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종이다 -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적인
김종성 지음 / 북오션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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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515일은 세종(世宗) 탄생 622돌이다. 세종은 누구나 숭앙(崇仰)하는 성군(聖君)이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 이 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세종에 대해 무지한 채로 있던 나에게 지인(知人)이 이런 말을 했다.

 

세종은 누구나 다 추앙하는 임금인데 정조는 그에 못 미치는 것 같아 안타깝네요.” 지난 해 5월의 말이었으니 1년 전의 일이다. 이 분은 세종 시대와 정조 시대의 간격(358)보다 정조 시대와 현대의 간격(242)이 더 짧다는 말도 했다.

 

이에 나는 컴퓨터로 몸을 유지하는 과학자 스티븐 호킹과 목발을 짚은 사람의 차이가 목발을 짚은 사람과 비장애인의 차이보다 크다고 한 여성학자 정희진 선생의 글이 생각나네요.”란 말을 했다.

 

이렇듯 나는 색다른 것을 좋아한다. 물론 대상을 정확하게 안 다음에 기능한 것이 색다른 해석이다. 그런 과제 아닌 과제를 염두에 두고 있는 나에게 525일 영릉(英陵) 해설 제의가 들어왔다. 부랴부랴 관련 자료를 찾다가 능에 대한 책은 아니지만 참 독특한 책을 만났다.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적인 나는 세종이다란 책이다. ‘역사 추리 조선사등의 저술 경험이 있는 저자 김종성이 쓴 이 책은 한국철학을 전공한 이색 경력의 소유자의 내공을 만끽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역사 전공자가 쓴 책과의 차이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적인 나는 세종이다의 키워드는 고뇌다. 저자는 아버지가 형님과 나를 저울질한다, 나는 과연 이 나라의 주인인가, 왕권과 신권의 조화는 불가능한가, 나처럼 불행한 왕이 또 나오지 않기를 등의 챕터들로 세종의 고뇌에 초점을 맞추었다.

 

전체적으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부분은 왕권과 신권의 갈등 및 타협에 대해 해명한 부분, 그리고 여진족 이성계의 자손(손자)인 세종이 중국과의 문자 투쟁의 차원에서 한글을 만들었다고 주장한 부분 등이다.

 

세종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해야 할 인물은 그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이다. 태종은 아내 원경왕후 민씨의 기지(機智) 내지 조력으로 정도전을 제거할 수 있었다. 정도전이 추진한 사병 혁파 때문에 이방원은 병장기를 치워야 했지만 민씨가 남편 모르게 무기를 감추었다가 거사가 임박했을 때 무기를 공개한 것이다.(22, 23 페이지)

 

물론 정도전과 이방원 사이에는 명나라에 대한 대응의 차이가 큰 차이로 이어진 부분이 있었다. 정도전은 동아시아 최강 명()을 배척했고 이방원은 그렇지 않았다. 명의 주원장은 이에 정도전의 지위를 흔들었고 이로 인해 이방원이 조선에서 더 많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방원의 왕권중심주의가 승리한 것이다.(187, 188 페이지)

 

태종은 아들 이도(李祹)에게 임금 자리를 양위했지만 가장 중요한 군사권은 양보하지 않았다. 태종에게는 강상인이라는 최측근이 있었다. 이방원을 왕자 시절부터 보좌한 강상인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병조 사무에 관한 보고를 세종에게 올렸다.

 

이는 상왕 태종의 진노를 불렀다. 강상인은 영의정인 세종의 장인 심온과 뜻을 함께 했다고 진술했다.(85 페이지) 심온은 반국가 사범으로 처형되었다. 심씨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86 페이지)

 

세종은 장남 이향(李珦: 문종)을 지나치게 염려했다. 이향은 학문을 즐기는 것만 보면 사대부 신하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군주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학구적인 군주가 냉혹한 권력의 세계에서 얼마나 경쟁력이 떨어지는지 세종이 잘 알고 있었다.

 

세종은 이향에게 일찌감치 왕위를 물려주고 4년간 상왕 역할을 했다.(234 페이지) 문종은 불행했다. 세종은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에게 문종을 돕도록 했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왕자들의 영향력만 키우는 악수가 되었다.

 

문종은 할아버지 태종이 아버지 처가(자신에게는 외가)를 쑥대밭으로 만든 바람에 다른 임금들과 다르게 외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세종이 죽고 문종도 죽은 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권력투쟁을 벌였다. 이 투쟁은 계유정난으로 종결되었다. 이 난으로 문종의 아들 단종은 실권을 잃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235 페이지)

 

잠시 연산군과 세종을 비교해보자. 최악의 폭군 vs 성군으로 나눌 수 있을까? 맞다. 하지만 초점을 다른 곳에 둘 수도 있다. 연산군은 폭군이었지만 정통 군주였다. 정통 군주는 왕비의 몸에서 태어나 원자(왕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임금의 큰 아들)와 세자를 거쳐 여러 해 후계자 수업을 받은 뒤 부왕의 죽음을 계기로 군주가 된 사람을 일컫는다.(230 페이지)

 

이 기준에 맞는 가장 확실한 사람은 뜻밖에도 연산군이었다. 그는 후궁이나 무수리가 아닌 왕비의 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예비 후계자로 지목된 원자 출신 왕자로 원자를 거쳐 왕세자가 된 뒤 다년간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왕세자 신분으로 관례와 혼례를 치르고 성인이 되었고 형을 계승하지 않고 왕이 되었다. 더구나 상왕이 된 아버지의 실제 통치를 겪지 않고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왕이 된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왕이 된 사람은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면 정통성 시비를 겪게 되고 아버지가 섭정을 한다면 정치적 간섭 때문에 임금의 위상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서 큰형인 양녕대군의 폐위와 함께 세자가 된 데 이어 왕이 되어 콤플렉스를 가졌을 것이다. 정통성이 완벽한 연산군은 긴장감을 잃고 방심하다가 쿠데타를 당했고 태종, 세조, 선조, 정조처럼 정통성이 취약했던 임금들은 왕권을 지키는 데 힘썼거나 나라를 제대로 통치하느라 애썼다.

 

이성계는 여진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여진족 혈통의 많은 부분이 이성계의 손자인 세종에게도 이어졌을 것이란 의미다.) 단재 신채호는 여진족과 한민족이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성계가 여진족이라고 100퍼센트 확실하게 말해주는 기록은 없지만 이성계가 여진족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는 한 둘이 아니라고 말한다.(143 페이지)

 

이성계는 분명히 여진족 거주지에 살고 있었다. 이성계 집안의 가업은 농업이 아니라 목축업 또는 유목업이었다. 이성계의 휘하 장수들은 주로 여진족 세력가들이었다. 이성계는 여진족의 종교 교주가 아니라 군사 지도자였다.

 

일반적인 경험으로 볼 때 비여진족 출신의 장수가 여진족 병사들로부터 고도의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정규군과 사병을 포함해서 고려 말에 존재한 군사 집단 중에서 가장 단결력이 강했던 것은 이성계 군단이었다.(이성계가 명성을 얻은 것은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홍건적과 왜구를 무찔러 고려를 지켜내는 과정에서였다.)

 

지휘관과 병사들의 혈통이 달랐다면 강한 응집력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랏말이 중국 말과 달라 고생하는 우리 백성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통치술의 일환이었다는 말도 있다. 저자는 여진족 이론으로 세종의 한글 창제를 설명한다. 즉 농경민족에 대한 유목민의 대결 지향 정신에 따른 것이라는 말이다.(168 페이지)

 

동아시아 농경민은 한자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동아시아 유목 지대에서는 한자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유목민은 자기들만의 고유문자를 고집했다. 거란문자, 서하문자, 티벳문자, 여진문자, 몽골문자처럼.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는 과정에서 여러 고대 문자들을 참조했다. 그 중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이란 게 있었다. 이상한 것은 세종이 변음과 토착의 해석을 왕자들에게 부탁했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 사대부 지식인들은 그런 글자를 읽을 줄 몰랐다.

 

세종이 자식들에게 변음과 토착에 대해 물은 것은 자기 집안에 그 문자를 해독할 만한 사람이 있었다는 의미다.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면 그 자손들은 엘리트 여진족 3세가 되는 것이다. 왕자들이 답하지 못하자 세종은 시집간 딸인 정의공주에게 서한을 보내 문자 해독을 부탁했다. 정의공주는 별 어려움 없이 문제를 해결했다.

 

세종의 한글 창제는 유목민 출신 군주가 한자에 맞서 독창적인 문자를 가지려 한 결과다.(176 페이지)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시기는 한자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는 세력(사대부)의 힘이 강력할 때다.

 

세종은 열성을 다해 한글을 만들었지만 통용을 위해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한글은 양반 권력이 약화된 19세기 후반(세종의 기준으로는 450년 후)에서야 대중적 위력을 발휘했다. 자신이 없는 먼 미래를 내다보며 고뇌하고 일하며 공부한 것이라 할 수 있다.(264 페이지)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적인 나는 세종이다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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