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가로 보는 경성 풍경 식민지 일본어 문학.문화 시리즈 58
엄인경.김보현 편역 / 역락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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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카(’短歌; 단가’로 보는 경성 풍경‘은 엄인경, 김보현이 편역한 책이다. 경성의 일흔 네 명소를 읊은 재조(在朝) 일본인의 단카 사백여 수를 번역하고 원문과 함께 각 명소의 과거 혹은 현재의 사진을 함께 실은 책이다. 단카는 5.7.5.7.7의 다섯 구 서른 한 음절로 이루어진 일본의 전통적 문예 장르다.

 

조선은행(朝鮮銀行)을 보자.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발권은행인 구(舊) 한국은행은 1909년 10월에 설립되었다. 1911년 8월 15일 일본이 조선은행법을 공표하면서 명칭을 조선은행으로 개칭하였고 조선총독부 산하에 놓이게 되었다. 1950년 한국은행법에 의해 조선은행을 인수하여 대한민국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세워졌다.

 

하세가와마치(長谷川町)를 보자. 소공동은 러일전쟁 당시 조선군사령관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거주했다 하여 일제강점기에 하세가와마치로 불렸다. 러일전쟁의 수훈으로 자작 지위를 받은 그는 1916년 조선 총독에 취임, 무단정치의 주역으로 군림했다. 하세가와마치는 1946년 동명 개정 시기에 소공동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단카를 보자. 나도 모르게 마음 차분히 걷는 포장도로의 가로수 그늘에는 가을바람 불었네. おのづからこころしづかに步みゆく鋪道樹かげや秋風ふきつ.

 

조선호텔은 1914년 현 서울시 중구 소공동에 건립된 호텔이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조선 국왕의 제례를 행하던 환구단(또는 원구단)의 일부를 헐고 지은 건물이다. 처음에는 철도 호텔이라 불렸다. 호텔 내에 황궁우, 석고, 석조 대문이 남아 있다. 독일 건축 기사가 설계를 맡았다. 광복 이후 운영권이 일본인에서 조선인으로 넘어오게 되어 현재 조선호텔에 이르렀다.

 

일본 최초의 백화점인 미쓰코시는 조선에 건너와서 1906년 미쓰코시 백화점의 경성 출장소인 미쓰코시 오복점(吳服店)으로 출발하였고 1929년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 지점으로 승격했다. 1930년 현 회현동 충무로 1가(소공로 63)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근대식 백화점 건물을 신축, 개점했다. 해방 후 동화백화점으로 상호를 변경, 1963년 삼성이 인수하면서 오늘날의 신세계백화점으로 이어졌다. 별이 빛나는 아름다운 밤 경성 미쓰코시의 옥상에는 가을의 화초들과 물소리.

 

1898년 10월 3일 남산 왜성대(倭城臺;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주둔지였던 것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이 건립되었으며 1925년 5월 22일 조선신궁이 건립되면서 이름이 경성신사로 바뀌었다. 광복 후 해체되었으며 신사가 철거된 자리에는 현재 숭의여자대학교가 들어섰다.

 

약수대(藥水臺)는 지금의 종로구 가회동 취운정 아래의 약수대다. 취운정은 1870년대 중반 조선 후기의 정치가 민태호가 지은 정자로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의 회합장소로 이용되었다. 현재 정자는 사라지고 삼청동 감사원 뒤에 취운정 터가 남아 있다.

 

박문사는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추념하는 사찰로 이토의 23주기 기일인 1932년 10월 26일 현재 장충동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완공되었다.

 

경복궁은 서울 종로 세종로의 조선시대 정궁으로 태조 이성계가 창건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가 고종 때인 1867년 중건되었다. 중구 정동의 조선시대 궁궐인 덕수궁은 본래 명칭은 경운궁이었으나 1907년 고종 황제의 장수를 비는 마음에서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안의 잔디밭에는 붉게 타오르는 사루비아(サルビア) 꽃이 지금 한창 피어 있다.(샐비어가 원래 이름이다. 영어로는 sage라 한다.)

 

조선총독부는 일제강점기 일본이 조선에 설치한 식민 통치의 중추 기구로 경복궁 근정전과 광화문 사이에 1926년 10월 건립되었다. 독일인 게로르크 드 라란데가 설계 초안을 마련하고 노무라 이치로가 마무리 설계를 한 총독부 청사는 당시 동양 제일의 건축물로 꼽힐 정도로 압도적 규모와 외관적 위용을 갖춘 건물이었다.

 

서대문편에는 이런 내용의 글이 나온다. 서대문을 부순다고 하는 날 살짝 소매에 넣어서 집에 왔네 바로 이 돌멩이를. 파고다공원은 지금의 탑골 공원이다. 고종 때 원각사 터에 조성한 최초의 공원이다.

 

경학원(經學院)은 1887년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이 개칭된 이름이다. 성균관은 유생들의 교육기관으로 명목만을 유지하다가 1894년 폐지되었다. 일제에 병합된 후 조선총독부가 남아 있던 성균관을 경학원이라는 이름으로 재개칭했다. 일제강점기 경학원은 천황의 하사금으로 설립되어 총독부의 식민 정책에 부합하는 교육기관으로 전락하였다. 1920년 명륜학원으로 개칭되었고 1937년에 명륜전문학원, 1942년에 명륜전문학교를 거쳐 1946년 성균관대학교로 이어졌다.

 

푸른 잎 짙은 은행나무 그늘에 오래된 공자님의 혼백 사당 절 올리기 잊었네.(은행나무가 있지만 ’행단; 杏壇’의 행은 살구나무라는 말이 있다. 살구나무가 유교의 상징나무라고 한다.) 신당리는 현 중구 신당동의 1936년 이전 명칭이다.

 

한강은 강원도, 충북, 경기도, 서울 등 한국 중부를 거쳐 서해로 유입하는 큰 강이다. 고기잡이 배 불빛 하나 비치는 강의 수면에 삐걱 노 젓는 소리 고요히 전해오네. 월파정(月波亭)은 조선 시대부터 한강 서남쪽의 노량진 부근 언덕에 존재했던 정자로 현재는 터만이 남아 있다.(동작구 노량진동 수산시장 내 15-1 번지) 일본의 토목청부업자였던 아라이 하쓰타로가 소유했었다. 해방 이후에는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이 별장으로 사용하였다.

 

뚝섬(둑도; 纛島)편을 보자. 현 광진구 자양동과 성동구 성수동 1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 임금의 행차를 알리는 깃발인 둑기(纛旗)를 세운 곳이라는 의미다. 물이 흐르지 않는 삼전도에서 아득히 멀리 대청황제비석이 서 있는 것을 보네. 삼전도는 송파구 삼전동의 나룻터다. 조선시대 광주부 서북쪽 한강 연안에 있던 나루였으며 여주, 충주로 가는 길목이 되었다. 조선시대 한강도(漢江渡), 양화도(楊花渡), 노량도(露梁渡)와 더불어 4대 도선장의 하나였다. 글이 새겨진 비석 앞쪽 여진족 글자 못 읽어도 한 글자 한 글자를 눈으로 응시하네.

 

개운사(開運寺)는 성북구 안암동의 절로 1396년 무학대사가 현대 고려대학교 이공대학 부근에 창건하여 영도사라 하였던 것을 1779년 인파당(仁波堂) 축홍(竺洪) 스님이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개운사라 하였다. 산 속 절에서 낮이 깊어갈 때에 마당 앞에는 백일홍이 만발해 어지럽게 피어 있네. 돌베개 삼아 구름이 돌아오길 기다린다는 이 산속 절 주련에 적혀 있는 글귀네.

 

망우리(忘憂里) 고개는 망우산 북쪽 능선에 있는 고개로 옛날부터 서울로 들어오는 동부 관문이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 개국 후 묏자리를 정하기 위해 고심하다가 동구릉의 건원릉 터를 유택지로 정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이 고개에 이르러 잠시 쉬면서 주위의 산천기세를 둘러보고 오랜 근심을 잊게 되었다 하여 유래한 이름이다.

 

서빙고는 용산구 서빙고동에 있던 마을로서 조선 후기부터 국가에서 사용하는 얼음을 저장해 둔 빙고의 서쪽에 있던 마을인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하늘 뒤덮은 구름의 어느 한 곳 햇빛 새나와 저쪽 편 기슭 물이 하얗게 반짝이네. 신촌(新村)은 조선시대에 새터말이라 부르는 것을 한자로 바꾸어 부른 이름이다. 산을 넘어 온 골짜기에 들국화 흐드러지게 꽃 피우고 낮 시간 고요하게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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