. 초기 스토아철학의 대표인 제논(Zeno of Citium)과 크라시포스는 누구보다 장녀과 존재에 관심을 두었으며 그것을 운명이라고 여긴 철학자들이다. 제논은 제논의 역설의 제논(Zeno of Elea)과 다른 사람이다. 스토아철학의 운명(fatum)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모이라와 상당히 다르다. 한탄의 대상이었던 모이라는 스토아철학에 와서 파툼이 된다. 파툼은 로고스 즉 세상의 이법(理法)이다. 이는 물질적인 법칙이다. 이를 프네우마라 한다. 숨, 숨결 정도의 의미다. 


스토아철학의 핵심은 ‘운명 = 로고스 = 프네우마 = 불‘이다. 프로타고라스가 말한 인간은 만물의 척도란 말에서 인간은 수동적이다. 척도로서의 진리가 인간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데카르트에게서 나의 주체는 현저하게 주도성을 띤다.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타자 또는 타인이었다. 그에게 타인은 우리가 세상을 지각할 때 배경이 되는 존재의 의미를 가졌다. 타인의 첫 번째 효과는 내가 지각하는 각각의 대상과 생각하는 각각의 관념 주위에서 바탕을 조직한다는 점이다. 한 생애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극히 일부다. 그렇기에 우리가 보는 세상은 열에 아홉은 나의 시선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다. 이 논의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나의 시선으로 구성한 세계상은 거의 대부분 나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이고 이에 따라 나는 내가 아니라 타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323 페이지) 


이는 데카르트적 자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근대인들에게는 상당히 불안하고 섬뜩한 결론이다. 여기서 나의 존재를 보증하는 코기토는 유령처럼 느껴진다. 들뢰즈의 생각은 나는 늘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말을 생각하게 한다. 과연 나의 욕망이 나의 고유한 내면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욕망이 본래부터 내 것이었을까?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은 주로 자연철학 즉 존재론 위주의 사유를 전개했다. 소크라테스 이후에도 인식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보다는 윤리학이나 정치철학이 전경(前景)을 차지하게 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이르러 인간 인식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340 페이지)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의 회의주의에 대응하면서 인간 의식의 심층적인 면모를 드러내 보이려고 했고 플라톤주의는 근대에 이르러 데카르트에서 스피노자에 이르는 합리론으로 계승되었다. 근대에 이르러 플라톤식의 인식론은 비판받기 시작했다. 전면에 선 것이 경험론이다. 이 경험론의 핵심을 이어받으면서 칸트는 자신의 이성비판을 전개했고 20세기에 와서 다시 합리론적 경향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바슐라르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와중에 존재론은 베르그송이라는 거대한 산맥을 형성하면서 인식론과 일정한 길항(拮抗)관계를 형성했다.(340 페이지)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 나오는 논의들은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앎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떻게 이루어지고 또 궁극적인 앎이란 무엇인지 말해준다. 앎은 경이에서 시작되어 추론과 기억에서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것이 다는 아니다. 


어떤 앎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언제나 무지의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무지를 다시 인정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앎과 무지에 대한 고대 철학자들의 언어들을 넘어 나아가면 엄청나게 거대한 앎 ? 무지의 철학자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가 바로 칸트다.(351 페이지) 존재론의 개념들은 범주라고 일컬어진다. 철학은 사실상 범주론을 통해 정점에 이른다. 철학으로서의 철학을 밝혀 드러내는 분과는 형이상학적 존재론이다. 여기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존재 또는 존재자이고 이를 근원적으로 분류, 탐구하는 것이 범주론이기 때문이다. 범주라는 말을 철학적 의미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플라톤의 최상위 유는 다섯 가지다. 존재, 운동, 정지, 동일자, 타자가 그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범주론은 인식론적 전회를 거쳐 일신된다. 그 중심에 칸트가 있다. 전회라는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이 존재자의 존재를 탐구하는 방향에서 추구되었다면 칸트의 범주는 존재에서 인식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359 페이지) 그래서 범주는 인간 주체의 인식 가능성과 관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인식 능력이 존재자들과 상응한다는 전제하에 성립한다면 칸트에게서 그것이 역전되어 존재자들이 인식 능력에 상응한다는 전제가 나타난다. 칸트는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때 인식 능력(지성)은 대상을 구성하는 주체다. 이 구성 작업이 인식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보장한다. 감성을 통해 받아들여진 재료인 잡다(雜多)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지성의 범주다. 


칸트는 범주표를 도출하기 전에 그것이 우리 인식 능력인 판단력으로부터 나오는 종합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제시했다. 지식의 한계에 대해 더욱 철저하게 깨달은 철학자는 중세의 부정신학자 니콜라우스 쿠사누스다. 인간이 아무리 신에 대한 앎을 조장하고 거기에 접근하려 해도 궁극적으로 신에 대해서는 완전히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 쿠사누스는 원 안의 다각형을 예로 들었다. 원 안에 다각형을 아무리 많이 그려넣어도 원이 되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정신도 절대적 진리에 접근하기는 해도 그것에 적합한 진리를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365 페이지) 인간의 이성은 동일률에 근거한다. 모순적인 것이 동시에 참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무한자를 파악하려 할 때 모순율은 무용지물이다. 


쿠사누스에 따르면 유한한 인간은 진리에 만족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교화된 무지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런 무지의 긍정이 지적 허무주의를 초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366 페이지) 쿠사누스의 교화된 무지는 과학과 수학 연구의 원동력이 되었다. 무지는 더 정교한 지성의 연마를 촉진하는 기반이 된다. 쿠사누스는 이성이 불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지하기 때문에 그러한 무지를 깨치고 나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비록 그것에 한계가 있을지라도 무한한 것에 접할 수 있다면 추진하라는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무지에 대한 무지다. 무지에 대한 무지는 무지의 최대치이고 무지에 대한 앎은 알의 최소치다. 여기에서 말하는 앎은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고 무지의 최대치와 앎의 최소치 사이에는 아주 미세한 차이만이 있다.(376 페이지) 칸트는 인식 주체의 시야를 벗어난 것을 물자체(物自體)라 이름했다.(378 페이지) 


현상은 우리 앎의 최대치이고 물자체는 무지의 최대치다. 최근 철학사상의 첨단은 신유물론이다. 가장 중요한 인물이 카렌 바라드다. 바라드의 철학을 행위적 실재론이라 한다. 바라드는 이 사상을 존재-인식론이라 불렀다. 존재론과 인식론이라는 철학의 분과는 데카르트 이래 분화되어 칸트에 이르러 완전히 다른 영역이 되었다. 이 이후 사람들은 이 두 영역이 완결된 체계로서 때로 대립하고 때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바라드는 이 두 영역이 이미/ 언제나 하나라고 선언한다. 바라드는 이론물리학자였다가 철학자가 된 사람으로 양자역학에 기반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바라드는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에 기반하여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것은 불충분하다고, 더 신랄하게 말하면 그릇된 것이라고 본다.(389 페이지) 


대안은 하이젠베르크의 스승인 보어에게서 나왔다. 보어의 이론은 하이젠베르크의 그것과 달리 미결정성 원리 또는 상보성 원리라고 불린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발표되자 다소 우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해석이 아주 중요한 부분에서 잘못된 것인데 대중적으로 너무 급격하게 유명세를 타는 바람에 그에 대한 논의가 붇혀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서 보어의 상보성 원리는 부차적으로 다루어졌다. 하이젠베르크의 핵심적인 주제는 실험 상황에서 입자의 운동량을 측정하기 위해 무언가(예컨대 빛)을 쏘면 그것에 의해 측정이 방해받는다는 사실이다. 방해라는 생각에 기반한 이런 분석은 하이젠베르크를 불확정성 관계가 인식론적 원리라는 결론으로 이끌었다. 이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보어에게 중요했던 것은 방해가 아니라 입자의 속성을 어떻게 결정하는가였다.(390 페이지) 


가령 그 입자가 방해를 받음으로써 빨강(입자의 경우에는 운동량과 위치)이 빨강으로 남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빨강이라는 특성 자체가 이미 미결정된 상태라는 것이다. 보어가 보기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우리가 운동량과 위치라는 이미 정해진 결정값이 있고 그것에 대해 분명하게 알 수 없다고 보는 점에서 오류를 범한 것이다. 보어는 그런 이미 정해진 결정값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장치를 통해 측정하느냐에 따라(위치 측정을 위한 장치냐 운동량 측정을 위한 장치냐에 따라) 둘 중 하나의 측정값만이 불확실하게 결정되며 다른 하나는 미결정 상태에 놓인다고 말한다. 이 동일한 의미에서 두 측정값의 존재는 서로 상보성 다른 말로 상호배제성을 띤다.(391 페이지) 철학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어떤 대상에 대한 확실한 앎이 있다고 전제하지만 사실상 그 대상은 직접 실험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앎도 존재하지 않고 안다고 해봐야 기껏 그 부분만을 알뿐이다. 


”보어에게 실재적인 주제는 미결정성이지 불확정성이 아니다. 그는 의미론적이고 존재적인 용어로, 그리고 추론적인 인식론적 용어로 위치와 운동량간의 상호관게를 이해한다. 보어의 미결정성 원리는 다음과 같이 진술될 수 있다. ’상보적 변수들의 값(위치와 운동량 같은)은 동시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 주제는 인식불가능성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동시적으로 존재한다고 알려질 수 있는 것에 관한 질문이다.‘“  중요한 것은 안다는 것(의미론적인 것)과 모른다는 것(존재론적인 것)은 상보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이다. 상보적이란 말에는 상호배제적으로 보완한다는 의미가 있다. 상호배제적으로 관계 맺는 무지는 곧 미리 결정된 것은 없다는 것이고 때문에 어떤 것에 대한 앎은 동시에 다른 것에 대한 무지를 필연적으로 야기한다.(39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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