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충격으로 읽는 것은 아니지만 충격 때문에 고요히 음미할 수만은 없는 경우가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의 경우 1990년대 초 홍정수 교수의 ‘베짜는 하나님’이 그랬다. 기독교 신학자가 쓴 불교 비판서인 정일권 교수의 ‘붓다와 희생양’도 그랬다.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뱅의 튤립(TULIP) 교리를 절충적으로(자의적으로) 신봉하는 교계에 대한 비판서 정도로만 알았던 신광은 목사님의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도 그렇다고 보아야 하겠다. 아르뱅이란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칼뱅주의를 절충한 용어다. 저자가 절충한 것이 아니라 그런 현상이 있기에 용어를 만든 것이다. 비판하기 위해서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1) 인간의 자연적 무능력, 2) 조건적 선택, 3) 보편 속죄, 4) 저항할 수 있는 은혜, 5) 조건적 견인 등을 종지(宗旨)로 한다. 칼뱅주의는 1) 구원에 관한 한 전적 타락(Total Deprivacy),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4) 저항할 수 없는 은혜(Irresistible Grace),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Saints) 등을 종지로 한다. 앞 글자들을 따 TULIP 교리라 한다.
한 가지만 이야기하면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믿음이, 구원을 위해서 나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공짜 심리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전적 타락이란 교리는 성화(聖化: 거룩해지는 것)의 부담을 누그러뜨리는 용도로 사용된다. 이어 아무리 거듭난 사람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논리로 이어지고 윤리적으로 실패한 교회와 신자를 정당화하는 데로 이어진다.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였던 홍정수 고수의 ‘베짜는 하나님’은 기독교가 고대 희랍의 영혼불멸사상과 후기 유대교의 육체의 부활 사상을 어정쩡하게 결합한 사상이라고 주장한 책이다.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학과 신학을 전공한 신광은 목사님의 ‘천하무적 아르뱅주의’에 이런 구절이 있다.
“기독교는 죽을 때 영혼이 육체를 떠나 혼령들의 고향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죽은 뒤 부활체로 변형될 때까지 잠시 기다림의 시간을 갖는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예수를 믿는 이들이 부활체로 변형되어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에 들어가리라는 것이 부활신앙이다. 이 부활 신앙은 고린도전서 15장에 장엄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가장 오래된 사도신경에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라는 요약된 고백 속에도 들어 있다.”(414 페이지)
내가 믿는 종교도 아니고 굳이 가릴 필요가 없기에 신광은 묙사께서 한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 이야기를 짧게 하고 말아야겠다. 저자에 의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영혼불멸사상을 기독교에 거의 그대로 도입한 인물이다.(421 페이지) 아우구스티누스로 인해 하나님 나라는 근본적으로 피안적인 것이 되었으며 기독교 구원도 개인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422 페이지)
여담이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어식으로는 어거스틴이라 불린다.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플라톤 – 어거스틴’이란 짝을 짓기 위해서다. 톤으로 끝나는 사람과 틴으로 끝나는 사람을 잇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과 그의 사상을 수용한 어거스틴을 잇는 것이다. 다행이 톤과 틴이란 마지막 음절이 비슷하게 만나는 것이다.
나머지 한 짝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는 아로 시작해 스로 끝난다.(이렇게 외우면 가억하기 좋다.) 이런 구절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이 플라톤을 재구성했던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를 신학으로 재구성한 인물이다.”(이영진 지음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9 페이지) 문장이 명쾌하지 않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어거스틴은 플라톤을 재구성했다고 말하면 좋았을 것이다. 홍정수, 신광은, 이영진의 공통점은 플라톤을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플라톤을 공부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