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이동으로 보는 한국사 - 삼국통일전쟁에서 여말선초까지
이정철 지음 / 역사비평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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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철의 '권력 이동으로 보는 한국사'는 다섯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1부 7세기, 당나라의 등장과 삼국의 생존 투쟁, 2부 통일 왕국의 파편화, 3부 호족의 시대, 4부 원 간섭기 고려 국왕들의 개혁, 5부 개혁에서 건국으로 등이다.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당나라와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와 관련된 문제였다. 618년 건국한 당나라를 유화책으로만 상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 대당 강경파 연개소문은 유화주의자인 영류왕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알아차리고 선공했다.

 

연개소문의 큰 아들 남생의 묘지(墓誌)에 연개소문의 아버지와 연개소문이 양야양궁(良冶良弓)했다는 기록이 있다. 쇠를 잘 다루고 활을 잘 다루었다(병사를 잘 길렀다)는 뜻이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먼저 제압하려 한 데 비해 당나라는 고구려를 최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당나라에게 고구려 침공의 명분이 되었다.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 친정(親征)에 나섰다. 신라는 당의 지원군 파병 요구에 응했다. 고구려 남부 국경선인 임진강을 넘어 고구려를 공격함으로써 당나라를 배후 지원했다. 당나라는 고구려 침공 실패로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선공하는 전략을 세웠다.

 

신라는 당나라 이외의 선택지가 없었다. 고구려와 백제가 느슨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여 신라에 공세적인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백제의 패망은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660년 의자왕의 항복이 첫 번째이고 6대 663년 백제 부흥 운동의 실패가 두 번째다. 사비 도성이 함락된 후 매우 빠르게 대규모로 백제 부흥군이 일어났다. 백제 부흥군은 3년 후 소멸되었다. 백제 부흥군 지도부 내의 깊은 반목과 갈등이 부흥 운동을 종식시켰다. 신라와 동맹관계였던 백제는 554년 신라의 공격을 받고 성왕이 목숨을 잃는 사건을 당했다. 551년 신라와 백제는 연합해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 때문에 고구려는 임진강 영역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고구려는 이 때로부터 668년 멸망할 때까지 약 120년간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신라와 대치했다. 642년 쿠데타 이후 23년만인 665년 연개소문이 사망했다. 642년 쿠데타 이전 고구려는 귀족 연립정권 체제였다. 연개소문은 제도화된 권력 창출 체계를 확립하지 못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무너뜨린 후 668년 12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660년 백제의 웅진 도독부, 663년 신라의 계림주 대도독부에 이은 것이다.

 

이로써 백제, 신라, 고구려는 모두 당나라 행정 체계의 일부가 되었다. 신라가 당나라를 상대로 치른 두 건의 전투가 있다.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다. 매소성을 연천 청산 대전리 한탄강 주변 일대로 보는 견해가 양주 대모산성으로 보는 견해보다 많다. 매소성 전투는 당군을 한반도에서 패퇴시킨 육상의 결전이다. 매소성 전투 다음 해에 벌어진 금강 하구 기벌포 전투는 당군을 한반도에서 패퇴시킨 해상 결전이다.

 

김부식은 신라를 상대, 중대, 하대로 나누었다. 상대는 성골 계통이 왕이 된 시대이고, 중대는 태종무열왕(김춘추) 직계가 이어진 시대이고, 하대는 태종무열왕계가 아닌 진골이 왕이 된 시대다. 박혁거세 거서간부터 진덕왕까지 28 임금이 상대, 태종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 8 임금이 중대, 선덕왕부터 경순왕까지 20 임금이 하대다. 신라를 파편화한 제도가 골품제였다. 신라는 골품제가 발생시키는 문제들을 관리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중앙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잃어 갔으며 지방은 파편화되었다.

 

6두품이 진골 귀족에 대한 비판 세력으로 등장했으나 개혁에 실패하자 6두품과는 전혀 다른 새 사회 세력인 호족이 등장했다. 진골 귀족들은 자신들 내부에서는 파벌화되어 내란 수준의 갈등을 빚었음에도 지방이나 6두품의 신분 상승 요구에 대해서는 일치 단결하여 단호히 반대했다. 언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고 정점을 지나 쇠퇴하는 사회에서 더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6두품 출신 지식인들과 관료들의 불만은 신라 패망과 관련해 자주 언급된다. 신라의 골품제가 강력했던 데는 이유가 있다 골품제는 신라의 성공적 성장 과정이 만들어낸 제도다.

 

그것은 사로국이 신라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주변 국가들의 지배 집단을 흡수하는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세력을 인정하고 신라의 위계 체계에 반영하여 흡수, 편제했던 틀이 골품제다. 8세기 후반에 이르러 소농민층의 경제적 조건이 더 악화되었다. 소농민층은 전근대 시대 전체를 통틀어도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었던 적이 드물다. 개별 소농민들은 늘 생존과 소멸의 경계선상에 있었다. 소농민층의 생산력은 높지 않았다. 수리 시설은 크게 부족했다. 고리대도 소농민층을 힘들게 한 요인이었다.

 

소농민층은 수조권 및 토지에 딸린 노동력 및 공물을 모두 수취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읍을 하사받은) 고위관료로 인해 더욱 어려웠다. 신문왕 때 폐지된 녹읍이 경덕왕 때 부활했다. 열악한 생산 조건에서 가중되는 부담은 영세한 소농들을 좌절시키는 힘으로 작용했다. 다수의 소농민이 토지를 잃고 유민으로 떠돌거나 지방 유력자의 비호 아래 들어가 대토지소유제에 포섭되었다. 이렇게 되면 국가는 세금 낼 사람과 군인이 될 사람을 잃는다. 이 두 가지야 말로 국가 기구를 유지하는 핵심 자원이다.

 

이들을 잃고서는 국가가 유지될 수 없다. 고구려와 백제는 수도를 옮긴 적이 있지만 신라는 그렇지 않다. 기득권의 강도와 배타성은 특정 지역에 대한 고착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후삼국시대는 말 그대로 세 나라가 공존한 시대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한 900년부터 왕건이 통일을 달성한 936년까지 36년간에 해당한다. 신라 중앙 정부는 822년 김원창의 난 이후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는 말은 지방에서 생겨난 많은 호족이 왕경(王京) 경주에 대해 독립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889년 원종과 애노의 난은 그 흐름의 정점을 알려주는 사건이다.

 

견훤과 궁예도 원종과 애노의 난 이후 자신들의 진로를 분명히 했다. 왕건은 후삼국을 호족 연합적 형태로 아울렀다. 신라 중앙 정부에 대해 독립적인 호족들이 등장한 계기는 치안 부재다. 진성여왕 이후 도적, 군도, 초적 등으로 불리는 반란군들이 전국적으로 창궐했다. 진골 귀족에 비해 호족들에게는 혈연보다 지역성이 훨씬 중요했다. 견훤과 궁예가 초기에 성장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듯 호족은 혈연과 무관하게 주변 사람들을 자신에게 끌어들일 수 있을 때에만 더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발전했다.

 

고려 건국 초 태조 왕건이 처음 시행한 지역 기반의 본관 제도는 이 같은 사회적 변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호족 개개인의 사회적 출신은 다양했다. 지역의 터전을 둔 토착 세력이 호족이 되는 경우도 있고 견훤처럼 중앙에서 지방관으로 파견되었다가 독립한 세력도 있었다. 궁예, 원종, 애노처럼 공동체에서 일탈하여 도적 무리를 형성한 세력도 있었다. 이런 무리들도 호족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지역에 기반을 둔 경제력을 갖추어야 했다. 호족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존재다. 호족 같은 존재는 사회의 기존 시스템이 무너져서 무질서해질 때 나타난다.

 

본인의 재능이나 운에 따라 귀중한 사회적 차원을 획득하여 비록 적은 규모라 해도 자기 주변의 일정한 영역을 지배하는 존재가 호족이다. 호족은 속성상 장기간 지속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기존의 사회 시스템이 붕괴된 상황에서 나타나는 존재였기에 호족이 등장하게 되면 사회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통합되는 힘이 자연스럽게 작동하기 마련이다. 고려 건국은 그런 흐름을 증명한다. 견훤은 실제로는 892년 무진주에서 스스로 왕이 되었다. 하지만 왕이라고 공공연하게 칭하지 못하다가 900년 후백제를 건국하고 난 후에야 왕이라 자칭했다.

 

궁예 또한 896년 철원에 도움을 정하고 건국의 태세를 갖추었지만 901년에 가서야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국왕으로 즉위했다.(238 페이지) 927년 견훤이 경애왕을 제거하고 경순왕을 대신 세운 사건과 930년 고창 전투 사이에 중요한 전투가 있었다. 927년 11월 견훤과 왕건의 군대가 격돌한 공산 동수 전투다. 신라 경애왕은 견훤이 공격해 오자 왕건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다. 왕건의 원군이 도착했을 때 이미 경주는 견훤에게 점령당했다. 고려군은 대패했다. 왕건은 신숭겸의 희생 덕에 목숨을 건졌다. 고창 전투에서는 견훤 군대가 대패했다. 패서(浿西)의 패권을 잡았던 박지윤이 궁예에게 귀부하자 송악의 왕륭이 그 뒤를 따랐다.

 

왕륭은 궁예에게 자신의 지역 기반인 송악을 모두 바치겠으니 맏아들 왕건을 송악의 성주로 삼아 달라는 제안을 했다. 궁예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궁예가 전제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은 904년 무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해에 궁예는 국호를 고려에서 마진으로 바꾸었다.(269 페이지) 마진은 마하진단의 약칭이다. 범어로 크다는 뜻이다. 진단은 동방 전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왕건은 견훤이나 궁예는 물론이고 어떤 다른 호족들보다도 좋은 조건에서 사회 경력을 시작했다.

 

좋은 집안과 아버지 왕륭의 대담한 거래의 결과였다. 가히 행운이라고 할 만한 요소를 갖추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조건이 왕건의 승리를 결정한 정도는 아니었다. 왕건은 22세에 궁예를 만나 42세에 왕위에 올랐고 60세에 후삼국을 통일했다. 왕건은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쿠데타 세력의 추대를 받아 즉위했다. 왕건은 처음 기병장들이 쿠데타를 이끌어 달라고 요청하자 완강히 거부했다. 중폐비사(重幣卑辭)는 선물을 후하게 주고 말은 겸손하게 한다는 뜻이다.

 

즉위 이후 호족들을 대하는 왕건의 태도 즉 포용 정책을 함축하는 말이다. 그의 이런 태도는 궁예와 대척점에 있었다. 고창 전투에서 왕건이 예상 밖의 대승을 거두자 931년 신라 왕은 왕건에게 사람을 보내서 귀순할 뜻을 밝히며 만남을 요청했다.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가장 큰 관건이 된 요인은 수많은 호족과의 관계 설정 문제였다. 왕건은 견훤과 궁예 외의 호족들과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는데 월등한 기량을 보였다. 하지만 호족들과 관계만 잘 맺는다고 나라를 안정시킬 수는 없다. 나라를 근본적으로 안정시키려면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 왕건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왕건은 십일세법으로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줄였다. 호족에 대한 포용 정책과 백성에 대한 십일세법은 상충할 가능성이 높다. 왕건 재위 기간 이 문제는 현실화되지 않았다. 광종은 과거 제도를 도입했다. 후삼국시대를 포함하여 백여년에 걸쳐 성장한 무장 세력을 제도적으로 축소하기 위해서였다. 즉위 직후 광종의 왕권은 두 형(혜종,‘정종; 定宗’)이 가졌던 왕권과 다름없이 불안했다. 1231년(고종 18년)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여섯 차례에 걸쳐 30년 가까이 이어졌다. 고려는 1170년(의종 24년) 이래 무신 정권이 지속되고 있었다. 고려 정부는 일단 몽골이 요구한 조건들(곡물 납부, 군사 협력, 다루가치 설치) 등을 약속하여 몽골을 안심시킨 뒤 고려 땅에서 군대를 철수하게 했다. 몽골군대가 철수한 다음 해인 1232년(고종 19년) 6월 고려는 전격적으로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겨 대몽 항전체제에 돌입했다. 이후 1259년 국왕이 태자를 몽골에 보내 귀부할 때까지 항쟁이 지속되었다.

 

고려가 개경으로 되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다시 11년 후인 1270년(원종 11년)이다. 고종은 태자 왕식(후에 원종이 됨)을 몽케 칸에게 보내 귀부하기로 결정했다. 태자 일행은 몽케의 남송원정군이 사천의 조선행재소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경요양부에서 조어산까지는 대단히 먼 거리다. 이 와중에 몽케 칸이 사망했다. 누구에게 가서 고려의 귀부 의사를 밝혀야 할지 불확실한 상황이었다.

 

당시 몽골 제국의 정치적 상황은 공석이 된 대칸 한자리를 놓고 몽 케의 두 동생 쿠빌라이와 아리크무카가 대결하는 형세였다. 어떤 이유로 그랬는지 불확실하지만 왕식은 아리크부카 대신 쿠빌라이에게로 갔다. 왕식의 행동은 고려를 대표한 귀부였다. 왕식을 만난 쿠빌라이는 크게 기뻐했다. 왕식의 귀부는 쿠빌라이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고려 태자 원종은 쿠빌라이를 만나 진행한 교섭에서 여섯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고려의 의관 등 풍속은 본국 즉 고려의 것을 따른다. 둘째 원나라 사신은 몽골 조정에서만 보낸다. 셋째 고려 조정의 개경 환도를 재촉하지 않는다. 넷째 압록강 유역에 주둔시킨 몽골군대를 가을 내로 철수한다. 다섯째 고려에 설치한 다루가치를 소환한다. 여섯째 고려에 설치한 몽골에 투항한 고려인들을 돌려보낸다 등이다. 강화 협상으로 내건 6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첫 번째인 불개토풍이었다.

 

불개토풍은 원나라 세조가 약속한 제도라는 의미의 세조구제(世祖舊制)였다. 왕식(원종)의 귀부가 힘이 되어 대칸이 된 쿠빌라이는 왕식의 다소 과한 요구들을 흔쾌히 수용했다. 부왕 고종의 사망 이후 뒤늦은 즉위식을 하고 왕위에 오른 원종은 쿠빌라이와의 인연으로 고려에서의 발언권과 권위가 높아졌다. 고려 조정에는 원종으로 대표되는 강화파와 몽골과의 항전을 계속 주장하는 무신 정권이 공존했다.

 

원종은 임연에 의해 폐위되었다가 쿠빌라이의 군사 파견에 힘입어 4개월만에 복위했다. 원종은 임연 제거와 출륙환도를 조건으로 쿠빌라이에게 군사를 얻었다. 원종은 몽골군을 이끌고 돌아와 무신 정권을 붕괴시키고 강화도를 나와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1170년 성립된 고려 무신 정권은 정확히 백년 만인 1270년에 종식되었다. 원종은 원나라에서 돌아온 다음 해인 1271년 2월에 사신을 보내 정식으로 세자와 원나라 공주의 결혼을 요청했다. 11월에 귀국한 고려 사신은 쿠빌라이가 청혼을 허락했음을 알렸다.

 

몽골 황실의 통혼은 혈통적, 문화적 동질성이 우선 고려 대상이었다. 여기에 정치, 군사적 목적성이 더해졌다. 첫 통혼자는 충렬왕이었다. 충렬왕은 아버지 원종보다 훨씬 더 자발적으로 몽골 제국의 일부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원나라는 고려를 황제의 부마국으로 대우했다. 충선왕은 첫 혼혈 군주였다. 충선왕의 초휘(初諱)는 왕원이고 후에 왕장으로 개명했다. 충렬왕의 세자 왕원(충선왕)은 16세에 원에 독로화(禿魯花; 뚤루게; 원나라에 인질로 보내지는 고려 왕족 및 귀족 자제)로 보내졌다.

 

원 간섭기 초에는 독로화로 원나라에 가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나중에는 그 성격이 변하여 일종의 정치적 기회의 성격을 띠게 된다. 쿠빌라이 칸의 신임을 얻은 세자는 아버지 충렬왕과 갈등의 휘말리게 된다. 충선왕은 심양왕(瀋陽王; 원의 황제가 고려 왕에게 내린 봉작)과 고려 국왕의 지위를 함께 가졌다. 충선왕은 무신 집권기의 인사권 독점 기구인 정방을 폐지했다. 정방은 고려 패망의 한 원인이었다. 충선왕은 환관 임백안의 참소로 티베트로 유배를 갔다. 아들 충숙왕은 정방을 다시 설치했다.

 

조선을 건국한 신흥 유신들이 그들 스스로 처음 결집한 계기는 공민왕 16년에 이루어진 성균관 재건이다. 성균관이 재건되자 성균관 대사성 이색을 중심으로 김구용, 정몽주, 박상충, 박의중, 이숭인 등이 교관으로 성균관에 모여서 성리학 부흥의 계기를 만들었다. 신흥 유신들이 이제현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현상은 당시 고려에서 진행되었던 주자 성리학 보급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나라로부터 주자 성리학이 고려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이제현의 역할 또는 지위는 독보적이었다.

 

이성계가 연이어서 두드러진 전공을 세울 수 있었던 요인은 당시 고려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거느렸기 때문이다. 선대부터 거느려온 이성계의 친병은 동북면 인민과 여진인들로 구성되었다. 사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만 대략 1000에서 2000명 정도로 구성된 정예 병력이었다. 고려는 동북면의 지역민을 회유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역역(力役)을 부과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평소에도 군사훈련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성계가 여진족 추장까지 포함하는 휘하 부대의 충성을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선대의 유산 덕분만으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자신의 용맹함과 능수능란한 용병술, 적조차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이 더 큰 요인이었다. 그는 무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전투에서는 늘 용맹스럽게 싸웠다. 더구나 그는 적이라도 우수한 무공을 가지고 있으면 살려서 자신의 수하로 삼곤 했다. 부하 장수들 중 여진족 추장 출신이 여러 명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위화도 회군 1년 뒤에 창왕은 유배지 강화도에서, 우왕도 역시 유배지인 강릉에서 피살되었다. 이들의 무덤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왕건이 견훤에 대해서 그랬듯 저항 세력의 결집을 자극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왕과 창왕이 피살된 후 3년이 채 못 되어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폐위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우왕을 잇는 두 왕의 재위 시기는 실질적으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양상은 이전의 왕조 교체 과정에서 볼 수 있는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신라에서 고려로 전환될 때는 정치 중심지인 수도와 핵심 인물들의 사회적 신분이 말 그대로 완전히 변화했다. 경주에서 개경으로 정치무대가 바뀌었고 정치 집단도 진골 귀족에서 평민 호 족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교체는 정치 무대나 주인공들의 성격에 뚜렷한 단절이 보이지 않는다. 개경이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고려의 쇠망과 조선의 건국 과정이 겹쳐서 진행되었다. 심지어 개국에 반대했던 인물들이 조선 건국 이후 새 나라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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