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공부할 시간 - 인문학이 제안하는 일곱 가지 삶의 길
김선희 지음 / 풀빛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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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의 나를 공부할 시간은 사마천과 괴테, 디드로와 이규경, 브루노와 최제우, 홍수전과 로자 룩셈부르크, 스피노자와 정약용, 성호 이익과 레비나스, 페트라르카와 주희를 각기 다른 주제로 묶어 설명한 책이다. 사마천과 괴테는 여행하는 삶, 스피노자와 정약용은 유배당한 삶, 성호 이익과 레비나스는 공감하는 삶 등이다.

 

세창출판사에서 나온 프레너미 시리즈가 있다. 사상적으로 대립하면서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학문을 발달시켜온 둘 이상의 사상가를 비교, 대조하여 이해를 극대화시키는 시리즈라고 한다. 니체 vs 바그너, 하이데거 vs 레비나스, 사르트르 vs 메를로퐁티, 루터 vs 칼뱅 등의 책이 나와 있다. 궁금한 것은 정약용 vs 듀이란 책이다. 시대적으로 겹치지 않은 두 사람이 함께 묶였기 때문이다. 공명하는 부분과 대조적인 부분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다.

 

나를 공부할 시간을 사게 된 가장 큰 요인은 동양철학 스케치 2‘를 통해 저자의 역량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나를 공부할 시간에서 큰 관심을 부르는 사람들은 로자 룩셈부르크, 스피노자, 주희(朱熹) 등이다. 특히 유대교로부터 파문(破門)당한 스피노자와 오랜 유배 생활을 한 정약용이 한데 묶여 설명된 것은 흥미마저 부른다.

 

물론 정약용과 주희를 한데 묶을 수도 있고 괴테와 성호 이익을 한데 묶을 수도 있다. 정약용과 주희는 신유학에 대한 입장 차이를 주제로, 괴테와 성호 이익은 박물지적 관심으로. 그러면 전자는 대립적인 면이, 후자는 공통점이 요점일 것이다.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이 여행으로 큰 전환의 계기를 맞았다는 점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천문관측과 의례(儀禮)를 담당하는 태사령(太史令)이었다. 그러나 국가 제사인 봉선제에서 배제된 뒤 화병을 얻어 통한 속에서 아들에게 역사서 집필의 과제를 안기고 눈을 감았다.

 

사마천이 행한 여행이 사마천의 사기 집필에 큰 역할을 했다. 아예 저자는 사마천이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사기를 쓸 수 없었을 것이란 의미의 말을 한다. 사마천에게 여행을 권한 사람은 아버지 사마담이었다. ‘사기가운데 백이, 숙제 이야기도 있다. 그들이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은 것은 제후국인 주나라가 천자국인 은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사기의 특징은 인물과 사건 중심의 서술을 했다는 데 있다. 편년체가 아닌 기전체다. 편년체는 연도 중심의 서술 즉 왕조의 변천을 서술한 연대기란 위상을 갖는다. 괴테는 평생 수많은 곳을 여행했고 죽기 직전까지도 등산을 멈추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괴테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 그의 이탈리아 여행을 든다. 괴테는 자신은 이탈리아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말을 했다.

 

괴테의 여행이 남긴 가장 본질적인 흔적은 아마도 그의 주저 파우스트에 담겨 있을 것이다.”(39 페이지) 앎을 좇는 삶의 디드로와 이규경 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지식을 수집하고 분류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배열하는 것은 기존의 질서나 가치 체계에 대한 재평가와 재배치란 것이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비판 및 저항으로 연결된다.

 

이규경은 간서치(看書癡) 이덕무의 손자다. 이규경의 호는 오주(五洲). 그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백과전서다. 오주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망과 그 지식을 길어올릴 수 있는 여행에 대한 동경을 담은 말이다. 연문(衍文)은 군더더기 문장이란 의미다. 장전(長箋)은 길게 쓴 주석이란 의미다. 산고(散稿)는 정리되지 않고 흩어져 있는 글이라는 의미다.

 

브루노와 최제우(1824 1864)는 꿈에 이끌린 삶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두 사람 다 비범한 꿈을 꾸고 전혀 다른 삶을 산 사람이다. 최제우가 산 시대는 순조(재위: 1800 1834), 헌종(재위: 1834 1849), 철종(재위: 1849 1863)의 시대였다. 정순왕후 김씨(경주 김씨)의 수렴청정, 순조 비 순원왕후 김씨(안동 김씨), 순원왕후의 부친 김조순 등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린 시대였다.

 

백성을 가혹하게 쥐어짠 세도정치로 파탄난 민생이 란()을 초래한 시대였다. 홍수전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변혁하는 삶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혁명가란 이름은 실천의 결과에 관계 없이 부여되는 이름이다. 로자 룩셈부르크(1871 1919)는 폴란드 출신의 여성 혁명가다. 그는 혼란스러웠던 20세기 초 독일에서 혁명의 최전선에서 활동했지만 거의 모든 국면에서 억압받고 차별받았던 소수자였다. 마르크스 이후의 최고의 이론가, 탁월한 연설가, 진정한 혁명가 로자는 독일 민병대원의 무자비한 폭력에 희생된 비운의 인물이다. 유대인이었고 차별받는 여성이었고 어려서 앓은 좌골 관절염으로 평생 다리를 절었던 장애인이었다.

 

스피노자가 살았던 17세기 네덜란드는 당시 유럽에서 일종의 종교적 중립지에 가까웠다. 유럽 곳곳에서 박해받던 종교 분파들이 종교의 자유와 관용을 보장한 신생 독립(스페인으로부터)국가 네덜란드로 몰려들었다. 스피노자는 예수회 출신의 반 덴 엔덴을 만나 장래 희망을 랍비에서 철학자로 바꾸었다. 가업을 잇거나 랍비가 되는 것 외에 생계를 이을 방법이 없었던 스물네 살의 스피노자는 스스로 생계를 꾸려 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자신이 성장한 유대교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뒤 그는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인 렌즈 깎는 일을 하며 독립적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스피노자가 렌즈만 연마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철학을 가르치기도 했고 친구들과 꾸준히 교제했다. 헨리 올덴부르크 같은 친구와 계속한 서신 교환은 학술적 토론장의 역할을 대신했다.

 

당시 스피노자를 충분히 비난하지 않는 사람들은 비판을 받았을 정도로 스피노자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유대 기독교적 세계관과 전통 신관을 전면 부장한 그의 행보 때문이었다. 스피노자는 이 세계가 초월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로 이원화된 것이 아니라 일원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본 자연은 목적이나 의도 없이 무한히 생성 변화하는 이 세계 자체다. 현실 세계 외에 초월적 세계가 없다는 의미다. 이 세계는 신이라는 실체(다른 사물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존재와 그 특성이 그것 자체에 의해서만 설명되는 것)가 변용된 모습으로 이를 양태라 한다. 그에게 세계 자체가 신이다. 스피노자는 인격적이며 오로지 사유로만 존재하는 신 관념을 버리고 자연의 물질성까지 신의 속성으로 바라보았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 전체가 신의 양태며 따라서 모든 것이 신 안에 들어 있다. 신은 자연의 원인이지만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이다. 신이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라는 말을 원인과 결과가 함께 하는 바다와 파도의 관계로 비유해 설명할 수 있다. 바다가 파도의 원인이지만 바다는 파도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자연 역시 결과로 존재하지만 원인인 신 안에 존재한다.

 

이 자연 세계는 인격적 신의 초월적 계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과관계의 법칙으로 질서잡힌 합리적인 세계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인간은 우연적이며 유한하다. 그런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욕망이다. 스피노자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사물은 자기를 지키려 하며 자기 안에 머무르려는 노력(코나투스)에 의해 존재한다고 보았다. 코나투스가 정신에 관계될 때 의지라 하고 정신과 육체 모두에 관계될 때는 충동이라 한다.

 

충동을 의식하면 욕망이 된다. 충동과 욕망을 구분할 줄 모르는 인간은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지만 이는 결국 자연의 필요성에 따른 행위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은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해서 그것을 향해 노력하고 의지하고 욕망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노력하고 의지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라 판단한다고 보았다.

 

저자는 유배되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정약용을 스피노자와 유사한 사람으로 본다. 그가 산 시대는 정조, 순조, 헌종 시대였다. 정조와의 좋은 시절이 끝나고 순조, 헌종 시대에 그는 많은 고난을 겪었다. 정조는 정약용이 서른 아홉에 유배되기 직전까지 그의 최대 후원자였다. 정약용을 이해하려면 정조만큼이나 광암 이벽(정약용 형수의 남동생)을 알아야 한다. 이벽은 성호 이익의 제자 권철신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이다.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였는가 여부는 아직도 논쟁거리다. 그에게 서학은 현대적 개념의 종교였다기보다 새로운 학문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배 기간 내내 정약용은 가난과 병을 짊어져야 했다. 몸이 갇힌 만큼 정약용은 강렬한 의지로 자신의 학술을 완성해 나갔다. 정약용이 그토록 많은 저술을 남긴 것은 유배 기간이 길어서만은 아니다.

 

강진에는 어머니 종친인 해남 윤씨들이 살았는데 처음에는 죄인으로 유배 온 정약용을 외면했지만 결국 그를 후원했고 정약용은 해남 윤씨 가문의 장서들을 연구에 활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해남 윤씨 자제들이 제자로 들어와 정약용의 저술을 돕기도 했다. 정약용의 작업 중 상당 부분은 제자들과 공동 작업을 통해 이루어낸 것이다. 정약용은 제자들이 필사하고 분류하고 정리해 놓은 전거들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저술을 완성해 나갔다.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온 것은 1818년 가을,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그 후 1836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정약용은 언젠가 자신의 학문이 세상에 쓰일 날을 기대하며 저술을 정리했다. 이 당시 그가 선호했던 호는 후대를 기약한다는 의미의 사암(俟菴)이었다.(: 기다릴 사)

 

그의 사상 전체가 시대와 불화했다거나 시대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급진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정약용 철학의 가장 큰 특징은 당대의 지배 학문이었던 주자학과 거리를 두었다는 점이다. 그가 젊어서 접한 천주교는 그의 정치적 생명을 끊었지만 그 안에 담긴 새로운 세계관은 정약용에게 유학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했다.

 

]성호 이익에게 가난은 일상적인 삶의 조건이었다. 레비나스와 이익은 공감하는 삶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페트라르카와 주희(朱熹)는 읽고 쓰는 삶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페트라르카는 거의 중독에 가까울 만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읽고 또 썼다. 주희(朱熹)도 페트라르카처럼 평생 읽고 쓰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 학자 중 하나다.

 

주희가 태어났을 때 송나라는 금나라의 침입으로 온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53세의 주희는 태주의 지사였던 당중우라는 인물을 집요하게 탄핵하다 직위도 잃고 사상적으로도 탄압받았다. 주희는 말년에 학문적 활동을 금지당하는 위학(僞學)의 금()을 겪기도 했다. 이런 불운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주희는 어떤 상황에서도 읽고 쓰는 삶에 헌신했다. 주희는 성리학의 집대성자다. 주희가 당한 위학지금은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물론 주희가 받은 모든 탄압과 불명예는 주희 사후에 대부분 풀렸다.

 

모든 삶의 가능성을 한쪽으로 기울여, 읽고 쓰는 삶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읽고 쓰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지루하고 반복적인, 그토록 오랜 시간을 투자해도 성취를 보장할 수 없는, 노력에 성과가 비례하지 않는, 무엇보다 평생토록 끝나지 않을 일에 자신을 헌신하게 하는 것일까... 읽고 쓰는 삶을 택한 이들은 상당한 이상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어쩌면 현시의 자기보다 더 큰 자기를 상상하는 몽상가들일지도 모른다”(246, 247 페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읽고 쓰는 삶을 택하는 사람들은 부박하고 과시적인 변화를 기대하지 않았고, 당장 생활을 바꿀 현실적인 힘과 영향력을 만드는 데 힘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페트라르카도 주희도 묵묵하게 긴 호흡으로, 담담하게 먼 시각으로 자기와 세계에 대한 실천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읽고 쓰는 과정을 통해 얻을 효과가 보다 일찍, 보다 분명한 형태로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엄밀히 말해 읽고 쓰는 삶이 아니라 성공하는 삶을 택한 것에 가깝다.(24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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