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을 썼지만 저자의 이름을 무심히 흘려버린 책이 로버트 단턴의 '시인을 체포하라'이다. 단턴은 '고양이 대학살'의 그 단턴이다. 서평 작성 5년만에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은 김병익 선생의 '조용한 걸음으로'란 책을 읽고 단서를 얻었기 때문이다.
김병익 선생에 의하면 단턴은 '미래의 책'에서 1968년에서 1984년 사이에 미국 의회도서관이 도서 전자화를 위해 9300만 페이지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1000만 달러의 책과 문서가 버려졌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건재를 전제한 이야기이지만 미국 의회도서관이 있기에 세계가 어느 날 갑자기 붕괴해도 복구는 시간 문제란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각설하고 '시인을 체포하라'나 '고양이 대학살' 말고도 단턴의 저술 목록에는 '책의 미래', '책과 혁명', '로버트 단턴의 문화사 읽기' 등 책과 관련한 읽을거리들이 꽤 있다.
특이하게도 단턴은 프랑스사를 전공한 미국인 역사학자이고 2007년에서 2016년 사이에 미국 하버드대 도서관장을 지낸 사서이다. '책의 미래'에는 도서관에 관한 유용한 자료들이 꽤 있다. 도서관 관련 자료는 아니지만 ‘프로이트보다 푸코’, ‘책읽기에서 책쓰기로’ 같은 흥미를 자극하는 글들도 있어 주목을 요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단턴을 이야기하며 '고양이 대학살'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1730년대 파리 생세브랭 가(街)의 한 인쇄소에서 벌어진 고양이 대학살을 다룬 책이다.
제롬과 레베이예라는 두 견습공이 인쇄소 여주인이 좋아하던 20여 마리의 고양이들을 죽인 사건이다. 견습공들은 춥고 더러운 방에서 잠을 잤고 고양이들조차 거부한 음식을 먹었던 반면 고양이들은 초상화의 모델이 되기도 했고 구운 새고기도 먹었다.
고양이들은 밤새 울어댔다. 흉내를 잘 냈던 레베이예는 고양이 울음 소리를 진짜처럼 흉내내 주인과 아내로 하여금 '미친 고양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하게 했다. 두 견습공은 유쾌하게 고양이들을 죽였다. 여주인은 그들이 죽인 고양이가 자신이 아끼고 좋아하던 것들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단턴은 견습공들은 여주인이 아끼던 고양이를 죽임으로써 실제 그녀가 마녀였다고 기소한 것이고 고양이들을 재판(견습공들은 고양이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고 최후 의식을 치른 뒤 교수대에 고양이들을 매달았다.)함으로써 법 질서와 사회 질서 전체를 조롱했다고 썼다.
번역자 조한욱 교수는 견습공들의 행위를 상징의 언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드러나는 상징적 모독으로 설명한다. 조한욱 교수에 의하면 이는 인류학적 방법이다. 인류학은 오지의 원주민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데 그것은 그 사람들의 흥미로운 생활방식을 알려고 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들은 같다는 자신들의 학문적 전제에 따른 것이다.
인류학은 단순화된 원주민들의 생활방식이 다른 복합적인 문명권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단서가 된다고 생각한다.(이는 과학의 환원주의를 연상하게 한다.) 관건은 단 한 차례 일어난 사건을 근거로 노동자들 일반의 사고방식에 대해 추론할 수 있는가, 이다.
그러나 아담 한 사람의 죄가 인류 전체의 죄가 되고, 한 존재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는 물론 십자가 사건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그의 삶이 모두 관계한 것이다.)이 모든 인류를 사(赦)한 것을 알지 않는가.
다나 해러웨이가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에서 한 말이 있다. 하나는 부족하고 둘은 너무 많다는 말이다. 백소영 교수는 게임 때문에 휴대폰과 혼연일체가 된 청소년을 예로 든다. 그 청소년은 자신 혼자만 있을 때와는 다르기에 한 개체라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둘은 아니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게임 때문에 휴대폰과 혼연일체가 된 청소년은 하나 이상이고(청소년과 휴대폰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에 하나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고) 둘은 아니라는(청소년과 휴대폰의 관계는 둘은 아니라는) 의미란 것이다.('페미니즘과 기독교적 맥락' 95 페이지)
다나 해러웨이의 말을 맥락과 무관하게 마음대로 쓴 것은 아닌지 모르겠으나 ‘고양이 대학살’의 두 견습공의 행위가 당시 노동자 일반을 대표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 같고 아니라고 하면 너무 자폐적인 것 같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