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덕(金時德) 교수의 서울 선언을 읽고 있다. 지난 96일 옥인동 시범아파트터에서 시작해 윤동주 하숙집, 박노수 미술관, 통인 시장, 이완용 집으로 추정되는 상촌재 앞의 건축물, 세스팔다스 게옴마루(세계정교 유지재단) 등을 둘러본 서촌 답사를 함께 하고 역사책방에서의 강연 수강 후 산 책이다. 내 역사상 이렇게 강의도 듣고 책도 산 경우는 처음이다.

 

6일 강의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저자의 거침 없이 빠른 말에 실린 독특한 시각의 반골(?) 기질이었다. 가령 이런 글을 보자. "유명 건물이나 사건 현장만 보고 다니는 것은 서울 답사의 초보 단계이고 유명한 지역을 걸어 다니며 그 공간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은 중급 단계이고 전혀 특별할 것 없이 보이는 도시 구획을 걸어다니며 서울 사람이 살아온 모습과 감춰진 재미를 발견해내는 것이 고급 단계의 서울 답사이다."

 

리뷰를 통해 체계적으로 거론하겠지만 이 글을 읽고 생각한 것은 문헌학에 대해 깊이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자신 같은 문헌학자는 어떤 문헌의 사료적 가치가 높은지 낮은지, 문학적 가치가 높은지 낮은지를 판단하기 전에 눈 앞에 있는 문헌이 자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저자의 말 때문이다.

 

이 부분을 읽으니 이해할 수 없는 해설 지침을 내리는 모 해설단체의 장이 생각난다. 그는 창덕궁 인정전의 오얏 문양이 조선을 폄하하려는(조선이 이씨 즉 오얏 이씨의 나라였기에) 일본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는 설과 그 문양을 조선의 상징으로 대외에 알리려는 고종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란 설 가운데 부정적인 전자는 해설에서 거론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의 의도가 궁금하다. 정설이 있으면 그 정설을 이야기하면 되고 속설들이 있으면 차별하지 않고 다 이야기하면 되는데 말이다. 그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궁궐 관람 신청 수가 줄어들 것을 염려하는 것일까? 우리나라 사람이 역사를 좋아하기보다 이데올로기를 좋아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는 조선 문화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 같다.

 

돋보이는 것은 서울 역시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법칙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사실과 연관되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란 책을 인용한 저자의 포석(布石)이다. 앤더슨에 의하면 하나의 나라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지역은 처음부터 필연적으로 서로 간에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연한 이유에서 특정 국가에 편입된 뒤에야 그 특정 국가의 내부에 존재하는 다른 지역들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

 

이 내용을 보며 생각한 것은 지난 해 정동(貞洞) 해설에서 내가 한 말이다. 당시 나는 아름답고 멋진 건축물들이 정동에 모인 것은 그곳이 명당(明堂)이어서도 아니고 그곳을 명당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모임으로써 정동을 명당으로 만들었다는 말을 하며 한 조각 꽃잎이 떨어져도 봄볕이 줄어든다는 두보의 시를 인용했다. 두보의 한 조각 꽃잎처럼 정동의 건축물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사라진다면 정동을 그 만큼 빛바라게 할 것이라는 말이다.

 

서울 선언에는 불편한 말들이 많다. 이 점이 책의 장점이다. 기와집만 지어져 있는 은평 한옥마을을 예로 들며 저자가 지적한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의 기와집만 한옥입니까? 초가집은 한옥이 아닌가요? 20세기에 만들어진 북촌의 개량 한옥은? 뗏집은? 너와집은? 또는 가난한 한국 시민들이 만든 토막집은? 하코방은?” 같은 말, “식민지 시기에 일본군 성 노예로 희생당한 여성들의 추모 시설을 이곳(서대문 형무소)에 함께 건설하자는 주장에 대해, 그녀들의 희생을 이곳에서 기리면 우리 민족이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한 민족이기보다 일제에 의해 수난당한 민족이라는 왜곡된 역사 인식을 관람객들에게 주게 된다면서 남성 위주의 독립 운동 관련 단체들이 반대 움직임을 전개한 적도 있다는 말...

 

지나간 사실이지만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는 것은 저항하지 않는 것보다 낫지만 그 자체가 이미 외세로부터 수난을 당함을 증거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물론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저자의 목적이 아니다. 저자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제행무상이란 불교 용어를 거론했으니 하는 말이지만 저자가 그런 불편한 사실들을 거론하는 의도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 즉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여실지견(如實知見)하자는 데에 있다.

 

니체가 문헌학을 전공했다는 사소할 수 있는 사실까지도 함께 떠올리게 하는 서울 선언을 통독(通讀)/ 정독(精讀)하자.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이 예전과 다르게 보이는 경험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35 페이지)란 저자의 말을 확인하자.

 

어제 나는 한용운 시인 강의에서 일제 시대를 살았던 만해 선사가 지금 우리와 함께 한다면 조선 그것도 왕조(王朝)와 관련한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우리의 편중(偏重)된 문화 소비, 1970 1980년대의 강남 개발의 와중에 백제 시대의 서울을 증언하는 삼성동 토성 같은 유적들이 무참히 파괴된 사실(65 페이지) 등을 보면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란 물음을 던졌다. 비판 정신이 인문학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것 없는 인문학은 예능 또는 오락 이상은 아님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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