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2 - 역사평설 병자호란 2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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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골대란 청나라 장군 타타라 잉굴다이를 말한다. 병자호란 한 해 전인 163512월 후금 사신 용골대와 마부대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들어왔다. 달라진 후금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온 것이다. 참월(僭越: 주제 넘음)한 오랑캐와 단교할 것이라는 사실, 오랑캐가 침략해 올지도 모르니 방어태세를 확고히 하라는 인조의 명령을 전하기 위해 평안감영으로 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화급하게 도망치던) 용골대 일행에게 붙잡혔다.

 

인조가 보낸 유시문(諭示文)이 용골대 일행에게 입수되었다. 1636411일 여명, 홍타이지는 백관들을 이끌고 심양성 천단(天壇)으로 나아갔다. 자신이 제위(帝位: 황제 또는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는 사실을 천지에 고하기 위해서였다. 식장에 사신 나덕헌, 이확도 있었다. 두 사람은 즉위식 내내 홍타이지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 조선은 아직 형제국이지 청에 신속(臣屬)하는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주와 몽골인들, 조선이 상국으로 섬기는 명 출신 신료들까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던 식장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두 사람의 행동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청의 관원들에게 심하게 맞았다. 홍타이지는 두 사람을 죽이라는 신하들의 요구에 하찮은 분노 때문에 사신을 죽이지 않겠다며 신하들을 다독였다. 조선에 먼저 절교할 수 있는 명분을 주지 않으려는 결정이었다.

 

홍타이지는 조선 신료들을 가리켜 책은 읽었지만 백성과 나라를 위해 경륜을 발휘할 줄은 모르면서 한갓 허언만 일삼는 소인배들로 규정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후금을 원수로 규정한 이상 자신은 전쟁을 통해 강약과 승부를 겨룰 뿐 사신들을 죽이는 쩨쩨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연암(燕巖)은 나덕헌, 이확의 행동을 존주대의(尊周大義)를 지키기 위한 희생으로 추켜세웠다. 그러나... 나는 허세(虛勢)로 본다. 힘을 갖추지 못한 나라에서 명분만 내세운 허세로 보일 뿐이다.

 

절하지 않을 거라면 즉위식에는 왜 갔을까? 절을 하도록 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는가?(절을 하지 않는 이유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면 청은 조선 사신이 즉위식에 가지 않았어도 어떤 식으로든 명분을 만들어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죽도록 맞고 홍타이지가 준 (조선을 맹렬히 비난하고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협박과 조선을 조롱하는 내용의) 국서(國書)는 왜 받았는가?

 

나덕헌, 이확은 홍타이지가 준 국서를 만주 통원보의 숙소에 몰래 던져놓고 내용을 등사(謄寫)하여 조정에 올렸다. 평안감사 홍명구는 나덕헌, 이확의 목을 베어 홍타이지에게 보여주라고 촉구했다. 나덕헌, 이확은 평안도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인조는 오랑캐와의 결별과 대결을 선언했지만 조선의 군사력은 미약했다. 병자호란 직전 조선의 군사력은 국가 안보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정권 안보를 지키기에도 급급한 상황이었다.

 

부제학 정온(鄭蘊)은 인조에게 진정으로 오랑캐와 싸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반정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정예병들을 원수(元帥)에게 배속시키라고 요구했다. 인조는 안이한 자세로 일관했다. 인조는 병자호란 직전 오랑캐와 일전을 불사하자는 명분론자들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일전을 불사하기 위해 근본적인 대책을 제시했던 정온 같은 신하들의 목소리에는 귀기울이지 않았다.

 

인조의 책임은 컸다. 오랑캐를 타오르는 불길처럼 여겨 겁먹고 두려워하면서도 청과의 화친론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조선은 군신 상하가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전쟁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도원수 김자점은 겨울에는 청군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고 봉화 두 개(청군 침략시 올리도록 한)가 오른 것을 무시했다.

 

봉화가 올랐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서울에서 소동이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자점은 뒤늦게 장계(狀啓: 서면 보고)를 올렸다. 인조는 광해군 시절부터 유사시의 피난처로 점찍어 준비했던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했다. 강화도행을 촉구한 신하가 있었지만 인조는 청군이 들어올 리가 없다며 좀 더 기다려 보자고 했다. 인조는 결국 상당한 양의 군량과 화약이 비축되어 있었던 강화도에 가장 중요한 시기에 들어가지 못했다.

 

정묘호란 때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바람에 맥이 빠졌던 청은 이번에는 아예 인조가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을 막아버렸다. 이조판서 최명길이 나섰다. 인조에게 자신이 청군 진영으로 가 담판을 벌일 테니 그 틈을 타 남한삼성으로 들어가라고 건의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당도한 것은 밤 9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김류(金瑬)가 강화도로 가자고 고집했다. 그러나 김류는 청군이 1633년 공유덕 등의 귀순을 통해 수군과 함선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인조는 김류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길이 얼어 붙은 탓에 돌아와야 했다. 강화도 대신 남쪽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병자호란은 1만여 조선군과 그 열 배에 이르는 청군의 싸움이었다. 남한산성 농성(籠城: 성문을 굳게 닫고 성을 지키는 것.) 초기 조정에는 청군은 화약만 맺으면 곧 철수할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론이 퍼지고 있었다.

 

청군은 성 주변에 참호를 파고 목책(木柵)을 설치했다. 성을 외부로부터 완전 차단해 성안 사람들을 고사(枯死)시키려는 작전이었다. 청이 때때로 홍이포를 발사하여 돈대와 성첩을 파괴하면 성안의 공포심은 극에 이르렀다. 군량은 나날이 줄어드는데 보충할 방도는 없고 학수고대하는 외부 구원병은 오는 족족 청군 복병들에 의해 궤멸되었다. 청군은 예상과 달리 대오도 정제되어 있었고 조선 피란민들을 함부로 약탈하지 않았다.

 

인조는 화친(和親), 주전(主戰) 등으로 엇갈린 신하들의 주장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조선군은 청이 산성으로 접근하고 있음에도 화의 시도를 망칠까봐 발포하지도 못했다. 전전긍긍이었고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추위가 기승을 부렸고 물자들은 동이 나기 직전이었다. 화친이든 결전이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면 굶어죽거나 얼어죽거나 할 판이었다.

 

당시 추위는 혹독했다. 갑자기 소집되어 들어온 병사들이 방한 장구를 갖추었을 리 없었다. 공석(空石: 빈 가마니) 하나를 방한복 삼아 어깨에 두른 채 살을 에는 추위와 맞서 싸우던 병사들이 동상에 걸리는 일이 속출했다. 춥고 배고픈 현실 속에서 결전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김상헌은 물론 최명길도 비숫한 주장을 했다.

 

당시 청군은 전사한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가져가는 데 결사적이었다. 동료의 시신을 적에게 넘겨주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불문율이었다. 청의 주력군이 도착함으로서 그나마 있었던 작은 전과들이 무위가 될 상황이었다.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며 근왕병(勤王兵)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사이 어느덧 병자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조선은 청군에 쫓겨 남한산성에 갇힌 상황에서도 명나라 황제에 대한 망궐례를 거르지 않았다.

 

충성스런 조선이었다.” 홍타이지가 황제를 칭()한다는 소식을 듣고 펄펄 뛴 것도 명나라 때문이었다. 대다수 신료들은 명에 대해 충성과 의리를 지키려다가 조선이 이렇게 참담한 지경으로 내몰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선의 일편단심을 명나라는 과연 알고나 있을까?” 산성 안의 마초(馬草)가 고갈되자 조선군 장졸들은 말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청군은 남한산성과 외부와의 연계를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근왕병은 계속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각개 격파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조선 조정은 청군의 돌격에 대비하기 위해 청야견벽(淸野堅壁) 작전을 구사했다. 청군이 이동하는 대로 주변의 병력과 백성들을 인근 산성으로 몰아넣고 수성전(守城戰)을 꾀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청군 선봉대가 거의 무인지경의 상태에서 돌격할 수 있게 방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졸지에 기습을 당한 서울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대로 주변 산성에 머물던 조선군이 거꾸로 청군을 추격하여 서울로 올라와야 할 형편이었다. 하지만 상경하려는 조선군은 뒤따라오는 청군 본진과 좌우익군의 공격에 다시 노출되는 위기를 맞았다. 청군은 병력과 목책으로 산성을 포위한 채 느긋하게 주인처럼 기다리고 있는데 아군은 근왕병도 들어오지 못하고 날로 피폐해져 가는 산성에서 객이 되어 버렸다.(140 페이지)

 

최명길은 나라가 보전된 뒤에야 와신상담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은 일찍이 임진년의 환란으로 소방(小邦)이 곧 망할 뻔하였을 때 명의 신종황제께서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소방의 백성들은 그 은혜를 깊이 새겨 차마 명나라를 저버릴 수 없습니다.“란 국서를 보냈다. 광해군 시절인 1619년 명의 강요로 후금을 공격하기 위해 원병을 보냈을 때에도 조선은 참전 명분으로 재조지은을 내세웠었다.

 

당시 후금의 누르하치는 그 명분을 인정해주는 자세를 보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천하는 크고 나라는 많다. 너희를 구해준 것은 오직 명나라 하나뿐인데 너희는 어찌해서 천하를 운운하는가? 명나라와 너희의 허탄(虛誕)하고 망령됨이 끝이 없구나.“ 청은 이미 명나라를 주조(朱朝) 즉 주원장이 세운 나라로 폄하하고 있었으니 조선의 명 = 천하 인식이 거슬릴 수 밖에 없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보낸 국서에 대해 작심한 듯 반박과 비아냥, 협박하는 내용의 언사들을 쏟아냈다. 홍타이지는 인조가 16363월 용골대 일행이 서울에서 도주한 직후 평안감사에게 보낸 유시문의 내용을 문제삼았다. 장차 오랑캐와의 화친을 끊으려 하니 방어 태세를 강화하라는 내용은 정묘호란 당시 맺은 맹약을 조선이 먼저 어겼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소방(小邦)은 바다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만 일삼았지 전쟁은 몰랐습니다란 주장에 대해서는 전쟁을 모르는 나라가 왜 과거에 명을 도와 자신들을 공격하는 데 동참했느냐고 힐문했다. 조선이 자신들을 가리켜 노적(奴賊)이라 부른 것에 대해서는 도둑이란 몸을 숨겨 몰래 훔치는 자를 가리키는데 우리가 과연 도둑이라면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를 체포하지 않고 내버려두느냐고 따졌다. 조선은 이 반박 논리들을 다시 반박하기가 쉽지 않았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자신의 판도 안으로 들어오면 적자(赤子: 갓난 아이, 비유적으로 임금에 대해 백성)와 같이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다. 항복 요구였다.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네가 살고 싶으냐? 그러면 성에서 빨리 나와 항복하라. 네가 싸우고자 하느냐“? 그러면 성에서 빨리 나와 한 번 겨뤄보자. 하늘이 처분을 내리실 것이다.”란 글을 보냈다.

 

교섭을 잘하면 정묘호란 당시 맺었던 형제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조선은 난감했다. 조선은 인조가 성에서 나가는 것만은 면제해달라고 요청했다. 성 위에서 요배(遙拜)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홍타이지가 조선이 이미 칭신(稱臣)했음에도 인조의 출성(出城)을 요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홍타이지를 분노하게 한 것은 대국 명조차 벌벌 떨고 막강한 차하르 몽골까지도 항복했는데 나덕헌, 이확 등이 끝까지 배레하지 않은 것을 통해 보듯 소국 조선이 끝까지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에서 나덕헌, 이확의 불배(不拜)를 허세라고 말했거니와 그들의 행위는 결과적으로 악수가 되었다. 조선의 뻣뻣한 태도는 공유덕 등의 한족 출신 귀순자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명의 번국(藩國)인 조선조차 끝까지 고개 숙이기를 거부하여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켰는데 명의 신료들이 먼저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비아냥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기에 홍타이지에게는 인조를 불러내 자신 앞에 무릎을 꿇려야 할 절박함이 있었다.

 

인조는 홍타이지가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지존으로서의 위신을 잃어 이후 왕 노릇 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출성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쫓겨난 광해군에게 문제가 많았지만 그래도 그는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다. 인조와 조정 신료들이 외롭고 추운 산성에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강화도는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 덕분이었다.

 

그런데 강화도가 함락되고 말았다. 인조는 청군이 서울로 들어오기 직전 며느리 강빈(姜嬪)과 봉림대군 등 왕실 피붙이들, 조정 대신들 중 늙고 병든 사람들로 하여금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먼저 강화도로 들어가도록 조처했다. 영의정 김류의 아들 김경징이 아버지의 추천을 받고 강화도 방어를 책임질 검찰사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멸공봉사(滅公奉私), 선사후공(先私後公)했다.

 

김경징 집안의 가술과 50개나 되는 재물 궤짝을 운반하기 위해 경기도의 마부들이 거의 모두 동원되었을 정도였다. 김경징은 강화도를 금성탕지(金城湯池; 철옹성)로 여겨 방어를 위한 군사적 준비를 내팽개쳤다. 날마다 잔치를 열고 술잔을 기울였다. 봉림대군조차 그의 위세에 눌려 함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홍타이지는 출성을 완강히 거부하는 인조를 제압할 묘수를 찾느라 고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강화도 함락이었다.

 

강화도를 먼저 함락시키면 남한산성의 결전 의지는 결정적으로 꺾일 것이라 본 것이다. 청군은 육로로 동거(童車)라는 작은 수레를 이용해 병선을 운반했다. 에상하지 못한 작전이었다. 청군 가운데 만주병들은 어느 정도 군율이 잡혀 있어서 탐욕과 음란함이 덜했지만 몽골병이나 한병(漢兵)들은 달랐다. 특히 공유덕과 경중명 휘하의 병사들이 저지르는 겁략(劫掠)이 심각했다.

 

1637122일 강화도가 함락되었지만 남한산성의 조정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123일 청군은 양동작전을 폈다. 조선이 척화신(斥和臣)들을 묶어 보내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남한산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인조의 출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용골대 등은 최명길 일행에게 강화도에서 급히 데려온 종실 진원군과 내관 나업을 보여주었다. 강화도 함락을 알린 것이었다.

 

강화도 함락 소식을 듣고 인조는 출성을 결정했다. 출성을 면하게 해달라던 인조는 대신 안전 귀순을 간청하는 처지로 바뀌었다. 홍타이지는 명나라 연호를 반납할 것,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보낼 것, 청이 명을 칠 때 조선도 군사를 보내고 무기 협조를 할 것, 청의 신료들과 조선 신료들이 혼인을 맺을 것, 성을 수리하거나 다시 쌓지 말 것 등을 요구했다.

 

용골대 등은 조선을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제 1등 절목 즉 함벽여츤(銜璧輿櫬)을 면제해주겠다고 했다. 함벽여츤이란 손이 뒤로 묶인 채 구슬을 입에 물고 관을 메고 나아가 항복하는 의식이다. 용골대는 삼전도에 이미 수항단(受降檀)을 만들어놓았다는 사실과 130일을 항복 의식을 행하는 날로 정했다는 사실을 통고했다. 그리고 인조가 용포를 입어서는 안 되고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정문인 남문으로는 나올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인조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례를 행했다. 강화도에서 끌어온 강빈과 왕실 신료들도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행했다. 인조는 인질이 되어 심양으로 가게 된 소현세자, 봉림대군 부부와 이별한 채 귀경길에 올랐다. 신료들이 어의(御衣)를 잡아당기면서까지 배에 먼저 타려고 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고 포로들은 인조에게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며 절규했다. 인조 생애에서 가장 길고 처참했던 하루가 갔다.

 

척화신이 여럿이었지만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3학사가 끌려가 처형당한 것은 그들이 누구보다 홍타이지의 참월을 비난하고 주화신들을 성토했기 때문이다. 홍타이지는 홍익한을 회유(懷柔)하려고 했다. 인조는 홍타이지를 배웅할 때도 삼배구고두의 례를 행했다. 인조는 소현세자 일행이 떠나는 날 창릉(昌陵) 근처까지 거둥하여 배웅했다.

 

심양으로 들어간 소현세자는 인조에게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청인들은 소현세자를 지렛대로 삼아 인조로부터 충성을 이끌어내려 했다. 여차하면 인조를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대신 즉위시키겠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 와중에 인조와 소현세자는 경쟁자가 되고 정적이 되었다. 1622년 모문룡이 처음 들어가 동강진을 설치한 이후 가도는 청의 서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청은 수군이 없고 해전에 익숙하지 못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1633년 명의 공유덕, 경중명이 선단을 이끌고 귀순해온 뒤 청은 조선 수군을 징발해 가도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조청 연합 수군은 가도 동강진을 정복했다. 1637년의 일이었다. 전원 옥쇄를 각오하고 결사항전 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던 문신들 특히 척화신들의 주장은 비현실적이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척화신들은 항복이 시간 문제인 상황에서도 결사항전을 외쳤다. 그들은 명분과 관념으로 전쟁을 하자고 한 사람들이었다. 이를 보며 조선 왕실의 의료 시스템을 생각하게 된다. 조선 왕의 건강을 책임지는 것은 내의원 등의 어의들만이 아니었다. 대신들도 내의원 제조, 약방 도제조 등의 직함을 가지고 일종의 자문으로서 왕의 건강 관리와 질병 치료에 참여했다. 기술적인 부분은 어의를 비롯한 의관들이 맡았지만 진료와 치료의 논리적 타당성을 검증하는 것은 유학자(儒學者) 출신의 삼제조가 맡는 구조였다.

 

삼제조는 정1품 이상의 정승이 맡는 도제조, 2품 이상이 맡는 제조, 3품 이상이 맡는 부제조를 이르는 말로 삼제조가 감시하는 경직된 분위기에서 의관들은 자신 있게 진찰하지 못했고 이것이 조선 왕들의 진료와 치료를 실패로 이끈 가장 큰 문제이자 원인이었다.(이상곤 지음 왕의 한의학참고)

 

인조는 척화파들이 앞뒤를 따지지도 않고 용골대 참수를 운운하며 오버한 것이 청의 침략을 부르고 궁극에는 자신과 백성들을 끔찍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다고 비판했다. 인조는 스스로를 낮추고 백성들에게 머리를 숙였지만 말끔한 전후 처리를 하지 않았다.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청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인조는 청으로 끌려갔다가 도망쳐온 피로인<被擄人: 주회인: 走回人>들을 색출해 청으로 다시 보내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았다.

 

최명길은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이 회생하고 비()가 극에 달하면 태()가 오는 법이라며 인조를 위로했다. 인조는 청이 자신을 입조(入朝: 인조를 심양으로 불러 청 황제를 알현시키는 것)시키는 것을 가장 두려워 했다. 조청(朝淸) 관계가 격동하면서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는 흔들렸다. 1643년 소현세자의 귀국 소식이 들려왔다. 인조는 우호 차원에서라면 봉림대군까지 모두 보내야 하는데 소현세자만 보내려는 것에 의구심을 품었다.

 

인조는 청이 자신을 입조시키고 소현을 즉위시키려 한다고 믿었다. 소현과 강빈은 청 조정의 고위 인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등 심양에서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다. 소현은 동아시아 판도가 바뀌는 현장을 직접 목도했다. 1644년 명을 대신해 중원의 주인이 된 청은 소현세자를 영구 귀국시키기로 했다. 명이 망한 이상 인질까지 잡아두며 조선을 견제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병자호란 이후 친청파로 변신한 인조는 청이 입조론과 왕위교체론을 흘리며 압박해오자 권력을 지키기 위해 폭주기관차처럼 내달렸다. 저자는 인조실록을 비롯 당시 기록 어디에도 환향녀라는 용어가 나오지 않기에 속환을 통해 돌아온 여성은 속환녀, 불분명한 방식으로 돌아온 여성은 귀환여성이라 부르기로 했다고 말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대일 위기감은 커졌다. 청군의 침략으로 한양과 경기도 이북 지역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일본까지 움직일 경우 조선의 안보가 심각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청의 압박과 요구에 순응하는 행보를 계속했다. 유백종은 인조의 친청 행위를 보며 그렇다면 반정은 왜 했느냐고 직격탄을 날렸다.

 

몽골족의 원()이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지배한 시기는 1279년부터 1368년까지의 90년에 지나지 않았다. 1673년 명에서 청으로 투항했던 한인 출신 번벌(藩閥)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 청은 더욱 강해졌다. 이에 조선의 청에 대한 저항은 관념적인 차원으로 흘러갔다. 조선은 명이 망한 지 60년이 지난 1704(숙종 30) 창덕궁 후원 깊숙한 곳에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었다.

 

황단이라고 불렸던 이 제단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원군을 파견한 명의 만력제(신종)를 기리고 제사지내기 위한 장소였다. 당시 청은 이 사실을 알았지만 묵인했다. 그 과정 자체를 조선이 청에 길들여지는 과정으로 파악한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대다수 지식인들은 청을 오랑캐이자 원수로 여겼으나 청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또는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조반정에는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인조는 정권 안보에만 급급해 온갖 난맥상을 연출했다. 인조반정을 통해 영달했던 사람들 가운데 최명길, 이귀 정도를 빼면 나머지 사람들은 문제가 적지 않았다. 인조는 광해군이 생모를 추숭했던 것을 맹 비난했지만 자신은 생부 원종 추숭에 더 강하게 집착했다. 인조는 국방 대책 마련과 민생 안정을 강조했으나 구체적 정책 실현에는 무관심했다.

 

인조 재위 기간은 사과(謝過)로 점철된 시간들이었다. 인조는 병자호란 기간 자주 울음을 보인 군주였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전승국임에도 병자호란이 끝나자마자 조선의 전장에서 과오를 저지르거나 지시를 어긴 지휘관들을 가차 없이 처벌했다. 인조는 사정(私情)에 눈이 어두워 공신들을 끝까지 비호했다. 훗날 인조 정권과 효종 정권을 뒤엎으려던 심기원과 김자점이 모두 공신 출신들이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인조는 1619년 광해군 재세시 명의 압력에 못이겨 강홍립이 15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전한 사르후 전투의 패배를 오직 조선군 탓으로 돌렸다. 팩트에 눈감고 주관적으로 해석한 잘못이 아닐 수 없었다. 1633년 명의 공유덕, 경중명 등이 전함과 수군을 이끌고 후금으로 귀순했음에도 변화를 꾀하지도 않은 채 유사시 강화도로 피난하려는 계획에만 집착했다.

 

맹자7년 된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한다는 말이 있다. 절박한 처지의 환자 입장에서는 3년 묵은 쑥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일지 모르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나가서 쑥을 뜯어야 그것이 한 달 묵은 쑥, 1년 묵은 쑥, 그리고 3년 묵은 쑥이 되는 것이다. “비록 우리 세대는 그것을 먹지 못하고 죽더라도 후손들을 위해 쑥을 뜯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여담이지만 최근 국회방송을 통해 인간 책방이란 프로그램이 방송된 것을 보았다. ‘남한산성 1, 2’의 저자인 한명기 교수의 최명길 평전이 소개되었다. 환향녀라는 말을 초청 인사가 쓰는 것이 들렸다. 중요하지 않아서였기 때문인지 그것을 시정해주지 않아 아쉬웠다. 과문(寡聞) 탓이겠지만 유연한 주화(主和) 정책으로 조선을 곤경에서 구해낸 최명길이 인조반정 가담자였다는 사실에 불편함을 가졌었는데 인조반정을 통해 영달했던 사람들 가운데 최명길, 이귀 정도를 빼면 나머지 사람들은 문제가 적지 않았다는 글을 통해 마음을 누그러뜨리게 되었다.

 

그리고 인조반정에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는 지적에 일방 비난을 가했던 나를 반성했다. 남한산성 농성 중 추위에 비까지 계속 내려 말할 수 없이 스산하고 참담했던 상황에서 인조가 기청제를 드리며 엎드려 울부짖었다는 대목에서는 울컥 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인조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고통과 수난에 내몰린 군병들과 백성들을 생각하며 가지게 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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