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애그니스가 생각한 죽음의 개념은, 드넓은 황무지 한가운데 불이 켜진 작은 방의 모습으로 떠올랐다. 산 사람들은 방안에서 산다. 죽은 사람들은 건물 밖에 모여들어 손바닥과 얼굴과 손끝을 창문에 대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자기 식구들한테 가닿으려고 절박하게 매달린다. 방안에 있는 이들 가운데, 바깥에 있는 이의 모습을 보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벽을 통해 얘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은 그러지 못 한다. - P326

애그니스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다. 절대로. 이 아이의 배를 채우고, 이 아이들을 생명으로 채울 것이다. 밖으로 나가는 문과 아이들 사이에 서서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길을 막을 것이다.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모든 것에 맞서 세 아이를 지킬 것이다. 애그니스는 아이들이 안전하다는 걸 알기까지 쉬지도 자지도 않을 것이다. 밀어내고 맞서 싸우고, 살아남은 아이가 둘뿐이라는 오래된 예감을 지워버릴 것이다. 그렇게 하고 말 것이다. 할 수 있다는 걸 안다. - P327

애그니스는 너무 지쳐 정신이 없는데도, 그의 손을 잡아보지 않았는데도, 그가 찾아냈으며 그 안에 들어갔으며 그걸 살고 있다는 걸 안다. 그가 살려고 했던 삶, 그가 하려고 했던 일을. 애그니스는 침대에 누워 그가 그렇게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슴을 넓게 펴고, 걱정과 좌절이 씻겨나간 얼굴로 서 있는 것을 보고, 그의 만족감의 냄새를 들이마시며 웃음을 짓는다. - P329

아직도 손을 입에 댄 채 애그니스는 딸을 내려다본다. 온갖 아픈 사람, 앓는 사람, 회복하는 사람, 꾀병을 부리는 사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 미친 사람을 돌보아온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얼마 안 남았어. 그러나 애그니스의 다른 부분은, 이 아이를 젖 먹이고 돌보고 보살피고 쓰다듬고 먹이고 입히고 끌어안고 입 맞췄던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그럴 순 없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제발, 이 아이만은. - P335

어떻게 해도 차도가 없었다. 어떤 것도 햄닛을 낫게 할 수 없었다. 애그니스는 구멍난 양동이에서 물이 새듯 희망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걸 느낀다. 애그니스는 바보, 천치, 최악의 멍청이다. 내내 주디스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햄닛을 뺏기게 될 모양이었다. 운명이 어떻게 이처럼 잔인한 함정을 놓을 수가 있나? 엉뚱한 아이에게 집중하게 해놓고, 한눈을 파는 사이에 손을 뻗어 다른 아이를 잡아채다니? - P339

애그니스는 자기 약초밭, 가루와 물약, 잎, 용액이 가득한 선반을 떠올린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화가 치솟는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수년 동안 돌보고 김매고 다듬고 따 모은 약초. 밖에 나가 죄다 뿌리째 뽑아 불에 던지고 싶다. 애그니스는 등신, 무능하고 교만한 등신이다. 약초 따위로 이것에 맞서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 P339

아들의 몸은 고통의 장소에, 지옥에 가 있다. 뒤틀리고 꼬이고 휘어지고 당겨진다. 애그니스는 들썩이지 말라고 아이의 어깨와 가슴을 붙잡는다. 달리 더 할 일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아이의 옆에 앉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려고 애쓸 뿐. 이 병은 너무 엄청나고 너무 강력하고 너무 사악하다. 너무 강한 적이다. 아들에게 촉수를 뻗어 휘감고 조이며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 사향냄새, 축축하고 짭짤한 냄새를 풍긴다. 그것이 아주 먼 곳에서, 부패하고 눅눅하고 답답한 곳에서 왔으리라고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인간과 짐승과 벌레를 거쳐가며 엄청나게 먼 길을 왔으리라고. 고통과 불행과 슬픔을 먹으면서.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멈출 줄 모르는 최악의 극악한 악이다. - P339

그러나 햄닛의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다. 한참 전부터 어머니나 누이들, 고모와 할머니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식구들이 주위 에서 약을 주고 말을 걸고 몸을 쓰다듬는 것은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다른 곳에, 자기도 모르는 장소에 와 있다. 이곳은 차고 고요하다. 혼자다. 눈이 부드럽게 하염없이 쉬지 않고 내린다. 땅 위에 쌓이고 오솔길과 계단과 바위를 덮는다. 나뭇가지를 짓누른다. 모든 것을 희고 텅 비고 정체된 상태로 만든다. 적막, 차가움, 낯선 은빛이 그에게 위안보다 더 큰 무엇을 준다. 햄닛은 이 눈 위에 누워 쉬고 싶은 생각뿐이다. 다리는 지치고 팔은 쑤신다. 드러누워 굴복하고 이 반짝이는 두툼한 흰 담요에 몸을 뻗고 싶다. 얼마나 편안할까. 그런데 무언가가 누우면 안 된다고, 그 욕망에 굴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게 뭐지? 왜 쉬면 안 된다는 거지? - P341

죽음을 두고 ‘떠나갔다‘느니 ‘평화로웠다‘느니 하는 사람은 그걸 본 적이 없는 거라고 일라이자는 생각한다. 죽음은 폭력이고, 죽음은 투쟁이다. 담쟁이가 벽에 매달리듯 몸이 삶에 매달려 놓지 않으려고 끝까지 붙들고 싸운다. - P341

애그니스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뻗어나갔다가 다시 모인다. 뻗어나갔다가 모이고, 다시 또다시.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그럴 순 없어, 우린 어떻게 살지, 어떻게 하지. 주디스가 이 일을 어떻게 견디지,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지, 어떻게 계속 살 수 있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남편은 어디 있나. 그가 뭐라고 할까,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살릴 수 있었을까, 왜 못 살렸을까, 왜 얘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러다가. 초점이 좁아지고,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내 애가 죽었어, 내 애가 죽었어, 내 애가 죽었어. - P352

애그니스는 문을 등지고 벽난로 쪽을 보고 있다. 벽난로 안에는 통나무였던 때의 모양을 유지하고 있지만 건드리면 풀썩 무너져내릴 재만 가득하다. - P354

애그니스가 직접 눈꺼풀을 닫았다. 자기 손으로, 자기 손가락으로. 손가락이 어찌나 뜨겁고 미끄럽던지, 그 일이 어찌나 힘 겹게 느껴지던지, 누가 손에 목탄을 쥐여주면 기억만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잘 아는 그 몹시 사랑스러운 눈꺼풀에 축축하고 떨리는 손가락을 대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죽은 자식의 눈을 감긴다는 게 가능한가? 동전 두 개를 찾아 와서 안구에 얹고 눈꺼풀을 누른다는 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지? 옳지 않다. 그럴 수는 없다. - P355

봐, 애그니스는 햄닛에게 말한다. 타고난 건 바꿀 수가 없어. 주어진 걸 되돌리거나 고칠 수는 없어.
아이는 대답이 없다. - P360

두 여자가 잠시 마주보다가, 메리가 접힌 천을 들어 두 손으로 모퉁이를 잡는다. 천이 꽃잎을 활짝 벌리는 거대한 꽃처럼 펼쳐 진다. 소스라칠 정도로 텅 비고 하얗고 넓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 진다. 어두운 방안에서 별빛처럼, 외면할 수 없게 빛난다. - P362

애그니스는 아들을 본다. 새장 같은 갈빗대, 맞잡은 손가락, 동그란 무릎뼈, 고요한 얼굴. 옥수수색 머리카락은 이제 물기가 말라 늘 그렇듯 이마에서 솟아 있다. 햄닛은 주디스와 달리 존재감이 늘 뚜렷하고 강했다. 햄닛이 방에 들어오거나 나가면 늘 알 수 있었다. 확고한 발소리, 공기의 움직임, 의자에 털썩 앉을 때의 중량감. 그런데 이 몸을 놓아주어야 한다. 흙에 내어주고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한다. - P363

애그니스는 자기 아이의 고통만은 참을 수가 없다고 느낀다. 이별, 질병, 충격, 출산, 궁핍, 굶주림, 부당함, 고립, 그 어떤 것도 참을 수 있으나 이것만은 견딜 수가 없다. 내 아이가, 죽은 쌍둥이 남매를 보고 있는 것. 내 아이가 오라비를 잃고 우는 것. 내 아이가 슬픔에 시달리는 것. - P366

애그니스는 무덤을 생각하면 마치 말이 웅덩이를 피하듯 뒤로 물러서게 된다. 햄닛을 데리고 교회로 가는 광경은 미리 생각해 볼 수 있다. 바살러뮤나 아니면 길버트나 존이 들고 가겠지. 사제가 망자를 축복하는 광경도 그려볼 수 있다. 그렇지만 땅속 어두운 구덩이로 아이의 몸을 내리고 다시 보지 못하게 되는 것만은 생각할 수가 없다. 상상이 불가능하다. 아이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할 수는 없다. - P367

애그니스는 묘지로 가는 길이 너무 길고도 너무 짧다고 느낀다. 그들을 뚫어지게 보고 훑어보는 사람들의 눈길, 수의에 싸인 아들의 몸을 머릿속에 각인하며 아들의 본모습을 잊어버릴 눈길 들을 견딜 수가 없다. 날마다 아이가 문 앞을, 창문 아래를 지나가는 걸 보았던 사람들이다. 아이와 말을 나누고, 머리를 쓰다듬고, 학교 종이 칠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면 서두르라고 말하던 사람들이다. 아이는 그 집 아이들과 같이 놀고 이 집 저 집 이 가게 저 가게를 들락거렸다. 아이는 전갈을 전해주고, 개를 쓰다듬고, 볕이 잘 드는 창턱에서 자는 고양이 등을 어루만졌다. 그들의 삶은 변함없이 계속되고 개는 불가에서 하품을 하고 아이들은 밥 달라고 조르는데, 햄닛은 이제 여기에 없다. - P371

무덤은 충격적이다. 거대한 발톱으로 땅을 무심하게 할퀴어놓은 것처럼 깊고 어두운 상처다. 묘지 안쪽 깊은 곳에 있다. 바로 그 너머에서 강이 서서히 완만하게 구부러지며 다른 방향으로 물을 몰고 간다. 오늘은 물이 불투명하다. 밧줄처럼 땋은 무늬를 만들며 앞으로 나아간다. - P372

묘지에서 나가는 일이 들어오는 일보다 더 힘들다. 너무 많은 무덤을 지나쳐야 하고, 너무 많은 슬프고 성난 유령이 애그니스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며 차가운 손가락으로 건드리고 애처롭고 끈질기게 매달리며 말한다. 가지 마, 기다려, 우릴 두고 가지 마. 애그니스는 치맛단을 잡아당기고 손을 말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곳에 세 아이와 함께 왔는데 둘만 데리고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원래 한 아이를 여기 두고 가려고 온 거잖아, 애그니스는 자신을 다독여보지만, 정말 그럴 수 있는 건가? 울부짖는 영혼과 비늘잎을 뚝뚝 떨구는 주목과 차가운 손이 가득한 이곳에? - P373

애그니스의 속은 텅 비었다. 겉은 불분명하고 실체가 없다. 애그니스는 나뭇잎에 부딪힌 빗방울처럼 흩어지고 분해될 것 같다.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 이 문을 지나갈 수가 없다. 여기에 아이를 두고 갈 수는 없다. - P374

참을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이. 결핍의 거미줄에 걸린 듯한 기분이다. 어느 쪽으로 몸을 돌리든 거미줄과 촉수가 몸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이곳 이 마을 이 집에 돌아와 있고. 이 모든 것이 그를 다시는 달아나지 못하게 만들 것 같아 두렵다. 이 슬픔, 이 상실이 그를 여기에 붙들어놓고 런던에서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무너뜨릴까봐. - P380

때로는 극장이란 곳이 아버지가 만드는 장갑의 자수하고 몹시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면은 아주 일부분이고, 그 뒷면에는 무수한 수고와 기술과 좌절과 땀이 얽혀 있다. - P381

그는 좁디좁은 하숙방이 실제로 그립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부르지도 않고 안부를 묻거나 말을 걸거나 성가시게 하지 않는 곳. 침대 하나, 궤 하나, 책상 하나만 달랑 있는 곳. 그곳 말고는 세상에 소음과 법석과 사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없다. 그곳에서는 세상이 저멀리 밀려가고, 자의식도 사라지고, 그래서 그저 잉크를 묻힌 깃펜을 쥔 손이 되어 펜 끝에서 단어가 흘러나오는 걸 지켜볼 수 있다. 이 단어들이 하나하나씩 나오면 자신마저 잊고 너무나 압도적이고 너무나 편안하고 너무나 은밀하고 너무나 즐거운, 다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평화에 잠긴다. - P381

그는 그걸 포기할 수 없다. 여기에, 이 집에, 이 타운에, 장갑 사업 언저리에 머물 수 없다. 그게 아내를 위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이러다 영원히 스트랫퍼드에 붙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다리가 달리고 쇠덫 같은 턱이 있는 짐승 같은 곳, 옆집에 아버지가 있고, 교회 묘지 뗏장 아래서 아들이 차갑게 썩어가는 이곳에. - P382

"상관없어." 꿀꿀거리며 밥을 먹는 돼지 옆에서 남편과 몸실 랑이를 하던 애그니스가 헐떡인다. "알아. 당신이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그곳에 낚였다는 거."
"어디? 런던 말이야?"
"아니, 머릿속에 있는 장소. 아주 오래전에 한 번 본 적 있어. 그 드넓은 세상, 풍경을, 당신은 거기로 갔고 이제 당신한테는 그곳이 다른 어디보다 더 생생한 곳이지. 그래서 무엇도 당신을 막을 수가 없어. 당신 자식의 죽음조차도. 알겠어." 애그니스가 말한다. 그는 한 손으로 애그니스의 양 손목을 한데 잡고 다른 손을 발치에 놓인 가방으로 뻗는다.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 - P386

그들은 그렇게, 함께, 하나가 되어 잠시 서 있는다. 애그니스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속절없이 끌리는 걸 느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밧줄이 애그니스의 심장을 빙빙 감아 그의 심장에 묶어놓은 것처럼. 우리 아들은 우리 두 사람으로 이루어졌어,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둘이 함께 아이를 만들었고, 둘이 함께 아이를 묻었다. 아이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애그니스는 한편으로 실을 감듯 시간을 되돌려 감고 싶다. 물레바퀴를 반대로 돌려 햄닛의 죽음, 유년기, 유아기, 출생의 타래를 되감아 자신과 남편이 그 침대에서 한몸이 되어 쌍둥이를 만들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전부 풀어헤쳐 원래 양의 상태로 되돌리고 그 순간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낸 다음, 일어서서 별을, 하늘을, 달을 올려다보며 햄닛의 앞날을 바꿔달라고, 다른 결과를 만들어달라고, 제발, 제발, 호소하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하늘이 원하는 무엇이든 할 것이고, 무엇이든 내어줄 것이고, 무엇이든 포기할 것이다. - P388

돌아갈 길은 없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무를 수는 없다. 아들은 떠났고 남편은 떠날 것이고 애그니스는 남을 것이고 돼지는 날마다 먹이를 주어야 하고 시간은 한방향으로만 흐른다. - P389

셔츠에 얼굴을 묻는다. 바지를 가슴에 꼭 안는다. 신발 안에 손을 넣어 아이 발의 텅 빈 모양을 느낀다. 옷깃을 여미는 끈을 묶었다 끄른다. 단추를 채웠다 다시 푼다. 옷을 개었다가 펼쳤다가 다시 갠다. - P390

주디스는 자기 자신에게, 고양이들에게, 머리 위 골풀 지붕에 노래를 부른다. 라라–라라–라–라–라, 음을 이어가며 계속 불러 소리가 마음속의 빈 곳을 찾게 한다. 노래가 그 자리를 찾아 쏟아져들어가 안을 채우고 또 채우지만, 물론 아무 형체도 한계도 없는 그 공간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 P399

다른 여자가 자기 아들은 장작을 영 마음에 안 드는 방식으로 쌓는다고, 딸이 청혼을 거부했다고, 그러니 이 애들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한다.
바보들,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어리석은 사람들. 애그니스는 새어머니로부터 약간 거리를 두고 선다. 고개를 숙이고 벌집의 반복되는 무늬를 쳐다본다. 벌 크기로 줄어들어 그 사이로 들어 가고 싶다. - P400

애그니스는 이런 곳들에서 기다린다. 귀를 세우고 다른 더 시끄러운 존재의 소리와 요구와 불평을 가려내보지만 아이의 소리만은, 유일하게 듣고 싶은 소리만은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다. 침묵뿐. - P403

주디스는 그러나 바닥을 쓰는 빗자루 소리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담 너머에 내려앉는 새의 날갯짓에서 본다. 조랑말의 흔들리는 갈기에서, 유리창을 두들기는 우박에서, 굴뚝 아래로 팔을 뻗는 바람에서, 은신처 지붕의 골풀이 바스락거리는 것에서 느낀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마음에 간직한다.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한다. 네가 보여, 소리가 들려, 어디에 있니? - P403

딸들이 할머니를 배웅한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반짝이는 새 같다. 날개를 펼치고 방을 한 바퀴 돌아 저 밖 하늘로 날아가는 새들. - P406

아이들, 이 아가씨들이 어떻게 애그니스에게서 나왔을까? 이 애들이 한때 애그니스가 젖을 먹이고 어르고 씻겼던 작은 존재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애그니스에게 삶은 점점 낯설고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되어간다. - P407

런던에서 바쁜 삶의 중심에 있기만 하면 어떤 것도 그를 건드릴 수 없다. 여기, 이 배 안, 이 도시, 이 삶 속에 있는 동안에는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이 예전 그대로 고스란히 변함없이 존재하리라고, 침대에 세 아이가 잠들어 있으리라고 믿을 수도 있을 것 같다. - P411

죽는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피할 수 없는 뭔가가 다가오는 느낌? 이런 생각이 느닷없이 머리에 떠오르더니 포도주 한 방울이 물에 떨어진 것처럼 생각에 진한 물을 들인다. - P412

수재나는 할머니가 슬퍼하는 것도 적당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걸 안다. 슬픔을 다지려고 애써야 하는 때가 있다고. 너무 과한 사람이 있다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 P413

수재나는 한 손으로 천을, 다른 손으로 바늘을 꽉 쥔다. 똑같은 크기의 바늘땀을 계속 만들어갈 수만 있다면, 이것도 다 지나갈 거라고 생각한다. - P414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커진다. 침묵이 부풀어올라 둘을 감싼다. 형체와 모양과 촉수가 생기고 공중에서 끊어진 거미줄이 흩날리듯 흔들린다. 그의 몸안으로 숨이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게, 그가 팔짱을 끼고 팔꿈치를 긁고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게 느껴진다. - P422

"일 년은 아무것도 아니야." 애그니스가 땅에 떨어진 캐모마일 꽃송이를 주우며 말한다. "한 시간이나 하루나 마찬가지야. 평생 그 아이를 찾아야 할 수도 있어. 나는 그만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 P425

"뭘 찾았어?" 그가 묻는다.
"아무것도." 애그니스가 답한다. "당신 심장."
"그게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화난 척하며 말한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어떻게 그런 말을?"
애그니스는 희미하게 웃음을 짓는다. 그가 애그니스의 손을 확 당겨 자기 가슴에 갖다댄다.
"이건 당신 심장이야." 그가 말한다. "내 것이 아니라." - P427

애그니스는 자기가 분리된 것 같은 느낌이다. 몸이 분리되고 녹아내려 이게 누구 살인지 누구 다리인지 입안에 들어온 게 누구 머리카락인지 누구의 숨이 누구의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된다. - P429

"그 애는 여기 없어." 애그니스가 드디어 입을 연다. 등을 쓸던 그의 손이 멈춘다. 애그니스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써 억누르지만 말 사이사이로 고통이 새어나온다. "사방을 찾아봤어. 기다렸어. 지켜봤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기엔 없어." - P433

"조운은 절대 만족할 수가 없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이 만족하는 것도 못 견뎌. 다른 사람도 자기만큼 불행해야 기분이 좋지. 영원한 불만을 친구로 삼았으니까. 그러니 뭐가 널 행복하게 만드는지를 감춰. 그 반대의 것을 원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그러면 전부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거야. 두고 봐." - P438

애그니스는 그 생각에 푹 빠진다. 그 생각을 고이 싸서 보물처럼 마음에 간직해두었다가 혼자 있을 때, 거대한 집에서 밤에 돌아다닐 때 꺼내어 윤을 내고 감탄하며 들여다본다. - P442

주디스는 아버지가 머무는 동안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다. 아버지가 새집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니면서 굴뚝과 상인방을 올려 다보고 문을 하나씩 열었다 닫는다. 아버지가 개라면 내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을 듯하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안마당에 나가 우물에서 첫 물을 떠서 마신다. 여기 물이 지금껏 마셔본 물 중에서 최고로 신선하고 달콤하다고 말한다. - P444

주디스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주위에서 맴돈다. 어머니 가까이에 있으면 뭐가 보장되기에 그러는 건지, 수재나는 알 수 없다. 안전? 생존? 목적? - P447

타운에 한밤이 찾아온다. 깊고 검은 침묵이 거리에 내려앉고, 들리는 건 짝을 찾는 부엉이의 공허한 울음소리뿐이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들어갈 곳을 찾는 강도처럼 집요하게 거리를 훑는다. 나무 꼭대기를 건드리고 이쪽저쪽으로 휘어박는다. 교회 종 안에서 바르르 떨며 놋쇠를 울려 나지막한 음을 낸다. 교회 근처 지붕 꼭대기에 앉은 외로운 부엉이의 깃털을 흩뜨린다. 바람이 몇 집 건너에 있는 집의 느슨한 여닫이창을 흔들자 안에서 자는 사람들은 침대에서 뒤척이고, 덜덜 떨리는 뼈와 다가오는 발걸 음과 말발굽 소리가 나오는 꿈을 꾼다. - P450

이곳 땅은 한때 습지였다. 축축하고 물이 많고 반은 강이고 반은 땅인 곳이었다. 집을 지으려고 사람들이 물을 빼고 바다 위의 배처럼 건물을 떠받칠 골풀과 가지를 땅에 덮었다. 축축한 날이면 집은 기억한다. 오래된 부름에 이끌리듯 아래쪽으로 기운다. 징두리가 삐걱거리고 굴뚝이 갈라지고 문틀이 느슨해지고 터진다.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P4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 사람의 이마가 맞닿는다. 다른 사람과 이렇게 가까이 있다니 이상하다고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속눈썹, 감긴 눈꺼풀, 한방향으로 자란 눈썹 털까지 속속들이 보인다. 애그니스는 버릇대로 손을 잡아보지도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 P117

엄청 드넓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마치 풍경처럼 층이 있고 겹이 있었다. 공간이 있고 빈터가 있는가 하면 조림지가 있고 땅굴이 있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었다. 전부 파악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너무 넓고 너무 복잡했다. […] 그래도 자기가 알 수 있는 것 이상, 두 사람보다 더 큰 무언가가 있다는 건 알았다. 또 무언가가 그를 묶어 붙들고 있으며, 어딘가에 있는 어떤 끈, 굴레를 풀거나 끊어야만 그가 그 풍경 안에 거주하며 뜻을 펼치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 P117

이 순간 창고 안의 사과 한 알 한 알이 뚜렷이 다르고 독특하고 제각각 다른 붉은색, 금색, 녹색으로 물든 듯 보인다. 전부 다 외눈으로 애그니스를 보았다가 눈을 돌렸다가 다시 돌아본다. 너무 많고 너무 압도적이다. 사과가 어찌나 많은지, 각각이 내는 흔들리고 들썩이는 규칙적인 소리가 얼마나 요란한지. 계속 이어지고 점점 빨라진다.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가슴속에서 곱드러지고 달음박질쳐 더는 참을 수가 없다, 안 돼, 안 돼. 사과가 제 자리에서 흔들리다 바닥으로 떨어지고, 선생이 그걸 밟았는지 공중에 달콤하고 새콤한 냄새가 감돌고, 애그니스는 그의 어깨를 꽉 잡는다. 애그니스는 안다, 느낀다, 모든 게 잘 될 테고 모든 게 뜻대로 되리라는 걸. 그가 애그니스를 꼭 붙들자 애그니스는 숨이 그의 몸에서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다시 나가는 걸 느낀다. - P120

입에서 말이 말 벌처럼 튀어나간다. 자기가 아는지도 몰랐던 말, 쏘고 쪼개고 망가뜨리는 말, 혀가 꼬이고 짓눌리는 말이 나온다. - P125

이 집 안에 이런 전례는 없었다. 아버지가 대체 어떻게 나올지, 대머리가 되어가는 저 돌머리 속에서 무엇이 들끓고 있을지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 순간 이제 애그니스가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가 어떤지 알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수치심이 솟는다. 애그니스는 부자 사이에 들끓는 알력과 불화를 느낄 테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겠지. 덫에 한 다리를 붙들린 사람이라는 사실을, 애그니스는 모든 것을 보고 한순간에 알아차릴 것이다. - P136

이 집 안에 이런 전례는 없었다. 아버지가 대체 어떻게 나올지, 대머리가 되어가는 저 돌머리 속에서 무엇이 들끓고 있을지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그 순간 이제 애그니스가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가 어떤지 알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수치심이 솟는다. 애그니스는 부자 사이에 들끓는 알력과 불화를 느낄 테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겠지. 덫에 한 다리를 붙들린 사람이라는 사실을, 애그니스는 모든 것을 보고 한순간에 알아차릴 것이다. - P137

그는 남편이자 아버지가 될 것이고, 삶이 시작될 것이고, 이것, 이 모든 것, 이 집, 아버지, 어머니, 작업장, 장갑, 이 집의 자식으로 사는 삶, 고되고 지긋지긋한 장갑 사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이 아이, 애그니스 뱃속의 아이가 모든 것을 바꿔줄 테고 자신이 증오하는 삶에서, 도저히 같이 살 수 없는 아버지에게서, 더는 견딜 수 없는 이 집에서 해방시켜줄 것이다. 애그니스와 같이 날아갈 것이다. 다른 집으로, 다른 마을로, 다른 삶으로. - P138

믿을 수가 없다. 도저히. 자기와 애그니스가 부지불식간에 아버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그 생각을 하자 뛰쳐나가고 싶어진다. 휼랜즈에서, 숲에서 황조롱이가 옷감처럼 펼쳐진 나뭇잎 사이를 바늘처럼 뚫고 급강하할 때 있었던 둘만의 일을 아버지가 밧줄처럼 배배 꼬아 그걸로 나를 이 집에, 이 자리에 더더욱 단단히 붙들어놓게 되다니.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참을 수 없다. 영영 여기를 못 벗어난다고? 이 사람, 이 집, 이 일에서 영원히 풀려날 수 없다고? - P142

어머니도 거기 눈을 주는 것을 보고는 묻고 싶었다. 엄마도 그 애를 생각해요? 아직도 그 애 발소리가, 목소리가, 자면서 숨쉬는 소리가 들리나 자기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게 돼요? 나는 그러거든요, 언제나. 아직도 어느 날 눈을 뜨면 그 애가 여기 내 옆에 누워 있겠지 생각해요. 시간에 주름 같은 것이 있어서 원래 우리가 있던 곳으로, 앤이 살아서 숨쉬는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 P154

일라이자는 늘 앤 걱정을 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언니도 없이 홀로 어딘지 모를 곳에 있을 앤. 아주 오랫동안 밤에 잠들지 못한 채 누워, 앤이 혹시라도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지 모르니까, 언니 목소리가 위로가 될지 모르니까 앤의 이름을 불러보았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앤이 어딘가 다른 곳에서 힘들어하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가닿을 수도 없다는 것에서 오는 고통도. - P159

화관을 이루는 풀, 열매, 꽃이 흔들리고 따끔거리는 것을, 줄기의 물관과 잎맥에서 미세한 물의 흐름을 느낀다. 자기 몸안에서 식물들과 조화를 이루며 움직이는 흐름인지 물결인지 조류인지를 느낀다. 자신에게서 몸속 아기에게로 흘러가는 피의 흐름. 애그니스는 한 삶을 떠난다. 다른 삶을 시작한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 P165

그러니 당연히, 어머니는 지금 여기에 와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이든 자기가 띨 수 있는 형태로. 굳이 고개를 돌려 쳐다볼 필요도 없다. 돌아보았다가 혹시 놀라서 달아나면 안 되니까. 어머니가 여기 나타나 실체 없이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어머니가 보여요. […] 오신 거 알아요. - P166

제단 앞에서 남편 왼쪽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예식을 올린다. 두 사람이 동시에 머리를 숙이자 사제가 그들의 머리 위에 흰 천을 덮어 악령, 악마, 세상의 모든 험하고 궂은 것으로부터 두 사람을 보호한다. - P170

애그니스는 자신이 둘로 쪼개진 것 같다. 한쪽은 멍울을 보고 기겁한다. 다른 쪽은 기겁하는 자신을 보고 관찰하고 기록한다. 기겁하는 소리, 좋아. 첫번째 애그니스의 눈에 눈물이 솟구치고 심장이 가슴속에서 요동친다. 뼈로 된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심장이 가슴뼈를 쿵쿵 친다. 다른 애그니스는 징후들을 체크한다. 멍울, 고열, 깊은 잠. 첫번째 애그니스는 딸의 이마, 뺨, 머리카락과 관자놀이가 만나는 자리에 입을 맞춘다. 다른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빵가루와 구운 양파, 끓인 우유, 양기름으로 만든 찜질약, 들장미 열매, 운향과 컴프리와 인동덩굴 가루로 만든 강장제. - P176

햄닛은 부엌 열기를 참기가 힘들다. 지옥문에서 뿜어내는 연기가 자기에게 불어닥치는 것 같다. 열기가 부엌 입구를 막고 실내를 가득 채우고 숨막히는 부피감으로 사방 벽을 밀어낸다. 여자들은 이런 걸 어떻게 견디는지 알 수가 없다. 햄닛이 한 손으로 이마를 닦는데 손 가장자리가 어른어른하게 보인다. 언뜻 어둠 속의 양초 수천 개가 보인다—아니, 보이는 듯하다. 팔랑거리고 너울거리는 불꽃, 빛줄기, 도깨비불. 눈을 깜박이자 사라진다. - P178

앤, 여기 있는 거 알아, 우린 널 잊지 않았어. 그들의 세계와 이 세계 사이의 막은 얼마나 얇고 약한지. 애그니스는 두 세계가 구분되지 않고 서로 맞붙어 있어 그 사이를 오갈 수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주디스가 저쪽으로 넘어가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 P181

애그니스와 메리 사이가 삐걱거리긴 해도—이렇게 가까이 붙어살고, 이렇듯 할일이 많고 애들도 많고 먹일 입도 많은데다 요리하고 세탁하고 수선하고 남자들을 살피고 헤아리고 달래고 이끌어야 하니 당연하다—눈앞에 일이 닥치면 불화는 사라진다. 두 사람은 서로 구시렁대며 뾰족하고 거슬리게 굴기도 한다. 말씨름하고 투닥거리고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서로가 만든 음식이 너무 짜다고, 너무 거칠다고, 너무 향이 강하다고 하면서 돼지우리에 던지기도 한다. 서로가 꿰매거나 집거나 수를 놓은 것을 보며 눈썹을 치키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시기에는 한 사람의 손발처럼 움직인다. - P182

애그니스는 신혼 침상에서 일어나 새집 안을 돌아다닌다. 도무지 잠이 찾아와 애그니스를 깃털로 감싸지 않을 것 같아서. 머 릿속에서 너무 많은 생각이 바글거리며 자리를 차지하려고 서로 밀쳐대서. 새겨 담을 것이, 오늘 있었던 일 중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서. 침대에서 자는 것도, 이층에서 자는 것도 오늘이 난생처음이라서. - P185

아버지가 아주아주 천천히 열쇠를 아들에게 내밀었다. 아버지가 열쇠를 내주고 싶어하지 않는 만큼이나—어쩌면 그 이상으로—아들도 받고 싶어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뭇거리며 아버지의 손에 들린 철제 열쇠를 도통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듯 건드렸다. 그러더니 손가락 두 개만으로 집고는 그게 자기에게 해를 끼칠지 아닐지 모르겠다는 듯 멀찍이 들었다. - P186

존은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고 난롯가와 행복과 아내가 어쩌고 하는 말을 늘어놓으며 손을 뻗어 아들의 등을 탁 쳤다.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아버지다운 몸짓을 연출한 것이었지만, 무언가 불편한 기색이 있지 않았나? 애그니스는 나중에 생각했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지 않았나? 등을 치는 손에 힘이 살짝 지나치게, 의도가 살짝 지나치게 들어갔다. 전혀 예상 못하고 있던 아들은 균형을 잃고 조금 비틀거렸다. 아들은 빠르게, 마치 복싱이나 펜싱을 하는 사람처럼 지나치게 빠르게 몸을 세우고 중심을 잡았다. 순간 두 사람이 열쇠가 아니라 주먹을 주고받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 P186

이 집은 그 글자처럼 생겼다. 지붕이 양쪽으로 경사지고 가운데에 이층 바닥이 있다. 애그니스는 이것을, 흙바닥에 새긴 글자와 어머니의 단단한 발과 스치는 머리카락의 기억을 자신의 징조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올빼미가 아니라, 시어머니의 울적하고 화난 얼굴이 아니라, 남편의 어린 나이가 아니라, 비좁은 집이 아니라, 공허하고 무력한 분위기가 아니라, 남편의 등을 후려 치던 시아버지의 손길이 아니라. - P188

애그니스는 오가는 사람들을 본다. 이 무렵 애그니스는 정보를 모으고 신뢰를 얻고 일과를 습득하고 성품과 관계를 파악한다. 벽에 걸린 그림처럼 조용히, 모든 것을 빼놓지 않고 관찰한다. 작고 비좁은 자기 집이 따로 있지만 뒷문을 통해 공동 마당으로 나갈 수 있다. 텃밭, 부엌채, 돼지우리, 닭장, 세탁장, 양조장을 두 집이 공유한다. 그래서 애그니스는 자기 공간으로 물러나 있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 섞여 어울릴 수도 있다. 애그니스는 관찰자이자 참여자다. - P192

배가 부풀어 앞치마 앞쪽이 튀어나왔다. 메리는 눈을 돌린다. 다시 그 느낌을 갖지 못하리란 걸, 자기 나이에는 이미 끝난 경험이라는 걸 다시 한번 자각한다. 그 가능성을 잃었다는 게 가끔 아프다. 여자로서 놓아버리기 힘든 일이다. 특히 집안의 다른 여자가 그 상태에 막 접어들 때에는. 며느리의 배를 볼 때마다 메리는 자기 배의 고요한 공허를 생각한다. - P197

남편이 옆으로 와서 본다. 그러더니 애그니스의 머리에 머리를 기대고 두 팔로 그녀를 안는다. 애그니스는 모이 그릇을 든 채 남편의 내면에서 느꼈던 동굴과 분지의 풍경을 생각한다. 장갑의 솔기를 생각한다. 각 손가락의 옆면을 따라 올라갔다가 내려가며 장갑을 낀 사람의 피부 아닌 피부를 한데 잇는 솔기. 장갑은 손에 딱 들어맞게 손을 덮는 한편 구속한다. - P201

애그니스는 창고에 있는 가죽을 생각한다. 찢어지거나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잡아당겨 늘인 가죽. 작업장에 있는 도구를 생각 한다. 자르고 모양을 잡고 고정하고 뚫는 데 쓰는 도구. 장갑 장인이 짐승을 유용하게 쓰기 위해 버리고 빼앗는 것을 생각한다. 심장, 뼈, 영혼, 정신, 피, 내장. 장갑 장인은 가죽만, 거죽만, 겉 껍질만 취해 쓴다. 나머지는 전부 쓸모없고 성가시고 불필요한 쓰레기일 뿐이다. 장갑처럼 아름답고 완벽한 물건의 이면에 어떤 은밀한 잔인성이 있는지 생각한다. 지금 만약 남편의 손을 잡고 손가락으로 눌러보면 전에 보았던 풍경과 함께 어둡고 무시 무시한 존재도 보일 것이다. 짐승의 내장을 꺼내고 가죽을 벗기고 정수를 훔치는 도구를 든 존재. 에드먼드가 닭에게 모이를 뿌려주는 동안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어쩌면 이 집에 오래 살지는 않을 거라고. 곧 떠나서, 달아나서, 다른 곳을 찾아야 할 거라고. - P201

어머니는 치료약을 팔고 약초를 직접 기르고 잎과 꽃잎. 나무껍질과 즙을 채집하고 사람들을 낫게 하는 법을 안다. 이 사람이 어머니에게 악감정이 있음을 햄닛은 퍼뜩 알아차린다. 어머니가 의사의 환자를 빼앗고 영역을 침범하고 돈벌이를 방해하니까. 그 순간 어른들의 세계가 어찌나 알 수 없고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느껴지는지. 그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 P206

어머니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지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아니, 말하는 것 같았다. "숲속은 나뭇가지가 빽빽해서 비 오는 게 안 느껴져." 그러더니 숲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 P210

애그니스는 다시 누워 남편의 자세에 자신을 겹쳤다. 남편이 그녀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애그니스는 남편의 머리채를 더듬어 쓰다듬고 손가락으로 꼬고 또 꼬았다. 남편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 머리카락을 타고 올라와 자신의 손가락으로 흘러들어오는 상상을 했다. 갈대가 속이 텅 빈 줄기로 물을 빨아들이듯이. - P211

그럼에도 출산이 이렇게 무자비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강풍에 맞서는 것 같기도 하고 범람한 강에서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는 것 같기도 하고 쓰러진 나무를 일으켜세우려는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이 이렇게 나약하고 무력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 애그니스는 늘 자신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그렇지만 이건 전혀 다르다. 완전히 다르다. 극복하고 억누르고 이기려는 모든 시도를 비웃는다. 이 고통이 애그니스를 압도하고 말 것이다. 목덜미를 잡고 물밑으로 끌고 들어갈 것이다. - P215

바살러뮤는 양몰이 지팡이를 자기 발 사이에 딱 놓는다. "누나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남편은 갈대줄기처럼 꼿꼿하게 서서 팔짱을 끼고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젓는다. "뭐라고 했는데요?"
"자기가 만나본 누구보다 속에 감춰진 게 많은 사람이래." 남편은 자기가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쳐다본다. 얼굴에 괴로움, 고통, 놀라움이 어린다. "그렇게 말했어요?"
바살러뮤가 고개를 끄덕인다. "누나가 왜 너를 선택했는지 이해하겠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누나에 대해 이거 하나는 알아. 뭔지 듣고 싶나?"
"네."
"누나는 틀리는 법이 없어. 무엇에 대해서건. 그게 재능이라는 사람도 있고 저주라는 사람도 있지만. 누나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사실일 가능성이 있지." - P224

애그니스는 아기가 내는 소리를 따라 한다. 애그니스는 도저히 아기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 없을 때가, 딸의 얼굴에서 영영 눈을 떼고 싶지 않을 때가 많다. 연한색 장미 꽃봉오리 같은 귀. 날개처럼 펼쳐진 작은 눈썹, 마치 붓으로 그린 듯 정수리에 매달린 짙은 머리카락 말고 다른 무엇이 보고 싶겠는가? 세상에 자기 딸만큼 아름다운 게 없다. 세상 어디를 보더라도 이렇게 완벽한 존재는 영영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 P248

밤에 초를 켜놓고 침대에서 애그니스에게 책을 읽어준 지도 꽤 오래되었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요새도 예전처럼 밤에 난롯가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던가? 얘기를 나누긴 했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하지만 애그니스는 아기며 집안일이며 텃밭이며 창문으로 찾아오는 방문객 때문에 바쁘고, 그는 오후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오전에는 아버지 심부름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삶이 그들을 함께 보조를 맞춰 떠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다니. - P252

난생처음으로 애그니스는 누군가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다. […] 이런 대가족 안에서는 할일이 너무 많고 신경써야 할 것도 많고 저마다 원하는 것도 다 제각각이다. 애그니스는 접시를 치우며 생각한다. 한 사람의 고통과 괴로움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치기가 얼마나 쉬운지. 그 사람이 말하지 않는다면, 마개를 단단히 닫은 병 같은 것에 담아두려 한다면, 그래서 그 안의 압력이 점점 커지면 결국—어떻게 될까?
애그니스는 알 수 없다. - P258

만들려고 깃털을 깎고 또 깎지만 적당한 게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이건 너무 길고, 이건 너무 짧고, 이건 너무 가늘어 손에 쥐기 불편하다. 종이를 찢거나 긁거나 아니면 잉크가 번지고 얼룩이 진다. 제대로 된 깃펜 하나 갖겠다는 게 그렇게 무리한 욕심이야? 애그니스는 어느 밤 그가 이렇게 외치며 잉크병이며 뭐며 전부 벽에 다 던지는 소리에 깬다. 수재나가 울음을 터뜨린다. 울부짖는 아기를 안아올려 달래며 애그니스는 이 사람은 자기가 아는 남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격분한 얼굴, 흐트러진 머리카락, 소리를 질러대는 입, 벽에 검은 열도처럼 뿌려진 잉크. - P259

애그니스는 아이의 축 처진 손가락을 쥐고 있다. 아이를 어떻게든 삶에 붙들어놓으려는 듯. 그럴 수만 있다면 의지의 힘으로 여기에 붙잡아두고 다시 끌어오려는 듯. 메리도 그런 심정을 안다. 메리도 느끼고 경험했고,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같은 심정이다. 메리도 저 짚요 옆의 엄마였다. 그런 적이 너무나 여러 번이었다. 아이를 붙들고 놓지 않으려 매달리는 여자였다. 아무 보람도 없이. 주어진 것은 언제라도 다시 거두어질 수 있다. 가혹함과 비통함이 바로 저 모퉁이 어귀에서, 궤 안에서, 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 도둑이나 산적처럼 언제라도 덮칠 수 있다. 결코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 결코 안심하지 마라. 아이의 심장이 뛰고 우유를 마시고 숨을 들이쉬고 걷고 말하고 웃고 다투고 노는 것을 결코 당연히 여기지 마라. 아이가 떠날 수 있다는 것. 아이를 뺏길 수 있다는 것, 눈 깜짝할 사이에 엉겅퀴 홀씨처럼 흩어져 버릴 수 있다는 것을 한순간도 잊지 마라. - P267

엄마한테 가야 한다. 이 본능이 얼마나 강한지, 열 한 살이나 된 지금도 이렇게 강력할 수 있다니 놀랍다. 햄닛은 훨씬 어릴 때 느꼈던 이 느낌, 바로 이 충동을 기억한다. 엄마 곁에 있고 싶고 엄마 눈길을 받고 싶고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만큼 엄마 가까이에 있고 싶은 강렬한 욕구.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여야만 하는. - P270

햄닛은 평생 지녀온 그 느낌을 다시 느낀다. 주디스가 자기의 다른 한쪽이라는 느낌. 둘이 호두의 반쪽처럼 서로 딱 들어맞는다는 느낌. 주디스가 없으면 자기는 불완전하고 가망 없는 존재가 되리라는 느낌. 햄닛의 옆구리, 주디스가 찢겨나간 자리에 평생 아물지 않는 상처가 남을 것이다. 주디스 없이 어떻게 사나? 불가능한 일이다. 심장더러 허파 없이 살라고 하는 것이나, 달을 하늘에서 떼어내고 별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하는 것이나, 보리더러 비 없이 자라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주디스의 뺨에 은빛 씨앗 같은 눈물이 마법처럼 맺힌다. 햄닛은 그게 자기 눈에서 주디스의 얼굴로 떨어진 눈물이란 걸 알지만, 그건 주디스의 눈물이기도 하다. 그 둘은 다르지 않으니까. - P272

햄닛은 숨을 들이마신다. 숨을 내쉰다. 고개를 돌려 주디스의 귀에 숨을 불어넣는다. 자기의 힘, 건강, 모든 걸 불어넣는다. 너는 남을 거야. 속삭인다. 나는 가고. 이런 말들을 주디스에게 보낸다. 네가 내 삶을 가지면 좋겠어. 네 것이 될 거야. 너한테 줄게. - P274

애그니스는 곁눈으로 그를 본다. 그의 옆모습은 확고하고, 수염은 다듬고 기름을 발랐다(이것도 애그니스가 어젯밤에 직접 해주었다. 가죽숫돌에 갈아 날카롭게 세운 날을 사랑하는 사람의 살갗에 갖다댔다. 엄청난 믿음이고 복종이다). 그는 사람들하고 인사나 잡담을 나누고 싶지 않아 눈을 내리깔고 걷는다. 애그니스의 손을 꽉 쥐고 손가락으로 세게 누른다. 그는 항해를 시작하고 싶다. 이곳의 일은 끝내고 싶다. 출발하고 싶다. - P286

애그니스는 왔던 길을 더 천천히 다시 걸어 돌아간다. 어찌나 기분이 묘한지, 똑같은 길을 거꾸로 되짚어 가자니. 마치 오래된 단어 위에 다시 글을 쓰듯이, 발이 펜이 되어 돌아보고 다시 쓰고 지우듯이. 헤어짐이란 이상하다. 너무나 단순한 일 같다. 일 분 전에, 사 분, 오 분 전에는 그가 여기 곁에 있었다. 지금은, 가고 없다. 그와 같이 있었다. 지금은 혼자다. 애그니스는 양파처럼 벗겨진 기분이다. 헐벗고 추운 느낌이다. - P293

뱃속 아기가 빠르게 움찔움찔 움직인다. 손바닥인지 발바닥인지 어깨인지로 배를 누른다. 애그니스는 그 자리에 손을 갖다 댄다. 바깥쪽의 손과 안쪽의 손을 맞댄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는 듯이, 세상은 예전 그대로라는 듯이. - P294

그는 하늘을 찢어발기고 싶다. 저 나무의 꽃을 다 뜯어내고 싶다. 불타는 나뭇가지를 들고 분홍색 옷을 입은 여자와 말을 벼랑 너머로 몰아가고 싶다. 그저 모든 걸 다 없애기 위해,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들기 위해. 그와 아이 사이에 너무 멀고 많은 길이 있고, 시간은 너무 조금 남았다. - P298

애그니스가 바라는 건 숲의 푸른색뿐이다. 땅바닥에서 어룽거리며 흔들리는 빛의 패턴, 잎이 만든 지붕의 자비로운 그늘, 적막이 아닌 고요, 호젓한 작은 땅을 둘러싸고 저멀리 끝없이 뻗은 나무들. 애그니스는 숲까지 갈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시간이 없다. 이 집에는 문이 너무 많다. - P311

무언가가 잘못되고 어긋났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 한 줄을 맞추지 않은 채 연주하는 악기 소리를 듣는 것 같다. 모든 게 마땅히 그래야 할 대로가 아닌 거슬리는 느낌. 너무 빠르고 너무 이르다. 이게 오리라곤 예상 못했다. 애그니스는 잘못된 곳에 있다. 그도 잘못된 곳에 있다. 애그니스는 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순간 애그니스의 어머니가, 사람들이 가면 결코 돌아 오지 않는 그곳에서 애그니스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 P3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햄닛은 일주일에 엿새를 동틀 때부터 해 질 녘까지 학교에 가 있다. 말하는 속도만큼이나 빨리 쓰고 라틴어와 그리스어도 읽고 숫자 계산도 한다. 펜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꼭 암탉이 발톱으로 흙을 헤집는 소리 같다. 할아버지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자기가 죽은 뒤에 장갑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은 햄닛이라고, 햄닛은 머리가 좋고 문리가 트였고 타고난 사업가고 식구 중 유일하게 분별이 있다고. 햄닛은 들은 기색도 않고 교과서 위에 고개를 숙이고 숙제를 한다. 불가에 모여 앉은 식구들 쪽으로 정수리를 향하고 있어 시내처럼 구불구불한 가르마가 보인다. - P96

라틴어 선생은 휼랜즈에 가지 않는 날이면 침대에 누워 있다가 아버지한테 당장 안 일어나면 가죽을 벗기겠다는 소리를 듣는다. 일어나더라도 축 처져서 집안을 돌아다니며 한숨을 푹푹 쉬고, 말을 걸어도 대꾸도 안 하고, 멍하니 빵 껍질을 씹고 물건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작업장에서는 작업대 앞에 몸을 숙이고 여자용 장갑의 봉제선과 힘없는 텅 빈 손가락에서 무슨 감춰진 의미라도 찾듯 만지작거리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다가 다시 한숨을 쉬고 장갑을 원래 있던 상자 안에 아무렇게나 집어넣는다. 매잡이 허리띠를 꿰매는 도제 네드한테 하도 바싹 붙어 구경하는 바람에 네드는 신경쓰느라 일을 잘 못하고, 존에게 문만 열면 길바닥인데 쫓겨나고 싶냐고 한소리 듣는다. - P99

일라이자는 침묵에 엄청난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빠가 도무지 배우지 못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 P107

필요하면 100피트 멀리에 있는 쥐의 심장박 동도, 숲속에서 돌아다니는 담비의 발소리도, 들판 위를 나는 굴뚝새의 날갯짓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한 황조롱이의 귀가 이런 소리를 쫓는다. 사백여 개의 사과가 놓인 자리에서 밀리고 흔들리고 움직이는 소리. 너무 커서 구미가 동하지 않는 크기의 포유동물이 내는 점점 가빠지는 숨소리. 손바닥이 근육과 뼈에 가볍게 놓이는 소리. 혀가 이를 차고 핥는 소리. 다른 재질의 천을 맞대고 비비는 소리. - P114

그리고 이제 이렇게 된다—이렇게 들어맞는 느낌.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전혀 다른 느낌. 손에 장갑을 낄 때, 암양 몸에서 젖은 새끼 양이 미끄러져 나올 때, 도끼로 통나무를 쪼갤 때, 열쇠로 기름칠한 자물쇠를 돌릴 때가 떠오른다. 애그니스는 라틴어 선생의 얼굴을 보며 생각한다. 어떻게 이렇게 잘, 이렇게 딱, 이렇게 옳은 듯이 맞을 수 있지? - P1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는 충격을 받고 따라 한다. 입에서 그 단어가 익숙하면서도 기묘하게 울린다. 여동생의 이름, 죽은 지 이 년도 채 안 된 동생의 이름이다. 동생이 흙에 묻힌 날 이후로 그 이름을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퍼뜩 떠오른다. 언뜻 비에 젖은 교회 묘지, 물방울을 떨구는 주목나무, 어두운 구덩이, 흰 천에 싸인 너무 작고 여린 몸뚱이를 받아들이려고 벌어진 틈을 본다. 그렇게 홀로 땅속으로 들어가기엔 너무 조그마한 몸이었다. - P67

마을 여자들이 와서 죽은 여자를 씻기고 염해서 다음 세상으로 보낼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 여자들은 울었다. 죽은 사람, 숲에서 나와 자기들 중 한 명과 결혼한 사람, 나무의 이름으로 불리던 사람, 자기들에게 말을 걸지 않던 사람, 벗이 되어주겠다는데도 거부했던 사람을 아껴서가 아니라, 여자의 죽음이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기 때문에 울었다. 여자들은 시신을 씻기고 머리를 빗기면서 같이 울었다. 손톱 밑 때를 빼내고 머리 위로 흰 천을 덮고, 죽은 채 태어난 작은 아기를 천으로 싸서 시신의 팔에 안기며 울었다. - P75

너희 어머니는 마음이 순수한 사람이었지. 네 엄마의 새끼손가락에 든—그러면서 노인은 옹이 진 손을 들어올렸다—사랑만 해도 다른 사람들 전부를 합한 것보다 컸어. - P82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숲으로 가서 나무에, 잎에, 가지에 대고 외친다. 나무딸기의 가시투성이 줄기를 손이 찢기도록 쥐고는, 일요일마다 단정한 차림으로 아기를 업고 가는 교회, 연기도 향로도 주문 같은 말도 없는 교회의 신에게 외친다. 신을 부르고 신의 이름을 내지른다. 당신, 당신, 내 말 들려요, 이제 당신하고는 끝이에요. 당신 교회에 가야 하니까 가긴 갈 테지만 지금부터는 거기에 있는 동안 한마디도 안 할 거예요.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흙이고 시신이고 전부 다 없어지니까. - P85

자라면서 애그니스는 다른 사람의 손에 마음을 뺏기고 그 손을 만져보고 싶어진다. 특히 엄지와 검지 사이 살을 만지고 싶다. 새의 부리처럼 닫혔다 퍼졌다 하고 아귀힘이 집중된 곳이다. 거기서 사람의 재주, 능력, 본성을 알아낼 수 있다. 사람이 지니고 지켜온 모든 것, 붙잡고 싶어하는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다. 그 자리를 눌러보기만 해도 그 사람에 대해 전부 알 수 있다는 걸 애그니스는 알게 된다. - P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재나는 장갑이 가득 든 바구니를 들고 할머니 뒤를 따라가며 입을 삐죽거린다. 잘린 손 같아, 수재나는 생각하면서 할머니의 목소리를 자기 한숨소리로, 높은 건물 사이를 가르는 잘린 하늘 조각의 모습으로 밀어낸다. - P39

그래서 존은 혼자 술집에 간다. 일단은. 남자가 혼자 술을 마시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니까. 존은 해질녘처럼 어둑한 구석자리에 앉아 짧은 양초가 하나 놓인 탁자를 마주하고, 길 잃은 파리 한 마리가 불빛 안에서 맴도는 걸 지켜볼 것이다. - P41

햄닛의 아버지는 남자의 말을 듣는 대신 해가 건물 사이 좁은 틈으로 사다리처럼 내려앉으며 비로 촉촉이 젖은 거리를 밝히는 모습, 강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팬케이크, 머리 위쪽에서 비누 냄새를 풍기며 펄럭이는 빨래, 그리고 잠시 아내의—묵직한 머리채를 틀어올릴 때 어깨뼈가 모였다가 다시 벌어지는—모습, 바늘땀이 풀린 자기 부츠의 앞코를 생각한다. - P46

휼랜즈의 창가에 서서 고개를 옆으로 길게 빼면 숲의 가장자리를 볼 수 있다. 그러면 숲이 가만있지 못하고 변덕을 부리는 신록의 광경이 보일 것이다. 바람이 무성한 잎을 어루만지고 훑고 흩뜨린다. 나무는 바람의 손길에 저마다 조금씩 다른 박자로 반응하며 가지를 굽히거나 떨거나 흔든다. 바람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양분을 공급해주는 땅을 훌훌 떠나려는 듯이. - P48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큰아들의 어떤 점 때문에, 말편자가 자석에 끌리듯 아버지의 분노와 실망감은 늘 큰아들을 향했다. 아버지가 굳은살 박인 손으로 위팔 무른 살을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고 더 힘센 다른 쪽 손으로 쏟아지듯 강타를 날릴 때의 느낌이 늘 그를 떠나지 않고 남아 있다. 위쪽에서 급작스럽고 매섭게 날아오는 손바닥의 충격, 나무연장으로 좋아리를 후려칠 때 거죽이 벗겨지는 듯한 느낌. 어른 손의 뼈는 얼마나 단단하고 어린아이의 살은 어찌나 여리고 무른지. 덜 여물고 덜 자란 뼈를 꺾고 누르기는 어찌나 쉬운지. 온몸을 흠뻑 적시는 분노와 무기력한 굴욕감, 끝나지 않을 듯 계속되는 매질. - P53

휼랜즈의 창가에 서 있는 그는 떠나고, 들고 일어서고,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렬해 터질 것 같은 심정이다. 수업을 받는 아이들의 어머니가 두고 간 접시 위의 음식에는 손도 대고 싶지 않다. 떠나고, 달아나고, 다리를 놀려 여기서 최대한 멀리 가고 싶은 충동으로 뱃속이 가득차 있으므로. - P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