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에 갇힌 역사, 프레임을 깨는 역사
신유아 지음 / 혜안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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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frame)은 틀, 액자 등을 의미한다. 프레이밍(framing)이란 사진을 찍을 때 대상을 파인더의 테두리 안에 적절히 배치해 화면을 구성하는 일을 의미한다. 이는 신유아의 '프레임에 갇힌 역사 프레임을 깨는 역사'를 읽을 때 필요한 최소의 앎이다. 저자는 역사는 어떤 시각으로 어느 면을 보느냐에 따라 허구를 섞지 않은 사실만 가지고도 전혀 다른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32 페이지) 이는 저자가 우리 역사를 우리의 눈으로 보자는 취지로 한 말이다. 우리 눈으로 우리 역사를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세상이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하다.

 

저자가 제시한 바에 따르면 국사에는 우리 시각으로 보았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한계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많다. 이는 저자가 15년간 고교 역사 교사로 근무하며 국사와 세계사를 복수로 가르친 결과 알게 된 사실이다.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제목 그대로 프레임에 갇힌 역사와 프레임을 깨는 역사다. 개인적으로 목차에서 흥미롭게 보게 된 것이 몇 있다. 객관과 실증에 대한 강박, 성리학의 역할, 당쟁, 예송(禮訟), 골품제도의 위력, 과거시험의 위력, 역사 발전의 의미와 동력 등이다.

 

책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는 것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역사를 전근대와 근현대로 나누는 것은 문제라는 사실이다. 저자에 의하면 근대에 대한 맹신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부작용의 최고봉은 식민지근대화론이다. 근대가 지체된 것에 대한 우리의 과도한 죄책감은 식민지와 근대화라는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를 만나게 했다.(55 페이지) 책은 저자의 경력(국사와 세계사를 함께 가르친)을 반영하듯 세계사와 우리 역사를 넘나드는 방식의 서술로 일관한다. 물론 중심은 우리 역사이고 그것을 바라보는 바른 길을 제시하는 데에 놓여 있다.

 

저자는 개인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과거에 근거 없는 한계를 설정하여 서양과 똑같은 역사를 갖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역사교육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67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랑케식의 실증과 객관에 대한 강조는 우리나라의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73 페이지)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역사학자들이 우리에게 전파한 것일 수도 있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유교적 합리주의가 랑케의 객관적 실증주의를 만나 시너지를 일으킨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나라 역사 기록의 성격과 유럽의 그것이 많이 다르다는 점이다. 유럽의 역사 기록 가운데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운 전언과 구전에 의한 기록, 음유시인들의 노랫말에 상상을 더한 기록이 많았지만 그들은 이런 기록을 바탕으로 해서라도 과거의 일을 최대한 밝힐 수밖에 없었다.(73 페이지) 랑케가 객관적 사실만을 기록하라고 강조한 것은 이런 사정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사실(史實)의 객관성과 정확성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현대의 기준에 비추어 합리적이지 않다거나 중국 등 다른 나라의 역사 기록과 차이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불신하고 우리의 역사 기록을 믿지 않으려는 태도는 재고해 보아야 한다.(76 페이지)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실증에 대한 강박에 의해 우리 역사 연구에서 역사적 상상력이 사실상 퇴출된 것이다. 저자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한계로 보는 시각에 대해 재고할 것을 요청한다. 저자에 의하면 신라가 당과 손잡고 대동강 이북 영토를 당에게 넘겨주기로 한 것은 (중국의 사서를 통해 증명되지는 않지만) 역사적 사실일 것이다. 저자가 말했듯 신라가 당과 손을 잡지 않았다면 아마도 신라는 망했을 것이며 본래 신라의 영토도 아니었던 대동강 이북의 땅을 잃지 않기 위해 당과의 동맹을 고려하지 않고 자국을 멸망으로 이끄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81 페이지)

 

저자는 우리가 우리 역사를 박(薄)하게 보는 것의 배경을 논한다. 유교적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역사학의 잘못된 만남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일제가 강요한 식민사관(타율성론, 정체성론, 당파성론)에 상당한 혐의가 있다고 말한다.(85 페이지) 저자가 말했듯 역사 인식에 있어서 자가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모든 인류를 똑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역사를 누구의 시선에서 보려고 노력해왔는지에 대해 돌아볼 때도 되었다.(87 페이지)

 

저자는 성리학에 의해 조선이 창업되었으니 성리학에 의해 망했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성리학에 의해 백성들의 실생활과 상관 없는 논쟁이 벌어지고 그로 인해 정파가 갈려 무익한 정쟁을 일삼으면서 조선이 줄곧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는 시각은 익숙하다. 서인에 의한 반정(反正)이 과연 명(明)에 대한 의리와 폐모살제를 규탄하는 성리학적 명분 때문에 일어난 일인지 광해군의 대북(大北) 정권에 반발한 서인들이 이러한 명분을 이용하여 정권 탈환에 나선 것인지는 잘 따져 보아야 한다.(90 페이지)

 

한 마디로 서인세력은 광해군을 내몰기 위해 적절한 명분을 이용했을뿐 단순히 성리학적 사고에 사로잡혀 반정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91 페이지) 저자는 서인 정권이 인조반정 이후 명에 대한 의리를 무리하게 주장하여 병자호란이라는 위기 상황을 초래했다는 것도 서인이 사대주의의 화신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입장을 달리 함으로써 반정의 정당성을 스스로 훼손하게 되면 정권을 지킬 수 없다는 판단을 한 결과로 본다. 저자에 의하면 성리학은 인간의 선악과 시비에 대한 분별력이 왜 차이가 나는지에 대해 알고 인간의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도록 교화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라고 생각했다.

 

성리학은 현실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회문제를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또 그 해결을 지향했던 학문이었다.(9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주기론(主氣論), 주리론(主理論)은 식민사관을 주장했던 다카하시 도루가 조선의 성리학을 깎아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한 잘못된 용어다. 이황은 이(理)가 스스로 동(動)할 수 있다고 보아 인간 스스로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보았고 이이는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 이런 전제하에서는 인간 심성이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강하게 믿었고 이황의 학맥을 이은 동인(東人; 후에 남인과 동인으로 분기)은 군주에 대한 기대가 크고 마음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큰 편이었다.(외형적 제도나 물질적인 측면의 변화보다 인간 심성의 변화에 의존하는 정도가 더 클 수밖에 없는 인간관을 가졌다.)

 

이이에게 인간의 선악은 기질의 차이에서 비롯된 당연한 것이었고 인간이 도덕적이지 않다는 사실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이의 학맥을 계승한 서인은 인간을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 자체의 도덕적 변화 가능성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고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황과 이이는 모두 선조에게 성인이 될 것을 주문했다. 사람이 마음먹기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을 그대로 방치하면서 군주의 심술(心術)에만 의존하려는 성향은 남인의 패인이었다.(102 페이지) 남인은 왕권을 견제하기보다 강화하는 쪽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남인 가운데 실학자로 분류되는 인물들은 뒤늦게나마 다방면에 걸친 제도 개혁을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 추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부정하지 않았다.(104 페이지)

 

저자는 예송에 대해 중종 이후 줄곧 수세적 위치에 있었던 왕권이 효종 대의 북벌, 현종 대의 예송을 통해 다시 성장하기 시작해서 숙종 대의 환국을 통해 크게 강화됨으로써 영조와 정조 대의 중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오히려 역사적 사실에 더 가깝다고 썼다.(125 페이지) 역사를 편견 없이 읽으려 한 결과 예송에 대해 긍정적 시각을 제시한 모범 사례로 기록될 부분이다. 물론 저자의 시각은 왕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중세사회에서 왕의 위상에 대해 신하들이 왈가왈부했다는 것 자체가 역사의 발전인 바 그 부분에 예송의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쓴 ’한국사 속의 한국사 2; 조선왕조 500년‘과 비교할 만하다.

 

긍정적인 시각이라는 점은 같지만 전자는 왕권 강화에 초점을 두었고 후자는 신하들이 왕권에 대해 왈가왈부했다는 점이 발전이라는 말을 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관건은 짧게 제시된 저자의 글을 내 나름의 근거와 논리로 보강해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재미 있는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효종과 현종대에 있었던 서인과 남인의 충돌이 계기가 되어 국왕의 역할이 계속 확대되었다고 썼고(126 페이지) 숙종 대에는 왕권이 강화되었고 황해도와 평안도까지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으며 인구와 경지 면적도 계속 증가하는 추세였으며 국경 수비 시설에 대한 보수 공사도 활발히 진행되어 말 그대로 부국강병이 이룩된 시기였으며 신분 상승 가능성도 효종 대의 19%보다 높은 30%대로 뛰어오른 시기라 썼다.(128 페이지)

 

또한 영조는 쌍거호대(雙擧互對) 원칙을 내세워 하나의 부서에 노론과 소론, 때로는 남인까지도 고루 등용하는 정책을 폈다고 썼다.(12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영조는 무신란(戊申亂;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노론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같은 소론 온건파에게 진압을 맡김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탕평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12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정조 대에는 경지면적과 인구, 신분 상승의 가능성이 더욱 확대되었다.(136 페이지) 덧붙여 저자는 정조 대의 발전은 정조의 치세에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정치 개혁의 결과라기보다 현종 대부터 시작되었던 역사의 상승 국면이 꽃을 피운 결과라는 말도 했다.

 

저자는 정조 말년의 수원 화성 축조 등으로 인한 재정 부담이 그의 사후 세도정치의 단초가 된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논의할 부분은 ’인간의 역사에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는 서로 분리되어 움직였던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다. 모두 상호작용을 해 왔고 어느 한 가지 요소도 절대적인 원인으로서 선행하지 않았다.‘(8 페이지)는 말이다.

 

책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꽤 있다. 정조가 말년에 시행한 수원 화성 축조 등으로 인한 재정 부담 가중으로 그의 사후 세도정치의 단초가 되었다는 글(136 페이지)이 그렇다. 현실인식이 잘 된 광해군이 아무 이유 없이 궁궐 공사 등으로 재정을 낭비했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다고 보며 당시 광해군은 모문룡에 대한 지원 등 명의 과도한 요구를 물리치기 위해 궁궐을 지어 국가재정을 다 써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는 글(91 페이지)도 그렇다.

 

저자는 ’인간의 발전을 물질적 측면의 변화로 판단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라고 묻는다.(139 페이지) 저자는 ’산업과 과학기술의 발달은 풍요로운 삶의 토대일뿐 인간의 삶을 진정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것은 처음부터 인간 자신일 수밖에 없었던 것을 아닐까?’라고 묻는다.(141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역사 발전의 동력은 인간이 자유를 더욱 확대하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제공되고 자유의 확대는 이성과 합리가 더욱 증대된 시스템에 의해 가능하다.(143 페이지) 욕구 실현의 기회가 오직 혈통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지배층으로 태어난 이들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대다수의 피지배층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계급 또는 신분을 세대마다 새롭게 실력 대결을 통해 결정하려고 하면 그 집단은 몇 세대 이상 존속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기들끼리의 경쟁으로 인해 외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147 페이지) 부모의 능력이 자손에게 고스란히 유전될 가능성이 많지 않다. 절대 다수의 인간들은 유전자가 보증하는 것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여간해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신분 세습을 내면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하는 장치가 종교가 제시하는 전생 또는 내생에 대한 믿음이다. 국가 권력을 장악한 지배층은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계속해서 누리기 위해 어떻게든 국가의 수명을 늘려야만 했고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것이 학문의 역할이었다.(149 페이지)

 

능력이라는 개념으로 고려(高麗)라는 국가에 대해 풀어보자. 광종 대에 과거 제도를 도입한 고려(163 페이지)의 건국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려 왕조의 건국은 흔히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의 전환이라고 평가된다. 골품제도가 폐지되고 능력에 따라 출세할 수 있는 사회로 한 단계 발전하였기 때문이다.(163 페이지) 과거(科擧)는 송(宋)에도 변화를 초래했다. 과거제가 세습적 특권을 단절시키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게 되면서 송의 지배층은 더 이상 귀족이 아닌 유교 경전을 공부한 사대부(士大夫)로 바뀌었다.(162 페이지) 송의 과거는 황제가 최종시험을 직접 주관함에 따라 황제권이 크게 강화되었다.

 

송 대의 과거제가 초래한 결과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철저한 관료제의 확립이 황제권을 비대하게 만들어 환관에 의한 측근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 기회를 가진 모든 구성원이 신분 상승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환경을 조성했다. 송 대에 화약과 나침반이 발명되고 과거 시험의 수험서를 인쇄하는 과정에서 인쇄술이 크게 발전하는 등 문화가 융성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212 페이지) 귀족 출신에게 유리했던 과거제가 송 대에 들어와 더욱 합리적으로 바뀐 것은 당말 5대 10국의 항쟁 과정에서 귀족 세력이 대부분 몰락했기 때문이다. 가문의 영향력이 배제된 상태에서 오직 개인의 실력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완전한 형태의 과거제가 시행될 수 있었고 국가의 중심세력도 귀족이 아닌 사대부 계층으로 바뀌었다.(211 페이지)

 

과거제의 시행은 왕건에게 협조하여 나라를 세운 호족세력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태어나는 동시에 보장되었던 여러 가지 특권들이 시험을 통과해야만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바뀔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164 페이지) 광종은 쌍기를 지공거(知貢擧)에 임명했다. 쌍기는 그가 주관한 두 번째 과거 시험에서 서희를 진사 갑과로 뽑았다.(165 페이지) 서희는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은 인물이다. 강동 6주가 고려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서희가 거란에 땅을 떼어주기보다 소손녕과 담판을 할 것을 주장한 것은 그가 광종 대에 과거에 합격하여 송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거란과 송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했기 때문이다.(166 페이지)

 

소동파가 고려 사람들을 미워한 데에도 고려, 송, 거란의 역학 관계가 깔려 있다. 거란의 3차 침입 때 강감찬이 대승을 거둔 곳도 강동 6주에 속한 귀주성이었다.(168 페이지) 13세기 세계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과의 수십 년에 걸친 전쟁에서도 강동 6주는 고려에게 빛나는 승리를 안겨주었다. 광종 대에 처음 제정된 과거제는 현종 대에 이르러 더욱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지방의 인재들도 넓게 응시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로 여겨지면서 고려는 빠르게 문관 위주의 사회로 재편되어 갔다. 서희, 윤관, 강감찬, 김부식은 모두 문관 출신으로서 군사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170 페이지)

 

이런 이유 때문인지 고려 정부는 전시과를 개정하여 무관들에 대한 대우를 조금 개선하는 것 외에 무관 출신이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후 고려 조정은 무관 출신에 대한 홀대로 인해 무신정변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고려에서 무관에 대한 대우가 문관에 비해 낮았던 데에는 송의 문치(文治)적인 정치문화의 영향도 있었다. 과거제는 개인의 실력으로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으나 폐단도 낳았다.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지공거가 자신이 합격시켜준 사람들과 좌주(座主) - 문생(文生) 관계를 이루면서 이들이 정치세력화한 것이다.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활약한 서희, 여진족을 막은 윤관,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 공민왕 대 정치 개혁의 주역인 정몽주와 정도전, 권근, 조준 등은 모두 과거 급제자 출신이었다.(172 페이지) 정도전은 혈통에 의해 세습되는 왕이 직접 정치를 하는 것보다 무수한 경쟁을 뚫고 자신의 실력으로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온 재상이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왕조국가 체제하에서 나오기 힘든 대단히 합리적인 발상이었다.(181 페이지) 조선 개국은 단지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가 무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과거 급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합리적 개혁을 통해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함으로써 민심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했다.(180 페이지)

 

사회경제적 모순이란 과거제도는 지공거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고 토지는 권문세족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탈점(奪占)되어 있었음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178 페이지) 인재 선발과 관직 승진 제도에서 조선이 고려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인재를 등용할 때 출신 가문보다 개인의 능력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한 데에 있다. 가난한 농민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도 조선이 양반 중심의 사회였다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일종의 편견에 가깝다.(183 페이지)

 

당시 피역(避役) 수단으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조선시대 지방의 공립학교였던 향교에는 일반 양인 출신들이 다수 등록되어 있었고 향교에서는 국가의 비용으로 배울 수 있었기 때문에 학비가 별로 없었다. 농사철에는 방학을 하고 추수 뒤에 개학했기 때문에 농민의 자제도 충분히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향교에서는 일반 농민의 자제가 많이 다녀서 지방 양반들은 자제를 서원에서 별도로 교육시키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후기에 서원이 남설(濫設)된 데에는 이런 사정도 있었다.

 

조선이 중농억상(重農抑商) 정책을 취해 제도적으로 농민만 우대하였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농민의 경우 농한기에 과거에 합격하는 경우가 많아 잠재적 관료 후보군으로 여겨져서 사회적으로 우대받았던 것이고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과거에 응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회적 인식이 농민과 달랐던 것이다.(184 페이지) 현종 대는 예송 말고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이 없는 시기인데 신분 상승의 가능성과 인구는 큰 폭으로 증가했다.(193, 194 페이지)

 

과거제도를 더욱 합리적으로 정비하려는 노력은 조선왕조가 지속된 전 기간에 걸쳐 계속해서 이루어졌다. 과거 시험을 시부(詩賦)에서 유교 경전과 정치 현안에 대해 의견을 묻는 대책(對策)으로 바꾸어 나가려는 시도는 이미 고려 말 이제현에 의해 시작되었다. 원의 간섭으로 국가가 어려운 상황에서 옛 고전 문학작품을 시험 쳐서 인재를 뽑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196 페이지) 한영우 교수는 조선왕조가 500년 이상 장수한 비결은 지배 엘리트인 관료를 세습적으로 보장하지 않고 능력을 존중하는 시험제도인 과거로부터 부단하게 하층사회에서 충원했기 때문이라고 하며 조선 정부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탄력적인 사회를 유지하려 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신분제 사회에서 조선왕조에서 소위 개천 용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비율이 왕조가 지속된 전 시기에 걸쳐 평균 30%를 훌쩍 넘고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에는 40-50%를 넘나들었다는 것은 놀라움을 넘어 충격적인 사실이다.(202 페이지)

 

저자는 역사 발전은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기 위한 사회적 합리성이 확대되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적 합리성을 확대하는 길의 전부는 관직 등용의 기회를 넓히는 것이 아니다. 세제의 합리적 개선을 통해 경제적 실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하는 것도 구성원들의 자유 획득에 대한 의지를 제고하는 좋은 방법이다.(221 페이지)

 

저자는 개인의 실력에 의해 경쟁하는 시험이 폐지되고 경제력에 의해 개인의 미래가 좌우되는 제도가 점점 더 늘어나고 그것이 더 발전한 제도인 척 우길 수 있는 까닭은 서양에서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225 페이지) 우리는 경제적으로 궁핍해도 개인의 능력만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주었던 시대를 이미 거쳐왔다. 재산 축적의 기회가 보장된 사회단계보다 한 단계 더 진전되어 경제력이 없어도 개인의 실력만으로 더욱 포괄적인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었던 역사적 경험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다.(22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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