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비어 수준의 역사가 회자되는 경우가 있다. 영조가 정성왕후 서씨를 미워하게 된 경위를 말하는 기사도, 책도 일화가 있다고만 이야기하니 말이다.(문서 자료가 없이 민간에서 구전되던 이야기인가?) 첫날밤에 영조가 정성왕후에게 손이 곱다고 말하자 정성왕후가 고생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에 영조는 다시 정성왕후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
책은 이 이야기는 현실성이 떨어져 사실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고 말한다. 어떻든 영조와 정성왕후 이야기는 지난 해 칠궁(七宮)에서 담당 해설사로부터도 들은 이야기다.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일화가 사실일 경우 영조의 성격이 참 기이하다는 것이다. 물론 영조는 이것이 아니어도 충분히 까다롭고 별났다.
어떻든 기이하다고 말하는 것은 영조가 첫날밤 사건으로 다시 찾지 않은 정성왕후가 죽자 홍릉(弘陵)을 조성한 뒤 그 옆자리를 신후지지로 삼았기 때문이다.(첫날밤 일화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영조가 정성왕후를 박대하고 무시한 것은 사실이라 해야 하겠다.) ‘한중록’에 수록된 영조의 성격은 편집증적이거니와 자격지심과 열등감(특히 아들에 대한)을 전매특허처럼 지니기도 했다.
그나저나 사람들은 복수를 좋아하는 것 같다. 정조가 103년간 비어 있던 묘자리(효종이 묻혔던 곳)에 영조를 묻은 것을 복수라 하고, 아버지 사도세자를 친자식처럼 대하고 자신을 친손자처럼 대해준 정성왕후를 영조와 함께 묻지 않음으로써 은혜를 갚은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조가 자신을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말했으나 근본을 둘로 하지 않을 것이라 결론지었음에도 앞 부분만 언급하며 그것을 복수를 천명한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정조는 할만큼 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관계했던 자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복수라기보다 최소의 불가피한 개입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