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진화 - 아프리카에서 한반도까지, 우리가 우리가 되어 온 여정
이상희 지음 / 동아시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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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진화‘는 고인류학자 이상희 교수가 전작인 ’인류의 기원‘ 이후 8년만인 2023년 국내외의 수많은 문헌들을 참고해 완성한 유의미한 성과물이다.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를 외둥이라 부른다. 외둥이란 말이 알려주듯 현생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 하나다. 그러나 인류 계통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했다. 저자에 의하면 인류의 진화란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앞으로 행진하는 모습도 아니고 곁가지와 본가지로 갈라져서 울창한 아름드리 나무가 되어 가는 모습도 아닌 갈라졌다가 만난 뒤 다시 갈라지는 강줄기와 같다.

 

인류와 고릴라가 갈라진 것은 800만년전 이전이다.(54 페이지) 침팬지 계통이 인류 계통과 갈라진 것은 500 - 800만년전이다.(115 페이지)(54 페이지의 말은 인류 계통이라 해야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인류는 500만년전 아프리카에서 기원해 300만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52 페이지) 200만년전 호모속이 등장해 아프리카에서 확산해 유라시아로 진출했다.(55 페이지) 기후 변화로 몸집이 큰 짐승들이 아프리카를 떠나 유라시아로 옮겨갔기 때문이다.(77 페이지) 이때 고인류 호모 에렉투스의 사냥 도구는 아슐리안 주먹도끼였다.

 

200만년전은 전기 구석기 시대가 시작된 시기이고, 20만년전은 중기 구석기 시대가 시작된 시기이고, 3만년전은 후기 구석기 시대가 시작된 시기다.(96, 97 페이지) 올도완 문화, 아슐리안 문화, 무스테리안 문화는 전기 구석기 시대와 중기 구석기 시대에 나타난 문화다.(98 페이지) 호모속의 고인류가 추위를 견딘 것은 현재 호모속의 유일한 후손인 호모 사피엔스가 추위를 견딘 방식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몸으로 견뎌내고 문화로 견뎌낸 것이다.(55 페이지)

 

인류가 털옷을 입고 불을 이용해 추위를 견뎠다는 가설이 있다. 이는 그들이 그러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을 것이라는 논리에만 근거한 것은 아니다. 털에 사는 몸니의 존재가 방증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털이 없는 인류가 사냥한 짐승의 털을 옷으로 입었다는 데에 근거한 이야기다.(인류가 사냥을 한 것은 고기 때문만이 아니라 털, 가죽 등을 얻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최초로 불을 사용한 흔적을 남긴 고인류는 호모 에렉투스다.(59 페이지)

 

고인류를 수식하는 이름은 사어(死語)인 라틴어로 쓰인다. 하지만 화석을 통해 드러나는 그들의 삶은 역동적이다. 가령 하나의 종이 생식이 가능했던 관계에서 생식이 불가능한 다른 종으로 갈라지는 과정이 그렇다. 물론 갈라짐이란 어느 순간 무가 칼에 의해 갈라지는 것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차츰 유전자를 섞지 않는 방식이 이어지며 다른 점이 쌓여간 결과다. ’인류의 진화‘는 고인류들의 그런 역동적인 면모를 만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저자에 의하면 고인류학의 역사는 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얼마나 특별하지 않은지를 밝혀온 역사이기도 하다.(24 페이지)

 

영어 단어 가운데 opposable이란 단어가 있다. ’마주 볼 수 있는’이란 의미의 단어다. 반대어는 nonopposable이다. 엄지 손/ 발가락이 나머지 손/ 발가락들과 마주 볼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알다시피 인간의 발은 엄지가 나머지 발가락들과 마주 볼 수 없을뿐 아니라 다른 발가락들 끝과 닿지 못한다. 손은 가능하다. 엄지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들과 맞닿지 못한다는 것은 나무를 움켜쥐고 나무 타기를 할 수 없다는 의미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중 가장 유명한 루시(아파렌시스) 화석의 어깨뼈 관절은 사람처럼 옆을 향하지 않고 위쪽으로 향하고 손가락뼈는 굽었다. 이를 보고 루시가 나무 타기에 최적화된 존재였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조각만 남은 루시의 어깨뼈로는 방향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고 손가락뼈가 굽었다고 꼭 나뭇가지를 휘감은 동작에 최적화된 것이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루시는 직립했지만 두뇌는 침팬지 정도였고 몸집은 유치원생 정도였으며 치아는 컸다.

 

직립하면 손이 자유로워짐에 따라 도구를 만들 수 있게 된다. 도구를 만들었다면 치아를 덜 사용함에 따라 치아가 작아졌을 것이다. 다윈은 다른 동물과 차별화되는 인류의 특징을 큰 머리, 두 발 걷기, 도구 사용, 작은 치아로 보았다.(39 페이지) 이 네 가지 특징은 서로 어우러져 밀접한 연관 관계를 맺는다. 직립함에 따라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도구를 만들었고 도구를 만들기 위해 큰 머리가 주는 지능이 필요했고 도구를 쓰게 됨에 따라 큰 치아가 필요 없어진 것이다. 도구를 쓰지 않았다면 치아가 컸다는 의미다.

 

참고할 거리는 치아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클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 많이 씹는다고 더 커지지도 않고 덜 씹는다고 작아지지도 않는다는 말(89, 90 페이지)이다. 고인류 역사에 몸집이 큰 거인족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현생인류의 어금니보다 더 큰 어금니를 가졌던 화석종은 있다. 이 경우 큰 몸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먹거리의 질이 낮은 척박한 환경을 나타낸다.(73 페이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는 의무적 직립보행(오직 두 발 걷기만 가능한 상태)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메리 리키가 탄자니아의 라에톨리(책에는 래톨리라 나옴)에서 발자국 화석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책에 나온다.(30 페이지) 이어 라에톨리 발자국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두 발 걷기를 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는 말이 나온다.(36 페이지) 혼란스러운 것은 라에톨리는 탄자니아이고 아파르(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화석이 발견된)는 에티오피아란 점이다. 검색을 해보니 366만 년 전에 생긴 발자국 화석 다섯 개가 발견된 곳이 라에톨리 A 지역이고 2년 후 A 지역에서 1km 정도 떨어진 G 지역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일명 루시)의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 에티오피아 아파르에서 아파렌시스의 무릎뼈 화석이 발견되었고(29 페이지) 탄자니아 라에톨리에서 아파렌시스의 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것이다.

 

라에톨리에 발자국 화석이 남은 것은 기적 같은 일이 연속으로 일어난 결과다. 1) 화산이 폭발해 화산재가 두껍게 온 세상을 덮었다. 2) 비가 와 화산재가 뻘 같은 진흙이 되었다. 3) 그 위에 발자국이 남았다. 4) 햇빛이 진흙을 시멘트처럼 단단하게 만들었다. 5) 여진(餘震)이 발생해 화산재가 발자국을 덮었다. 석기는 최초의 도구다. 최초의 도구는 나무, 가죽, 뼈 등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라 보이지만 돌 만큼 단단하지 않아 대부분 썩어 사라졌을 것이다.(42 페이지)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고인류가 의도를 가지고 돌을 깨서 모양을 만들면 깨진 면에 특별한 자국이 남는다.(43 페이지)

 

호모속이 아닌 오스트랄로피테쿠스속과 함께 올도완 찍개가 발견되었다. 올도완은 응고롱고로 분화구 주변의 화산에서 분출한 화산재가 쏟아지곤 했던 탄자니아의 올두바이에서 유래한 문화 이름이다. 저자는 석기와 함께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석기를 만들어 사용한 주체인지 동물처럼 도축된 것인지 쉽게 알 수 없다고 말한다.(44 페이지)(학자들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찍개를, 에렉투스가 주먹도끼를, 네안데르탈인이 창을, 사피엔스가 활을 사용한 것으로 본다.)

 

1996년 약 250만년전에 살았던 고인류 화석종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가르히가, 칼자국이 난 동물 뼈와 함께 발견되었다. 그들이 석기를 만들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사용한 것은 분명하고 나아가 (사용했기에) 제작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석기를 만드는 것은 알맞은 원석을 고르는 일부터 시작해 단계를 상상하고 가상의 세계인 완성품을 상상하는 일까지 고도의 인지 능력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동물들의 이빨 자국 위에 석기 자국이 난 것은 동물들이 한 차례 먹고 뼈만 남은 사체를 돌로 만든 도구로 쳐 뼈 안의 골수를 빼먹은 결과로 추정된다.(45 페이지)

 

에렉투스가 사용한 아슐리안 주먹도끼 (칼) 자국 위에 다른 동물의 이빨이 난 것은 에렉투스가 도구를 이용해 사냥하고 도축하는 포식자의 위치에 섰음을 의미한다.(45 페이지) 사냥은 두 발 걷기, 도구의 제작과 사용, 어머어마한 두뇌 용량이라는 인류의 특성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적응이다. 사냥으로 얻은 동물성 단백질과 지방 덕분에 두뇌가 커질 수 있었다.(75 페이지) 그렇다면 인류사에 사냥과 육식이 등장한 시기는 언제인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가르히 화석종과 함께 동물 뼈에 남은 칼자국이 발견된 260만넌전으로 비정한다.

 

물론 당시 쓰인 도구는 찍개로 이는 살아 있는 짐승을 잡는 도구라기보다 사체 처리에 쓰인 도구였다. 고인류학자 앨랜 워커는 고인류 화석 뼈의 염증의 원인이 그들이 비타민 A가 축적된 육식동물의 간을 너무 많이 섭취하여 생긴 비타민 A 과다증이라 발표했다.(78 페이지) 화석 자료에 의하면 호모 에렉투스가 등장하는 시기와 맞물려 돌날 흔적이 새겨진 동물 뼈가 증가(79 페이지)했지만 호모 에렉투스 이후 돌날 흔적이 남겨진 동물 뼈가 계속 증가하지도 않았다.

 

저우카우텐에서 호모 에렉투스 화석과 함께 발견된 동물 뼈에는 짐승 이빨이 난 후에 고인류의 돌날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뛰어난 사냥꾼이 되었지만 여전히 다른 짐승이 먹고 지나간 찌꺼기도 먹었다는 의미다.(79 페이지) 앨랜 워커와 다르게 비타민 A 과다증이 벌집을 너무 많이 먹은 결과라는 말도 있다.(81 페이지) 최근에는 동물성 먹거리를 얻기 위한 행동으로서 사냥이 남성의 전유물이었고 여성은 채집을 통해 식물성 먹거리를 확보했다는 경제 분업 가설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다. 육식만이 아니라 곤충 등 다양한 동물성 먹거리와 씨앗, 구근류, 해산물 등도 두뇌 용량 증가의 원인으로 지목된다.(83 페이지)

 

화식(火食)은 영양학적으로 대혁명이었다. 소화흡수력이 높기 때문이다. 인류는 농경이 자리잡으면서 인구 폭발을 겪었다. 곡물로 만든 이유식 덕이다. 이유식 덕에 모유 수유 기간이 줄어 수유 기간 정지되었던 배란이 다시 시작되어 임신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89 페이지) 인류가 확실히 화식을 한 것은 후기 구석기 때로 추정된다.(90 페이지) 호모 사피엔스 이전의 호모 에렉투스도 화식에 의존했을까? 비싼 장기 가설에 의하면 아니다. 비싼 장기 가설은 에너지가 많이 드는 두뇌와 소화 장기를 모두 크게 만들 수 없었다는 설이다. 한쪽을 크게 하면 다른 한쪽은 작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두뇌 대신 소화 장기를 택했다. 호모 에렉투스의 사냥법은 사냥감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몇날 며칠을 뒤쫓는 것이다. 사냥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한데 고기를 씹고 소화하는 일에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쓸 수 없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불을 이용하여 음식을 익혔다면 시간을 적게 들여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호모 에렉투스의 몸집과 두뇌가 커지는 데에 화식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 곳곳에서 살던 호모 에렉투스 중 일부가 플로레스섬에 고립되어 섬 왜소화로 머리와 몸집이 작아진 새로운 화석종 호모 플로레시안스가 되었다면 그 시기는 공교롭게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의 토바 화산이 폭발한 75000년전과 맞물린다.(131 페이지)

 

4-5만년전 인도네시아에서 벽화를 그린 고인류는 누구였을까요? 호모 플로레시안스일 가능성도 있다.(103, 104 페이지) 1미터 내외의 작은 키, 호모 사피엔스의 1/4에 불과한 400cc의 두뇌 용량을 가진 그들이 벽화를 그렸다면 추상적인 예술에도 큰 머리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는 충격적인 결론이 나온다.(104 페이지) 저자는 21세기에 주목해야 할 것은 호모속이 보여주는 두뇌 용량의 증가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라 말한다.(140 페이지) 21세기에 밝혀진 팩트는 우리 안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147 페이지)

 

네안데르탈인의 두뇌 용량은 호모 사피엔스의 그것에 비해 크다. 하지만 두뇌 세포가 현생인류처럼 촘촘하게(빼곡하게) 배열되지 않아서 인지 능력이 현생인류보다 못하다는 해석이 대두되었다. 그들의 큰 두뇌 용량은 추운 지방에서 살아남기 위한 적응이었다는 해석도 나왔다.(151 페이지) 네안테르탈인에 대한 연구가 점점 진행되면서 우리가 바라보는 네안데르탈인의 모습도 변했다. 물론 이는 단순히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 아니라 단편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다양하고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153 페이지)

 

저자는 현생인류가 복수(複數)의 기원점과 복수의 조상 집단을 가지고 있다는 가설이 의외로 많은 자료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고 말한다.(173 페이지) 20만년전 남아프리카 오카방고에 살던 고인류도 30만년전 서아프리카에 살던 고인류도 40만년전 유럽에서 살던 네안데르탈인도 우리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아프리카 기원설이 정설로 굳게 자리잡았지만 고인류학 역사에서 손꼽히는 중요한 화석인 자바인 화석과 베이징인 화석으로 인해 아시아 기원론이 대두되었었다.(179 페이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구석기는 주로 석영으로 만들어졌다. 석영은 사람이 의도를 가지고 때리거나 떼어낸 자국과 자연적으로 생긴 자국을 구분하기 어렵다. 인류가 만든 석기라는 증거가 분명하지 않다는 의미다.(203 페이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화석종 중 가장 유명한 루시 화석은 머리뼈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몸뼈에서 얻은 두 발 걷기에 대한 정보는 두 발 걷기가 인류 진화 역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했다는 가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데 중요 역할을 했다.(232 페이지) 새로운 자료가 새로운 문제의 답을 찾는 데 기여하지만 기존 자료가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기도 한다.(233 페이지) 저자의 책에서 핵심적인 것들은 무엇일까?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언급에서 나온 단편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다양하고 입체적인 모습의 필요성, 그리고 갈라졌다가 만난 뒤 다시 갈라지는 강줄기와 같은 인류 진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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