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명숙 할머니를 불렀다. 가까이 다가가서 인사할 수도 있었지만, 명숙 할머니가 원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다가갈 수 없었다. 할머니는 슬프고 두려운 마음으로 몇 번 더 명숙 할머니를 불렀다. 명숙 할머니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인상을 찌푸린 채로 마당 쪽을 바라보고는 이제 그만 떠나라는 손짓을 했다. 그것이 명숙 할머니의 본심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할머니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아팠다. 도무지 그 순간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 P205

희자는 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멀고 커다란 세계로 날아갈지도 몰랐다. 결국 희자는 나를 잊겠지. 편지가 점점 뜸해지면서 할머니는 희자를 조금씩 잃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언젠가 희자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사람이 되고 말 거야. 나는 너무 오래 개성과 대구를 그리워했는지도 몰라. 하지만 내 삶은 개성에도, 대구에도 있지 않아. 내 삶은 희령에 있어. 나는 희령에서 살아가야 해. 할머니는 그런 식으로 희자와 새비 아주머니, 명숙 할머니에게서 자신을 분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희자의 삶이 다음 단계로 나아간 것처럼, 할머니 또한 자신의 삶이 정체되어 있지만은 않다는 것을 희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 P213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할머니는 그때 자신이 스스로를 속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증조모의 눈에 보였던 남선의 단점들을 할머니 또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남선을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면서 그저 노처녀가 되고 싶지 않아서, 남들 보기에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서 자신을 속였다. 남선 정도라면 남편으로서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기면서 마음속의 경고를 무시했다. 증조부의 목소리로 할머니는 생각했다. ‘내가 잘난 게 뭐가 있는데.‘ - P218

할머니는 증조부에게서 작은 선물 하나도 받은 기억이 없었다. 피난 갈 때도 그는 가장 좋은 자리에서 잠을 잤고 어떤 것도 딸에게 양보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얇은 외투를 입고 떨어도 자신의 외투를 벗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증조부의 그런 행동이 너무 익숙해서 서운하지조차 않았다. 할머니와 남선의 관계는 그런 익숙함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배려하는 남자, 아내와의 관계에서 손익을 따지지 않는 남자를 자신의 배우자로 상상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기대하고 실망하는 대신 그 안에 주저앉아 포기하는 편을 선택 했다. 그편이 훨씬 더 쉬웠기 때문이었다. 남편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고 체념하고 나니 그런 삶도 견딜 만했다. - P219

명숙 할머니가 보내오는 편지에도 할머니는 답을 하지 않았다. 편지에서 묻어 나오는 명숙 할머니의 애정이 할머니는 버거웠다.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다보면 결국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으니까. 그것도 아주 간절하고 절실하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으니까. 남선의 모진 말들은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었다. 하지만 명숙 할머니의 편지를 읽으면 늘 마음이 아팠다. 사랑은 할머니를 울게 했다. 모욕이나 상처조차도 건드리지 못한 마음을 건드렸다. - P220

스무 살 이후의 할머니를 만난 이들은 할머니를 냉소적인 사람이라고 평했다.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화를 내거나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기보다는 비웃거나 차갑게 평가했으니까. 그 냉소적인 가면 뒤에 상처받고 싶지 않고, 더는 울고 싶지 않은 할머니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 P221

영옥아, 내레 너를 처음 봤을 적부터 더러운 정이 들 줄 알고 있었다. 저리 가라면서 너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는데도 너는 강아지마냥 내게 오더구나. 세상이 뒤집히구, 나도 죽을 날이나 기다리며 살고 싶었는데······ 네가 나를 비웃어도 할말이 없어.
내 너를 전쟁통에 만났다. 이제 너를 언제 볼 수 있을까. 내 살아 있을 때 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영옥아, 영옥아. 이렇게 불러본다. 항상 건강해라. 건강해라, 영옥아.
할마이가. - P223

할마이, 할마이, 부르며 곁에서 아무 이야기나 종알거려도 그걸 다 들어주고 가끔씩 희미하게 웃어 보이던 명숙 할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로빈슨 크루소』를 읽을 때면 가까이 다가와서 귀를 기울이고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도,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면 영옥이 왔냐, 묻던 얼굴도. 명숙 할머니가 대수롭지 않은 척을 해도 할머니는 그녀가 자신을 반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새비 아주머니는 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우리가 결국은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말을. 단 한 번만이라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대구 집을 떠날 때로 돌아가서 명숙 할머니를 껴안고 싶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 P224

– 기래서 나더러 뭘 어쩌라는 기야?
그를 찾아가면서 할머니는 적어도 그가 자신을 보고 놀라거나 두려워할 줄 알았다.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고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설명할 뿐이었다. 할머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할머니를 속였다는 사실에 대한 죄책감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아직도 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지 생각해보곤 한다고 했지만 결론은 늘 한 가지였다. 그는 그럴 수 있어서 그랬던 것뿐이었다. - P228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날 아침 의사가 내게 귀리의 죽음을 알렸을 때 느낀 감정이 슬픔만은 아니었음을 기억했다. 나는 안도했다. 나의 일부는 안도했다. 귀리의 고통이 이제 사라졌다는 사실에, 고통을 받는 그애의 모습을 보고 겪어야 했을 나의 괴로움이 끝났다는 사실에. 그 이기적인 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 P233

지연아.
그때 내게 앞니 두 개가 빠진 여덟 살의 언니가 다가와서 등을 두드린다.
지연아, 지연아.
언니가 나를 부를수록 세상이 환해진다.
태양이 커지고 있나봐.
나는 좀전까지 울던 일을 잊고 언니에게 말한다.
너무 밝아서 눈이 부셔. 어떻게 이렇게 밝을 수 있어?
내 말에 언니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환한 빛 속에서 소리 내며 웃는다.
바보야.
언니가 말한다.
바보야, 난 널 떠난 적 없어. - P235

"너랑 이야기하다보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침묵을 깨고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뭐가요?"
"그냥. 가깝진 않더라도 우리가 종종 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어. 그런 생각이 드니까 지나간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고, 또 이 순간도 지나갈 걸 아니까 아깝고."
개와 사람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듯이 삼십대인 나의 시간과 칠십 대인 할머니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 P243

"의사가 그러는 거예요. 이런 사고를 당하고 이 정도 다친 건 흔한 일이 아니라면서 저보고 운이 좋다고요. 부정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운이 좋았어요. 항상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즐겁지가 않았어요. 잡고 싶을 만큼 아까운 시간도 없었어요. 그런 건 이미 다 끝나버렸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찬바람에 몸이 떨려서 어깨를 움츠렸다.
"네 나이 때 나도 그랬어.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었지. 그럴 수만 있다면 내게 남은 시간을 다 퍼다가 갖다버리고 싶었어······"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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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여느 날처럼 낭독을 마치고 물을 마시는데 명숙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얼굴이 아니라 대문을 바라보고 이야기해서 꼭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 내레 어릴 적에 소설 읽어주던 이들이 있었다이. 책방에서 『홍길동전』두 읽어주구 『사씨남정기』랑 『임진록』두 읽어주구. 내레 기걸 참 좋아했더랬어. 넋을 농구선 이야기를 들었다이. 어마이가 이야기 좋아하믄 가난해진다고 해두 어쩔 수가 없었다. 기게 참 좋았더랬어.
그 말을 하는 명숙 할머니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 P186

내가 아직 서울에 살 때 엄마가 집에 왔다가 정신과 약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봉투에 인쇄된 약 이름을 핸드폰으로 하나하나 검색해보고 나서 엄마는 차갑게 말했다. 내게 실망했다고, 힘든 일이 있다고 무턱대고 약을 먹는 건 옳지 않다고 했다. 나는 싸우고 싶지 않아서 곧 끊을 거라고 약속했었다. 엄마와 맞서 싸웠다면 엄마는 결국 자신이 나와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음에도 정신과에 의지하지 않았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 P190

이런 갈등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엄마나 나나 서로에 대해 많은 걸 포기했었다. 그런데 어째서 다시 이렇게 부딪치게 된 걸까.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 결국 엄마를 공격하게 되는 패턴을 반복하고야 말았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았지만 끝내 자신을 꺾지 않고 나를 비난하는 엄마를 견딜 힘이 내게는 없었다. - P191

– 보통이 아니구만.
혼잣말하듯 무심하게 한 말이었지만 명숙 할머니에게 칭찬을 듣자 할머니는 가슴이 뛰었다. 명숙 할머니가 보기에 할머니의 바느질은 엉성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처음 하는 것치고는 나쁘지 않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말을 듣자 할머니는 자신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칭찬을 받아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할머니는 그후로 매일 명숙 할머니 곁에 붙어서 바느질을 손에 익혔다. - P195

앞에서는 듣기 좋은 말을 하면서 뒤에선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 악의 없는 웃음을 보이면서 다른 마음을 품는 사람들이 흔하고 흔했다. 그런 모습은 어쩌면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성질인지도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명숙 할머니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고양이 같았다. 움직이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걷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그랬다. 고양이 중에서도 결코 인간의 무릎에 앉지 않고, 인간에게 치대지 않는 고양이라고 해야 할까. 늘 인간에게서 등을 돌려 앉고, 인간이 자신을 보지 않을 때는 멀리서 바라보다가도 눈길을 주면 외면하는 척하는 고양이. 명숙 할머니는 그런 고양이를 닮아 있었다. - P195

밤에 잠이 들면 증조부가 나오는 꿈을 꿨다. 전쟁이 다 끝나고 나서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온 증조부를 맞는다. 그 장소는 늘 개성의 집이다. 이상하게 봄이는 귀도 아직 퍼지기 전인 어린 시절 모습이다. 봄이가 전쟁을 지나고 다시 아기 강아지가 됐구나, 감탄하면서 할머니는 봄이와 함께 증조부를 환영한다. 그가 증조부라는 건 알지만, 그의 얼굴은 언제나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꿈을 꾸고 일어나면 가슴이 서늘했고 증조부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휩싸였다. 국군에 입대하기로 결정한 중조부의 마음이 무엇인지 할머니는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증조부가 죽지 않기만을 바랐다.
밥을 먹을 때도, 바느질할 때도, 증조모와 새비 아주머니가 일을 나가는 모습을 볼 때도, 희자와 이야기할 때도 할머니는 이상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이야기하다 웃음이 나올 때는 더 그랬다. 웃는 소리가 담장을 넘어가서는 안 되는 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할머니는 웃음을 삼갔다. - P197

새비 아주머니는 술을 한 잔 마시고는 손뼉을 치면서 숨이 넘어가라 웃기 시작했다. 얼굴이며 목이 온통 울긋불긋했다.
– 너이 아바이 닮아서 기렇구나. 우리 아바이고 오라비고 다 술을 못 먹어서 저랬디.
명숙 할머니가 새비 아주머니를 보고 혀를 찼다. 명숙 할머니는 깍두기를 안주 삼아 빠르게 술을 마셨다.
– 고모는 수녀회에서 술 마시는 거나 배워왔더래?
새비 아주머니가 명숙 할머니를 가리키면서 웃었다.
– 에이, 미친년. 술이나 먹고 실컷 웃어라.
그때 명숙 할머니가 새비 아주머니를 어떤 표정으로 보았는지 할머니는 기억했다.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얼굴에 어리던 슬픈 마음을, 다가가 어루만져주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을, 그리고 그 마음에 깃든 깊은 애정을 할머니는 새비 아주머니를 보는 명숙 할머니의 얼굴에서 발견했다. - P198

하지만 할머니는 그날 그 자리에서 불안을 느꼈다. 경계하지 않을 때, 긴장하지 않을 때, 아무 일도 없으리라고 생각할 때, 비관적인 생각에서 자유로울 때, 어떤 순간을 즐길 때 다시 어려운 일이 닥치리라는 불안이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전전긍긍할 때는 별다른 일이 없다가도 조금이라도 안심하면 뒤통수를 치는 것이 삶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불행은 그런 환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겨우 한숨 돌렸을 때, 이제는 좀 살아볼 만한가보다 생각할 때.
그런 생각은 증조모로부터 온 것이기도 했다.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좋다, 행복하다, 만족스럽다, 같은 표현을 하면 증조모는 부정 탄다고 경고했다. 자식이 예쁠수록 못났다고 말하고, 행복할수록 행복하다는 말을 삼가야 악귀가 질투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돌이켜보면 살면서 후회되는 일은 늘 그런 것이었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함께 웃고 즐거워하고 따뜻함을 나누는 시간을 그대로 누리지 못하고 불안에 떨었던 것 말이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있었으니까. 아무리 불안에 떤다고 해도, 좋은 순간을 그대로 누리지 않으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으니까.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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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는 "자신이 더러워진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했다."우리가 하는 이 일들은 실제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즉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라옵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세상을 바꿨지?" 그는 사용하기 더 쉬운 기술을 만드는 일이 곧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설계자와 기술 전문가로서 얻은 가장 큰 배움 중 하나는, 무언가를 사용하기 쉽게 만드는 것이 꼭 인간성에도 좋은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더 나은 사람이 될 자유를 주는 기술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아버지의 헌신을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의 비전에 따라 살고 있는지 자문했다. - P186

아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러니 중 하나는, 비반응적인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정신적 공간을 마련하는 마음챙김 워크숍이 페이스북과 구글에서 무척이나 인기를 끈다는 겁니다. 그들이 바로 이 세상이 마음을 챙길 수 없게 하는 가장 큰 가해자인데 말이죠." - P188

언젠가 제임스 윌리엄스(내가 만난 전 구글 전략가)는 일류 기술 설계자 수백 명 앞에서 강연을 하며 "현재 자신이 설계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싶은 분이 얼마나 계십니까?"라는 단순한 질문을 던졌다. 강연장은 침묵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을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P189

트리스탄은 내부에서 이러한 유인책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지켜보았다. 그는 내게 다음 상황을 상상해보라고 말했다. 한 엔지니어가 사람들의 집중력을 개선하거나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하는 약간의 수정을 제안한다.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2주에서 4주 후에 게시판에 관련 지표에 대한 리뷰가 올라옵니다. 관리자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봐, 왜 사이트에서 보낸 시간이 3주 전보다 낮아졌어? 아, 우리가 이 기능을 추가 해서 그런 걸 거야. 이 기능 다시 없애고, 수치가 회복되는지 보자고" 이건 음모론이 아니다. KFC가 사람들이 프라이드치킨을 더 많이 먹길 바란다는 말이 음모론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건 우리가 구축해서 계속 허용하고 있는 유인 구조의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트리스탄은 말한다. "그들의 사업 모델은 스크린타임이지, 우리의 일생이 아니에요. - P198

우리의 집중력을 좀먹는 현재의 기술 작동 방식은 과거나 지금이나 선택의 결과다. 이 방식은 실리콘밸리의 선택이며, 실리콘밸리가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는 사회 전반의 선택이다. 과거에 인간은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었고, 현재에도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다. 트리스탄은 이러한 기술을 전부 그대로 보유하면서, 최대한 우리를 산만하게 하는 방향으로 설계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는 정반대의 목표를 가지고 이 기술들을 설계할 수 있다. 집중력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을 최대한 존중하고, 사람들을 최소한으로 방해하는 것이다. 더 중요하고 유의미한 목표에서 사람들을 떼어놓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목표 성취를 돕도록 기술을 설계할 수 있다. - P200

진짜 논쟁은 이것이어야 한다. 어떤 기술이, 어떤 목적에서, 누구의 이익을 위해 설계되는가? - P201

페이스북(과 다른 모든 소셜미디어 기업)이 뉴스피드에서 우리가 볼 정보를 결정할 때, 이들에게는 보여줄 내용이 수천 가지나 있다. 그래서 이들은 우리가 무엇을 볼지 자동으로 결정하는 코드를 작성한다. 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알고리즘, 즉 우리가 무엇을 어떤 순서로 볼지 결정하는 방식은 무척 다양하다. […]
이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알고리즘은 때에 따라 다르지만 일관된 핵심 원칙이 하나 있다. 소셜미디어는 우리가 화면을 계속 들여다보게 만들 정보를 보여준다. 그게 다다. 우리가 화면을 더 많이 들여다볼수록 그들이 버는 돈도 늘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알고리즘은 언제나 우리가 핸드폰을 내려놓지 않도록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을 정보를 파악해서 그 내용을 점점 화면에 들이붓는다. 알고리즘은 집중을 방해하도록 설계된다. 그러나 트리스탄은 이러한 원칙이 (매우 뜻밖에도, 그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또 다른 변화로 이어지며, 이 변화가 믿기 힘들 만큼 중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 P202

퓨리서치센터의 한 연구에 따르면 페이스북 게시물을 ‘분개한 반대 의견‘으로 채울 경우 ‘좋아요‘ 수와 공유되는 횟수가 두 배로 는다. 그러므로 우리를 화면 앞에 붙잡아두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알고리즘은 (의도는 없었지만 불가피하게) 우리를 화나고 격노하게 만드는 일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분노를 많이 일으킬수록 참여도도 높아진다. - P204

많은 사람이 많은 시간을 분노하는 데 쓰면 문화가 바뀌기 시작한다. 트리스탄이 말했듯이, 이러한 현상은 ‘증오를 습관화‘한다. 증오가 우리 사회의 뼈대에 스며드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내가 10대였던 때 영국에서 열 살인 두 어린이가 막 걸음마를 뗀 제이미 벌저jamie Bulger라는 유아를 살해하는 끔찍한 범죄가 발생했다. 이에 당시 보수당 총리였던 존 메이저john Major는 우리가 "비난은 조금 더 많이, 이해는 조금 더 적게" 할 필요가 있다고 공개 발언했다. 14살이었던 내가 총리의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 했던 것이 기억난다. 악랄한 행동일지라도 (어쩌면 악랄한 행동일수록 더욱더)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언제나 더 낫다. 그러나 우리가 분노에 보상하고 자비에 벌을 주는 알고리즘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면서, 오늘날 (비난은 더 하고 이해는 덜 하는) 이러한 태도는 좌파 우파 할 것 없이 모두의 반응이 되었다. - P204

우리가 거짓말 속에서 길을 잃고 끊임없이 동료 시민에게 화를 내면 여기서부터 연쇄반응이 일어난다. 우리는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우리가 집단으로서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더 커지고 악화된다. 그 결과 사회는 위험하게 느껴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더 위험해진다.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실제 위험이 커질수록, 우리는 더더욱 각성 상태가 된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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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안에서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뒷걸음 질쳤고 익숙한 구덩이로 굴러떨어졌다.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서린 두려움이 나를 장악했다. 나는 왜 내가 원하는 만큼 강해질 수가 없을까.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도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래 울던 밤에 나는 나의 약함을, 나의 작음을 직시했다. - P155

인내심 강한 성격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인내심 덕분에 내 능력보다도 더 많이 성취할 수 있었으니까. 왜 내 한계를 넘어서면서까지 인내하려고 했을까.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 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삶이 천장까지 쌓인 어렵고 재미없는 문제집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오답 노트를 만들고, 시험을 치고, 점수를 받고, 다음 단계로 가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 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 P156

"그때 지연씨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어요. 이게 숨구멍이라는 말. 이 공부를 할 때 가장 자유롭고 편안하다고 했어요."
그때의 내 마음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세계가 지구 밖에 있다는 사실은 나의 유한함을 위로 했다. 우주에 비하자면 나는 풀잎에 맺히는 물방울이나 입도 없이 살다 죽는 작은 벌레와 같았다. 언제나 무겁게만 느껴지던 내 존재가 그런 생각 안에서 가벼워지던 느낌을 나는 기억했다. 무리를 이루는 듯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도 철저히 혼자이며,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어 있던 물질들이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빠른 속도로 서로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줄곧 느껴왔던 슬픔을 설명 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그 순진무구한 사랑은 대학원에 진학 하면서 차츰 빛을 잃어갔고, 그 자리는 현실적인 크기의 희망으로 대체됐다. 나의 숨쉴 구멍이었던 존재가 일이 되고, 나의 가능성이 한계가 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P158

"이티가 착한 애잖아요. 손가락으로 빛을 밝혀서 사람들 다친 데도 고쳐주고, 친구도 되어주고. 엄마 따라 극장 가서 그 영화를 봤는데 어느 장면에선가 이티가 저를 보는 거예요. 카메라를 보는 게 아니라, 모두를 보는 게 아니라, 극장 맨 앞좌석에 앉아 있는 나를 보는 거죠. 내가 자기를 보는 걸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어요. 아직도 그 순간을 기억해요. 이티가 마지막에 자기 별로 돌아갈 때 얼마나 울었는지 엄마가 부끄럽다고 할 정도였어요. 그 이후로 밤이 되면 하늘을 올려다 보는 습관이 생겼어요. 어릴 때 친구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하늘을 올려다보면 거기 어딘가에는 내 친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팀장을 데려다주고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어린 팀장의 얼굴을 상상해봤다. 예의바르고 말을 가려 하고 자신의 사적인 부분을 잘 얘기하지 않는 그녀가 내게 틈을 보인 순간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말이 위안이 되어서 나는 조금 놀랐다. 잠자리에 누워서야 어쩌면 그것이 그녀 방식의 위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P158

– 봄이야. 우리 봄이야.
봄이가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증조모를 올려봤다.
– 여기서 헤어지자. 이제 우리를 따라오지 말라는 말이야. 내레 미안해······
증조모의 말이 끝나자 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족들의 냄새를 한 번씩 맡더니 집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 멀어졌을 때야 한 번 뒤돌아봤을 뿐이었다. 할머니는 혹시나 봄이가 돌아올까봐 봄이의 이름도 부르지 못했다. 등을 돌린 채로 걸어가는 봄이를 보며 할머니는 목에 두른 목도리가 다 젖도록 소리 없이 울었다. 그후로 누구도 다시는 봄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봄이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그냥 개일 뿐이야. 할머니는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그런 거짓말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는 없었다. - P161

– 작은 간나가 애 하나 데리고 기렇게 내려가기가······
증조모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새비 아주머니가 걱정 되어 견딜 수 없을 때면 증조모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냈지만 곧 침묵했다. 할머니는 피난을 떠나려는 새비 아주머니와 희자를 만류하지 않았던 증조부가 미워졌다. 그래서는 안 됐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새비 아주머니와 희자를 그런 식으로 보내는 건 아니었다고.
– 기래두 아바이가 있어서 다행인 기야.
증조모가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두려웠다. 헛간에서, 마당에서, 뒤뜰에서 잘 때, 때로는 운이 좋아 사랑채나 행랑채에서 잘 때에도 두려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피난길을 가는 여자에게는 인민군, 국군, 미군, 중공군의 구분이 중요하지 않았다. 밤마다 민가를 다니면서 여자를 강간하는 군인들이 어느 쪽인지 구분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었으니까. - P165

– 어마이.
– 됐다.
– 이렇기 간다는 말이시까.
– 기래.
– 어마이, 이러지 마시라요.
말이 끝나자마자 증조모가 할머니의 얼굴을 때렸다. 한 번, 두 번, 다음에는 머리를 쳤다. 바닥에 쓰러질 정도로, 증조부가 말릴 때까지. 아이는 더이상 그들을 따라오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길을 걷다보니 해가 졌다. 그믐밤이었다. 별 무리가 아주 낮게까지 내려와 밝게 빛났다. 그걸 보면서 할머니는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라고. 짐승만도 못한 존재들, 천한 존재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라고. - P166

"너희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이런 계절이었어. 장례 치르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도무지······ 안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여기 길가에 서서 계속 맴돌았어. 겁이 나더라고.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면 세상에 엄마가 없다는 게 진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계속 맴돌았지. 옛날 사람들 말이 맞아. 딸의 곡성은 저승까지 들린다고······ 그렇게 한 해를 괴롭게 지내다가 네가 놀러왔을 때 얼마나 반갑고 좋았던지 몰라. 세상에는 끝나는 것들만 있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너를 보니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겠더라."
할머니가 개망초꽃을 손등으로 툭툭 쳤다. 지금 너도 남몰래 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할머니의 말이 내게 꼭 그렇게 들렸다. 끝나는 것들만 생각하지 마. - P168

나는 학교에 들어갔고 한글과 숫자를 배웠고 시계를 읽는 법을 배웠고 죽은 사람은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거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여기에 존재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배웠다. 나는 엄마에게 죽은 언니와 놀았다고 말하던 날을 떠올렸다.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겪은 사람 앞에서 나의 진실을 떠벌리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엄마의 고통 앞에서 나의 진실은 가치가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엄마의 불행에 나의 불행을 견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거짓말을 했다. 괜찮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잘 자고 잘 먹고 있다고, 문제가 없다고. 나는 언제나 잘 웃는 아이였고, 자라서는 잘 웃는 어른이 됐다. 마음속으로 울고 있을 때도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 P171

그렇게 지내면서 나는 내가 정말 오랜만에 온전하게 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박사논문을 쓰고, 박사 후 과정을 밟고,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남편의 배신을 알게 되고, 이혼하고,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희령으로 와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앞만 보며 달려왔었다.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를 느끼고 싶지 않아 나에게 더 큰 상처를 주면서. - P172

전남편에게는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시간은 흘러가는 강물이 아니라 얼어붙은 강물이라는 말을 즐겨 했다. 시간은 환상일 뿐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자유의지나 선택이라는 것 또한 커다란 환상일지 모른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식의 생각에는 분명 이점이 있었다. 그런 믿음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후회의 덫에서 구원해준다. 과거의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현재의 고통이 없었으리라는 사고의 공회전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속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 이건 일어날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 P173

"지연씨 사정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하지만 사적 영역의 감정이 공적 영역에까지 영향을 줘선 안 되는 거잖아요."
나는 그에게 다시 한번 사과했다. P선배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 나는 선배가 건넨 파일을 한번 더 봤다. 있을 수 없는 실수였다.
지연씨 사정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어요. 내 사정을 들어서 안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나의 실수가 사생활 때문일 거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으며 그 생각을 어떻게 내게 전할 수 있을까. 아니야. 그런 이야기를 듣도록 빌미를 제공한 나의 실수가 문제인 거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다니.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에 몸이 떨렸다. 나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흠 잡힐 일이 없도록 어느 때보다도 더 노력해야 했다. - P174

새비 아주머니의 고모 집은 대구의 비산동이라는 곳에 있었다. 피난민 수용소가 있는 곳이어서 골목은 물론이고 큰길을 걸을 때도 사람과 부딪치지 않는 게 어려울 정도로 붐볐다.
[…] 마치 죽 속 밥풀처럼, 모두가 개어져서 하나의 대접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 밀접함이 아득했다. 모두가 살고자 연고도 없는 그곳으로 모인 것이었다. - P177

개성에 찾아온 두 사람을 피난길로 몰았던 것은 그녀의 가족이었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써봤지만 개성에 두고 온 봄이 생각도 났다. 피난길에서 본 광경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되도록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는데, 처마밑에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는 동안 그간 한쪽에 밀쳐뒀던 생각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나왔다. 쌀 한 톨, 장작 한 조각도 나오지 않는 쓸모없는 생각이라는 것이. - P178

– 영옥이 언니.
할머니는 희자야, 라고 말하지도 못한 채로 자리에 주저앉아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반가움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동안 입 밖으로 내지 않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치받치던 두려움이 그제야 몸밖으로 빠져나왔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이란 신기한 감정이었다. 사라지는 순간 가장 강렬하게 느껴지니까. 할머니는 자신이 단 한 번도 새비 아주머니와 희자가 대구까지 무사히 왔으리라고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희망이 꺾였을 때의 충격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작은 희망까지도 모두 버린 채로 피난길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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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서서히 미끄러지고 있었으며, 하신은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간직해 온 숱한 습관들과 결별하는 중이었다. 후회는 없었다. 삶이 전보다 훨씬 나아진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울적함이 찾아들 때도 혼자 구석에 틀어박혀 자신의 존재가 지금보다 나아질 수는 없는지, 다른 사람들은 더 나은 인생을 사는 건 아닌지 반문하지 않아도 되었다. 인생을 완전히 망쳤다는 생각, 낙오자가 되었다는 우울한 생각이 사라진 건 순전히 코랄리 덕분이었다. 코랄리가 그의 생각을 바꿔 주었을 뿐 아니라, 그녀와의 섹스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장인, 장모도 썩 좋은 분들이었다. 다만 시내에 나갈 때마다 위축되는 기분이었는데, 아마도 전에 저지른 일들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런 러브 스토리는 대낮에 드러나면 가면극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연기에 서툰 가엾은 배우가 된 것 같았다. 하신은 두목이 되기를 꿈꾸었던 사내이므로, 누군가의 남편이라는 역할은 어울리지 않았다. - P547

카린을 보는 것만으로도 앙토니는 불편해졌다. 이 여자들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똑같은 기쁨, 똑같은 고통을 선사하는 자녀의 존속만을 위해 스스로 무너지며 하녀나 다름없는 신세를 자처한다. 모든 것이 앙토니에게는 심각할 정도로 우울했다. 그 소리 없는 집요함 속에서 앙토니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운명을 그려 보았다. 최악은 가스레인지 앞에서 세월을 보내는 여자들의 자각 없는 몸, 넙데데한 엉덩이, 불룩한 뱃살을 통해 영원히 지속되는 종족의 법칙이었다. 앙토니는 가족을 증오했다. 가족은 목적도 끝도 없이 연장되는 지옥이었다. 그는 길을 떠나고 기적을 만들 것이다. 다른 것을 이룰 것이다. 그런데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 P552

친구들, 매일 저녁, 그리고 아페리티프 마시는 시간을 두려워 했다. 저녁 7시쯤 되면 어김없이 욕구가 찾아왔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한 잔,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잔이 그를 유혹했다. 한 잔으로 어떻게 되는 건 아니었다. 인생은 짧고 너나 할 것 없이 언젠가 죽게 마련이라는 친구의 목소리와 함께 아페리티프가 그를 유혹했다. 그러니 즐겨야 했다. 그리하여 파트릭은 스스로에게 일탈을 허락했고, 다음 날이면 형편 없이 망가진 자신을 다시 만났다. 다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 P571

그때 여자애와 춤추고 있는 앙토니를 발견했다. 소년은 소녀를 바싹 당겨 안았고, 두 아이는 메두사처럼 느리게 흐느적 거렸다. 에로스 라마초티의 코맹맹이 소리가 사랑의 고통을 노래하자, 무대 위 커플들은 운명에 대한 진지한 감정에 압도당한 듯 서로를 한층 더 꼭 안았다. 여자들은 희미한 옛 사랑을 떠올렸고, 남자들은 경계를 늦추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원통함 같은 상반된 감정이 읽혔다. 구슬픈 멜로디에 힘입어 삶은 돌연 소용돌이처럼, 잘못된 출발의 결과처럼 되어 버렸다. 이탈리아 가수가 부르는 구슬픈 노래가 그들의 귀에 대고 이혼과 죽음, 일에 좀먹히며 이리 채고 저리 채는 신세, 불면과 외로움 으로 얼룩져 엉망이 된 존재들의 비밀을 속삭였다. 사람들은 모두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사랑하고 죽기도 한다. 우리는 어떤 것도 지배하지 못한다. 도약도 끝도 우리의 힘 밖에 있다. - P576

일터에서 앙토니는 친구를 몇 명 사귀었다. 시릴, 크림, 다니, 르주크, 마르티네. 아침마다 그들을 만나는 게 좋았다. 점심 시간이 되면 다 함께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휴식 시간에는 간혹 C작업장 뒤 작은 뜰에 있는 팔레트에 앉아 몰래 마리화나를 피웠다. 근무가 끝나고도 만났다. 취미나 월급이 다들 엇비 슷했으며 앞날에 대한 불확실함마저 공유했다. 특히 본질적인 문제들을 회피하게 만드는 수치심, 그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들 모두 벗어나고 싶어 했던 이 촌구석에서 날이면 날마다 뜨개질하듯 이어지는 삶, 아버지들과 너무나 닮은 존재가 되었다는 점, 느릿하게 찾아오는 저주까지. 앙토니는 복제된 일상이 가져다주는 선천성 질병 같은 삶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 같은 고백이 순종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는 삶에 수치심을 더 했을지 모른다. 그래도 빈둥거리지 않고, 공짜 혜택만 찾아다니지 않고, 변태나 실업자가 아니라는 걸 그들은 자랑스러워했다. 굳이 마르티네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걸쭉하게 트림하며 알파벳을 읊조리는 것도. - P614

술에 취해 RFM 라디오를 들으며 에일랑주의 밤길을 운전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게 취미가 되었다. 엔강을 따라 힘들이지 않고 운전하면서 그가 나고 자라 손바닥 보듯 훤히 꿰고 있는 거리를 끝없이 달렸다. 가로등 불빛이 하나하나 점을 찍듯 그의 길을 소리 없이 밝혀 주었다. 구슬픈 노래를 들으며 달리다 보면 조금씩 엄청난 감정이 밀려 올라왔고, 앙토니는 굳이 그것을 억누를 이유를 알지 못했다. 조니 할리데이는 그의 최애 가수였다. 그는 절망을 남긴 희망, 헛되이 끝난 이야기, 도시, 고독을 노래했다. 시간이 흘렀다. 그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한 손엔 캔 맥주를 든 채 그 흔하디흔한 풍경을 몇 번이고 훑었다. 조명을 받은 거대한 공장. 스쿨버스를 기다리며 유년의 절반 이상을 보낸 버스 정류장. 그가 다니던 학교, 늘 사람이 바글바글하던 케밥집,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각오로 떠났다가 불알을 덜렁거리며 되돌아온 기차역. 너무나 심심해서 강물에 대고 침 뱉기 놀이를 하던 다리. 마권 발매소, 맥도날드, 텅 빈 테니스 코트, 불 꺼진 수영장, 주택 단지로 미끄러지는 완만한 비탈길, 촌, 아무것도 아닌 것들, 「주블리 레 통 농」의 노랫말. - P615

하신은 갈기갈기 찢겼다. 한편으로 고마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신은 바로 이 사람들 손에 입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의 강박과 생활 방식을 증오했다. 점심식사는 정각 12시, 저녁식사는 정각 7시를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루를 마치 타르트 조각 자르듯 일일이 계산하고, 할당량을 정하고, 잘게 조각내는 사람들이었다. 식사를 마치면 으레 단추를 푸는 장인. 단순하고 거짓말을 모르고 영원한 얼간이 같은 그의 사고방식. 세상의 수업 앞에서 언제나 모든 것을 차단하는 성자와도 같은 강직함. 그들이 초등학교에서 배운 서너 가지 강렬한 교훈은 각종 사건 사고, 정치, 노동 시장, 유로비전의 트럭이나 크레디 리오네 은행 사건 등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안 되었다. 그것만 가지고는 그저 어쭙잖게 분개하거나 정상이 아니라는 둥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둥 비인간적이라는 둥 하는 말로만 거들 뿐이었다. 모든, 아니면 거의 모든 질문들을 잘라 버리는 세 개의 칼날. 인생이 계속 그들의 진단에 어긋나고 그들의 희망을 꺾고 역학적으로 속였음에도 그들은 언제나 그들의 원칙을 꼿꼿하게 고수했다. 여전히 우두머리를 존중하고 TV에서 하는 말들을 전적으로 신뢰했으며 필요할 때면 열광하거나 분노했다. - P618

하신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전부 털어놓을 사람, 동지가 절실했다. […] 동료들에게 하소연이라도 할라치면, 아이가 있는 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는 뻔한 대꾸만 돌아왔다. 다른 데서와 마찬가지로 고정 관념이 직장을 지배했으며, 그것이 사람들을 점잖게 꾸며 주고 냉혹한 현실에서 고꾸라지지 않도록 행복으로 중독시켰다. - P619

그러나 사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하신은 다른 한 가지를 깨달았다. 코랄리는 내면 깊이 공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는 언제나 빈자리가 남아 있었다. 오세안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그 자리를 차지했고, 코랄리는 생애 처음으로 완벽히 채워졌다. 이제 모든 것이 다시 정리되었다. 아이가 모든 일의 잣대가 되었고 모든 것을 정당화했다. - P620

하신에게 질투심 따위는 없었다. 딱히 자신이 배제된다는 느낌도, 딸을 원망하는 마음도 없었다. 아이에게 모든 걸 희생하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 있으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하신에게는 그 공허가, 누군가에 의해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자리가 없었을 뿐이다. 오세안은 하신의 신경증, 불행, 그를 떠 나지 않는 분노에 더해진 보너스였다. 어차피 인생은 하신에게 충분하지 않았고, 딸이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아무튼 쉽지 않은 문제였다. 무슨 수를 써도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 P621

자정이 지나고 새벽 1시 무렵, 앙토니와 하신은 ‘공장‘ 앞 보도블록에 서 있었다. 멀리서 아주 간간이 폭죽과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술집들은 문을 닫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고깃 덩어리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앙토니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심하게 비틀거리는 바람에 담뱃불 하나 붙이면서도 담벼락에 등을 기대야 했다. 저녁 내내 수없이 떠들고 수많은 사람들과 술을 퍼마셨다. […] 앙토니와 하신은 가능한 한 서로를 피하려고 애썼다. 마침내 두 사람 사이에 한마디가 오가기까지는 늦은 시간, 알코올, 승리, 그리고 공기 속을 부유하는 용서와 사면의 강렬한 감정이 필요했다. 하신이 주머니에 손을 꽂고 다가왔다. 먼저 말을 건넨 것도 하신이었다.
"엉망진창이긴 해도 멋지네."
"그러게." - P641

하신은 화단 가에 앉아 팔을 무릎 위에 얹고 아주 침착하게 담배를 피웠다. 앙토니는 선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서로 할 말이 없는 것도 우스웠다. 사연이야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은 같은 시에서 자라고 같은 일에 권태를 느끼고 같은 학교를 다니다가 너무 일찍 그만두지 않았던가. 심지어 아버지들은 메탈로르 동료였다. 그동안 두 소년은 수도 없이 마주쳤다. 그럼에도 이런 공통점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떤 두툼한 벽이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었다. 앙토니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운전 욕구가 오줌이 마려워 절절 맬 때처럼 그를 불태웠다.
"야, 한 번만 타 보자." 그가 다시 말했다.
하신이 두 눈을 들자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오갔다.
앙토니가 다가가 한 손을 내밀었다.
"자.....!"
하신이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던졌다.
"저 끝까지 갔다가 다시 와."
"오케이."
"한 번만 왕복하는 거야. 끝."
앙토니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런 집요함은 짜증스럽다. 알았다고 했지만, 앙토니의 눈에는 비웃는 듯한 기미가 숨어 있었다. - P646

앙토니는 바캉스 계획도,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전부 끝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채무에서 벗어난 기분이랄까. 샤워를 하러 욕실로 향했다. 옷을 다 벗고는 세면대 위 큰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물을 아주 뜨겁게 틀었다. 델 듯이 뜨거운 물줄기 아래에서 앙토니는 입을 벌리고 검고 숱 많은 머리칼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몸을 떨었다. 뜨거운 물이 미지근해졌다가 차가워질 때까지 한동안 물을 맞았다. 스테프가 남긴 공허는 단연 물리적이었다. 가슴속, 뱃속에서 그녀의 냄새가 났다. 삶은 계속될 것이다. 그게 가장 힘들었다. 이러고도 삶이 계속된다니. - P655

인생을 즐기고 싶어 하는 혼자 사는 여자들은 정말 많아서 같이 산책을 하고 단체 여행에 등록했다. 이렇게 우리는 싱글 여성이나 미망인, 어떤 이유로든 혼자가 된 여성들을 가득 싣고 알자스 지방과 포레누아르를 달리는 관광버 스를 종종 보게 된다. […] 전부, 아니, 거의 모두가 몇 번의 임신을 겪었으며, 해고당하고 우울증에 빠지고 난폭하고 마초적인, 실업자 신세가 된 강박적인 남편과 함께 살아왔다. 그 남자들은 식탁에서, 술집에서, 잠자리에서도 우울한 얼굴을 했으며, 굵은 손과 기진맥진한 마음으 로 수년 동안 세상을 원망했다. 그토록 대단했던 그들의 공장 이 문을 닫고 용광로가 입을 꾹 다문 뒤로는 위로받을 길조차 막혔다. 그중 어진 쪽인 세심한 아버지, 선량하고 말수 없고 순종적이던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남자가, 아니, 거의 모든 남자가 침몰했다. 그 아들들 역시 짝을 찾아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일반적으로 기대에 어긋나고 아무 짓이나 해 대고 근심만 낳았다. 그 모든 시간 동안 아마조네스들은 견디고 인내했으며 학대받았다. 그러다가 심각한 위기를 겪고 나서야 상황은 비로소 받아들일 만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경제 위기라고 해도 그것은 더 이상 한순간을 가리키지 않았다. 그건 순리였다. 운명. 그네들의. - P660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로, 두 사람이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는 좀체 찾아오지 않았다. […] 그의 죽음은 서서히 지워지는 것들 다음에 오는 논리적인 결과였다. 몇 주가 흘렀다. 몇 달. 앙토니도 엄마도 죽음에 대해 또는 미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엇비슷한 일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다음부터 엘렌은 전남편을 떠올릴 때면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말하지 않았다. 추억은 동전처럼 무너져 내렸다. 엘렌은 추억들의 순서를 맞추었고, 자기 편의에 맞게 이야기들을 재구성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사람에게는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그녀가 후회하지 않는 그녀 삶의 일부였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경제 위기 탓은 더더욱 아니었다. 어쩌면 술이 문제였을까. 그것이 운명이고 그들의 삶이었으니 창피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앙토니가 고집을 부리거나 꽉 막힌 사람처럼 보일 때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넌 어쩜 그렇게 네 아빠랑 똑같니. 칭찬이 아니었다. 앙토니는 자랑스러워 했다. - P668

앙토니는 차라리 보지 않고 싶었다. 스즈키에 올라탄 앙토니가 전속력으로 지방 도로를 달렸다. 엔진의 강하고 갑작스러운 떨림이 손바닥에 다시 찾아들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이 감정, 지옥의 소리, 머플러가 뿜는 달콤한 휘발유 향기. 그리고 한숨 가운데 에일랑주에 7월이 다시 찾아올 때 보드랍게 와닿는 빛의 질감. 해가 저물 녁의 하늘은 솜처럼 나긋나긋한 분홍빛을 머금었다. 여름날 저녁 언제나 똑같은 이 느낌, 숲속에 드리운 그늘, 얼굴 위로 부는 바람, 공기의 이 틀림없는 냄새, 소녀의 피부처럼 오돌토돌한 아스팔트 길의 친숙함. 호수 골짜기가 그의 피부에 남겨 놓은 지문. 거기에 속해 있다는 이 끔찍한 포근함. - P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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