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빌리티 존재에서 가치로 모빌리티인문학 총서 28
김태희 외 지음 / 앨피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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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빌리티란 영국의 사회학자 존 어리(John Urry; 1946 - 2016)가 게오르그 짐멜의 논의, 복잡성 이론, 유동성과 유목주의 등을 참조해 제안한 개념이다. 김태희, 전진성 등이 쓴 ‘존재에서 가치로 모빌리티’는 모빌리티 이론으로 우리 사회의 현상을 분석한 책이다. 키네스테시스(운동에 대한 감각) 개념에 따르면 지각은 신체 운동을 통해 발생한다.

 

사물의 정지/ 운동은 키네스테시스를 매개로 주어진다. 키네스테시스 의식은 반드시 신체 의식이자 자기 의식이다. 키네스테시스를 실행되고 감지되고 지각되고 표현되고 측정되고 안무되고 음미되고 욕망되는 운동으로 확장해 사유하자는 논자(메리만, 피어스)가 있다.

 

사학자 전진성은 공간이 기억을 배반해 온 증거를 세 가지 제시한다. 첫 번째 공간은 랑에마르크다. 1차 대전의 격전지로 여겨진 이곳은 서부전선에서의 희생을 상징하는 성지로 여겨져 전후 학생들의 순례지로 각광받았고 2차 대전 당시에는 나치의 전쟁 선전문구에 자주 등장했지만 놀랍게도 실제 격전지가 아니었다.

 

두 번째 공간은 일름강의 아테네라는 별칭을 가진 바이마르다. 대문호 괴테의 자취가 가득한 고전주의 문학의 성지이자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국인 바이마르 공화국의 탄생지이지만 인근 산에는 전혀 아울리지 않는 부헨발트 수용소가 자리하고 있다. 이 수용소는 나치 치하에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은 곳이고 동독 치하에서는 반파시즘 투쟁의 선봉에 섰던 공산주의 순교자들의 성지로 탈바꿈했다.

 

세 번째 공간은 현재 재건되고 있는 경복궁과 그 앞에 있었던 조선총독부다. 현재의 경복궁은 조선 개국 당시의 궁궐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 폐허로 전락한 후 270여년만인 1868년 중건된 모습을 기준으로 삼았다. 더구나 중건 이후에도 여러 차례 화마를 겪은 뒤 재건된 지 10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인 1896년 고종이 세자와 함께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김으로써 다시 폐궁이 된 곳이다.

 

이 때 제국 일본이 이를 손쉽게 접수하여 상당 부분 훼철하고 그 자리에 압도적인 서양식 석조건물인 조선총독부를 세워 식민지배의 사령탑으로 활용했다. 이 청사는 광복 후에도 미군정청, 중앙청, 아주 짧게는 인민군 청사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며 항상 수도 서울, 사실상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기능했다.

 

무엇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9. 28 서울 수복 당시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경복궁은 사실상 패망 이후 이렇다 할 부흥운동도 없었을 만큼 민심과 유리되었던 옛 조선왕조의 유적일 뿐이지만 철거된 조선총독부 청사는 오히려 한때나마 대한민국 현대사의 핵심 유산이었다.

 

전진성은 역사와는 가장 대척점에 놓인 자연환경마저도 역사성과 생산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한다. 자연환경은 민족사의 혼이 서린 배타적 영토도 아니고 역사로부터 동떨어진 무릉도원도 아니다. 자연환경은 언제나 담론적, 물질적 실천의 산물이다.(86 페이지)

 

양선진의 글은 흥미롭다. 양선진은 단순히 객관적 세계만 묘사하다면 지리학자라고 불릴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가령 숲이든 초원이든 그 존재 근거를 지리학적 관점에서 캐묻고 설명할 수 있어야 비로소 지리학자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양선진은 존재의 시간성과 구체성을 지닌 철학을 해야 함을 역설한 대표적 철학자로 베르그송과 왕양명을 든다.

 

두 철학자는 공간적 사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시간적 사고로 전환한 사람이고 실제의 시공간을 논리적 사고의 시공간으로 환원하지 않고 구체적이고 시간적인 존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 한 철학자다. 시간성을 제거하는 것은 물질의 경우보다 생명의 경우에 더 큰 문제가 된다. 생명은 변화 자체다. 물질의 본질적 특성은 공간성이고 생명의 본질적 특성은 시간성이다.

 

흥미로운 점은 베르그송은 공간적 사고의 전형인 칸트를 비판했고, 왕양명은 논리적 사고 위에서 형이상학을 구축한 주희를 비판했다는 점이다. 뉴턴 이후 다시 기하학에 뿌리를 둔 철학이 지배적인 사조가 되었다. 물질세계를 연구하는 물리학은 양화(量化)를 중시한다. 이에 따르면 물질은 시간 경과 속에서도 동질성을 유지하며 공간 속에서 단순한 양적 성질을 가질뿐이다.

 

따라서 현재의 물질을 과거로 되돌린다 해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열역학 2법칙(엔트로피 증가 법칙)이 등장하기 전 물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물질이란 시간성을 제거하고도 이해 가능했다. 이러한 물질들로 이루어진 자연세계는 목적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이해 가능하며 이런 기계적 법칙은 미래에도 적용되기에 자연은 예측가능성이 지배한다.

 

이는 기계론적 관점인 동시에 결정론적 관점이다. 생명의 본질인 변화는 단순한 동질적 이동인 위치 변화가 아니라 이질적 이동인 질적 변화를 의미한다.(105 페이지)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이란 질적 변화이며 순수한 이질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흐름으로서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할 수 없으며 정신 내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지속하는 시간을 지속하지 않는 것으로 만든 대표적 사례가 영화적 기법이다. 영화의 필름들은 각각 정지한 것이지만 이들을 모아 돌리면 동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운동을 이렇게 개념화하는 것은 변화와 흐름 자체인 시간을 정태적 조각들을 결합해 파악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생명의 지속은 측정 불가능하지만 직관할 수는 있다. 주희의 리(理)는 중용(中庸)의 천(天)이라는 인격적이며 초월적 존재성을 논리적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왕양명은 인간의 생생한 생명적 특성을 설명함에 있어 주희와 달리 인간 마음이 바로 외부 사물에 자극을 받고 반응을 보이는 감응적 존재라고 규정했다.(111 페이지)

 

왕양명에게 리란 변화 자체다. 변화적 속성 자체가 천리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왕양명은 (천)리란 변화(역; 易)라 주장했다. 왕양명에 따르면 구체적인 (윤리적) 상황에서 마음이 양심(‘양지; 良知‘)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리는 추상적이거나 사변적인 형이상학적 원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살아 있는 리이다.

 

왕양명에게 형이상학적 원리는 별도로 존재하는 원리가 아니라 구체적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원리다. 정동(情動)은 흥미롭고 논쟁적인 개념이다. 정동은 만남과 접촉을 통한 신체적, 정신적 변화 또는 그 에너지이며 감정이나 정서, 나아가 이성의 영역보다 먼저 발생하는 마음의 움직임이다.

 

순자는 인간의 윤리적 행위가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수행된다는 믿음을 거부한다. 순자는 모든 선한 결과는 인위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며 인간의 본성을 좇아서는 쟁탈과 혼란, 궁핍이라는 악한 결과가 도출될뿐이라고 믿었다. 사실 순자의 논의는 성악설이기보다 인간이 본래 가지고 태어나는 본성이라 할 것은 호리(好利)와 이목구비의 욕망에 다름 아니며 인간이 그 본성을 따라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쉽게 악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순자는 마음의 판단 능력과 후천적 노력을 통해 얼마든지 윤리적 행위를 수행하고 선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성(性)은 인간이 타고난 여러 속성의 총칭에 불과하다. 그 실제 내용은 모두 정(情)이다. 욕(慾)은 정의 반응이다. 윤태양은 정동 개념이 만능 열쇠처럼 사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정동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제기되었다고 설명한다.

 

존 어리는 사회를 정적이고 구조적인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동적이고 유동적인 것으로 볼 것을 제안했다. 그 자체로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로 논할 수 없는 모빌리티는 자연의 변화보다 더 복잡한 움직임이다.

 

최성희는 지금 시점에서 굳이 정동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전략적으로, 정서라든가 감정이라든가 하는 말이 가지는 한정성을 뛰어넘기 위한 것일 터라고 말한다.(292 페이지) 정동 개념에서 가장 기본적이자 핵심적인 것은 이 개념에 포함된 운동성이다. 정동은 이른바 감정의 모빌리티다. 단 감정을 주관적인 것으로 전제하지 않는 한에서다.

 

정동을 힘으로 파악할 때 우리가 감정이라는 말로 사유하는 것보다 그 중심이 훨씬 더 신체쪽으로 이동하며 급기야 몸과 정신의 경계는 흐릿해진다.(293 페이지) 마주침의 힘이라는 말은 그 힘들이 우연한 만남에 의해 발생하는 것임을, 따라서 정동의 움직임이 우연성에 노출되어 있고 그렇기에 잠재성을 갖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힘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정동이 방향성과 크기를 갖는다는 점을 읽어낼 수 있다. 정동이란 말에는 운동성, 물리성, 비인격성, 우연성, 잠재성, 방향성, 가치성이 담겨 있다. 마이클 크로닌의 ’팽창하는 세계‘에 의하면 외지여행이란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먼 곳으로 떠나는 행위다. 내지여행은 가까운 곳에 머무는 것으로 익숙하고 가까운 곳에서 새롭고 낯선 것들을 다시 만나는 경험에 해당한다.

 

모빌리티는 본능적 편안함의 추구를 반성하며 낯설과 편안하지 않음에 대한 관대함을 요구한다. 최성희는 모빌리티외 정동의 결합을 잘 보여주는 작품인 ’작은 구름’의 작가인 제임스 조이스를 “몸은 바깥으로 이동했지만 머리는 내내 더블린에 머문 특이한 작가로 소개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복잡다단한 정동의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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