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해법 - 블랙홀 서울, 땅과 건축에 관한 새로운 접근법
김성홍 지음 / 현암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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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가 시대를 초월하는 생각을 가졌더라도 건축물은 장소, 기술, 노동이란 기반 위에 만들어진다...건축물이 제도판에서 잉태되어 현장에서 구현되는 과정은 역사에 비유하면 정사(正史)에 야사(野史)가 가려지는 경우다.“.. 이 인상적인 내용이 프롤로그에 담긴 책이 김성홍의 ‘서울 해법’이다. 저자는 수잔 랭거(Susanne K. Langer; 1895 - 1985)의 은유를 소개한다. 비담론의 넓은 바다에서 담론의 작은 섬에 갇히는 것이란 말이다. 사람들이 몸으로 느끼는 건축을 언어화하는 순간 깊고 풍부한 건축의 전체성은 언어의 논리로 축약된다는 것이다.

 

책은 1부 땅, 2부 제약, 3부 관성, 4부 명제로 이루어졌다. 서울처럼 산으로 둘러싸인 수도는 흔하지 않다. 베이징, 도쿄, 워싱턴 D. C, 런던, 파리, 베를린 모두 평지다. 한양도성으로 둘러싸였던 4대문 안과 그 밖 일부를 역사 도심이라 부른다. 이곳의 면적은 서울 전체 면적의 2.9 퍼센트(17.9 제곱 km)에 지나지 않는다. 인구는 9.7 퍼센트, 인구 밀도는 서울시 평균의 1/3이다.(42 페이지)

 

토지구획정리사업은 19세기 말 스위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은 20세기 초 이를 독일에서 도입하여 도쿄, 요코하마를 재건했고 한반도, 대만 등 강점(强占) 지역에도 시행했다. 1980년대에는 이 사업을 통해 가나자와, 사이타마, 지바 등 교외 신도시를 건설했다. 일본이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자국에 도입한 목적 및 배경과 경성을 포함한 강점 도시에 시행한 그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일제가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편 것은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함으로써 토지 경작권을 잃고 영세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경성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54 페이지)

 

서울의 신시가지 조성은 한양도성 밖 동북쪽 관문이었던 혜화문 밖 돈암동에서 시작되었다.(55 페이지) 구획정리사업의 정점은 강남이 탄생한 것이다. 구획정리사업은 불규칙한 필지를 곧게 펴고 잘게 나누면서 개인이 소유한 필지의 일부를 떼어 길과 공원 등의 공공용지를 확보한다.(57 페이지) 세계 도시 비교 연구를 해온 존 페포니스는 모더니즘을 둘로 나누었다. 주변 맥락과 독립된 오브제와 스펙터클한 내부 공간을 만나는 모더니즘, 건축과 도시의 인터페이스를 만들어 대면 접촉을 촉진하는 모더니즘이다.

 

저자는 성장하는 도시에만 익숙했던 한국도 서유럽과 일본이 겪고 있는 문제를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69 페이지) 저자는 서울의 인구 집중화에 따른 주택난을 해결하고 부족한 도시기반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도입했으나 부동산 투기와 정치 비리의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던 구획정리사업지구는 이제 필지 단위에서 소블록 단위의 재생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을 맞고 있다고 말한다.(73 페이지)

 

구획정리사업은 서울 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이었다. 그리드 바탕 위에 작도한 경복궁 복원도가 전해오지만 조선 초기 경복궁을 이 방식으로 계획했는지는 알 수 없다.(76 페이지) 서울은 20세기 후반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도시 집중화를 겪었다.(117 페이지) 저자는 5년제 건축학 교육을 받고 실무 수련을 마친 예비 건축사의 설계 능력을 시험으로 판단하는 것은 수요와 공급 논리로 건축사 수를 제한하는 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120 페이지)

 

지난 50년간 건설사업의 성장 동력은 더 높은 용적률을 향한 집단적 욕망이었다.(128 페이지) 저자는 이 부분에서 여러 저자들이 쓴 ‘서울의 인문학’에 실린 자신의 글을 소개한다. 용적률(容積率)이란 대지면적에 대한 연면적(건물 바닥 면적의 합)의 비율을 말한다. 가령 집의 연면적이 대지면적과 같으면 용적률은 100퍼센트, 연면적이 대지 면적의 2배이면 용적률은 200퍼센트가 된다. 건폐율(建蔽率)은 대지면적에 대한 건축면적(1층 바닥 면적)의 비율이다. 건폐율이 50퍼센트인 집을 4층으로 지으면 용적률은 건폐율의 4배인 200퍼센트가 된다.(‘서울의 인문학’ 191 페이지. 積은 쌓을 적자다. 蔽는 덮을 폐자다.)

 

저자는 건축은 숫자로 치환할 수 없고 치환되어서도 안 되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영역’이지만 문제는 지난 50년간 건축을 추동한 밑바닥에 용적률이 있었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130 페이지) 인구 밀도가 높다고 용적률 게임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땅값 상승이 받쳐주어야 하는 것이다.(133 페이지) 한양의 단층집은 수직으로 쌓을 수 없는 목구조와 온돌 결합 방식이었다. 구한말 한양은 건폐율과 용적률이 70퍼센트로 같았던 수평도시였다.

 

2016년 서울의 평균 용적률은 70퍼센트에서 145퍼센트로 2배 올랐다. 지난 100년간 서울의 시간은 용적률을 2배 올리는 과정이었다. 현재 평균 건폐율이 50퍼센트라고 가정하면 높이 평균은 2.9층이다.(145/ 50; 2.9) 저자는 네덜란드의 건축가 렘 콜하스(Rem Koolhaas; 1944 - )를 소개한다. 그는 거대 도시 맨해튼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부한 ‘광기의 뉴욕’이란 책으로 주목을 받은 사람이다.

 

건축 기술은 보수적이다. 변화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145 페이지) 공장에서 생산하는 완제품과 달리 건축은 땅을 딛고 있으므로 하이테크와 로테크를 모두 필요로 한다.(146 페이지) 스위스는 전 세계 최고의 품질을 유지하는 건축의 나라다. 850만의 인구에 건축사, 건축 엔지니어 수는 16,000명으로 인구 5000만 명인 남한의 건축사 수에 육박한다. 기존 건축사들의 생존을 위협한다고 건축사 합격자 수를 암묵적으로 조절하는 한국보다 경쟁이 더 치열하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건축학과 졸업장이 곧 건축사 자격증이 된다.(149 페이지)

 

맑스는 노동자들이 생산한 상품의 가치가 시장에서 어떻게 가격으로 전환되는지를 규명하고 이론화했다. 자본주의에서 상품 가치는 기술적 한계가 아니라 사람의 관계에서 형성된다는 맑스의 가치론은 논쟁거리다.(155 페이지) 저자는 버내큘러(vernacular)를 번역할 마땅한 우리말이 없다고 말한다. 건축에서는 평범한 집을 짓는 데 사용하는 지역 양식을 의미한다. 평범, 비공식, 비표준, 장소, 지역, 언어, 방언, 양식 등을 포괄하는 단어다. 이 단어가 사전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1700년경이다. 집에서 태어난 노예, 원주민을 의미하는 라틴어 베르나(verna)에서 파생한 말이다. 영국이 아메리카와 서인도에 방대한 식민지를 구축하던 시기다.

 

저자는 일본 신사(神祀)를 닮았다는 김수근의 부여박물관 논쟁, 법주사 팔상전(八相殿)을 콘크리트 덩어리로 차용했다는 정봉진의 국립민속박물관 논쟁은 모더니즘의 수동적 학습자이면서 전통 현상에 대한 혼돈과 목마름을 앓았던 1세대의 필연적 결과였다고 말한다.(168 페이지) 부여박물관 논쟁은 도리이(鳥居; とりい) 논쟁이기도 하다.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부여박물관(현 국립문화재연구소)을 보고 김중업 건축가가 일본풍이라고 비판한 데서 비롯된 논쟁이다.

 

버내큘러와 비교할 말이 제네릭(generic)이란 말이다. 제네릭 도시란 특징 없고 무미한 도시를 말한다.(164 페이지) 저자는 주변과 무관하게 고유한 것이 있었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며 만들어낸 가공이라 말한다.(175 페이지) 저자는 서울을 향한 타자의 비판, 냉소, 폄하, 훈수에 대해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제3의 시선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면 된다고 말한다.(176 페이지)

 

저자는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를 읽는 것은 필요하지만 고증을 통해 입증할 수 있는 사실과 상상에 기댄 가공은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록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지배자, 승자, 강자의 틀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 집중하면 된다.(177 페이지) 평면도는 허리 높이에서 건물을 수평으로 자르고 위에서 바닥면을 내려다보고 그린 도면이다. 평면도는 보고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가정하고 그리는 가상 도면이다. 건축가들은 2차원 평면도와 단면도를 보고 3차원 공간을 상상할 수 있고 역으로 3차원 공간을 경험한 후 평면도와 단면도를 그릴 수 있다.(181 페이지)

 

서울에 2층 상가가 들어선 것은 일제강점기다. 단층이었던 상점을 2층으로 짓도록 한 조선총독부 정비령 때문에 조선 상인들이 파산하기도 했다.(215 페이지) 저자는 근린생활시설(근생)이 주택가에 침투한 사례를 열거한다. 신사동 가로수길, 강남 역삼동, 잠실 방이시장, 홍대앞 서교동, 연희동, 건대입구역 화양동 등이다. 저자는 왼쪽을 빨간 튤립이, 오른쪽은 노란 튤립이 이랑을 따라 일렬로 심어진 밭을 반(半) 자연이라 말한다.(255, 256 페이지) 사람 손을 거친 자연이라는 의미다.

 

패턴이란 자연이나 인공물에 내재하는, 확연히 구별되는 규칙성을 말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단순한 규칙이 만들어낸 집합적 패턴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랭거는 비담론적 예술을 표상 상징이라 설명했다. 저자는 건축은 언어의 세계와 느낌의 세계 사이에 교묘하게 걸처져 있다고 말한다.(258 페이지) 건물은 공간적으로 시각 예술을, 시간상으로 음악의 스케일을 능가한다.(264 페이지) 건물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내외부 전체를 움직이며 경험해야 한다.

 

게슈탈트 심리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눈에 들어오는 시각적 환경을 최대한 단순하고 정형적 형상으로 축약하려는 경향이 있다. 복잡한 사물과 현상을 쉽게 지각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다.(267 페이지) 도시 연구는 귀납적이다. 현상을 파악하고 대안을 찾아간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건축 연구는 연역적이다. 자신이 설정한 아이디어를 맥락화하고 합리화한다. 이미 내린 답을 역으로 검증하는 과정이다.(274 페이지)

 

앙리 베르그송은 인간의 의식 세계는 분석하고 계량화할 수 있는 물질세계와 다르며 직관만이 대상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직관은 대상을 맴돌며 분석하고 판단하지 않고 대상 안으로 곧바로 들어가 표현할 수 없는 무엇과 공감하는 것이다. 많은 장소에서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고 도면을 분석하더라도 도시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론 직관과 즉물적 감각으로 단번에 도시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다.(275 페이지) 도시계획은 집단의 욕망을 제어하고 건축설계는 개인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이질성과 역동성은 종이 한 장 차이다.(285 페이지) 동으로는 일본, 서로는 티베트, 남으로는 베트남에 이르기까지 기후, 재료, 기술, 관습에 따라 동아시아 목구조 건축은 다양하게 갈래를 쳐왔다.(288 페이지) 우리는 고유한 것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우수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전통의 원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속성의 토대 위에 변용과 변화가 있을 뿐이다. 고정된 전통은 우리가 만든 가공이다. 도시와 건축에서 오염된 단어가 커뮤니티란 말이다.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물리적, 심리적 경계를 만드는 설계안에 커뮤니티라는 말이 붙는다.(300 페이지)

 

저자는 서울은 레비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정의한, 한 곳을 깊이 파는 고슴도치와 여러 곳을 살피는 여우의 모습을 지닌 다면적 브리콜뢰르 건축가를 기다린다고 말한다.(314 페이지) ‘서울 해법’은 새로운 개념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책, 진지하고 묵직한 사유의 궤적을 보여주는 책이다. 사안이 있을 때마다 다시 들춰볼 책이다. 건축의 매력과 특성을 단편적이나마 음미할 수 있었다. 조선과 일제강점기, 근현대 한국을 연결짓는 통시적 접근법이 빛을 발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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