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어떤 이가 꽃차 강의를 하는 분께 차()는 선()인데 6(1, 2시간) 강의로 방대한 내용을 다 다룰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했다. 내가 질문을 받은 것이 아니어서 참견하지 않았다. 마음이 편치 않아 입장을 정리해본다.

 

질문자는 다선일미(茶禪一味)란 말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꺼냈으리라. 나는 다선일미의 기원을 알고 싶지 않다. 하지만 다선일미라는 말은 다()의 의미를 선()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이지 모든 다()가 선()과 같(은 원리를 갖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물론 설령 다와 선이 하나의 원리를 갖는다 해도 문제 될 것은 없다. 여러 가지 차원의 말을 할 수 있다. 가령 그 부족한 시간은 입문 과정으로 보면 될 것이다.

 

질문자는 심화 과정이 있는지 묻지 않았다. 나라면 그것부터 물었을 것이다. 만일 심화 과정이 없어 그 제한된 12시간으로 강의가 끝난다 해도 의미가 없지 않다. 글쓰기 훈련 가운데 같은 주제의 글을 분량을 달리 해 여러 번 쓰는 것이 있다..

 

어떤 강의든 글을 그렇게 여러 분량으로 쓰듯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뜬 구름 잡는 글처럼 보이지만 고도로 응축된 법문을 보며 시비 거는 사람은 없다. 그 추상성과 은유의 과잉을 질타할망정 왜 짧게 이야기하느냐 따지지는 않는 것이다.

 

박동춘 교수의 책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차는 처음에 약으로 이용되다가 점차 정신 음료로 발전해갔다는 것이다. 차에 몸과 마음을 정화하는 기능이 있음을 알고 수행에 결합시킨 것은 선종(禪宗)이었다.

 

다도(茶道) 역시 성쇠(盛衰)의 운명에서 예외가 아니다. 차 문화가 쇠퇴한 시기에 차 활용은 원시적 응용 범위를 넘지 못했다. 저자는 다산(茶山)이 차를 체기(滯氣)를 내리는 용도로 썼다고 말하며 그렇기에 그가 아무리 한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시대의 걸물이었다 해도 차에 대한 안목은 저급한 수준이었다고 결론짓는다.(‘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 182, 183 페이지)

 

그런데 나는 이 말에 수행(修行) 도구로 쓸 것이 차 밖에 없는가, 란 말을 하고 싶다. 스님도 아닌 다산이 치열한 공부에 지쳐 울체(鬱滯)된 머리를 차로 푸는 것이 문제인가?

 

학식(성리학) 높고 의례(儀禮)에 엄격하고 다() 즉 선()에 능했던 조선 선비들은 개인적으로는 훌륭한 인품을 지녔지만 정치 영역에서는 그런 고매함을 무색케 하는 아이러니를 보였다.

 

정신분석학은 개념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아 현실을 이해하고 분석하기에는 역부족이고 다양한 정신분석 이론을 모두 모아 놓아도 그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현실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다(홍준기 지음 라캉, 클라인, 자아심리학’ 119 페이지)는 글이 떠오른다. 정신분석학이란 말을 다도(茶道)(뿐이 아니지만)라는 말로 바꾸어보라.

 

덧붙여 분석가와의 둘만의 좁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민남을 떠나 많은 경험을 쌓고 다양하게 독서하고 폭 넓게 사유하며 자신이 옳다고 믿는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더 좋은 치료 효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같은 책 109 페이지)는 구절도 아울러 음미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 참고로 말하면 저자 홍준기 교수는 라캉, 알튀세르 연구로 박사가 된 정신분석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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