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이론 껍질 깨기 한강문화유산연구원(한강문화재연구원) 학술총서 12
에이드리언 프랫첼리스 지음, 유용욱 옮김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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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드리언 프랫첼리스의 책이다. 원어 제목은 ‘Archaeological theory in nutshell’이다. 우리 말로는 고고학 이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지만 통과절차적 의미를 담아 고고학 이론 껍질깨기라 했다. 번역자는 이론은 강의실에서 주입식으로 배우고 도서관에서 암기식으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경험적으로 터득하거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체험하던 것이 어느 시점에 구체화되어 개념어들이 언명 체계화하는 것일 뿐이라 말한다.

 

책 서두에 이런 글이 인용되어 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는 사람이 거짓말쟁이라면 뭔가를 덧붙이는 사람은 신성모독자다.(토사포스 메길라; 토사포스; 탈무드 주석, 메길라; 에스더서가 수록된 유대교의 두루마리.) 마르크스주의 고고학에 가할 수 있는 비판점 하나는 발굴을 시작해 첫 삽을 뜨기도 전에 고고학자는 이미 그 유적에서 발생한 모든 일의 배후에 계급투쟁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에서 보듯 결정론적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동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보다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에 더 관심을 가졌던 데 비해 알튀세르는 사회가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강화하기 위해 수렴하는 제도들에 관심을 가졌다.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미치는 인공물의 위력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는 마크 레오네가 해석한 18세기 미국 메릴랜드의 귀족 윌리엄 파카의 정원이다. 파카는 자신의 지역 내 영향력이 쇠락하자 원근법과 착시현상을 이용하여 복잡한 형식의 정원을 만들었다. 그는 테라스를 연속적으로 만들고 정원의 화단을 대칭으로 배치해서 경관에 질서를 부여했다.

 

레오네의 해석에 따르면 파카가 정원을 꾸민 목적은 방문객들에게 정원 주인이 심오하고 박식하며 자연 법칙에도 통달했음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 과시를 통해 파카의 훌륭한 지위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상한 방식으로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저자는 정치적이지 않은 페미니즘은 언어도단이라 말한다. 페미니즘 고고학의 핵심적 특징은 젠더화된다는 것이다. 젠더 관계가 인간 사회에서 항상 주요한 구성 요소였다는 의미다. 페미니즘 고고학의 목표는 여성들이 자신의 삶과 사회를 창조하는 데 고유한 작주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일뿐 아니라 남성 위주의 성적 편향을 폭로하고 그것을 타파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작주성; agency’에는 개인이 자기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어떤 힘에 종속된다기보다 개인 스스로가 삶을 능동적으로 창조하는 주체라고 보는 개념이 들어 있다.)

 

자연선택설이나 빅뱅이론은 세상에 대해 설명하는 생각들이지만 퀴어이론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이고 그 후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에 의하면 정신은 단지 주어진 정보를 걸러내고 이미 이전부터 존재하던 모종의 구조들에 따라 자료를 정리한다. 그리고 그 구조를 가지고 모든 의미가 통하도록 한다.

 

구조주의자들은 우리가 현실을 인식하고 문화를 창조하는 방식의 기저에 구조가 깔려 있고 궁극적으로 구조는 우리가 역사를 만들어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마르크스의 관점은 어떤 면에서 구조주의적이다. 레비스트로스도 구조주의적이지만 그는 마르크스와 달리 물질보다 정신의 구조를 우선시한다.

 

구조주의는 특정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원칙에 근거하기 때문에 맥락적 정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구조주의 고고학자들은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종 비판을 받는다. 만일 그대가 날것/ 익힌 것, 공공/ 사유 등의 이항대립이 시공을 초월해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상징 자체의 의미를 다루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해석학적 이해는 물렁물렁하고 모호하지만 과학적 이해는 딱딱하고 익히 알려진 측정 방식을 통해 검증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한다. 많은 고고학자들은 구조주의적 방법을 단지 본질주의의 또 다른 형태라고 본다. 고고학은 종종 하위계층(subaltern)의 경험을 재구성해 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롤랑 바르트는 예측가능성과 완결성의 느낌으로 얻는 감정을 즐거움/ 기쁨이라 부른다. 즐거움/ 기쁨의 사악한 쌍둥이가 주이상스(jouissance)다. 통념을 파탄내는 것, 기존의 고정된 범주를 무시하는 것이다. 저자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는 대신 상상력을 발휘해 자신의 고고학 유적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표현해보라고 말한다.

 

많은 고고학자들은 자신을 인류학자로 인식한다. 인류학자들은 개인의 삶과 경험보다 집단의 그것에 더 관심을 갖는다. 푸코는 보편적 진리는 없고 그것을 찾는 것은 환상이며 텍스트를 해독하는 것은 국지적 지식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풍요롭다는 말은 유적을 해석함으로써 고고학자들이 상상하는 지평을 확대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현상학은 인간이 주관적으로 겪는 경험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고고학에서는 지금은 아무도 없는 곳이지만 과거인들이 살던 유적을 그들의 감각을 통해 어떻게 느꼈는지 밝히기 위해 현상학을 채용한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는 정신이라는 것은 단지 감각을 통해 전달되는 날것 그대로의 정보에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데카르트가 생각한 것과 달리 사람들은 사물을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 자신들에 대한 자각,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이 만들어내는 한 다발의 필터를 거치면서 경험한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런 문화적 필터와 경험이 만들어내는 한 다발의 필터와 경험의 복합체를 아비투스라 불렀다. 사람들은 감각기관으로 입력된 정보를 아비투스의 영향을 받는 렌즈를 통해 처리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주변을 경험한다. 계량화할 수 있는 자료는 딱딱하지만 감각적인 정보는 물렁물렁하다.

 

에틱(etic)한 접근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외부자의 시각을 취한다. 이런 접근은 과학적 방법의 기본적 요건이며 실증 가능한 관찰 결과인 사실을 가지고 통제 가능한 비교를 하려 한다. 이에 현상학자들은 이즈음에서 잠시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이런 석조 기념물을 이용하고 체험한 과거인들에게 경관 내에서 크기가 색깔이나 입지보다 더 중요한 특징이었다고 어디에 써 있기라도 한 것인가?

 

이런 에믹(emic)스럽거나 내부자적 접근은 현상학적 방법의 핵심이다. 각각의 유물들은 크기, 색상, 형태, 위치, 다른 유물들과의 관계 등 여러 가치 특성을 갖는다. 현상학적 접근은 전체를 하나로 이해한다. 실제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고고학은 일부 연역적이기도 하지만 다분히 귀납적이다. 저자는 과거에는 어느 시점이나 상관없이 모든 집단이 어두움에 대해 무섭고 위험하다고 여겼을까? 묻는다.

 

그 반대로 어두운 동굴은 뭔가를 편안하게 숨기거나 안락하게 숨어 있을 장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물론 물렁물렁한 주관적 데이터를 주로 다루는 현상학적 입장만 취하면 뚜렷한 해답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

 

경험주의자는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것만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실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관념론은 사고와 생각이 행동보다 선행하고 더 중요하다고 믿는 신조다. 기능주의는 문화적 관습 및 제도는 유기체가 생명 유지를 위해 신체 각 부위를 함께 작동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움직이거나 변화한다는 생각이다.

 

담론은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나 특정 학문 분야 내에서 생각이 소통이 이루어지지만 노골적으로 언급되지는 않는 모종의 규칙들이다. 모더니즘은 종교나 선천적 지혜 대신 과학과 논리적 의사결정을 통한 인간의 진보를 강조한다. 목적론은 어떤 산물이나 결과를 미리 상정하는 모델이다.

 

아날학파는 역사서술의 한 방식으로 거대하고 장기적인 과정들을 강조한다. 이러한 과정들은 전통적 서사를 통해 역사로 구현되는 자잘한 사건들의 밑에 보이지 않게 내재해 있다.(기후나 지리적 여건들이 역사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아비투스는 개개인이 특정 장소와 시간 속에서 성장하는 동안 터득하는 모든 태도, 범주, 무의식적 관습 등을 일컫는 말이다.

 

작주성은 개인이란 스스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힘에 갇힌 무력한 볼모가 아닌 그들 삶의 능동적 창조자라는 견해다. 주이상스는 불협화음 같지만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감흥으로서 우리 머릿 속의 기본 가정을 배반하는 비익숙한 것들로부터 나온다. 해석학은 사물의 의미가 고유하지 않다고 가정한다. 해석이란 사람이 사물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적극적 과정이다. 해석학적 접근에서는 새로운 이해가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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