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세계는 급속도로 풍화되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풍화는 건물 표면에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대비라는 영구적인 음영을 남긴다. 풍화가 만들어내는 빛과 어둠, 크고 작음, 또렷함과 모호함, 실재와 가상, 미켈란젤로 적인 의미의 ‘살아 있는‘ 돌과 ‘죽은‘ 돌, 정신과 물질의 대비는 풍요로 착각되지만, 그것은 파괴로 가는 전 단계에서 일어나는 잠시의 풍요이다. - P143

빅토르 위고는 한 소설에서 책이 건축보다 더 오래간다고 말했지. 시간의 풍화를 막는 책의 물매가 건축의 물매보다 더 싸게 먹히기 때문이야. 책은 얼마든지 복제할 수 있지만, 건축은 그럴 수 없으니까. 하지만 책은 아무리 오래되어도 새로운 내용을 드러내진 않아. 어떤 질문에도 책은 정해진 이야기만 반복할 뿐이지만 풍화되는 건축은 항상 새로운 대답을 내놓지. 쇠퇴한다는 것, 몰락한다는 것, 풍화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야. 오스카 와일드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영혼은 늙게 태어나 시간이 갈수록 어려지는데 이것이 인생의 희극이다. 반면에 육체는 어리게 태어나 점점 더 늙어가니 이것이 인생의 비극이다.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풍화되어야만 영혼이 드러나게 돼 있어. 폐허마다 영혼이 드러나.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저절로 드러나는 영혼이지. 이 폐허는 끝이 아니야. 이건 이 집의 가장 어린 영혼, 새로운 시작이야. 알겠니? - P145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관계성의 물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누군가를 만나거나 인터뷰를 할 때 혹은 어떤 일이 벌어질 때마다 물 한 잔을 떠올리는데, 그게 바로 그녀가 말하는 관계성의 물이었다.
"일단 물 한 잔을 얻어 마시는 게 중요해요. 물 한 잔 정도의 호의를 받을 수 있다면 관계성이 형성되거든요. 물 한 잔을 준 사람과 물 한 잔을 받은 사람. 그렇게 서로 맺어지는 거죠. 한 번 맺어지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좀 쉬워집니다." - P163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눈덩이를 굴리는 일과 비슷했다. 사랑할수록 더 사랑하게 된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미워할수록 더 미워하게 된다. 매 순간 관계가 호의와 악의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 P166

"그 언니의 손을 맞잡기 전에도, 나는 최선을 다해 좋은 쪽으로만 생각했어요. 다 잘될 거야. 괜찮아질 거야. 비행기는 무사히 착륙하고, 아빠는 깨어날 거야. 하지만 어느 순간 머리는 폭발한 것처럼 멍해졌고 끔찍한 공포가 밀려왔죠. 그때 그 언니의 손을 잡게 된 거예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기에 나는 그저 그 언니의 손에만 집중했어요. 그러자 마치 태어나서 누군가의 손을 처음 잡아본 것처럼 그 손의 물성이 고스란히 느껴졌어요. 물렁물렁한 손바닥이라든가, 그 안에 든 뼈 혹은 흐르는 피의 온기 같은 것들이. 나는 눈을 감고, 그 느낌에만 집중했어요. 거기서부터 모든 게 바뀌기 시작했어요. 그 작지만, 내 쪽에서 찾아낸 좋은 느낌에서부터." - P167

"밖에서도 검게 칠하고 안에서도 검게 칠하면, 인간은 그 즉시 하찮아집니다. 그것 역시 인간진화학의 법칙이죠. 벌레보다도, 티끌보다도 더 하찮아지다가 인간은 결국 사라지게 됩니다. 시간이 흐르자 협동농장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거기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는 듯이 행동했습니다. 저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렇게 두 손을 들어 바라봤습니다. 내가 정말 눈에 보이지 않는가 싶어서 말입니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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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할까? 부르주아 세계와 프티부르주아 세계에 발을 좀 담가보았다고 해서 이렇게 가족을 버리고 그들을 부끄럽게 여겨도 되는 것일까? 지적·정치적으로 사회세계의 위계질서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가 왜 그 질서를 체화하고 있는 것일까?" - P80

폴 엘뤼아르Paul Bluard 가 슬픔과 회한이 담긴 유명한 시에서 동정했던, 이 "명예를 잃고 흉한 몰골"로 "포장도로 위에 남겨진 불행한 여자," "옷이 찢겨나간" "피해자"와 비슷해졌다는 것을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 P85

어떤 정치적 서사가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실제로 누구인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서사가 화제로 삼고 해석하는 개인들의 삶을 구축된 허구로부터 빠져나간다는 이유로 비난하기에 이른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통일성과 단순성을 해체하고 거기에 모순과 복잡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리고 거기에 역사적 시간을 다시 도입하기 위해, 변화해야만 하는 쪽은 서사이다. 노동 계급은 변화한다. 그것은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지 않는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노동 계급은 1930년대나 1950년대의 노동 계급과 더 이상 같지 않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회적 장 안에서 동일한 위치에 있다고 해서 반드시 동일한 현실, 동일한 열망을 갖는 것은 아니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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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집에서 사라지자, 나는 그 전까지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이 여행, 아니 차라리 귀향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을 이 여정을 결심하게 되었다. 내가 그토록 도망치고자 했던 "나의 고장"—장 주네Jean Genet라면 이렇게 불렀을 것이다—을 다시 찾는 여정 말이다. 내가 거리를 두던 이 사회적 공간은, 내가 그것에 맞서서 나 자신을 구축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내 존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는 정신적 공간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왔다. 그녀와의 화해의 시작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 자신과의 화해, 내가 거부하고 내쫓고 부인했던 나 자신의 어떤 부분과의 화해의 시작이었다. - P12

어린 시절 우리의 삶과 사회화된 방식의 흔적들은 성인의 나이에 이르러 생활 조건이 변화한 후에도, 심지어 우리가 이 과거로부터 멀어지기를 원했을지라도 계속해서 남아 있다. 따라서 우리가 떠나온 환경—혹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가까스로 빠져나온 환경—으로 되돌아갈 때면 우리는 항상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게 되며, 부인된 만큼이나 보존되어 있는 나 자신과 다시 만나게 된다. […] 기이하게도 우리가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단지 진정시키려고만 해도, 이 은밀하고 흐릿하던 불편함의 윤곽은 훨씬 뚜렷해지고 한층 깊어진다. 이 감정들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제야 그것들이 거기 있었음을, 우리의 심연 속에 숨은 채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향해 작용하고 있었음을 발견, 아니 재발견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진정 이 불편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 멜랑콜리를 진정시킬 수 있을까? - P14

나는 곳곳에서 전조 증상들을 발견한다. 겁내는 만큼 자꾸 의식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 후의 내 일상은 알츠하이머의 유령에 사로잡혔다. 장차 닥칠 미래를 보여주어 날 불안하게 만드는 과거에서 온 유령. 이런 식으로 아버지는 내 존재 속에서 계속 현존한다. 고인이 된 사람이 자기 아들의 머릿속—위협이 자리 잡는 장소—에서 살아남는 이상한 방식. 라캉Jacques Lacan은 ‘세미나Seminaires 시리즈‘ 중 한 권에서 아버지의 사망이 어린 자식, 특히 남자아이에게 열어놓는 불안에 관해 아주 잘 말한 바 있다. 아이는 죽음 앞 최일선에 홀로 남겨진 자신을 발견한다. 알츠하이머는 이 존재론적 불안에 일상적인 두려움을 덧붙인다. 우리는 그 지표들을 감시하고 해석한다. - P18

내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느낀 감정과 얼마나 다른지 헤아려본다. […] 하지만 나는 시간이 장악하지 못할, 지울 수 없는 고통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내가 느낀 것은 고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혼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개인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질문에 의해 촉발되었다. 사회적 숙명, 사회의 계급적 분화, 사회적 결정요인들이 주체성의 구성에 가져오는 효과, 개인 심리, 개인들 간의 관계 등에 관한 질문 말이다. - P20

그녀는 벽장에서 사진이 가득 든 상자를 꺼냈다. […] 우리 앞에서 실제로 움직이고 있는 몸들과 비교할 때, 과거의 사진에 찍힌 몸들이 우리 시선에 얼마나 즉각적으로 사회적·계급적 신체로서 나타나는지 확인하는 일은 언제나 현기증을 불러일으킨다. 마찬가지로 ‘추억‘으로서의 사진이, 개인—이 경우에는 나—을 그의 가족적 과거로 데려감으로써 그를 사회적 과거에 정박시키는 것을 확인하는 일 역시 그러하다. 낡은 사진들 속에서 다시 솟아나는 사적인 것과 내밀한 것의 영역은 우리를 우리의 출신 배경인 사회세계의 칸막이 속에, 특정 계급에 속한 것으로 여겨지는 장소들 속에, 그리고 어떤 지형도 속에 다시 기입한다. 근본적으로는 매우 개인적인 관계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를 집합적인 역사와 지정학 안에 위치시키는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 각자가 가장 심층적인 진실 가운데 하나로 자기 안에 품고 있는 개인적 계보학이 사회적 고고학이나 위상학과 분리 불가능한 것처럼) 지형도 속에 말이다. - P21

내가 태어나 청소년기까지 보낸 도시를 떠나 파리로 가기로 한 스무 살 때의 결정은, 내 사회적 환경의 점진적인 변화를 의미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내 동성애 성향을 확인하고 인정하려는 욕망, 즉 내 개인적인 여정에서 성적인 ‘벽장‘에서의 탈출은 또 다른 위장이자 또 다른 유형의 분리된 인격, 혹은 이중적 의식이 제약을 가하는 일종의 사회적 벽장으로의 진입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해도 과장이 아니다(이 사회적 벽장은 잘 알려진 성적인 벽장과 동일한 메커니즘을 가진다. 이를테면 실마리들을 흐트려놓는 책략, 비밀을 알고는 있지만 지켜주는 극소수의 친구들, 상황과 상대방에 따라 달라지는 말투, 아무것도 삐져나오지 않게 하고 스스로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과 몸짓, 억양, 표현에 대해 가하는 지속적인 통제 등등). - P24

그러니 서로 뒤얽힌 두 여정이 있는 셈이다. 자기 자신을 재발명하는 상호의존적인 두 가지 궤적. 하나는 성적 질서와 마주한 궤적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 질서와 마주한 궤적이다. 그런데 내가 글을 쓰기로 했을 때 분석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성적 억압과 관련된 첫번째 궤적이었지, 사회적 지배와 관련된 두번째 궤적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러한 실존적 배반은 바로 이론적 글쓰기의 몸짓에 의해 한층 심해졌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글 속에 주체의 사적인 차원을 연루시키는 글쓰기의 한 가지 유형 [내 섹슈얼리티의 분석]을 채택한 셈인데, 이는 또 다른 유형 [내 계급적 출신 배경의 분석]을 거의 배제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선택은 현재의 시간 속에서 나를 정의하고 주체화하는 방식을 구성할 뿐만 아니라, 내 과거, 즉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 내가 과연 누구였는지를 선택하는 방식을 구성했다. 노동자의 아들이 아닌 게이 어린이, 게이 청소년으로서 말이다. - P30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엽에는 박애주의자들이 꿈꾸고 실현해낸 경관의 가치가 많이 퇴색했다. 조부모님과 막내 삼촌, 숙모가 여태껏 살고 있었던 푸아예 레무아의 ‘정원 주택단지‘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정작 그것이 감추려고 했던 궁핍함에 의해 부식되고 좀먹은 듯이 보였다. 그 흔적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그곳은 병폐가 생기기 쉬운 환경이었고, 실제로 다양한 사회병리 현상이 발전했다. 통계적으로 볼 때 비행을 통한 일탈은 이 구역의 청소년들에게 주어진 길 가운데 하나였다. 오늘날에도 유사한 사례가 사회적·도시적 분리가 이루어진 공간들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의 역사적 영속성에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더 넓은 맥락에서 볼 때 크고 작은 불법 행위들은, 일상에서 적대 계급의 도구로서 지각되며 언제 어디서든 그 권력을 드러내는 국가의 법률에 집요하게 맞서는 일종의 민중적 저항으로 기능하는, 이 구역의 규칙이었다. - P42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공적 발언권을 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가? 공적인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동자들은 어떤 수단을 활용할 수 있는가?) - P45

민중 계급과 ‘노동 계급‘에게 좌파 정치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감내하는 것들을 아주 실용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의미했다. 관건은 전지구적 관점에서 영감을 받은 정치적 기획이 아니라 항의에 있었다. 우리는 시공간적으로 먼 곳이 아니라 우리 주변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자주 "혁명이 제대로 한번 일어나야 하는데"라고 되뇐다 해도, 이는 다른 정치 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관점에 기반한 것이라기보다는 고된 생활 조건과 참기 힘든 부정의와 관련된 틀에 박힌 표현이었다. 우리는 혁명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는 자문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닥친 모든 일이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였기에 ("이건 전부 의도된 거야"), ‘혁명‘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삶에 그렇게나 많은 불행을 초래한 사악한 힘—우파, 부자 놈들‘ ‘거물들‘—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하나의 신화에 맞서는 또 다른 신화—인 양 소환되었다. - P46

당시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위계 안에서도 가장 낮은 위치였다. 아버지가 그의 삶의 무대이자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지평을 구성하게 될 환경 속으로 들어간 것은 열네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아버지는 6월 말 초등 교육을 마치자마자 일을 시작했는데, 열네 살이 되기 석 달 전이었다). 공장이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장이 아버지를 위해 거기 있었고, 아버지도 공장을 위해 거기 있었다. 또한 공장은 그의 뒤를 따르게 될 형제들과 여동생들도 기다리고 있었다. 공장은 앞으로 태어나 그의 가족이 될 이들, 그와 같은 사회적 정체성을 갖게 될 이들을 기다려왔고 계속해서 기다릴 것이었다. 사회적인 결정논리determinisme social는 아버지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를 지배했다. 그는 우리가 ‘재생산‘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온갖 법칙과 메커니즘이 그를 규정해놓은 것으로부터 빠져나가지 못했다. - P53

나는 의무교육 연령이 16세까지로 연장되었을 때 가족들이 얼마나 분개했는지 기억한다. "뭣 하러 애들이 좋아하지도 않는 공부를 억지로 계속하게 만드는 거야? 애들은 오히려 일을 하고 싶어 한다고." 이러한 ‘취향‘, 아니 공부에 대한 ‘무취향‘이 얼마나 차별적으로 분포되어 있는지를 전혀 의문시하지 않고, 사람들은 이런 말을 되풀이했다. 학업에서의 도태는 마치 스스로의 선택과 요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인 양, 많은 경우 자발적인 도태의 과정을 거친다. 학업 기간의 연장은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형편이 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인데, 이들이 ‘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결국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가능성의 장champ des possibles—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은 고사하고, 단순히 구상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조차—은 계급 위치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된다. 마치 각각의 사회세계가 거의 물샐틈없이 가로막혀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 그리고 이 동떨어진 사회적 영역에서 매우 명백한 규칙을 구성하는 것에 접근할 수 없을 경우,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 됐든 배제되었다거나 박탈당했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는 단지 사물의 질서일 따름이며, 그것이 전부다. 우리는 그 질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려면 스스로를 외부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삶과 타인들의 삶에 대해 내려다보는 시각vue en surplomb을 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P54

사회적 운명은 일찌감치 결정된다. 모든 것이 미리 작동된다! 우리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판결은 이미 내려져 있다. 태어나는 순간 선고문이 우리 어깨에 낙인처럼 새겨지고, 우리가 차지할 자리도 우리에 앞선 것들, 그러니까 우리가 속한 계층과 가족의 과거에 의해 규정되고 제한된다. 아버지에게는 민중 계급 아이들의 학교 교육 이수와 성취를 보여주는 졸업장인 초등교육 증명서를 획득할 기회조차 없었다. - P57

실제 가족은, 법적인 가족뿐만이 아니라 생물학적 가족과도 겹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른바 ‘혼합‘ 가족은 1990년대에 와서야 생겨난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세계에서 부부와 가족의 구조는 아주 오래전부터, 좋고 나쁨을 떠나 복잡성, 다양성, 절연, 잇단 선택, 재구성 등으로 특징지어져왔다(‘동거하는‘ 남녀, ‘배다른‘ 아이들, 이혼하지 않은 채 각각 다른 여자, 다른 남자와 사는 유부남, 유부녀 등등). - P77

사회질서는 모든 사람에게 지배력을 발휘한다. 모든 것이 잘 ‘규정되어 있고‘ ‘의미‘와 ‘기준‘으로 충만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우리 의식 깊숙한 곳에 새겨진 규범에 대한 애착에 기댈 수 있다. 그러한 애착은 어린 시절부터 사회세계에 대한 지속적인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성장 환경이 법적·정치적 규칙에 어긋날 때 느끼게 되는 불편함—수치심—을 통해서 형성된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문화는 그러한 규칙을 유일하게 살 만한 현실이자 도달해야 할 이상으로 표상한다. 이러한 가족적 규범—규범적 가족—이 실제의 삶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부부란 무엇이고 가족이란 무엇인지, 또 어떤 이들은 인정하고 어떤 이들은 거부하는 사회적·법률적 정당성의 관념을 애써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그들의 상상 속에서 말고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모델들을 소환한다. 오늘날 내가 그러한 자들을 떠올릴 때 품게 되는 혐오감은, 여러 대안적 형태를 자의식 속에서 일탈적이고 비정상적인 것으로, 열등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경험하도록 요구받았던 과거에서 비롯한 바 크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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슌킨 이야기 쏜살 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박연정 외 옮김 / 민음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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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사랑이라 해야할지 집요라고 해야할지, 숭고하다 해야할지 미련하다 해야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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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 시대의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햇빛도 들지 않는 깊숙한 규방에 틀어박혀 자란 양갓집 규수의 투명하고 하얀 피부와 풋풋함, 가냘픔이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더구나 시골 뜨기 소년 사스케의 눈에는 그 모습이 얼마나 요염하고 아름답게 보였던 것일까? 당시 슌킨의 언니가 열두 살, 여동생이 여섯 살이었는데, 갓 상경한 사스케에게는 그 자매들이 시골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소녀로 보였겠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맹인이었던 슌킨의 형용할 수 없는 기품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슌킨의 감긴 눈이 자매들의 반짝이는 눈동자보다 맑고 아름답게 느껴져서 이것이 진정한 슌킨의 얼굴이며 예전부터 이랬어야만 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네 자매 중 슌킨의 미모가 가장 뛰어나다고 평판이 자자했지만, 아무리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녀의 장애를 안타깝게 여긴 동정심이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사스케에게는 슌킨이 아름답다는 사실이 곧 진실이었다. - P23

‘아아! 이것이 진정 스승님이 살고 계신 세상이구나! 이제 비로소 스승님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겠구나!‘ - P98

"누구나 눈이 먼 것을 불행하다 여기겠지만 나는 맹인이 되고 한 번도 그런 감정을 겪지 못하였단다. 도리어 이 세상이 극락정토라 느꼈지. 스승님과 나, 오로지 두 사람이 살아가면서 죽어야만 당도하는 극락정토의 연화대 위에 사는 기분이었다. 눈이 멀고 나니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많은 것이 보이게 되더구나. 스승님의 얼굴 역시 그러하단다. 그 아름다움을 절절히 느끼게 된 것은 맹인이 되고 나서란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발, 매끈한 피부, 아름다운 목소리도 진정으로 알 수 있었다. 눈이 보였을 때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느끼지 못했을까 의아스러울 정도였지. 더구나 실명한 후에야 스승님의 절묘한 샤미센 선율을 비로소 충분히 음미할 수 있었다. 입으로는 줄곧 스승님이야말로 이 분야의 천재라며 칭송했지만 그제야 겨우 그 진가를 알게 되었으니 미숙한 내 기량과 너무나도 현격한 차이가 있음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껏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니 이 얼마나 송구스러운 일인지······. 내 어리석음을 반성하게 되었단다. 신께서 다시 앞을 보게 해 주신다고 해도 거절했을 게야. 스승님과 나는 맹인이었기에 앞이 보이는 사람이 모르는 행복을 맛볼 수가 있었단다." - P108

사람은 기억을 잃지 않는 한 꿈을 통해 죽은 이를 볼 수 있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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