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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 - 조선 최고 지성, 다산과 추사의 알려지지 않은 귀양살이 이야기
석한남 지음 / 시루 / 2017년 8월
평점 :
다산과 추사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유배를 갔었다는 것이고 그를 통해 유의미한 성과를 냈다는 점이다. 석한남의 '다산과 추사, 유배를 즐기다'는 그 점을 파고든 책이다. 저술 동기는 두 선현에 대한 막연한 추앙과 도를 넘는 찬양 일색의 분위기에 일침을 가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써도 다산과 추사의 천재성과 그들의 열정이 빚어낸 위대한 업적이 조금도 퇴색하지 않을 것이란 게 저자의 주장이다. 추사는 여섯 살에 월성위궁에 입춘첩을 써 붙였다. 이를 본 박제가가 학예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릴 것을 예언했다. 후에 추사는 박제가로부터 학문을 익혔다.
추사는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들어가 월성위(김한신; 영조의 사위) 가문의 모든 것을 이어받았다.(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의 남편인 월성위 김한신이 추사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다산은 어머니 해남 윤씨가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다. 공재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다.
옛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글을 써 보낼 때 나이에 관계 없이 자신을 아우<제; 弟>라 칭했다. 심지어 동방입격(同榜入格)한 과거 시험 동기생이 자신의 자식보다 어린 경우에 제라 쓰기가 민망해 늙은 아우라는 뜻의 노제(老弟)라 쓴 사례도 있다.
동파 소식(東坡 蘇軾; 1037-1101)은 조선 지식인들 뿐 아니라 많은 유배인들이 존경하여 따르고자 한 롤모델이었다. 추사가 스승으로 모신 청나라의 지식인 옹방강은 소동파를 흠모해 평생 제사를 지냈다. 그 영향으로 추사는 유배된 자신의 처지를 은근히 소동파의 해남도 유배 생활과 동일시하며 이를 반영한 작품을 남겼다.
소동파는 유배 기간 내내 잠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73 페이지) 소동파의 유배를 닮고 싶었던 추사의 유배는 우리나라 최남단 섬으로 간 것이라는 점만 빼면 소동파의 유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보다는 도연명(陶潛 陶淵明; 365-427)의 전원생활을 동경했던 다산의 유배가 오히려 소동파의 유배 생활과 흡사했다.
다산은 소동파의 전원생활을 꿈꾸었으나 소동파의 귀양살이로 내달았다.(94 페이지) 추사는 어처구니 없게 당쟁에 휘말려 유배를 가게 된다. 저자는 여섯 차례에 걸쳐 36대의 신장(訊杖; 매질)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위리안치라는 중형을 받고 의금부 도사의 차가운 손에 이끌려 절해고도로 유배를 가던 추사가 전라감영에 들러 당시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을 만나 그의 글씨를 보고 시골에서 밥은 먹을 만한 글씨라 혹평했다거나 대둔사에서 초의를 만나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전의 현판 글씨 대웅보전을 떼게 한 뒤 스스로 다시 써서 걸게 했다는 이야기는 억측일 뿐이라 말한다.(98 페이지)
다산은 유배 시절 배움에는 귀천이 없고 남녀노소, 부자와 가난한 자, 힘이 있고 없는 사람 누구에게나 독서는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 믿었다. 가르침이나 교류에 있어서 신분에 구애받지 않았고 그렇게 애써 가르쳤다. 공자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공자는 가르치는 데는 계급이 없다<유교무류; 有敎無類>고 했다.
다산은 '논어고금주'에서 하늘이 사람을 내릴 때는 귀천을 두지 않았고 멀고 가깝고의 구분도 없었다고 해석하며 가르침이 있으면 모두 같다(유교즉개동; 有敎則皆同)고 정의했다. 다산은 유배 8년째인 1808년 비로소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추사는 유배지에서조차 계급적 신분주의와 지적 우월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159 페이지)
추사는 인격적 모욕도 서슴지 않았다. 저자는 추사가 다른 사람을 과도하게 깎아 내리고 필요 이상으로 비판했지만 그의 예술혼과 실험정신까지 매도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추사는 그 이전의 서풍과는 전혀 다른 독보적인 예술세계와 작품을 만들어냈다.(163 페이지) 다산은 아들 친구 추사를 벗으로 호칭했다.(168 페이지)
추사체는 수백년 동안 어떤 고증과 해석도 없이 맹목적으로 왕희지의 서풍을 답습하려고 노력해온 조선 서예에 대한 비판 및 새로운 서체의 구현을 위한 추사의 실험 정신에서 출발하고 있으니 추사야말로 진정한 예술가의 표상이다.(186 페이지) 추사는 글씨를 잘 쓰는 이는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일반적 견해가 아니라 말했다.(190 페이지)
세한도는 추사가 제자 이상적에게 선사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과 민영휘 집안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일본의 추사 연구가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의 소유가 되었다. 추사를 근대 학문 연구의 대상이 되게 한 인물이 후지츠카 치카시이다. 세한도는 소전 손재형의 노력으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어떤 일이 있어도 팔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아무 대가도 없이 넘겨받았으나 정치계에 투신하며 자금에 쪼들린 나머지 그림을 저당잡혔다. 개성 갑부인 미술품 수장가 손세기가 새 주인이 되었는데 그는 이를 국민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후지츠카 치카시의 아들인 후지츠카 아키나오(藤塚明直)는 선친이 평생 모은 2,750점의 추사의 필적과 자료를 자비를 들여 손질한 후 과천 추사박물관에 기증했다.(198, 199 페이지)
저자는 추사가 가마를 타고 오른 고갯마루에서 웅장하고 수려한 산세에 취해 감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시를 읆은 것과 다산이 사람들이 가마 타는 즐거움은 알아도 가마 메는 괴로움은 모른다는 시를 쓴 것을 품성에 기인하기보다 출신 배경과 성장 환경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편이 맞다고 말한다.(210 페이지)
다산의 유배지 강진은 수백 명의 하인을 거느리고 보길도 섬을 통째 소유할 정도로 대단한 부자였던 외가 해남 윤씨의 세거지(世居地)에서 가까웠다. 그래서 해남 윤씨 집안에서는 다산의 학문과 사상을 집대성하는 데 좋은 환경을 제공했다. 해남 윤씨 소장의 다양한 서책을 손쉽게 열람하게 하고 경제적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다.(205, 206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