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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박물관 2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28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순수 박물관 2>
- 한 여자를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과 집착 - 표지 뒷면에 간략하게 쓰여진 글자들을 1권을 시작하기 전에 읽었고 어떻게 저럴수가 있을까 싶었다. 몸이 떨어져 있으면 사랑도 깨끗이 잊혀지지는 않겠지만 그런대로 세월과 함께 흐르기 마련이지 않을까.. 곁에 있는 새로운 인맥을 만들면서 삶은 어찌되었든 평범하게 흘러가리라 생각해왔던 내 생각들이 오르한 파묵의 <순수 박물관>을 읽어가며 부서지는 느낌이다. 이렇게 지독하게 사랑할 수 있는걸까?
1권에서 점원이었던 퓌순에게 한눈에 반하고 그녀를 만나며 사랑하고 아름답고 지적인 약혼녀 시벨과 양다리를 걸치며 두 여인을 모두 사랑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우리의 주인공 케말은 부유한 집안의 차남으로 첫눈에 반한 퓌순의 먼 친척으로 등장했고 그녀와 나눴던 44일간의 사랑의 행위들은 풍부했지만 독자들이 견딜 수 있을만큼만 묘사가 되었으며 퓌순을 잃어버린 뒤 남자가 느껴가는 고통은 처절했고 읽는 나 마저 힘들게했다. 그저 소설의 한 장면이라, 소설속의 등장인물이라 생각하면 그뿐일텐데 이 책에서는 그렇게 간단하게 한쪽으로 놓아둘 수 없었으며 생각 자체가 소용없었다. 케말의 사랑과 고통, 집착에 반응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절로 반응하게 만들었던 작가의 힘 때문이리라.
오르한 파묵의 글은 이런 느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왔겠구나.. 이 사람의 글이 왜 그렇게 유명한지, 왜 독자들을 그의 작품 속으로 한없이 끌어들이는지, 그가 왜 이 작품을 두고 " 나는 이 소설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했는지 <순수 박물관 > 1~2권을 모두 읽고나니 살포시 이해가 될것도 같다.. 다만 지나치게 장황히 늘어놓은 과거로의 회상은 빠르게 달려가고 싶은데 속도를 낼 수 없어 답답하듯 조금씩 나를 지치게 만들었고 , 하나의 물건에 얽힌 이야기의 세세한 설명은 드문드문 지루했다.
1970년대가 이 소설의 배경이었기에 터키의 사회, 상류층으로 분류되는 사회작 배경과 결혼, 사랑의 관계들이 충분히 이해는 되었지만 저렇게 아랫배가 찢어지는 고통이 오랫동안 지속될바에는 케말이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사랑을 과감히 선택했으면 좋을것 같다는 현대적인 생각이 밀려오기도 했다. 약혼녀 시벨에게 퓌순과의 사랑을 꺼내놓고 교양있고 아름다운 시벨은 남자들의 일시적인 바람이라는 생각에 케말의 감정을 존종하며 점차 나아지리라 생각하지만 어느순간 퓌순과 케말의 사랑이 지나치는 바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케말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케말은 자신의 약혼식날 사라진 퓌순의 흔적을 찾아 339일 동안 헤맨 뒤 그녀의 초대를 받았지만 그녀는 이미 그에게 돌아올 수 없는 상태였다. 그 후 8년동안 퓌순이 살고있는 네시베 고모 집에 무시로 드나들며 그녀가 만졌던 소소한 물품들을 슬쩍 가져와 퓌순과 나눴던 사랑의 흔적이 남아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그녀와 함께할 수 없는 사랑의 고통을 그녀가 만졌던 소소한 물건들로 부터 위안을 받으며 기나긴 기다림의 세월을 보낸다.
두달이 채 안 되는 시간동안 정열적으로 사랑했고 퓌순을 잃어버린 일년동안 끝없이 이어질듯한 고통에 아파했으며 그녀와 재회하고 물건들에게서 위안을 받았던 8년의 기다림의 끝은 두 사람에게 해피엔딩을 가져다줄까 싶었지만 작가는 또한번의 고통을 준비해두었다. 행복한 결말이 아니어서 씁쓸하다 여겨질지도 모르겠지만 퓌순의 물건들로 이루어진 순수 박물관을 만들어가는 한 남자의 회고록 형식의 이 소설을 읽으며 이런 삶도 있을 수 있구나..이런 사랑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 내게 있어 행복은 이처럼 잊히지 않는 어떤 순간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 삶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처럼 선이 아니라, 이런 감정적인 순간들을 하나하나 놓고 생각하는 것임을 알면, 연인의 식탁에서 팔 년을 기다린 것이 조롱거리나 기행이나 강박관념처럼 보이지 않고, 그저 퓌순 가족의 식탁에서 보냈던 행복한 1593일의 밤으로 보일 것이다. 추쿠르주마에 있는 집에 저녁을 먹으러 갔던 모든 날들을 -- 가장 힘들고, 가장 절망적이고, 가장 자존심 상하는 날조차 -- 지금은 크나큰 행복으로 기억하고 있다. - 37p -
- 퓌순의 어떤 물건, 예를 들면 그녀가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면서 우아하게 만지고 있던 소금 통을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주머니에 넣고는 천천히 라크를 마시며 대화를 나눌 때 소금 통이 내 호주머니에 있다는 것을 ’ 이제 내가 그것을 소유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내게 커다란 행복감을 선사해서 저녁이 끝나갈 무렵 별로 힘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 169p-
- 마치 인류학자처럼 내가 모은 식기, 자질구레한 장신구, 옷, 그림 같은 물건들을 전시한다면, 내가 살았던 세월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35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