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가나 계기가 되면 하는 질문들이 몇 가지 있다.

‘능소화(凌霄花)의 소는 하늘 소인데 하늘 천(天) 대신 하늘 소를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요?‘도 그 가운데 하나다.

사실 이렇게 묻기보다 ‘하늘 천 대신 하늘 소를 쓰는 사연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식으로 묻는 경우가 더 많다.

지난 주에 이 질문을 연이어 두 번 했다. 숲 해설사께 한 번, 역사학 전공의 미술사학자께 한 번.

두 전문가로부터 어떤 답도 듣지 못했다. 질문 장소로 말하자면 북촌에서 한 번, 강릉 허균 생가에서 한 번 했다.

북촌의 능소화는 활짝 피었고 강릉 허균 생가의 능소화는 추위 때문인지 아직 피지 않았다.

강릉 허균 생가에서는 아쉬움에, 그리고 계기가 되어 또 다른 질문을 했다.

‘신사임당께서 5만원권 지폐의 인물로 선정된 것은 그 분이 갖춘 시서화에서의 고른 능력이 아닌 현모성(賢母性) 때문이라는 말이 있는데 설득력 있는가요?‘란 질문이다.

그런데 내가 들은 답은 그 분은 시서화에서 대단히 뛰어난 재능을 보이셨다는 것이다.

내가 신사임당이 그런 능력이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기에 다소 난감했다.

그러나 이는 내 의사 전달이 명확하지 않은 결과 빚어진 해프닝일 수도 있다.

해설을 듣는 다른 분들이 있어 ‘제 의사는 그런 것이 아닌데요‘나 ‘신사임당이 어진 어머니이기에 5만원권 지폐의 모델이 되었다는 말이 있던데요‘ 등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

오해(誤解)든 오인(誤認)이든 오독(誤讀)이든 내 의사가 잘못 받아들여지는 것을 특별히 난감해 하는 나는 가능하면 명확히 표현하고 관련 자료나 배경까지 상세하게 언급한다.

이 바람에 글이든 말이든 장황해지는 경우가 많다.
어떻든 생각과 표현을 더 간결하게 하고 명확하게 가다듬어야 한다고 나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으로 해프닝을 종료했다.

자현 스님의 ‘스님의 논문법‘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확인했다.

상대가 곡해한 것이라도 그것은 내 표현에도 일정 부분 미숙함이 있다는 내용이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책이 ‘스님의 논문법‘이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스님이 한 일간지 기자에게서 들은 말로 ˝글을 쓰는 사람이 중간에 쉬었다가 쓰게 되면 읽는 사람도 그 지점에서 쉰다.˝는 것이다.

이 글의 요지는 한 방에 글을 끝내라는 말이다.

물이 채 고이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끌어올리려 하지 말고 물이 가득 차도록 기다린 뒤에 경계를 터버리면 저절로 유창하게 흘러간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러기 위해서는 평소에 고도의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한 방에 쓰라는 말은 일필휘지하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이 말을 나는 머뭇거리지 말라는 말로도 읽는다.

쓸까 말까 망설이게 되는 구절이 있으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쓰고 나중에 고치거나 다듬거나 줄이면 된다.

그래야 양을 확보할 수 있다. 짧게 쓸 시간이 없어 길게 썼다는 파스칼의 말이 아니어도 길게 쓰기보다 짧게 쓰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물론 이 경우 짧게 쓰는 것은 길게(충분히) 쓴 이후 하는 작업이다.

일본의 대표적 다독가이자 저술가인 사이토 다카시는 독서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 독서력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논문 뿐 아니라 많은 글이 여기에 해당하리라.

내공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면 무엇이든 읽고 싶은 게 나다.

이제 달마, 혜가, 승찬, 도신, 홍인, 혜능 등으로 이어진 선불교 계보를 읽어볼까 싶다.

강인하고 유연한 정신력과 체력을 가졌던 그들에게서 어떤 점을 배울 수 있을까? 특히 글에 대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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