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질학은 교실에 앉아서 사고하기보다 야외에서 그 대상을 직접 관찰하고 만져 보고 느낄 수 있을 때 가치가 더욱 빛나는 학문”(이한조 지음 ‘라이엘이 들려주는 지질조사 이야기’ 책머리에)이란 말을 들었을 때 생각한 것이 방콕 여행자(voyager casanier: 보야지 카자니에 정도의 발음일까요?)란 말이다. 피에르 바야르는 바로 이 방콕 여행자란 개념이 담긴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이란 책을 한 번도 자신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를 벗어난 적 없이 언제나 동일한 도정을 따라 산책을 한 ‘방콕 여행자의 상징’ 같은 칸트에게 바친다는 말을 했다. 칸트는 오직 책을 통해서만 외부 여행을 했음에도 알프스 지형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한다.(백종현 지음 ‘인간이란 무엇인가’)
피에르 바야르는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 이야기를 한다. 마르코 폴로가 가족 소유의 해외 상관(商館)이 있었던 콘스탄티노플에서 숱한 여행객들에게 들은 이야기로 자신의 몽상을 살찌웠을 것이라 주장한 중국학 전공자 프랜시스 우드의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 갔었는가?“란 책을 언급하며 바야르는 폴로가 대단한 상상력의 소유자였던 게 분명하다고 말한다.
마르코 폴로가 과연 콘스탄티노플까지 갔는지조차 의심스럽고 차라리 베네치아 외곽의 어느 평화로운 장소에 은둔했으리라는 것이 바야르의 생각이다. 마르코 폴로는 청금석(靑金石)이라 불리는 라피스라줄리와 인연이 깊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라피스라줄리를 세상에 알린 사람이 바로 마르코 폴로다.
그가 아버지 니콜로와 숙부 마테오를 따라 중국을 향해 가던 중 방문한 아프가니스탄의 바다흐샨 광산에서 본 것이 푸른색으로 빛나는 돌과 그 표면에 박힌 금이었다. 마르코 폴로 일행이 광산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황과 쿠빌라이 칸의 친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다.(좌용주 지음 ’가이아의 향기‘ 65 페이지)
진실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이란 책의 저자인 바야르가 쓴 자매격의 책인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 대해 말할 필요는 있겠다고 생각한다. 바야르는 책들에 관한 담론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전체를 숙지하고 있느냐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언급한 숙지란 고립된 요소들을 잘 아는 것이 아니라 관계들을 잘 아는 것이라 말했다. 공감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한 바탕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문리(文理)가 트이기 위해서는 충분한 지식을 습득해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참고할 말을 꺼내고 싶다. 철학 박사이자 글쓰기 강사인 이유선의 말이다. ”거의 일년 내내 책을 읽으면서도 항상 책을 읽으면서 살았으면 하는 꿈을 꾸면서 산다. 아마도 나는 책을 읽으면서도 그 책이 내가 진정으로 읽고 싶은 책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책을 읽는 대부분의 상황이 내가 꿈꾸었던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럴지 모르겠다...늘 시간에 쫓겨 책을 읽는다. 아무리 읽어대도 책들은 마치 공포영화의 좀비들처럼 새롭게 나타난다.“(‘아이러니스트의 사적 진리’ 16, 17 페이지)
철학박사이자 글쓰기 강사로 책을 그렇게 많이 읽는 그가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지 못해 읽고 싶은 책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쉼없이 나타나는 공포영화의 좀비들에 비유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고, 세상에는 하나로 수렴하는 앎의 총체성이 있기에 지식들의 관계니 맥락이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이겠지만 사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문학평론가 정은경(鄭恩鏡)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이야기는 다 얘기되었고 모든 형식도 다 실험되었다고 생각했다.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될 것 같고 그 파도의 출렁임 속에 피로와 허무로 잔뜩 찌들어 있던 어느 날, 이 책은 나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서사가 다시 반복된다 해도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고 이야기는 새로운 인간과 작가들에 의해 첫 키스처럼, 첫 리듬으로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밖으로부터의 고백 디아스포라로 읽는 세계문학’ 109 페이지)
할레이드 호세이니의 장편 소설 ‘연을 쫓는 아이’를 두고 한 말이다. 문학작품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였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문과학이나 자연과학 분야의 책들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읽은 인상적인 책들 가운데 김경만 교수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상징폭력’이란 개념을 논한 책이다.
상징폭력이란 선학(先學)들이 이루어놓은 지식의 장(場)에 진입해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그들이 이루어놓은 성과로부터 연구를 시작해야 하기에 감수할 수 밖에 없는 후학들의 고통을 말한다.(123 페이지) 김경만 교수는 거인의 어깨를 논한다.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탔기 때문“이라는 뉴턴으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작가이자 수학자인 로빈 애리앤로드는 뉴턴의 말이 진리를 겸손하게 인정한 말일뿐 아니라 자신에게 끊임없이 표절 혐의를 씌운 ‘키가 작고 구부정한’ 로버트 훅을 겨냥한 말이기도 하다고 말한다.(‘물리의 언어로 세상을 읽다’ 101 페이지) 애리앤로드는 ‘거인의 어깨’ 운운한 뉴턴의 말을 뉴턴답지 못한 말이라고 말했다.
어떻든 뉴턴이 설령 훅을 조롱해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이는 후학이 선학으로부터 상징폭력을 당하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하는 사태를 잘 말해주는 경우라 하겠다.(후크는 최초로 ‘세포; cell‘이란 말을 사용했고 뉴턴과 달리 빛의 파동설을 지지한 사람이다.) 요컨대 선학과 후학의 근원적 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만일 상징폭력이란 말을 숙지하고 있다면 그런 관계를 길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 개념을 숙지하는 것도 관계를 숙지하는 것만큼 중요하다. 학문(學問)이란 말은 ’주역(周易)‘에서 비롯된 말이다. 배움으로써 모으고, 물음으로써 분별할 일(’학이취지: 學以聚之 問以辨之’)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주역 건괘 문언전)
칸트 전공자인 백종현 교수는 많이 배우는 것이 먼저이고 분별하는 것은 나중이라고 말한다.(‘인간이란 무엇인가’ 75 페이지) 개별 지식보다 관계를 보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내공이 어설픈 사람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종현 교수는 철학을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철학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칸트를 언급한다.(‘인간이란 무엇인가’ 76 페이지) 이 말은 고립된 지식에 집착하지 말고 지식들의 관계를 헤아려야 한다는 말과 맥락이 같다. 지질학 공부를 위해 책을 펼쳤으나 첫 줄을 읽고 이런 가외(加外)의 상상을 하는 나는 무엇을 하려 하는가? 나는 고향 밖을 한 번도 여행한 적 없으면서도 알프스의 지형을 누구보다 많이 숙지했던 칸트가 부럽다.
사물들 속으로 산책하기 위해 눈을 통해 나선 내 정신의 여행을 접어야겠다. 나는 엄청난 암기력과 학구열로 분야를 가리지 않고 지식을 흡수(홍대선 지음 ‘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 147 페이지)했기에 책만으로도 알프스의 지형을 깨알처럼 알 수 있었던 칸트를 섣불리 닮고자 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한다. 공부하자. 나는 많으면 달라진다(more is different)란 말을 믿는다. 물론 내 지식의 맥락 안에서 의미 있는 개별 지식들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염두에 두는 공부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