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커칸들이란 이름은 상당히 특이하다. 아니 희소하다고 해야 할까? 닐 슈빈의 ‘자연은 어떻게 발명하는가?’에서 주커칸들이란 이름을 만났다. 생물학자가 여러 생물학자들의 이름을 인용한 책에서 만난 것인데 정확히 30년젼 읽은 ‘소리와 상징‘의 저자인 주커칸들이라 착각한 탓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주커칸들은 나 같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음악계에서뿐 아니라 생물학계에서도 활약하는 사람이구나란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소리와 상징‘의 저자는 빅토르 주커칸들이고 닐 슈빈이 인용한 저자는 에밀 주커칸들이다. 과학철학자 케빈 엘리엇의 최신간 ’과학에서 가치란 무엇인가‘에서 소니아 샤란 이름을 만났다. 2021년 읽은 ’인류, 이주, 생존‘의 저자다.

 

’과학에서 가치란 무엇인가‘의 저자는 소니아 샤가 지난 수백년 동안 런던 인근의 늪이 많은 지역에서 말라리아로 죽은 사람들의 비율이 현대 아프리카 사하라 남쪽에서 죽은 사람들의 비율과 견줄 만한 정도였다고 보고했다고 말했다. ’더 나은 환경을 찾아 인류는 끊임없이 이동한다’는 부제를 가진 ‘인류, 이주, 생존’에서 소니아 샤는 이런 말을 했다.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있는 것 같은 기분 속에 살아온 나 같은 사람들에게 지난 몇십 년간 부상한 만물은 유전(流傳)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자연관은 역설적으로 소속감을 제공한다(335 페이지)는 말이다.

 

소속감이란 말이 안도감으로 다가온다. 이 책의 서평을 쓴 나는 당시 어떤 생각으로 이 구절을 받아들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서평을 들춰보니 당시 나는 소속감과 관련해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파르메니데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대표 발언은 만물은 유전한다는 말의 반대 격인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말이지만 나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말에 주목하고 싶다.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해지고 사유되지만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이유로 파르메니데스는 그런 말을 했다. 있음(존재)은 가능하지만 없음(무; 無)은 불가능하다는 차원이다. 이에 대해 이정우 교수는 존재와 사유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어떤 맥락에서는 존재가 사유를 넘쳐 흐르고 어떤 맥락에서는 사유가 존재를 넘쳐흐른다. 전자의 경우 존재에는 우리가 사유하는 것 이상의 차원들이 있다는 점을 말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사유한다는 점을 말할 수 있다.”(이정우 지음 ‘세계철학사 1’ 129, 130 페이지)

 

기승전 연천 글이냐 할지 모르겠지만 재인폭포를 비롯 연천 지질공원과 역사 유적들에 대해 나는 존재가 사유를 넘쳐흐르지도 않고 사유가 존재를 넘쳐흐르지도 않는, 양자가 대체로 일치하는 글을 써야 한다. 이런 생각 속에 1월의 11번째 날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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