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풍경 - 역사가는 과거를 어떻게 그리는가
존 루이스 개디스 지음, 강규형 옮김 / 에코리브르 / 200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표적 현대사가 중 한 사람인 존 루이스 개디스(John Lewis Gaddis; 1941 - )의 ‘역사의 풍경’은 역사와 역사가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다. 우리에게 익숙한 카스피르 다비드 데이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를 설명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한 저자는 인문과 자연과학에 대한 풍부한 소양을 바탕으로 논의를 플어나갔다. 이 그림을 풍경에 대한 지배와 한 개인의 하찮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설명한 저자는 역사의식의 성숙함도 자신의 중요함과 하찮음을 동시에 남겨준다고 주장한다.(24 페이지)

 

역사가는 멀리 지평선에 보이는 모든 것을 화폭에 담을 수 없음을, 또는 과거의 특정 시기조차 일어난 모든 것을 책에 담거나 강의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역사가는 진실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는 것을 배우는 것도 성장 과정의 일부로 여겨야 하며 스스로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역사가는 너무 적은 정보와 너무 많은 정보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취해야 하는데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묘사와 추상적 묘사 사이의 균형 인식을 의미한다.(29 페이지)

 

역사가는 선별성과 동시성, 스케일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능력을 갖는다. 역사가가 시간 여행에서 스스로 과거에 의미를 부과하는 것, 과거를 탐구하지만 현재에 머뭄으로써 주도권을 쥐는 것을 선별성이라 한다. 선별성보다 더 대단한 것은 동시성으로 이는 한 공간이나 시간보다 더 많은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다. 스케일이란 거시에서 미시로, 미시에서 거시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능력을 말한다.

 

저자는 에드워드 핼릿 카를 인용한다. 카는 분류와 관련한 문제들에 별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고 역사가 과학이 아니라는 사실에 필요 이상으로 근심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다.(65 페이지) 카는 지질학에서 찰스 라이엘이나 생물학에서 찰스 다윈이 이룬 업적은 과학이 정적이고 시간적 제한이 없는 대상을 다루는 것에서 벗어나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다루게 된 것이라 말했다.

 

천문학, 지질학, 고생물학 또는 진화생물학과 같은 학문은 도저히 연구실 안에서 그 학문적 대상을 다룰 수 없고 평생을 지켜봐도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학문은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s)을 이용한다. 이들이 역사를 재실험하는 유일한 방법은 상상력에 기대는 것이지만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69 페이지) 지질학자나 고생물학자와 마찬가지로 역사가들은 과거에 있었던 것 중 대부분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고 거의 모든 일상사는 아예 적당한 기록조차 없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생물학자나 천문학자들처럼 그들은 애매하거나 때로 상충하기까지 하는 증거들과 씨름해야 한다. 역사에서의 상상력이란 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자료와 관련되고 자료에 의해 한정되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지질학자도 몇 킬로미터 이상 몸소 지표면을 뚫고 들어가본 적이 없지만 땅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이 지상에서 어떻게 대륙을 움직이고 지진을 일어나게 하는지 자신 있게 설명한다. 어떤 화석학자도 실제로 공룡을 본 적이 없지만 공룡이 어떻게 살았고 죽었는지를 어린이는 물론 동료들에게 충분히 설득력 있게 재구성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 어떤 천문학자도 지구 궤도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지만 그 제한적인 관찰자의 위치에서도 우주의 지도를 그려낸다.(74 페이지) 합치라고 번역한 consilience는 통섭이라고 많이 쓰는 단어다. 19세기 케임브리지의 한 과학철학자인 윌리엄 웨웰(William Whewell)이 처음 쓴 이 단어는 한 주제에 대한 동떨어진 부분들로부터 도출된 결과가 예기치 않게 일치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쓴 개념이다.(83 페이지) 이 개념을 부활시킨 사람이 에드워드 윌슨이다.

 

‘변수의 상호종속성‘이란 장에서는 환원주의와 생태주의의 차이에 대해 알 수 있다. 환원주의는 현실을 여러 부분으로 쪼개어 볼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 주의에서는 중요도 순으로 원인의 등급을 매기는 것이 필수적이다. 즉 독립변수라는 것이 존재하고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다고 여기는 태도다. 물론 생명체의 진화과정이나 대륙의 이동, 은하의 형성을 설명하고자 하는 경우 너무 많은 것들이 다른 것들에 종속되어 있기에 설명 대상을 함부로 하위 영역으로 쪼갤 수 없다.

 

천문학, 지질학, 고생물학과 같은 과학은 현실의 생태학적 관점에서 기능한다.(조지 존슨은 환원주의가 소립자물리학에서조차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했다.) 생태학적 접근법은 단순한 요소들의 상술(詳述)을 중시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각 요소들이 전체 시스템(구조)이 되기까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고려하며 본질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 동등하게 본질적인 우주 내에 그 요소들을 위치시키려 한다. 환원주의적 관점이 배타적이라면 생태주의적 관점은 포용적이다.

 

저자는 원인의 다양성이나 시간의 흐름, 문화적/ 개인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과학자들과 기꺼이 계속 확산되는 변수들을 받아들이는 역사가를 구분한다. 역사가에게 특정 변수를 신성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호 연결성이다.(103 페이지) 저자는 역사가 헨리 애덤스와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 이야기를 한다. 애덤스는 "사람들의 탐구 수단이 점점 궁극을 파고 들어가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복잡한 환경 속에 내재하는 단순함을 찾고 그 후에는 단순함 밑에 깔린 복잡성을 찾아야 한다. 궁극의 것에 집착하지 말고 이 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푸앵카레의 말을 인용했다.(116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푸앵카레의 위대함은 그가 선형적 관계와 비선형적 관계가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을, 동일한 시스템이라도 그 안에서 단순성과 복잡성이 동시에 발생할 수 있음을 통찰한 데 있다.(120 페이지) 저자는 과학은 역사와 대단히 닮았다고 말한다. 이 세상은 어떤 것은 예측 가능하지만 또 어떤 것은 그렇지 못하며 규칙성이 있긴 하나 확연한 불규칙성과 함께 존재하고 단순성과 복잡성이 공존한다는 것이 푸앵카레의 견해다.(123 페이지)

 

단속평형설(punctuated equilibrium)을 주장한 굴드는 적자생존이라는 낡은 개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생명의 역사에서 우연성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주장했다. 그가 말한 우연성이란 각 생명체가 호의적인 진화상의 활동 범위에 운 좋게 맞아떨어졌다는 의미다. 굴드가 말한 것을 경로종속성(path dependency)이라 한다. 동작 과정의 초기에 일어난 사소한 사건이 궁극에 가서는 거대한 차이를 불러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이 역사가에게 가져다주는 의미를 논한다. 그것은 이야기라는 것이 대부분의 사회과학자가 또한 대부분의 역사가조차 인정했던 것보다 더 세련된 연구 도구로서 새로이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128 페이지) 역사가는 한쪽은 자연과학을, 또 다른 쪽은 사회과학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기에 좋은 위치에 서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역사가는 방법론적 열등감으로 고뇌할 이유가 없는데 그것은 물리학에 대한 동경이란 것은 역사가의 문제일 수 없고 적어도 은유적 측면에서 역사가는 이미 일종의 물리학을 잘 해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139 페이지)

 

역사 속에서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이나 특이 원인이 발생한 순간을 어떻게 잡아낼 수 있을까? 물리학에서는 상전이(相轉移)를 규명하려는 노력 속에서 이와 같은 문제 풀이가 이루어진다. 상전이란 안정된 상태에서 불안정한 상태로 변하는 임계적 상황을 말한다. 물이 끓거나 어는 상황이라든지 모래더미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상황, 단층선이 갈라지기 시작하는 상황 등이다. 시스템이 초기 조건에 대한 민감성과 규모와 상관 없는 자기유사성을 가질 경우 임계성(臨界性)이라 한다.(135 페이지)

 

역사 속에 상전이 같은 것이 있을까? 역사가 클레이튼 로버츠는 상전이라는 용어는 쓰지 않았지만 그와 같은 것이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로버츠는 “역사가가 궁극의 원인을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때 본능적으로 추적을 멈추는 경계점이 있다. 이 경계점이란 역사가가 설명하고자 하는 사태의 변동이 막 넘쳐나는 지점을 이른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이 말을 단속평형의 역사학적 버전이라 말한다.(151, 152 페이지)

 

단속평형이란 생물 진화가 지속적으로 매끈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급격하고 불안정한 변동과 구두점 찍듯이(punctuated) 나타나는 긴 안정기가 불연속적으로 진행된다는 뜻이다. 역사가는 결코 역사를 실제로 재현할 수 없다. 천문학, 지질학, 고생물학, 진화생물학 등이 시간을 재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반사실적 사유는 매우 엄격한 훈련이 필요하다. 여러 가지 반사실적 가정을 한꺼번에 냄비 속에 넣으면 안 된다. 그래봤자 어느 한 가지 효과도 낼 수 없는 상황이 된다.

 

단일변수를 잡을 때 시대에 상응하는 기술과 문화의 영역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과거에서 새로운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해도 현대의 변화된 시각을 바탕으로 과거를 향해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과거가 무척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역사가는 최선을 다할 뿐이며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역사 연구의 결과물도 언제나 수정될 수밖에 없다.(160 페이지)

 

묘사와 사실 사이에는 경계가 존재한다. 이 점을 언제나 존중해야 한다. 원인이 아니라 결과의 간결성을 선호해야 한다. 역사가는 결과의 간결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원인을 적시하는데 간결성을 중시하는 사회과학자와 구별된다. 사회과학자는 과잉결정된 사건 즉 다수의 원인을 갖는 사건은 설명하기에 부적합하다고 본다. 역사가도 일반화를 한다. 하지만 일반화를 이야기 속에 포용하지 이야기를 일반화 속에 포용하지 않는다.

 

연구가 필요한 부분은 시간과 공간과 문화적인 면에서의 거리 때문에 상식처럼 보이지 않는 상식이다. 저자는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느냐가 지적 습득의 방법적 순수성보다 늘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고 말한다.(167 페이지) 역사를 도덕의 언어로 사고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작업이다. 피해 가서도 안 된다. 저자는 역사가는 묘사와 사실에 동등한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말한다.(187 페이지) 저자는 자신의 글이 자신에게 영감을 준 블로크나 카의 시각에서 꽤 많이 벗어나 헤매고 있다고 말한다.

 

두 사람 모두 저자의 도덕적 당위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에게서 도덕의식의 작용을 배제하려는 것은 인간의 특성을 부인하는 것이기에 그러려면 차라리 물고기, 새, 사슴의 역사를 쓰지 인간의 역사는 쓰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한 저자와 달리 카는 소비에트 역사 전문가인 자신은 스탈린이 두 번째 부인에게 잔인하고 냉담했던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블로크나 카의 말에는 시대가 개인의 삶을 강제한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

 

역사의식이란 하나의 성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반대되는 성질들 간의 긴장으로 구성된다고 말하는 저자는 그러면 역사 연구는 무엇을 위해 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역사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고 역사가의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직접 겪은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비춰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203 페이지) 저자는 역사가는 과거를 명료하게 만들지만 그럼으로써 과거를 도망이나 배상, 항소도 불가능한 감옥에 감금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실제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은 접근 가능하지만 변형된 과거를 구성하는 것 즉 과거를 억압하고 그 자발성을 제약하고 그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라 말한다.(207 페이지) 물론 저자는 과거를 억압하는 역사가는 그와 동시에 과거를 해방시키기도 한다는 말도 했다. 저자가 대부분의 역사가보다 역사를 잘 이해했다고 표현한 굴드가 “우리의 선조들이 당연히 가질 수 없었던 현대의 지식에 비추어 그들을 판단하는 오만”을 역사가는 삼간다고 말한다.

 

저자는 역사가의 사유 목적은 역사가들 사이에서, 사회 내에서, 억압과 해방이란 양극 사이에서 최적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억압과 해방이란 성장하면서 스스로를 더 잘 돌볼 수 있고 독립적이 되지만 동시에 경험과 교훈, 의무와 책임의 망에 점점 얽매인다는 설명을 통해 드러난다. 저자는 건전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상호종속이 필요하며 이는 곧 앞에서 말한 생태주의적 의미를 지닌다. 이 말은 완전한 억압과 완전한 해방 모두 노예 상태로 이어진다는 말과 이어진다.

 

저자는 논문을 쓰라는 압력 즉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가하는 억압이 학생들에게 미래의 성장의 조건이 되고 교수들이 학생들로부터 받는 미숙하고 성가신 부담은 학생들을 가르침으로써 젊게 사는 미덕으로 인해 상쇄된다고 말한다. 질문 없이 가르치는 것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은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주고 결국 우리를 가르친다.(224 페이지) 저자는 앞에서 말한 카스피르 다비드 데이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의 남자가 보는 것은 앞(미래)인가, 뒤(과거)인가를 굳이 하나의 답으로 볼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둘 다라고 말한다.

 

‘역사의 풍경’은 독특한 책이다. 수미일관한 책, 억압과 해방의 적절한 긴장을 역설하는 책이다. 무엇보다 내게는 굴드를 인상적으로 인용한 책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연천군 전곡리 선사유적지 한 영역에 자리한 방문자센터에 그려진 그림 가운데 밤나무에 올라 이곳(현재)을 바라보는 구석기인의 모습이 있다. 이를 저자의 해석에 힘입어 과거와 미래를 함께 보는 것으로 설명하고 싶다. 언제 재독할 기회를 보아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