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0년, 열하로 간 정조의 사신들 - 대청 외교와 『열하일기』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 서가명강 시리즈 16
구범진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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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과 조선은 사대자소(事大字小) 관계였다.(‘자; 字’에는 자애롭게 보살핀다는 의미가 있다.) 1619년 사르후 전투,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이 있었다. 사르후 전투는 조선이 대명(對明) 전쟁을 선포한 후금을 칠 군사를 파견하라는 명의 압박에 못 이겨 강홍립 군대를 파견한 전투를 말한다. 강홍립은 투항했다. 광해군이 적당히 싸우는 척 하고 돌아오라는 밀지를 내렸다는 말은 전체 파병 수 13000 중 희생자가 8, 9천이니 설득력이 없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실현하지 못한 바람에 불과하다. 파병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정묘호란은 조선이 아닌 조선 서북부의 명군을 공격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저자는 홍타이지의 칭제(稱帝)식에서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를 완강하게 거부한 조선 사신들을 흙탕물을 끼얹은 것이라 표현했다.(32 페이지) 병자호란은 이 흙탕물 사건을 일으킨 조선을 응징하기 위한 차원이었다.(; 꿇어앉을 궤)

 

고려는 조공 대상을 여러 차례 바꾸었다. 한족이 세운 송나라,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한족이 세운 명나라,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등이다. 연천 미산면에 고려 4왕(태조, 현종, 문종, 원종)과 16공신을 모신 숭의전이 있다. 16공신을 모신 곳이 배신청(陪臣廳)이다.(陪; 모실 배) 배신(陪臣)이란 신하를 모셨다는 의미보다 제후의 신하가 천자에 대하여 자기를 일컫는 말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대보단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병을 파견한 명나라 황제 만력제에 대한 제사를 거행하기 위해 창덕궁 후원에 설치한 제단이다. 저자는 1704년에 세워진 대보단이 보통 조선이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상징하는 시설로 여겨지지만 명 황제의 후손이 아닌 조선의 임금이 명 황제의 제사를 모시는 것은 명의 회복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전제로 한 행동이었다고 말한다. 즉 조선이 명나라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의 존재로 정리했다는 것이다.

 

1704년은 명나라가 무너진 1644년 이후 60년이 지난 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청나라 6대 황제 건륭제가 재위한 60년은 조선의 영조, 정조 재위기와 거의 겹치는 시기다. 1780년 건륭제는 자신의 칠순 생일(만수절; 萬壽節)을 대경(大慶; 큰 경사)으로 기념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는 수사적 표현이었다. 건륭제는 자신의 생일(음력 8월 13일)을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지냈다.

 

당시 가을 사냥은 황제의 연례행사였다. 가을 사냥을 연례행사화한 첫 황제는 강희제였다. 목란위장(무란웨이창)은 사슴 사냥을 가리키는 만주어 muran을 음차한 목란(木蘭)과 관설(官設) 수렵장인 위장(圍場)의 합성어다.(圍는 사냥하다, 포위하다, 에워싸다는 의미다.) 면적은 1만 제곱킬로미터로 경기도 정도의 크기였다. 이 안에 72곳의 사냥터가 있었다.

 

1780년은 정조 재위기였다. 진하(進賀)란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신하가 군주에게 특별히 축하의 뜻을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박명원(박지원의 8촌형)이 열하의 건륭제의 칠순 만수절 하례에 참석하게 되었다. 조선의 진하 특사 파견은 건륭제도 기대하지 않았던 이례적 성의 표시였다.(진하 특사 파견은 의무가 아니었다.)

 

베이징이 아니라 열하에서 잔치를 연 것은 천연두와 관련이 있다. 건륭제는 천연두 면역이 없는 몽골 등의 왕공 귀족을 위해 매년말 베이징으로 오는 대신 팔월 중순 자신의 생일에 맞춰 열하로 오게 했다. 진하사, 사은사는 되도록 가까운 종친이나 부마를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다. 적당한 종친을 찾을 수 없었던 정조는 부마 가운데 금성위 박명원, 창성위 황인점을 선택했다.(박명원은 정조의 고모 화평옹주의 남편이었다. 황인점은 영조의 딸 화유옹주의 남편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정조의 고모부였다.)

 

정조는 ’열하일기‘를 꼭 집어 비판했다.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통속적인 글들과 비슷한 문체를 구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조선 사신단은 외교 사절의 성격만을 띤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상(隊商)과 다를 바 없었다.(88 페이지)

 

베이징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원래 청나라의 수도는 선양(瀋陽)이었다. 1644년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이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에게 함락되고 숭정제가 자살한 기회를 타 청나라는 베이징을 점령하고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겼다. 이 사건을 청의 입관(入關)이라 한다. 천하제일관이라 불렸던 만리장성 동쪽 끝의 산해관 안쪽으로 들어왔다는 의미다.(68 페이지)

 

압록강을 건너 선양까지는 옛날 거리 단위로 540리에 불과했으나 베이징까지는 무려 2000리가 넘었다.(69 페이지) 원래 박명원 일행이 목적한 곳은 베이징이었다. 박명원 일행이 베이징에 도착하자 베이징 예부에서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건륭제는 조선에서 만수절을 축하하는 사신이 도착했으면 곧장 열하로 보냈어야지 왜 그곳에 붙잡아두느냐고 역정을 내면서 당장 열하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162 페이지)

 

이때 사신들이 베이징을 떠나면서 이 사실을 서울에 장계(狀啓)로 알렸다. 수행 무관 중 몇 명을 뽑아 역관과 함께 사신의 장계를 들고 먼저 귀국하는 사람들을 선래군관(先來軍官)이라 한다.(163 페이지) 저자는 박명원 일행이 베이징을 떠나며 서울로 보낸 장계를 9월 17일 장계라 칭한다.(164 페이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박명원의 이 장계는 당일인 9월 17일 서울에 도착했다.(편찬자의 실수다.) 건륭제는 칠순 잔치를 열하에서 벌일 계획을 세우고 박명원 일행이 서울에서 출발할 무렵 이미 베이징을 떠나 줄곧 열하에 머물고 있었다.(161, 162 페이지)

 

청나라는 베이징과 열하 간에 매우 신속하고 효율적인 연락 체계를 운영하고 있었다. 1년에 몇 달씩이나 베이징을 떠나 있었음에도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박명원 일행은 금불 사건을 겪었다. 황제의 진노에 따라 허둥지둥 열하에 도착한 박명원 일행은 황제의 명을 칭하는 예부 관원들의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판첸을 만난 자리에서 판첸이 준 금불을 받는다. 판첸 라마라 하는 판첸은 티베트 불교에서 달라이 라마에 버금가는 종교적 권위를 지닌 전생활불(轉生活佛)이다.(251 페이지)

 

황제의 명이라고만 하고 왜 만나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듣지 못한 박명원은 모든 것을 황제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박명원은 성균관 유생들의 규탄에 직면했다. 배불(排佛)의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박명원은 황제가 정조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금불을 선사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우연의 산물이었을뿐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판첸과의 불상 관련 일을 자세하고 치밀하게 기록(해명)했다. 이 책 곳곳에는 봉불지사(奉佛之使)라는 비난의 표적이 된 박명원을 변호하는 내용이 숨어 있다. 저자는 박지원이 강조한 내용들이 정말 그해 8월 11일에 그가 직접 목도한 바에 근거한 것이었을까?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박지원이 공식 수행원 신분도 아닌 자제군관의 하나였음을 고려하자. 1780년 이후 3년만인 1783년 정조는 박명원을 동지겸사은사행의 정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박명원은 부담을 느끼고 명령을 거두어줄 것을 요청했다.

 

1790년 정조는 건륭제 팔순 진하(進賀) 특사를 보냈다. 정사는 창성위 황인점, 부사는 서호수였고 박제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1784년 박명원은 영조에게 존호를 올리기 위해 설치된 상호도감의 제조(提調) 중 하나로 임명되었다.

 

’열하일기‘가 문학적으로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참신한 문체의 책이라지만 문학적 감별 능력은 없고 그저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벅찬 역사학도의 입장에서는 무엇을 보고 새로운 문체라 하는지 알 모르겠다(152, 153 페이지)고 한 저자는 문학 작품으로서 ’열하일기‘의 가치는 오히려 단순한 여행 견문록에 머물지 않는다고 평하며 다만 ’열하일기‘를 사료로 취급할 때에는 저자의 집필 의도를 염두에 두면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론짓는다.(260 페이지) ’열하일기‘에 오류가 있지만 그것은 학자적 양심을 버리면서까지 사실을 왜곡한 것이 아니다.

 

정조는 대청(對淸)외교에 전에 없던 정성을 기울였다. 1780년 정조의 건륭 칠순 진하 외교는 예외적 우연이 아니다. 정조는 사신 파견에 수반되는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누차에 걸쳐 사은사를 특파했다.(275 페이지) 조선과 청은 사대와 자소의 관계를 맺었기에 조선이 성의 표시를 할 때마다 청 또한 그에 상응하는 우대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291 페이지) 건륭제는 1780년 열하를 무대로 칠순 만수절 이벤트를 거행했다.

 

건륭제는 이 자리에 두르베트, 우량하이, 토르구트, 회부의 무슬림 벡, 금천 지역의 토사 등을 참석하게 했다. 이들은 모두 건륭 연간에 이르러 비로소 청에 완전히 복속된 집단이나 지역의 수장들이다. 천자 건륭제에게 이들을 대거 한자리에 모은 칠순연은 자신이 평생 이룬 업적을 상징하는 이벤트였다. 이를 외번필집(外藩畢集)이라 한다. 건륭제는 조선에만 사상 초유의 특은을 베푼다는 혐의가 일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즉 모두에게 골고루 혜택을 베푼다는 일시동인의 원칙을 확고하게 지키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3대 연회의 문호를 외국 사신들에게 개방했다.(325 페이지)

 

저자는 1663년 겨울 청나라에서 파견한 칙사가 서울에 왔을 때 홍문관 수찬 김만균이 칙사 접대 업무를 맡긴 왕(현종)명을 거역한 사건을 이야기한다. 그의 조모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될 때 오랑캐에게 욕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결한 분이다. 부모가 죽으면 3년상을 치르고 조부모가 죽으면 1년상을 치르는 것처럼 관계가 멀어지면 사의에 입각한 도덕적 의무의 강도도 약해져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김만균은 파직되었으나 후에 주자를 인용하면서 복수오세설을 주장한 송시열로 인해 김만균에 대한 처벌을 주장한 사람이 오히려 파직을 당했다.

 

저자는 영조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은 인조의 4대손이지만 정조는 6대손이라는 말을 한다. 굳이 복수오세설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관계가 멀어지면 사의에 입각한 도덕적 의무의 강도도 약해져야 하고 시실 그렇겠지만 김만균의 경우 병자호란으로부터 30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고 당사자가 조모였으니 원한을 모두 떨쳐버릴 수 없지 않았을까? 영조는 4대손이고 정조는 6대손이어서 차이가 났다고 보기는 어려운 듯 하다.

 

저자는 1776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등극한 정조가 마주친 것은 청나라의 전무후무한 성세(盛世)라고 말한다. 시대가 바뀐 것이다. ’열하일기‘를 더 깊이 이해하려는 의도는 물론 정조에 대한 관심 때문에 접한 구범진의 책은 열하일기를 소재로 사대자소, 존주대의 등의 이야기를 들려준 참신한 책이다. 열하일기의 배경을 알 수 있었으니 이제 문제의식을 박지원의 ’연암집‘으로 이어가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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