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은 가시덤불과 잡초를 겅중겅중 뛰어넘으며 경사면을 오르기 시작했고, 앙토니도 그 뒤를 따랐다. 겁이 났지만 어쩐지 달콤한 데가 있었다. 창고 안으로 들어가 처음 몇 분 동안은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창고에는 작은 배와 딩기 420 요트, 카누 몇 척이 금속 고리에 매달려 있었다. 옷걸이에 걸린 구명조끼에서 곰팡내가 훅 하고 올라왔다. 습기를 머금은 어둠 속에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내다 보이는 호숫가와 반짝이는 수면, 단조로운 풍경은 마치 영화의 한 스틸컷 같았다. - P21

둘이 호흡을 척척 맞춰 사촌이 고른 카누를 금속 고리에서 벗겨 낸 다음 노를 집어 들었다. 서늘한 창고를 막 나서기 전 앙토니와 사촌은 잠시 멈춰 섰다. 날씨가 좋았다. 저 멀리 윈드 서퍼가 호수 수면 위에 선명한 물결을 따라 선을 그었다. 창고 쪽으로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앙토니는 엉뚱한 짓을 하기 전에 찾아오는 짜릿한 현기증을 느꼈다. 전에 프리주에서 오토바이를 훔칠 때도 똑같은 기분이었다. - P22

앙토니와 사촌이 늘 가는 곳이 있었는데 그들이 ‘재활용 센터‘라고 이름 지은, 배를 대기 쉬운 호숫가였다. 하수구 근처여서 한여름에도 사람이 거의 없고 한적했다. 호수는 여러 가지 얼굴을 지녔다. 그들 뒤에 있는 레오라 그랑주 레저 센터의 호숫가. 저 아래에는 캠핑장 호숫가. 좀 더 멀리엔 ‘대두‘ 일당이 주로 모이는 아메리칸 비치. 소나무, 금빛 모래사장, 그리고 바닷가 휴양지에서나 볼 법한 탈의실과 바가 있는 푸앵튀 저편 수상 클럽이 있는 곳이 풍광으로 치면 제일 예뻤다. - P25

오후 6시가 조금 지나자 소녀는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 갈 시간이 되었는지 부산을 떨었다. 앙토니가 소녀 옆에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있어, 소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 무릎이 앙토니의 무릎을 살짝 스쳤다. 여자란 얼마나 보들보들한 존재인지.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완전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소녀의 이름은 스테파니 쇼수아였다.
앙토니는 열다섯 살 여름을 지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시작되어야 했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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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폐지를 압축한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압축판이 전진하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한다. 이것이 세상의 기본적인 움직임이다. 헬리콘의 밸브나 반드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원처럼. 만차는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채, 자신의 잘못이 아닌 치욕을 견뎌야 했다. 그녀에게 닥친 일은 인간적인, 지나치게 인간적인 일이었다. 그런 일을 두고 괴테라면 울리케 폰 레베초프를 용서해주었겠고, 셸링이라도 카롤리네를 용서해주었을 것이다. 라이프니츠라면 그의 아름다운 정부 조피 샤를로테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고, 과민한 횔덜린 역시 곤타르트 부인에게 그랬을 테지만······ - P44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폐지 꾸러미를 차례로 압축기에 넣고 압축한다. 꾸러미마다 한복판에 책 한 권이 가장 아름다운 페이지가 펼쳐진 채 놓인다. […] 나는 밤이 새도록 그녀에게 용서를 빌었지만 헛일이었다. 그녀는 도도하게 몸을 세운 채 레너 호텔을 떠났고, 그렇게 노자의 말도 실현되었다. 치욕을 겪고 명예를 지킨다는. 그녀 같은 사람이 바로 그 명백한 사례다······ 나는 『도덕경』의 해당 페이지를 펼쳐 희생물을 바치는 사제처럼 지저분한 빵 종이와 시멘트 부대로 꽉 찬 압축통 한복판에 놓아둔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오물들이 모두 움직이기 시작한다. 절망의 기도를 올리기 위해 꽉 맞잡은 양손처럼 내 압축기의 아가리가 『도덕경』을 분쇄하는 광경을 나는 지켜본다. 그러고 있노라니 먼 과거로 되돌아가 만차의 삶 한 토막과 아름다웠던 내 젊은 시절이 떠오른다. 그 모두의 배후에서, 깊디깊은 땅 밑 하수구를 흐르는 더러운 물소리가 들린다. 그곳에서 두 종족으로 나뉜 쥐들이 생사를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아름다운 하루다! - P46

무수히 많은 푸른 파리들이 사방에서 미친듯이 날아다녔다. 날개와 몸이 금속성을 내며 소용돌이무늬의 살아 있는 거대한 화폭을 만들어냈다. 얼룩으로 가득한, 잭슨 폴록의 커다란 그림들 같았다. - P50

나는 그 둘의 출현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내 조상들 역시 술을 좀 과하게 마셨을 때는 환영을 보았고, 동화 속 인물들의 방문을 받곤 했으니까. […] 그러니 오늘 내가 좋아하는 그 두 사람이 방문했다고 해서 뭐,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고를 통찰하는 데 그들 각자의 나이를 아는 게 필수 조건임을 깨달은 건 처음이었다. 파리들의 광무, 그 성난 날갯짓이 점점 활기를 띠면서 내 작업복도 피로 물들었다. 내가 압축기의 녹색 버튼과 붉은색 버튼을 번갈아 누르는 동안에도 산등성이를 쉬지 않고 오르는 예수의 모습이 보였다. 노자는 이미 산 정상에 올라 있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은 열정적인 젊은이와 체념 어린 눈길로 주위를 둘러보는 노인. 삶의 근원으로 회귀함으로써 안감을 두둑이 댄 영원의 옷이 만들어진다. 예수는 기도를 통해 현실을 기적으로 만들려고 한 반면, 『도덕경』의 노자는 순진무구의 지혜에 도달하기 위해 자연법칙들을 유일한 방편으로 삼았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 P50

청년들과 아름다운 처녀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빛을 발하는 젊은 예수에게서 나는 눈을 떼지 못한 채 맥주를 단지째 들이켰다. 반면 노자는 홀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무덤을 찾고 있었다. 피 묻은 종이에 극도의 압력이 가해지면서 곤죽으로 짓이겨진 파리떼와 뒤섞인 핏방울이 튀는 와중에도 예수는 그윽한 황홀경에 빠져 있고, 노자는 깊은 우수에 젖어 무심하고도 거만한 자세로 압축통 모서리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믿음이 가득한 예수가 산 하나를 들어 옮기는 동안, 노자는 내 지하실에 불가해한 지성의 그물을 펼쳐놓았다. 예수가 낙관의 소용돌이라면, 노자는 출구 없는 원이다. 예수가 극적인 갈등 상황과 싸우고 있다면, 노자는 도덕과 관련된 상반되는 요소들의 풀리지 않는 문제를 조용히 명상한다. - P52

그 순간 난데없이 소장의 모습이 보였고, 분노와 증오가 가득 서린 목소리가 내 머리 위로 쏟아져내렸다. 고함을 지르는 소장의 손이 고통으로 뒤틀렸다. "한탸, 그 떠돌이 점쟁이 년들이 거기 남아 무슨 짓을 한 게지?" 늘 그렇듯 나는 깜짝 놀라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주저앉아 양손으로 내 압축통을 꽉 잡고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소장이 왜 나를 좋아하지 않는지, 왜 나만 보면 그렇게 험상궂은 표정만 짓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로 말미암은 고통의 낙인이 뚜렷이 새겨지고 부당한 분노가 서려 있는 얼굴. 그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한없이 비참한 심경에 젖곤 했다. 그지없이 고결한 주인에게 추악한 골칫거리나 떠안기는 밉살스러운 고용인, 그 혐오스러운 인간이 나인가 싶어서······ - P57

집시 여자들이 와 있던 내내 예수와 노자가 내 압축기 옆에 남아 있었지만 이제 나는 혼자였다. 줄처럼 감겨오는 검정파리들의 공격을 쉴새없이 받으며 버림받은 자가 되어 무작정 일에 매달렸다. 그러자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을 막 거머쥔 테니스 선수처럼 의기양양한 예수가 보였다. 반면 초라한 외관의 노자는 재고를 넉넉히 두고도 빈손처럼 보이는 장사꾼 같았다. 예수에게서는 상징과 암호로 이루어진 피 흘리는 현실이 읽혔지만, 수의에 싸인 노자는 엉성하게 다듬은 들보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만 있었다. 예수는 플레이보이 같았고, 노자는 내분비선이 고장난 노총각처럼 보였다. 예수는 오만한 손과 힘찬 몸짓으로 적들에게 저주를 내렸지만, 노자는 체념한 사람처럼 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예수가 낭만주의자라면, 노자는 고전주의자였다. 예수는 밀물이요 노자는 썰물, 예수가 봄이면 노자는 겨울이었다. 예수가 이웃에 대한 효율적인 사랑이라면, 노자는 허무의 정점이었다. 예수가 프로그레수스 아드 푸투룸이라면, 노자는 레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이었다······ - P58

우리가 아직 도끼를 들고 뛰어다니며 염소를 치던 시절, 집시들은 이 세상 어딘가에 국가를, 이미 두 차례나 쇠락을 경험한 사회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불과 두 세대째 프라하에 정착해 살고 있는 이 집시들은 자신들이 일하는 곳에 제의의 불을 지피는 걸 좋아한다. 오로지 기쁨을 위해 타오르는 유목민의 불이다. 대충 쪼갠 장작개비들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모든 사고 이전에 존재하는 영원의 상징이며 어린아이의 웃음 같기도 한 불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린 선물 같은 무상의 불이며. 환멸에 젖은 행인은 더이상 알아챌 수 없게 된 요소들의 생생한 표징이다. 방황하는 눈과 영혼을 덥혀주려고 장작개비들을 태우며 프라하 거리의 구덩이들에서 태어난 불이다······ 눈과 영혼을 덥혀주면서 추운 날에는 손도 그렇게 녹여주는 불이라고, 나는 후센스키 주점으로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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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토니는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어진 눈길로 호수의 물결을 응시했다. 게으름이 딱지처럼 눌어붙은 듯 오른쪽 눈꺼풀이 반쯤 감긴 얼굴이 어딘가 망가진 것 같고 늘 주눅 들어 보였다. 눈은 앙토니의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온몸에 엉겨 붙는 무더위처럼. 땅딸한 몸집, 꾀죄죄한 행색, 265 사이즈 발과 얼굴을 뒤덮은 여드름처럼. 수영이나 할까······. 사촌은 왜 죄다 멀쩡한 걸까. 앙토니는 잇새로 침을 뱉었다. - P15

실종된 녀석의 엄마는 병원에 입원해 진정제를 맞는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또 이미 목매달아 죽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밤중에 잠옷만 입고 이 거리 저 거리 헤매는 모습을 봤다는 사람도 있었다. 녀석의 아빠는 경찰이었다.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사람들은 자연히 아랍인들이 복수 차원에서 저지른 짓이라고 의심했고, 경찰인 그가 어떤 식으로든 사건을 해결할 거라고 기대했다. 수색 보트에 탄 작고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실종자의 아버지였다. 뜨겁게 내리꽂히는 햇살 아래 그의 벗어진 머리가 반짝거렸다. 호수 기슭에 모인 사람들은 그의 부동자세를, 그 참을 수 없는 차분함을, 시간이 흐를수록 서서히 벌겋게 익어 가는 그의 대머리를 지켜보았다. 이 아버지의 인내심은 모든 사람에게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차라리 무슨 짓이라도 해 주었으면, 몸을 살짝 뒤척이든가 모자라도 썼으면 하고 사람들은 바랐다. - P17

사촌은 언제나 대담했고 자존감이 넘쳤다. 사촌과 함께라면 지옥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두 집 사이에 복잡한 문제가 얽히면서 앙토니와 사촌은 점점 멀어졌다. 앙토니가 보기에 사촌네는 규모나 상황, 희망, 심지어 경기 여파로 여기저기 만연한 절망마저 너무나 작고 볼품없었다. 사촌이 보는 앙토니네 집은 회사에서 잘리고 부모가 이혼하는 한심하거나 암적인 집안이었다. 그런데 당시 앙토니 주변에서는 그런 일이 대체로 정상이었으며, 그런 범주 밖에 존재하는 모든 일은 상대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가족들은 파스티스 몇 모금만 마셔도 연회가 한창 무르익은 순간 언제고 폭발해 버릴 만큼 단단히 뭉쳐, 지하 세계에 간신히 억눌러 담아 온 고통과 분노를 육중한 보도블록 위로 밀어내며 꾸역꾸역 살아갔다. 앙토니로 말하자면 이 모든 것보다 훨씬 우월한 자기 모습을 상상했다. 멀리 떠나기를 꿈 꾸었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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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압축기로 책들을 압축하노라면, 덜컹대는 고철의 소음 속에서 20기압의 힘으로 그것들을 짓이기고 있노라면, 인간의 뼛조각 소리가 들리곤 했다. 마치 고전 작품들의 뼈와 해골을 압축기에 넣고 갈아댄다고나 할까. 탈무드의 구절들이 딱 들어맞는다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올리브 열매와 흡사해서, 짓눌리고 쥐어짜인 뒤에야 최상의 자신을 내놓는다." - P25

단 한 권도 더는 올려둘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서야 내 방의 침대 둘을 합쳐 그 위로 관 뚜껑처럼 닫집 형태의 선반을 짜 넣었고, 거기에 지난 삼십오 년 동안 찾아낸 2톤의 책을 쌓아두었다. 잠이 들면 끔찍한 악몽처럼 나를 짓눌러오는 책들이다······ 나는 잠결에 돌아눕거나 잠꼬대를 하거나 몸을 뒤척이다가 책들이 미끄러져내리는 소리에 질겁하곤 한다. 몸이 살짝 스치거나 소리만 질러도 눈사태처럼 책들이 선반에서 와르르 떨어져 나를 덮칠 것이다. 풍요의 뿔에 담겨 있던 희귀한 책들이 쏟아져내려 나를 한 마리 이처럼 뭉개놓고 말 것이다. - P29

변두리 구역으로 돌아온 나는 그곳에서 소시지 하나를 샀다가 깜짝 놀랄 일을 겪었다. 소시지를 입으로 가져갈 필요도 없이, 그저 턱을 내리기만 해도 소시지가 내 뜨거운 입술에 와닿는 게 느껴졌다. 소시지를 내 허리 높이에 잡고 있었는데 말이다······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고 경악했다. 소시지 한쪽 끝이 신발에 닿을락 말락 했다. 양손으로 잡고 보면 그저 보통 크기의 소시지였다. 결국 내 키가 줄어들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내 몸이 찌부러진 거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주방 문틀을 가린 백여 권의 책을 치웠다. 내 키를 날짜와 함께 잉크로 표시해둔 문틀이었다. 문설주에 등을 붙이고 책을 갖다대어 키를 잰 뒤 돌아서서 선을 그었다. 팔 년 새에 9센티미터가 줄었다는 걸 맨눈으로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침대 위로 솟은 책들의 천개를 올려다본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2톤짜리 닫집이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무게에 짓눌려 내 몸이 구부정해진 것이다. - P33

어쨌거나 나의 가장 절친한 친구는 단연 하수구 청소부들이다. 아카데미 회원이었던 두 사람은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에 대한 책을 쓴다. […] 그런데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인간의 전쟁만큼이나 전면적인 회색 쥐들과 검은 시궁쥐들의 전쟁과 관련해 그들이 쓴 기사였다. 그 전쟁 중 하나가 회색 쥐들의 완벽한 승리로 막을 내린 참이었다. 쥐들이 지체 없이 두 개의 무리, 두 개의 종족, 두 개의 조직화된 사회로 나뉘어 싸웠던 것이다. 프라하의 하수구와 시궁창에서는 쥐들이 생사를 건 대전쟁을 벌이는데, 승리하는 쪽이 포드바바까지 흘러가는 배설물과 오물을 전부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변증법의 논리대로 승자가 다시 두 진영으로 나뉜다는 것도 그 고매한 하수구 청소부들이 내게 알려주었다. 기체나 금속을 비롯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투쟁을 통해 생명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분열을 겪듯이 말이다. 이처럼 상반되는 것들에 균형을 부여하려는 욕구에 의해 조화가 이루어지며, 세상이 통째로 휘청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정신의 투쟁 역시 여느 전쟁 못지않게 끔찍하다, 라고 한 랭보의 말이 적확하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이해하게 되었다. - P36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은 내가 헤겔에게서 배운 것들을 생각하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서 단 한 가지 소름 끼치는 일은 굳고 경직되어 빈사 상태에 놓이는 것인 반면, 개인을 비롯한 인간 사회가 투쟁을 통해 젊어지고 삶의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야말로 단 한 가지 기뻐할 일이라는 사실 말이다. - P37

수도의 하수구에서 두 패로 나뉜 쥐들이 서로 밀어내며 어이없는 전쟁을 벌이는 동안, 추락한 천사들이 각자의 지하실에서 일하고 있다. 전투에서 패한 교양인들이다. 한 번도 이 전투에 가담한 적이 없지만 세상을 완벽히 설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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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토니는 호숫가에 우두커니 서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호수는 기름처럼 묵직했다. 간간이 잉어나 곤들매기가 지나갈 때마다 벨벳 같던 수면이 우그러졌다. 소년은 코를 킁킁거렸다. 공기에서 열을 잔뜩 품은 흙과 진창 냄새가 났다. 7월이 이미 떡 벌어진 소년의 등짝에 주근깨를 뿌려 놓았다. 소년이 걸친 건 낡은 축구 유니폼 반바지와 짝퉁 레이밴 선글라스가 전부였다. 날씨가 까무러칠 듯 무더웠지만 그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 P13

사촌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그의 피부 아래로는 근육이 울퉁불퉁 불거져 나와 정확히 따라 그릴 수 있을 정도였다. 가끔씩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사촌의 접힌 겨드랑이 틈에 앉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말이 귀찮은 등에를 쫓듯 피부가 움찔움찔했다. 앙토니는 군살 하나 없이 날씬하고 근육도 탄탄한 사촌의 몸이 부러워 저녁마다 방에서 윗몸 일으키기며 팔 굽혀 펴기를 해 봤지만 아무리 해도 사촌 같은 근육은 생기지 않았다. 앙토니의 몸으로 말하자면 여전히 두툼하고 둔탁한 스테이크 덩어리 같았다. 언젠가 학교에서 축구공을 펑크 내는 바람에 자습 감독 보조 교사한테 한 소리 들은 게 억울해서 학교 수업이 다 끝난 후 잠깐 보자고 했지만 사촌의 덩치를 익히 아는 교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촌이 쓰고 다니는 레이밴 선글라스는 짝퉁이 아니었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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