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여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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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8쪽    

하지만 어차피 그녀는 늙지 못할 것이다. 내가 죽일 거니까.   맞지?

 

 

섬뜩한 표현이다. 잠이 든 여인을 내려다 보며 아름다운 모습과 살아 움직이는 동작을 감탄하다, 지금은 젊지만 그녀가 늙었다면 이처럼 아름답진 못할 것이다, 는 생각에 문득 미치자 이런 말을 중얼 거린다.

늙은 모습을 보일만치 오래 살아있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는 이 한 마디, 독자는 다가 올 살인을 예고받는다.

 

여늬 살인 사건의 전개 보다는 더 진화한 듯한 느낌을 준다. 처음 이 책을 읽어갈 때에는 소제목으로 테드, 릴리를 교차로 반복하며 진행시키는 부분이 나와서, 왜 이런 전개 방식을 선택했을까 궁금했다. 남자 주인공, 테드와 여자 주인공, 릴리를 한 명씩 선택해서 그들의 상황과 속마음을 내 비추는 효과랄지, 내면을 뒤집어 보여주는 효과를 나타내 주는 것을 알게 되고, 끝까지 읽어가면서 이 구조가 탁월함을 느꼈다.

 

이 소설이 또 하나 탁월한 면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이야기의 반전에 있다.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사람을 겉모습만 봐서 판단하지 말아야겠다는 주의나 환기를 시켜주는 느낌도 갖게 했다. 첫 페이지 시작에서 공항 장면이 나오는데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오고 가던 시간 속의 만남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음으로, 그저 스쳐 지나갈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성장하는 소녀의 내면 또한 주변 인물과의 관련성에서도 한 사람의 괴물을 탄생 시키게 할 만한 재료가 되는 것도 눈여겨 볼 만한 아주 사소한 일상 중의 하나라고 생각이 된다.

 

" 우리같은 부모에게서도 잘 자라줘서 고맙다", 는 작가인 아버지의 말이 좀 더 가슴을 울리기도 했다. 부모의 역할, 건전한 가정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지도 생각해 보게 한다.

 

 

살인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나름의 철학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나 이성적이고 너무나 이유가 분명해서 타인을 죽이는데에도 철학이 있음에 마치 옳은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게 하는 설득력, 어떻게 할 것인가?

윤리 의식, 도덕, 법은 이미 거추장스러운 곁가지 인 양 인간 스스로가 재판을 하고 처벌을 하는 식인, 이 세상에서 이미 암적인 존재를 사라지게 하는 명분, 살아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더 피해를 줄 것이고 세상을 위해서라도 처리해 줘야 한다는 사고 방식.

모멘토 모리, 죽음을 유념하라, 언젠가는 죽을 그 시간을 조금 더 당김으로써 평화를 유지한다는 이유가 정신병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것 같은 느낌에 오싹함을 더했다.

 

이렇게 생각하게 만들기까지의 사회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행동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남자의 돈만 노리는 관계, 어떤 상황에서도 적절치 못하다고 비난을 받을만한 잘못된 만남은 사소한 시작이었지만 그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는 것을 반영해 주기도 한다. 이런 점을 작가는 아주 잘 짚어 내어 소설의 시작과 전개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것 같다.

 

책이 빼곡하게 꽂혀있는 호숫가 집에서 그 누구에게서도 상처받지 않고 평화로운 삶을 이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릴리의 일상은 수면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와 지면서 요동을 치게 된다. 독자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그 끝을 향해가는 스토리 전개는 보기 드문 긴장감을 주었다. 책을 좋아하던 소녀의 치밀한 사고, 이런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어 완성시킨 저자의 아이디어 또한 가볍게 다가오지 않는다. 셜록 홈즈의 뛰어난 머리와 사고, 상상력은 그가 탐정이었기에 칭송받았듯이 이 소설을 만들어 낸 작가의 사고도 어쩔 수 없이 위험하고 무섭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범죄를 기획한 쪽이 아니라 이 소설을 쓴 작가라는 사실에 다행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의 머릿 속이 무궁무진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더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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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동서대전 - 이덕무에서 쇼펜하우어까지 최고 문장가들의 핵심 전략과 글쓰기 인문학
한정주 지음 / 김영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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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동서대전>을 저자가 쓴 의도는, 동 서양을 통틀어 글 잘 쓴 문장가, 작가들의 글 솜씨에 스며있는 비결을 탐구하여 배우고자 하는 것에 있다. 이것이 바로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들의 열의와 욕구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그 과정과 맞 닿아 있겠다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저자가 살펴 본 문인 39명 에게서는 분명 저마다의 특징이 있었다. 글 속에 그들만의 철학이 녹아 있었던 그것이 첫 번째이다. 틀, 형식에 얽매이고 문법을 고려하다 보면 어느 덧 글은 좋은 글로 만들어지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그 반대 개념인 개성과 독특함을 기본적으로 찾아 내 보아야 한다. 글쓴이의 개성으로 이루어진 독창적인 글 이야말로 잘 쓴 글이며 무제한적인 자유로움을 구가하며 자연스럽게 다듬은 글이 바로 좋은 글의 표본이라는 점을 인지해야 할 필요를 준다. 여기에서 잘 쓴 글의 3 요소 라고 나름대로 이름 붙여 보고 싶다.

< 자기다움, 자유로움, 자연스러움>. 간단 명료한 특징인 것 처럼 느껴지는데 직접 글로 쓰며 활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저자가 예를 들어 설명하는 문인들의 책과 문장을 읽어가면서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도 흥미롭다. 그 첫 번째로 나오는 것이 가장 자기다움을 지키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어린아이처럼 순진 무구한 마음으로 글을 써야 함에 있다고.

어린이와 처녀의 솔직하고 부끄러움을 간직한 글쓰기를 의미하는 이덕무의 "영처의 철학" 이 가장 먼저 선 보인다. 서양의 루소와 니체의 글을 이루는 철학과도 일맥상통함을 보여준다.

 

조선조 양반들, 사대부 가에서는 천박하다며 눈 아래로 내려다 보게 하는, 절대 존경하지 않는 짧은 글, "소품문" 도 바로 스스로를 표현해 내는 수단으로 소개하고 있다. 무엇보다 경박, 천박하다는 좋지 못한 말을 들어가면서도 소품문의 형식으로 글을 썼던 조선의 작가들에게서 그 자유로움과 창의성에 놀랐다. 오늘날 에세이 형식이 이미 조선 시대에 성행했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점이다.오히려 저자의 주관적인 생각이 잘 표현되어 있어서 꾸밀 필요도 없이 좋은 글로 평가한다. 이것은 잘 쓴 글의 3요소 중에 그 두 번째인 자유로움을 구가하고 있다고나 할까?  물론 자기다움을 지키고 있는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겠다. 이에 버금가는 일본의 시, 일정한 운율을 지키는 17자 정도의 짧은 시인 하이쿠와 비교해서 소품문은 산문으로, 하이쿠는 시로써 짧은 글에 개인의 느낌과 정서를 담아냈다는 공통점도 알 수 있게 한다.

 

독자적이고 창의력이 돋보이는 글쓰기로는 "기궤첨신" 의 방법이 있다고 소개한다.  요즘이야 창의력 개발로 손쉽게 뭔가를 얻을 만한 소재거리가 풍부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옛날에는 어디에서 독특하게 표현해 낼 수 있게 하는 아이디어가 생겨났을까 궁금하고 대단하다. 글짓기는 결국 많은 독서를 한 이후에 저절로 자연스레 나오는 결과물이라 생각해 왔었지만 스스로 사색한 이후에 나온 깨달음 만이, 여기에서는 저자가 "자득" 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이 부분이 완성된 후에 책을 읽으면서 발견하게 되는 자세를 중시한다.

 

주자학과 양명학의 접근 방식으로도, 홍길주와 서경덕, 쇼펜하우어 같은 동 서양 문장가들의 글쓰기 방식으로도 비교해 주며 소개하고 있어서 읽을거리가 더욱 풍부해 진다. 글쓴 이들의 철학을 기대하며 그 이론적인 부분만을 기대할 수도 있었겠지만 다양한 저자들의 작품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어서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맛을 보아 가며 읽어갈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이러다 보니 책의 두께가 두꺼워지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까.

 

우리나라 작가 뿐만 아니라 비슷한 방식으로 글쓰기를 했던 중국과 일본의, 서양 작가들과의 비교 방식으로 글이 서술되고 있어서 글쓰기를 총체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게 한 자리에 모아 놓은 듯한 모습을 보인다. 막연하게나마 어떻게 글을 써야 할까, 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아주 자세한 대답이 되어 줄 거라는 생각도 해 본다.

 

프랑스 볼테르의 <철학 사전>을 통해서 작가의 철학과 의도에 대해 깊이 알게 되면서 더욱 볼테르를 감탄하게 되었다. 정조의 문체 반정이라는 사건이 있었고, 이 강력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박제가 가 있었음도. 그리고 중국에서의 문장가, 노신은 의학 공부를 하던 중, 중국인의 썩은 정신과 노예 근성이 불행인 것이지 질병 따위는 불행 축에도 끼지 않는다, 정신을 뜯어 고치기 위해서는 문학을 해야 한다는 그 깨달음.  이런 것들이 내게 까지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이제는 말 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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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제국 -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감각의 모든 과학
문동현.이재구.안지은 지음 / 생각의길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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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생존의 문제다. 살아있기 위해서 소통해야 하고, 그 많은 감각 기관을 동원해 왔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 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잘 볼 수 있고 잘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는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과 냄새를 맡고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동을 주는 일인지, 축복 받은 삶인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채로 살아가게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리 생각하면 아침에 잠에서 깨면서 눈을 뜨는 순간부터 다시 잠드는 그 순간 순간 모두가 감사할 일 투성이인 것이다.

감각의 제국이 소개하고 있는 일련의 사람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자연스러운 감각들 중 어느 한 두 부분을 불행히도 쓸 수 없는 사람들이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살아가는 중에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보게 하면서 왜 우리에게 통증이라는 것이 있어야만 하는지를,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알게 한다.

 

시각, 청각 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이 모든 경이로운 감각을 관장하고 있는 뇌의 세계도 둘러보고, 세상과 처음으로 접하는 감각 분야에서는 엄마와 연결이 된 아기의 세계를 둘러보게 한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공감 능력" 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감각의 존재는 살아있음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다른 생물체와 교류를 하기 위해서 필수적이었음을 돌아보게 한다. 사람들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살면서 또 동물과 자연과 함께 느끼고 나누는 기능, 상대편의 입장에 서서 헤아리는 심정인 공감각은 어울려 살아가는데에 무엇보다 필요한 감각임을 가장 강조하고 싶을 것 같다.

 

사람이기에 더욱, 교류할 때 타인을 배려하게 하는 느낌이 필요하고, 함께 나눠가는 감각 또한 사람답게 살아가게 하는 기본이 아닐까도 싶다.

 

이런저런 감각의 세계를 둘러보며 한편으론 감사하게도 하고 한편으론 공감 능력의 정도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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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내일이 올거야
이시다 이라 지음, 이규원 옮김 / 작가정신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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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속에 그대로 스며든다. 단순한 것 같은데, 별 것 없는 것 같은 와중에서도 뭔가가 꿈틀대며 느끼게 한다. 작가의 스토리 전개 방식과  내용면에서 가볍지 않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내일의 행진 이라는 이름으로 걸어가는 길 위에서 벌어지는 네 사람의 이야기가 계속 페이지를 넘겨가게 하는 왠지 모를 흡인력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젊은 세대에게도 별반 다르지 않는 아픔이기에 일본 청년이 겪고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에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와는 다른 나라가 참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걷는다는 것이 특별난 일도 아닌데 여기 주인공인 네 사람이 만들어 내는 일상은 특별한 것으로 다시 태어난다.

파견회사 비정규직인 슈고, 신야, 요스케와 호센은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던 별로 친하지 않던 동료이었지만 같은 날짜에 계약 해지를 당한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 버린 네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 지 어디로 가야 할 지도 정하지 못한 채 분노한다. 회사의 부품처럼 써 먹다가 필요없어진 물건처럼 내동댕이쳐 지는 것에 대해 분노가 치밀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다. 말수가 적고 덩치가 큰 슈고는 도쿄까지 도보 여행에 나서겠다 하고 가까운 곳도 아닌 그 먼 거리를 걸어 가겠다는 슈고를 따라서 반신반의하며 나머지 세 사람도 따라 나선다.

 

일단 네 사람의 캐릭터가 독특하다. 이야기가 이어 나가질 만한 연결 고리는 이 네 사람의 다른 성격으로 인해서 이미 구성이 된 셈이다. 각자 다른 성격의 네 사람이 만들어 가는 일상, 상황들이 흥미롭고, 작게 시작된 이야기가 점점 커져가는 구조도 그 다음에 일어날 상황을 궁금하게 만든다. 파워 블로거인 신야의 블로그 갱신으로 그들의 작은 행동은 외부에 알려지게 되고 잡지사 기자의 취재 요청도 들어온다.

 

역시 경험의 힘은 크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서 비정규직의 삶을 힘겹게 살아내던 요스케는 여태까지 나약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내일의 행진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부터도 배울 점과 깨달음이 많음을 생각하게 된다. 본래부터 미래의 희망 사항이 있어왔던 호센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용사라는 꿈을 내포해 왔고 여기에 걸맞는 행동을 보여 주고 있지만 꿈이라는 자체가 없었던 요스케의 마음에는 이 걷기에서 얻는 것이 많아졌다.

 

그저 묵묵히 걸으려 따라 나섰던 길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만들고 취재 기자들까지 불러 들이게 되는 역할을 해 왔던 신야는 그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던 한 판 승부의 장 같았다. 아무 것도 남기는 것 없이 파견 사원으로 이 곳 저 곳 방황하듯이 살아갈 뻔 했었던 네 명의 젊은이에게 삶의 전환기적 사태였던 것이기도 했다. 일탈이라고 부른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이미 희망없이 살아왔던 삶이기에 이들에게는 빛나는 도전과도 같은 찬란한 일탈이었다고 할 만 하다.

 

네 명의 걷기가 수 백명이 함께 걷는 대 행사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듯 우리의 삶이란 바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것 에서 어떤 이에게는 희망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절망과 체념으로 갈릴 수 있게 하는 것이겠다. 희망이든 절망이든 무엇이든 행동하는 자에게는 다른 시간이 다가 올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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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전사의 저항과 투쟁 - 이슬람과 중동,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맨몸으로 저항한 민중의 역사
램지 바루드 지음, 최유나 옮김 / 산수야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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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8-289 쪽

이스라엘 병사들이 곧 난민촌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일부는 그냥 달려왔고 또 다른 군인들은 커다란 군용 차량과 작은 지프를 타고 몰려왔다. 전쟁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   나는 돌멩이를 들고 우뚝 섰다. 아이들이 병사들 쪽으로 달려가면서 돌을 던지기 시작하자 나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나는 한 손에는 책가방을, 다른 손에는 돌멩이를 들고 지옥으로 달려 들었다.

" 신은 위대하다!" 를 크게 외치며 돌을 던졌다.

 

내 돌은 아무 것도 맞히지 못하고 바로 코 앞에 떨어졌지만, 자유로워짐을 느꼈다. 나는  더 이상 마른 팔라펠 샌드위치를 타려고 유엔 구호 급식앞에 줄지어 선 하찮은 난민촌 아이가 아니었다. (...)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 만의 언어로 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이름은 램지, 모하메드의 아들, 누세이라트 출신의 자유의 전사, 그리고 비통함 속에 눈을 감은 뒤 우리 형의 작은 무덤 옆에 묻힌 어느 농민의 손자라고 말이다.

 

 

눈물겹다. 모든 상황들이 우리의 1920년 대 그것에서 처럼 안타깝기 그지없다. 일제의 압박에 저항하던 우리 민족의 투쟁처럼, 터키의 지배 하에 있던 팔레스타인이 영국 세력에 밀려 버린 터키 대신에 자리를 바꿔 앉은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국가도 민족도, 위치해 있는 땅도 다르지만 외세의 침입을 번갈아 받으면서도 자신의 고향과 땅을 지키고자 분투했던 팔레스타인의 투쟁이 전혀 낯설지 않게 보인 것은, 일제 치하의 고통 받던 우리 민족의 투쟁과 겹쳐지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중동의 분쟁 지역,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하는 지역인 팔레스타인의 투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치열하고 끔찍한 테러의 형태로 메스미디어에 오르내린다. 대체, 왜?  그들의 역사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오랫동안 분쟁이 끊이질 않는건가,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이 사태를 확실히 알아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로 난,  죄없는 난민들만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어쩌면 잘못된 시각으로 어설프고 부족한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되짚어 보게도 한다. 역사는 힘 있는 자의 편에서 쓰여진다고, 세계적으로 막강한 힘을 가진 나라들의 비호 아래 그들과의 비밀 협약이 오고가고, 기어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해 내고야 마는 쪽이 옳은 것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

 

나도 그 중의 하나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6일 전쟁이 발발하자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속속 자기 나라로 돌아와 아랍 국가들과 전쟁에 임했던 이야기도 이스라엘 편 쪽에서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주로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바라보게 되었던 것은 그 쪽 사람들의 배경을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었고, 사람들이 말하는 쪽의 편으로 쏠려서 생각했던, 일종의 군중 심리에 말렸던 것 같다. 게다가 지금까지 팔레스타인 사람 쪽에 서서 이들의 관점으로 보여 준 책을 아직 읽지 못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일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반대 선상에서 바라 본 이 책이 또 다른 시각을 마련해 준다. 힘 있는 자 만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도.

 

특히 이들 상황과 비슷한 시기에 잔혹했던 시절을 겪어왔던 우리로서는 더욱 올바르게 바라보며 판단할 수 있는 시선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더욱 생각하게 한다.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마을에서, 조상대대로 일구어 오던 땅에서 강제로 내쳐졌던 그것은 절대로 옳았던 상황도, 정의로운 일도 아니었음을.

 

영국과 손을 잡은 시오니즘적 유대 민족 이스라엘이 어떤 방식으로 인종 청소 작업을 끝냈었고, 오늘 날 우리가 보아 온 가자 지구가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저자는 할아버지대 부터 아버지 시대까지 거슬러 이야기를 푼다. 마치 소설처럼,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지게 하지만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는 잔혹했던 시대였다. 이스라엘의 대포 아래 추방되고 굶주림과 고통 속에 살아서 버텨 낸 그 이야기들이 차라리 소설이라면 그 소설을 읽고 이스라엘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가자 지구로 피난해 들어갈 때 어린아이였던 저자의 아버지가 잘난 형에 치이면서 헤쳐 나오게 된 삶의 과정과 자유를 향한 전사였던 이야기는 저자의 가족사 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눈물겨운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역사이다.

 

이 책의 원제 또한 My father was a freedom fighter. 이다. 죽을 때 까지 가자의 난민촌에서 정신을 잃지 않고 꿋꿋이 버텨 내었던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그가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따라 가면서 그의 행적 속에 있어왔던 수 많은 전투들, 항쟁들, 협약, 그리고 고통과 분노를 읽다 보면 팔레스타인의 모든 것을 명백히 투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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