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묻고 지리가 답하다 - 지리 선생님들이 들려주는 우리 땅, 우리 역사 이야기 묻고 답하다 3
마경묵.박선희 지음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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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윤관의 강동 6주 이야기를 할 때 나오는 이야기가 세종에 대한 이야기다. 압록강과 두만강이라는 우리나라 자연 경계가 확정된 시기가 세종 때다. 세종은 4군 6진(4郡6鎭)을 개척했다. 군은 행정구역이고 진은 군사 방어 주둔지다. 일반적으로 국가간 경계는 강이나 높은 산맥 같은 자연적 경계를 따라 형성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방어를 위해서 국경을 따라 높은 성벽을 쌓아야 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비용과 수고가 많이 든다.

 

4군이 설치된 지역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과 거리가 워낙 멀다. 여진족과 같은 이민족이 우리의 북쪽 경계를 넘기도 했지만 생활이 어려워진 우리의 주민들도 두만강 넘어 만주 지역에서 거주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연이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지형, 지세를 잘 파악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 전쟁 당시 선조가 임진강을 건넌 것에 사연이 있다. 백성들이 자기 집 대문을 뜯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았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마을 이름이 널빤지 판자를 써서 판문리라 불리게 되었다. 문제는 판문(板門)이란 이름이 선조 이전에 이미 있었다는 점이다. 판문점은 휴전 당사자인 중국을 위해 한자로 이름을 표기하는 과정에서 널문리 가게를 판문점이라 하게 된 데서 유래했다.

 

지피지기에서 지기는 자기 군대의 군사적 능력이나 정보력 외에도 자신의 지형을 읽는 능력을 포함한다. 신도시들은 계획 도시다. 국가 주도의 계획적 신도시 건설은 왕조가 교체되면서 새 수도를 세울 때 볼 수 있다. 새로운 국가 건설에 따른 수도 이전이 아님에도 대규모 신도시 건설을 한 사례가 있다. 정조의 수원 화성이다.

 

화성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孝; ’이장; 移葬‘)로부터 비롯되었다. 화성이 북의 개성, 동의 광주(光州), 서의 강화에 이어 남의 거점 도시로 선정된 것도 중요하다. 방어의 기능이 중요했던 조선 초기와 달리 상업이 발달했던 조선 후기에는 물자 교류의 편리성이 도시의 중요 기능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구수원읍에 베해 새롭게 조성된 팔달산 아래의 화성(華城)은 삼면이 넓게 개방되어 있으며 지형도 평탄하여 서울에서 남으로 가는 큰 길을 만들기에 훨씬 유리했다. 신도시 화성의 이미지는 상업 활동이 활발하던 18세기가 요구하는 새로운 도시의 지형적 조건을 잘 갖춘 곳이었다.

 

신도시로서의 화성의 이런 장점을 먼저 알아본 사람이 반계 유형원이다. 반계(磻溪)는 방어를 고려한 전통적인 분지 지형보다 외부와의 교류가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개방적인 곳, 넓은 논과 들이 펼쳐져 있어 경제활동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곳을 좋은 공간으로 보았다. 그런 곳의 대표가 바로 화성이었다.

 

정조는 100년전에 쓴 반계의 글에 큰 감명을 받고 새로운 신도시를 화성으로 정했다.(유형원의 호 반계는 강태공이 낚시를 했다는 강이다. 산시성의 동남쪽에서 위수로 흘러든다.) 많은 축성 전문가가 있었음에도 젊은 정약용이 부름받은 것은 정조가 기존의 읍성과는 다른 성곽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했기 때문이다. 화성의 성곽에는 오성지(五星池)와 공심돈(空心墩) 등 새롭게 갖춰진 시설이 있다.

 

오성지는 적군이 성문에 불을 지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성문 위에 벽돌로 다섯 개의 구멍을 내고 그 뒤에 물을 저장한 큰 통인 누조(漏槽)를 설치하여 물을 흘려보낼 수 있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킨 3층의 망루로 열 곳에 총구를 설치했다.

 

화성에는 총 네 개의 성문이 있다. 네 개의 성문 모두에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옹성은 성문 밖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시설로 옹성 문은 보통 성벽 구석에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남문인 팔달문, 북문인 장안문의 옹성은 성문이 중앙에 있다.

 

유사시 방어와 함께 물자 유통도 고려한 포석이다. 신도시는 많은 사람의 이주가 이루어져야 하고 자족 기능이 있어야 한다. 화성은 자족 기능을 갖춘 도시였다. 아버지에게 효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화성 신도시를 건설했지만 이면에는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고 개혁정치를 완성할 새 공간을 만들려는 정조의 의도가 있었다.

 

강화도에는 단군이 제사를 지냈던 천제단이 있어 우리 역사가 처음 열린 곳이자 국가가 어려운 시기에 처했을 때 왕이나 왕자가 피난한 주요 장소였다. 폐위된 국왕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또한 외국 군대의 침입로였다. 빠른 조류와 더불어 넓은 갯벌 또한 몽골군이 강화로 접근하는 것을 어렵게 했다. 우리나라 연안 섬들은 대개 과거 빙하가 녹으면서 상승한 해수면에 의해 저지대가 침수되어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연안섬에서는 한반도의 서남부와 같은 넓은 평야가 형성되기 어렵다.('연안; 沿岸'은 바다와 육지가 맞닿아 서로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지역이다.) 그럼에도 강화도의 평야가 넓은 이유는 지속적 간척 사업 덕이다. 강화도 전체 면적의 1/ 3이 간척으로 만들어졌다. 몽골의 침입으로 수도 개성과 가까우면서도 방어에 유리한 강화도로 천도가 이루어지면서 강화도 인구가 급증했다.

 

산지 개간은 과할 경우 산사태, 토양 유실 등의 문제를 유발한다. 고려가 근본적으로 세운 대책이 간척 사업이다. 조선 초 비교적 안정기에는 간척 사업은 진행되지 않았다. 조선 중기 이후 양란을 거치며 도성의 외곽 방어가 중요해지며 강화도의 간척 사업은 재개되었다. 강화도는 한강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오는 물자와 세금으로 걷은 쌀 등을 수송하는 물길의 중요 길목에 위치한다.

 

프랑스와 미국은 조선을 식민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물러났지만 일본은 달랐다. 강화(江華)라는 지명은 강이 꽃처럼 피어 있는 듯 하다는 의미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모두 강화를 통해 서해로 빠져 나간다. 강화도를 통해 한강을 따라가면 수도 한양으로, 임진강을 따라가면 파주와 문산으로, 예성강을 거슬러 가면 개성으로 진출입이 가능하다.

 

천수답에 의존해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기후의 영향을 크게 받는 이앙법은 위험 요소를 안고 있는 농사법이어서 처음 국가에서 금지했다. 1418년 왕위에 오른 세종은 그 해부터 7년간 극심한 가뭄을 겪었고 그 후에도 홍수나 태풍 등의 자연재해를 계속해서 겪어야 했다. 자염(煮鹽)보다 염화나트륨 함량이 높은 천일염은 화학 공업과 무기 산업의 원료가 되었기에 군사대국을 지향한 일본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재료였다.

 

우리나라와 달리 대규모 갯벌이 없는 일본은 천일염을 생산하기에 적당하지 않아서 우리나라를 점령하는 동안 우리나라 소금 생산 방식을 대부분 천일염으로 바꾸었다.(갯벌은 조수간만의 차가 큰 얕은 바다에서만 발달한다. 염전이 가능하려면 지형적 조건 이외에 기후까지 알맞아야 한다. 물을 증발시킬 수 있도록 기온이 어느 정도 높아야 하고 비가 오는 날이 적고 바람이 적당해야 한다.

 

천일염은 가슴 아픈 일제 식민지 정책 속에서 탄생했지만 한국적 천일염으로 거듭나면서 주목받는 음식 자산이 되었다. 한양은 커다란 분지(盆地) 지형을 하고 있어서 성을 쌓아서 외적 침입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형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정조의 골머리를 썩였던 안흥은 현재의 태안반도 앞바다다. 태안 앞바다인 안흥량은 전라, 충청, 경상 지방의 세곡을 한양으로 운반할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바다쪽으로 돌출되어 있어서 파도가 강하고 태안반도의 구릉성 신지가 반도의 끝을 쳐서 해수면 바닥으로 이어져 있어서 크고 작은 섬들과 암초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고려 인종 때부터 조선 현종 때까지 무려 500년이 넘도록 수천 명의 일꾼을 동원하여 시도한 운하 공사는 모두 실패했다. 실패의 주요 원인은 단단한 지반과 큰 조수 간만의 차 때문이다. 태안반도 전역의 암반은 지질 구조상 화강암이다.

 

장돌뱅이의 다른 말이 보부상(褓負商)이다. 모든 소상인들의 물주 역할을 한 사람들이 객주다. 객주들은 은행 업무, 숙박업, 매매 중개업 등 다양한 역할을 했다. 임방(任房)은 보부상의 총 본부다. 채장은 보부상들의 신분증인 동시에 상행위 허가증이다. “망언하지 말고 패악한 행위를 하지 말고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라.” 채장 뒷면에 쓰인 말이다.

 

역사적으로 활동이 미미했던 보부상들이 조선 왕실을 도와 본격 활동을 한 것은 구한말 외세의 침략을 겪고부터다. 흥선대원군은 보부상들의 조직력과 충성심에 주목했다. 이들은 동학농민전쟁 당시 실제 전투에 참여해 농민군과 싸웠으며 정찰대, 보급대 역할을 하며 정부군을 도왔다. 농민군이 어느 정도 제압되자 정부는 보부상들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무리를 모으는 일을 금지시켰고 이들은 각자의 본거지로 돌아가 자신의 본업인 장사에 전념했다. 갑오개혁으로 해체되었던 보부상을 비롯한 전국적인 상업 조직이 부활했다. 정부의 보호 아래 설립되었고 활동했던 황국협회는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독립협회와 대립했다.

 

시장이 매일 열리지 않고 일정 간격을 두고 주기적으로 열린 이유는 구매력을 갖춘 인구 규모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당대 최고 수준의 세계지도로 인정받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조선 태종 대에 만든 지도)는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훔쳐 갔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세계 모든(혼일) 지역(강리; 疆理)의 역대 국가 수도를 그린 지도라는 의미다. 모든 지도에는 세계관이 담겨 있다.

 

봉금(封禁) 정책이란 청나라가 자기 민족의 발상지라고 여기는 만주 동북 지역 산해관 일대를 봉쇄해 한인(漢人)들의 만주 이주를 금지한 정책이다. 19세기 말 청나라의 봉금 정책이 풀리고 함경도,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기아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간도, 연해주 등지로 터전을 옮겼다.

 

1866년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도 함경북도에서 간도로 이사했다. 간도는 만주의 동남부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백두산 서쪽이 서간도, 백두산 북쪽이 북간도다. 최근에는 북간도 지역만을 간도라 칭하기도 한다. 섬은 아니지만 두만강, 송화강, 흑룡강(아무르강) 등에 둘러싸인 섬 같다고 하여 간도(間島)라 한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두만강 이북으로 이주해 살면서 개간한 땅이라 하여 간토(墾土)라 하던 것이 간도로 바뀌었다는 말도 있다.(아무르는 큰 강이란 의미다.)

 

우리나라 고구려와 발해의 옛 영토인 간도는 926년 발해가 망한 뒤 여진족(만주족)이 들어와 산 땅이다. 백두산 정계비에 나오는 토문강에 대해 우리나라는 두만강과 다른 강이라 생각하고 중국은 두만강이라 생각했다. 국경을 확정짓는 양국의 담판에서 우리측 대표 이중하 등의 노력으로 토문강이 두만강과 다른 송화강의 지류임이 밝혀졌다.

 

을유감계(乙酉勘界) 담판(1885년) 당시 그린 지도에 의하면 백두산 정계비로부터 국경을 표시했던 토퇴(土堆)와 석퇴(石堆.. 堆; 언덕, 쌓을 퇴)가 두만강이 흐르는 방향이 아니라 백두산 북쪽의 송화강 쪽으로 연결되어 있어 토문강과 두만강이 다른 강임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이 청나라와 협상에 나섰다. 처음에는 간도를 우리 영토로 간주했으나 1909년 만주의 철도 부설권과 탄광 채굴권 등을 얻는 만주협약을 체결하는 대가로 간도를 청나라에 넘기는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간도는 우리 영역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간도협약 체결 이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간도 이주는 계속되었다. 이후 간도는 독립군의 항일 무장 투쟁 중심지가 되었다. 명동촌 건설, 신흥무관학교 설립 및 활약, 청산리대첩 등은 간도 지방에서 이뤄낸 성과다.

 

간도협약은 국제법적으로 무효다. 1965년 한일 양국은 한일기본조약 제 2조에서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확인했다. 을사늑약을 근거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이 체결한 간도협약은 원천 무효다. 더구나 1952년 중일평화조약에서도 1941년 이전 일본이 체결한 모든 협약을 무효화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일본과 중국이 맺은 만주협약이 무효화한 것과 달리 그 대가로 체결한 간도협약은 여전히 유효한 상태다.

 

북한은 1962년 중국과 조중변계조약을 체결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정하고 이후 백두산을 중국과 분할하기까지 했다. 중국 또한 동북공정으로 간도에서 펼쳐졌던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왜곡, 편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소련은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 점령을 시도하자 조선인들을 중앙 아시아(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로 강제 이주시켰다.

 

일본이 연해주(러시아 동쪽 연안) 지방의 한인들을 일본의 첩자로 이용해 소련 침략에 활용할 것이라 판단한 결과였다. 늘어나는 한인과 러시아인 사이의 충돌을 차단하고 한인 공동체를 분산시켜 자치 요구 세력의 형성을 저지하려는 의도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임시 정부의 근거지였던 상하이는 어떤 곳인가? 중국 양쯔강 하구에 있는 상업 및 산업 도시로 지형이 평평하며 내륙 수로와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다. 한반도 이야기에서 상하이까지 ’역사가 묻고 지리가 답하다‘는 지리, 지형, 지세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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