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단숨에 읽는 바울 - 바울의 역사와 유산에 관한 소고
존 M. G. 바클레이 지음, 김도현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8년 8월
평점 :
바울(Paul)은 작은 이라는 의미다.(76 페이지) 하지만 그는 기독교 신학에서 참으로 큰 인물이다. 베토벤이 바흐는 시내가 아니라 바다라고 한 것을 연상하게 한다. 음악학자 폴 뒤 부셰는 바흐는 시내가 아니라 동유럽 방언으로 순회음악가라 설명했다.
바울은 순회 수공업자였다.(15 페이지) 그뿐 아니라 그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쉴 새 없이 움직였던 선교사였다.(26 페이지) 바울은 최저 생활을 한 사람이었다.(60 페이지) 존 바클레이의 ‘단숨에 읽는 바울’은 150여 페이지의 분량에 담을 수 있는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은 알찬 책이다.
이 책의 독자들은 바울에 대해서뿐 아니라 기독교 일반, 그리고 서양 철학 및 역사를 함께 아우르는 눈을 가질 수 있다. 바울은 그냥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고 단 하나의 그림에 담거나 단 한 가지 방식으로 해석하기에는 너무나 모호한 인물이다.(84 페이지)
또한 바울은 대단한 논쟁가였다.(73 페이지) 갈라디아서 연구로 철학 박사가 된, 신약학 교수인 저자는 믿을 만한 일곱 성경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 데살로니가 전서, 고린도 전서, 고린도 후서, 갈라디아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로마서다. 이 성경은 모두 바울이 쓴 편지들이다.
바울과 관련된 것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편지뿐이다.(31 페이지) 바울의 권위는 의심받기도 했고 자신이 세운 교회에 의해 도전을 받기도 했다.(34 페이지) 동료 신자들 사이에서 바울을 의심하고 싫어하며 반대했던 자들이 적지 않았다.(73 페이지) 물론 저자는 바울의 성격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그의 열정적이고 개성 있는 글솜씨에 매료되곤 한다고 말한다.(46 페이지)
모든 역사적 판단은 다툴만한 여지가 있다. 당연히 바울 서신의 저작설에 관한 다툼도 지난 200여년에 걸쳐 학자들간에 꾸준히 있어 왔다. 상황 대응적이었던 바울은 조직신학자라기보다 실천신학자에 가까웠다.(33 페이지) 바울의 편지들은 체계적으로 작성된 논문집이 아니었기 때문에 같은 용어도 각기 다른 문맥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91 페이지)
그의 편지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전제들을 담고 있어서 그 행간을 해석자들이 메워야 할 때가 있다.(91 페이지)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운동과 맞닥뜨렸을 때 그는 두 가지 이유에서 격분했다. 이미 로마인들에 의해 십자가형을 당한 하찮은 반역자로 정평이 난 예수에 관한 충격적 주장(부활, 하나님의 아들)과 예수 운동이 비유대인들을 영입하여 그들을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취급한 배경 때문이다.(21 페이지)
길리기아 속주의 다소(터키 남동부) 출신인 바울은 유대인 지성인이자 자칭 바리새인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소요를 일으킨다는 명목하에 로마 당국자들에게 체포되었다.(27 페이지) 바울이 처형당한 것은 60년대 즉 50을 넘긴 나이였을 것이다. 죄목은 반란죄 또는 치안을 어지럽힌 것이다.(28 페이지)
‘단숨에 읽는 바울’은 바울의 고투(苦鬪)와 감정들을 알게 하는 책이다. 하지만 로마 문명의 전복이라는 큰 사건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한다는 데에 책의 중요성이 있다. 바울이 활동했던 도시들은 이미 확장세를 타고 있던 로마 제국에 편입되어 있었다.(63 페이지)
의외인 점은 바울의 신학은 교육을 받은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비해 철학적으로 덜 헬레니즘화되었다는 말(51 페이지)이다. 바울의 언어는 여러 철학적인 관점과 조화를 잘 이룰 정도로 적응력이 뛰어나며 구원 및 이에 따른 인간의 자아실현에 관한 그의 이해는 스토아학파, (신) 플라톤주의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헤겔 혹은 실존주의 철학자 등에 의해 다양한 철학적 옷이 입혀졌다.(97, 98 페이지)
오독인지 모르나 바울은 양가적이었던 것 같다. 그 자신 미혼이었던 바울은 미혼을 옹호하는 신학적, 실천적 주장을 다양하게 전개했지만 결혼을 반대하거나 부추기지는 않았고(66 페이지) 예수를 못 박아 죽인 이 세대의 통치자들을 폄하하기도 하고 예수를 이 세상의 모든 권력을 능가하는 권력을 지닌 우주의 주님으로 높였으나 로마서를 기록할 때에는 이 세상의 권세에 복종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70 페이지)
바울은 자신이 받은 소명은 독립적인 것이라 생각했다.(74 페이지) 바울은 종교를 바꾸지 않았다. 즉 개종하지 않았다.(22, 23 페이지) 바뀐 것은 그의 생각이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바울의 개종 이야기란 말을 한다,(76 페이지)
바울의 편지는 이해하기 어렵고, 성경의 지위를 가진 권위 있는 글이고,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많고, 그렇기에 구원 자체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90 페이지) 바울이 그리스도가 율법의 텔로스가 되신다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일까? 텔로스는 마침을 의미하기도 하고 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울은 자신이 역사의 마지막 세대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95 페이지) 바울은 죄라는 용어로 위법 행위는 물론 불순한 세력까지 지칭했다.(96 페이지) 저자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본문을 해석하는 사람은 모두 각자의 관심사와 정황, 개성을 본문에 투영하는데 심지어는 자신들의 전제들을 본문이 깨뜨려주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그렇다.(98 페이지)
오늘날의 바울 해석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다. 그는 로마서 7장에 매료당했다.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한다는 구절이다. 은혜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급진적 해석들은 가능하긴 하지만 필수적인 바울 읽기는 아니었고 성경의 다른 본문들과 상당한 긴장을 초래했다.
그가 생을 마감할 시기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그를 흠모하던 사람들 중에서도 그가 너무 극단적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후대 신학자들은 때로는 그의 일부 극단적인 결론에 대해 자신의 지지를 거두어들이기도 했다.(109, 110 페이지)
마르틴 루터가 성경의 권위를 그리스도교의 다른 모든 권위 위에 올려놓았지만 신구약 성경 모두를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해준 것은 바로 바울의 편지들이었다. 바울의 독신주의 조언을 결혼보다 성적 순결을 우선순위에 놓는 것으로 이해한 오랜 해석 전통에 대항하면서 루터는 자신의 수도승 서약을 파기하고 수녀와 결혼해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았으며 결혼과 가정의 소박함을 향유했다.(119, 120 페이지)
루터는 영적 서열 없이 오히려 삶 전체를 신성한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저자는 비록 이론적으로는 개신교의 관점에서 성경 전체를 읽는다곤 하지만 다른 나머지 성경에 비해 바울의 편지들이 기형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던 것도 사실 부인하기 어렵다고 말한다.(124 페이지)
놀라운 사실은 바울이 한 번도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자칭 유대인이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당대에 고안된 것이다. 바울의 유산은 서로 엄청나게 다른 해석을 모두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모호하다.(130 페이지)
유럽의 반유대주의가 성장한 데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바울에 대한 해석도 신학적 원인 중 하나다, 저자는 바울은 앞으로도 계속 논란이 많은 1세기의 목소리로 남아 있을 것이라 말한다.(137 페이지)
저자는 말을 참 잘한다. 가령 바울이 어떤 이들을 매료시킬 수 있다면 또한 그는 급진적인 사회를 추구하는 이들을 실망시킬 수도 있다(143 페이지)는 말을 보라. 아이러니한 것은 바울의 편지들이 18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걸쳐 진행된 노예 문제 논쟁에서 양 진영에 의해 원용되었다는 점이다.(143 페이지)
노예제도 옹호자들은 주님이신 예수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범사에 주인에게 복종하라는 말을 인용했고 반대자들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면서 그를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고 묘사한 구절을 원용했다.
바울은 나름대로 장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생각은 우리가 기대하는 바대로 자유, 평등, 관용 등과 같은 가치와 항상 부합하지는 않는다,(150 페이지) 모든 정체성을 그리스도께 속함이라는 숭고하고 유일한 선(善) 아래 두면서 상대화시키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로지 현재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결과만을 초래한다.
저자는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보다 논란의 대상이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말한다. 바울의 본문들은 충분히 열려 있다. 다시 말하지만 얇은 분량에 핵심적인 내용들을 담아낸 내공과 글 솜씨가 대단하다. 바울에 대한 애정보다 비판적 지지를 하는 데 마음이 갈 것 같다. 물론 애정을 위해 읽은 책이 아니라 비판하기 위해 읽었는데 지지의 마음이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