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애그니스가 생각한 죽음의 개념은, 드넓은 황무지 한가운데 불이 켜진 작은 방의 모습으로 떠올랐다. 산 사람들은 방안에서 산다. 죽은 사람들은 건물 밖에 모여들어 손바닥과 얼굴과 손끝을 창문에 대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자기 식구들한테 가닿으려고 절박하게 매달린다. 방안에 있는 이들 가운데, 바깥에 있는 이의 모습을 보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벽을 통해 얘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은 그러지 못 한다. - P326
애그니스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다. 절대로. 이 아이의 배를 채우고, 이 아이들을 생명으로 채울 것이다. 밖으로 나가는 문과 아이들 사이에 서서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길을 막을 것이다.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모든 것에 맞서 세 아이를 지킬 것이다. 애그니스는 아이들이 안전하다는 걸 알기까지 쉬지도 자지도 않을 것이다. 밀어내고 맞서 싸우고, 살아남은 아이가 둘뿐이라는 오래된 예감을 지워버릴 것이다. 그렇게 하고 말 것이다. 할 수 있다는 걸 안다. - P327
애그니스는 너무 지쳐 정신이 없는데도, 그의 손을 잡아보지 않았는데도, 그가 찾아냈으며 그 안에 들어갔으며 그걸 살고 있다는 걸 안다. 그가 살려고 했던 삶, 그가 하려고 했던 일을. 애그니스는 침대에 누워 그가 그렇게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슴을 넓게 펴고, 걱정과 좌절이 씻겨나간 얼굴로 서 있는 것을 보고, 그의 만족감의 냄새를 들이마시며 웃음을 짓는다. - P329
아직도 손을 입에 댄 채 애그니스는 딸을 내려다본다. 온갖 아픈 사람, 앓는 사람, 회복하는 사람, 꾀병을 부리는 사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 미친 사람을 돌보아온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얼마 안 남았어. 그러나 애그니스의 다른 부분은, 이 아이를 젖 먹이고 돌보고 보살피고 쓰다듬고 먹이고 입히고 끌어안고 입 맞췄던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그럴 순 없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제발, 이 아이만은. - P335
어떻게 해도 차도가 없었다. 어떤 것도 햄닛을 낫게 할 수 없었다. 애그니스는 구멍난 양동이에서 물이 새듯 희망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걸 느낀다. 애그니스는 바보, 천치, 최악의 멍청이다. 내내 주디스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햄닛을 뺏기게 될 모양이었다. 운명이 어떻게 이처럼 잔인한 함정을 놓을 수가 있나? 엉뚱한 아이에게 집중하게 해놓고, 한눈을 파는 사이에 손을 뻗어 다른 아이를 잡아채다니? - P339
애그니스는 자기 약초밭, 가루와 물약, 잎, 용액이 가득한 선반을 떠올린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화가 치솟는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수년 동안 돌보고 김매고 다듬고 따 모은 약초. 밖에 나가 죄다 뿌리째 뽑아 불에 던지고 싶다. 애그니스는 등신, 무능하고 교만한 등신이다. 약초 따위로 이것에 맞서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 P339
아들의 몸은 고통의 장소에, 지옥에 가 있다. 뒤틀리고 꼬이고 휘어지고 당겨진다. 애그니스는 들썩이지 말라고 아이의 어깨와 가슴을 붙잡는다. 달리 더 할 일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아이의 옆에 앉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려고 애쓸 뿐. 이 병은 너무 엄청나고 너무 강력하고 너무 사악하다. 너무 강한 적이다. 아들에게 촉수를 뻗어 휘감고 조이며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 사향냄새, 축축하고 짭짤한 냄새를 풍긴다. 그것이 아주 먼 곳에서, 부패하고 눅눅하고 답답한 곳에서 왔으리라고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인간과 짐승과 벌레를 거쳐가며 엄청나게 먼 길을 왔으리라고. 고통과 불행과 슬픔을 먹으면서.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멈출 줄 모르는 최악의 극악한 악이다. - P339
그러나 햄닛의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다. 한참 전부터 어머니나 누이들, 고모와 할머니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식구들이 주위 에서 약을 주고 말을 걸고 몸을 쓰다듬는 것은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다른 곳에, 자기도 모르는 장소에 와 있다. 이곳은 차고 고요하다. 혼자다. 눈이 부드럽게 하염없이 쉬지 않고 내린다. 땅 위에 쌓이고 오솔길과 계단과 바위를 덮는다. 나뭇가지를 짓누른다. 모든 것을 희고 텅 비고 정체된 상태로 만든다. 적막, 차가움, 낯선 은빛이 그에게 위안보다 더 큰 무엇을 준다. 햄닛은 이 눈 위에 누워 쉬고 싶은 생각뿐이다. 다리는 지치고 팔은 쑤신다. 드러누워 굴복하고 이 반짝이는 두툼한 흰 담요에 몸을 뻗고 싶다. 얼마나 편안할까. 그런데 무언가가 누우면 안 된다고, 그 욕망에 굴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게 뭐지? 왜 쉬면 안 된다는 거지? - P341
죽음을 두고 ‘떠나갔다‘느니 ‘평화로웠다‘느니 하는 사람은 그걸 본 적이 없는 거라고 일라이자는 생각한다. 죽음은 폭력이고, 죽음은 투쟁이다. 담쟁이가 벽에 매달리듯 몸이 삶에 매달려 놓지 않으려고 끝까지 붙들고 싸운다. - P341
애그니스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뻗어나갔다가 다시 모인다. 뻗어나갔다가 모이고, 다시 또다시.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그럴 순 없어, 우린 어떻게 살지, 어떻게 하지. 주디스가 이 일을 어떻게 견디지,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지, 어떻게 계속 살 수 있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남편은 어디 있나. 그가 뭐라고 할까,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살릴 수 있었을까, 왜 못 살렸을까, 왜 얘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러다가. 초점이 좁아지고,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내 애가 죽었어, 내 애가 죽었어, 내 애가 죽었어. - P352
애그니스는 문을 등지고 벽난로 쪽을 보고 있다. 벽난로 안에는 통나무였던 때의 모양을 유지하고 있지만 건드리면 풀썩 무너져내릴 재만 가득하다. - P354
애그니스가 직접 눈꺼풀을 닫았다. 자기 손으로, 자기 손가락으로. 손가락이 어찌나 뜨겁고 미끄럽던지, 그 일이 어찌나 힘 겹게 느껴지던지, 누가 손에 목탄을 쥐여주면 기억만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잘 아는 그 몹시 사랑스러운 눈꺼풀에 축축하고 떨리는 손가락을 대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죽은 자식의 눈을 감긴다는 게 가능한가? 동전 두 개를 찾아 와서 안구에 얹고 눈꺼풀을 누른다는 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지? 옳지 않다. 그럴 수는 없다. - P355
봐, 애그니스는 햄닛에게 말한다. 타고난 건 바꿀 수가 없어. 주어진 걸 되돌리거나 고칠 수는 없어. 아이는 대답이 없다. - P360
두 여자가 잠시 마주보다가, 메리가 접힌 천을 들어 두 손으로 모퉁이를 잡는다. 천이 꽃잎을 활짝 벌리는 거대한 꽃처럼 펼쳐 진다. 소스라칠 정도로 텅 비고 하얗고 넓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 진다. 어두운 방안에서 별빛처럼, 외면할 수 없게 빛난다. - P362
애그니스는 아들을 본다. 새장 같은 갈빗대, 맞잡은 손가락, 동그란 무릎뼈, 고요한 얼굴. 옥수수색 머리카락은 이제 물기가 말라 늘 그렇듯 이마에서 솟아 있다. 햄닛은 주디스와 달리 존재감이 늘 뚜렷하고 강했다. 햄닛이 방에 들어오거나 나가면 늘 알 수 있었다. 확고한 발소리, 공기의 움직임, 의자에 털썩 앉을 때의 중량감. 그런데 이 몸을 놓아주어야 한다. 흙에 내어주고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한다. - P363
애그니스는 자기 아이의 고통만은 참을 수가 없다고 느낀다. 이별, 질병, 충격, 출산, 궁핍, 굶주림, 부당함, 고립, 그 어떤 것도 참을 수 있으나 이것만은 견딜 수가 없다. 내 아이가, 죽은 쌍둥이 남매를 보고 있는 것. 내 아이가 오라비를 잃고 우는 것. 내 아이가 슬픔에 시달리는 것. - P366
애그니스는 무덤을 생각하면 마치 말이 웅덩이를 피하듯 뒤로 물러서게 된다. 햄닛을 데리고 교회로 가는 광경은 미리 생각해 볼 수 있다. 바살러뮤나 아니면 길버트나 존이 들고 가겠지. 사제가 망자를 축복하는 광경도 그려볼 수 있다. 그렇지만 땅속 어두운 구덩이로 아이의 몸을 내리고 다시 보지 못하게 되는 것만은 생각할 수가 없다. 상상이 불가능하다. 아이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할 수는 없다. - P367
애그니스는 묘지로 가는 길이 너무 길고도 너무 짧다고 느낀다. 그들을 뚫어지게 보고 훑어보는 사람들의 눈길, 수의에 싸인 아들의 몸을 머릿속에 각인하며 아들의 본모습을 잊어버릴 눈길 들을 견딜 수가 없다. 날마다 아이가 문 앞을, 창문 아래를 지나가는 걸 보았던 사람들이다. 아이와 말을 나누고, 머리를 쓰다듬고, 학교 종이 칠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면 서두르라고 말하던 사람들이다. 아이는 그 집 아이들과 같이 놀고 이 집 저 집 이 가게 저 가게를 들락거렸다. 아이는 전갈을 전해주고, 개를 쓰다듬고, 볕이 잘 드는 창턱에서 자는 고양이 등을 어루만졌다. 그들의 삶은 변함없이 계속되고 개는 불가에서 하품을 하고 아이들은 밥 달라고 조르는데, 햄닛은 이제 여기에 없다. - P371
무덤은 충격적이다. 거대한 발톱으로 땅을 무심하게 할퀴어놓은 것처럼 깊고 어두운 상처다. 묘지 안쪽 깊은 곳에 있다. 바로 그 너머에서 강이 서서히 완만하게 구부러지며 다른 방향으로 물을 몰고 간다. 오늘은 물이 불투명하다. 밧줄처럼 땋은 무늬를 만들며 앞으로 나아간다. - P372
묘지에서 나가는 일이 들어오는 일보다 더 힘들다. 너무 많은 무덤을 지나쳐야 하고, 너무 많은 슬프고 성난 유령이 애그니스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며 차가운 손가락으로 건드리고 애처롭고 끈질기게 매달리며 말한다. 가지 마, 기다려, 우릴 두고 가지 마. 애그니스는 치맛단을 잡아당기고 손을 말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곳에 세 아이와 함께 왔는데 둘만 데리고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원래 한 아이를 여기 두고 가려고 온 거잖아, 애그니스는 자신을 다독여보지만, 정말 그럴 수 있는 건가? 울부짖는 영혼과 비늘잎을 뚝뚝 떨구는 주목과 차가운 손이 가득한 이곳에? - P373
애그니스의 속은 텅 비었다. 겉은 불분명하고 실체가 없다. 애그니스는 나뭇잎에 부딪힌 빗방울처럼 흩어지고 분해될 것 같다.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 이 문을 지나갈 수가 없다. 여기에 아이를 두고 갈 수는 없다. - P374
참을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이. 결핍의 거미줄에 걸린 듯한 기분이다. 어느 쪽으로 몸을 돌리든 거미줄과 촉수가 몸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이곳 이 마을 이 집에 돌아와 있고. 이 모든 것이 그를 다시는 달아나지 못하게 만들 것 같아 두렵다. 이 슬픔, 이 상실이 그를 여기에 붙들어놓고 런던에서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무너뜨릴까봐. - P380
때로는 극장이란 곳이 아버지가 만드는 장갑의 자수하고 몹시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면은 아주 일부분이고, 그 뒷면에는 무수한 수고와 기술과 좌절과 땀이 얽혀 있다. - P381
그는 좁디좁은 하숙방이 실제로 그립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부르지도 않고 안부를 묻거나 말을 걸거나 성가시게 하지 않는 곳. 침대 하나, 궤 하나, 책상 하나만 달랑 있는 곳. 그곳 말고는 세상에 소음과 법석과 사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없다. 그곳에서는 세상이 저멀리 밀려가고, 자의식도 사라지고, 그래서 그저 잉크를 묻힌 깃펜을 쥔 손이 되어 펜 끝에서 단어가 흘러나오는 걸 지켜볼 수 있다. 이 단어들이 하나하나씩 나오면 자신마저 잊고 너무나 압도적이고 너무나 편안하고 너무나 은밀하고 너무나 즐거운, 다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평화에 잠긴다. - P381
그는 그걸 포기할 수 없다. 여기에, 이 집에, 이 타운에, 장갑 사업 언저리에 머물 수 없다. 그게 아내를 위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이러다 영원히 스트랫퍼드에 붙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다리가 달리고 쇠덫 같은 턱이 있는 짐승 같은 곳, 옆집에 아버지가 있고, 교회 묘지 뗏장 아래서 아들이 차갑게 썩어가는 이곳에. - P382
"상관없어." 꿀꿀거리며 밥을 먹는 돼지 옆에서 남편과 몸실 랑이를 하던 애그니스가 헐떡인다. "알아. 당신이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그곳에 낚였다는 거." "어디? 런던 말이야?" "아니, 머릿속에 있는 장소. 아주 오래전에 한 번 본 적 있어. 그 드넓은 세상, 풍경을, 당신은 거기로 갔고 이제 당신한테는 그곳이 다른 어디보다 더 생생한 곳이지. 그래서 무엇도 당신을 막을 수가 없어. 당신 자식의 죽음조차도. 알겠어." 애그니스가 말한다. 그는 한 손으로 애그니스의 양 손목을 한데 잡고 다른 손을 발치에 놓인 가방으로 뻗는다.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 - P386
그들은 그렇게, 함께, 하나가 되어 잠시 서 있는다. 애그니스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속절없이 끌리는 걸 느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밧줄이 애그니스의 심장을 빙빙 감아 그의 심장에 묶어놓은 것처럼. 우리 아들은 우리 두 사람으로 이루어졌어,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둘이 함께 아이를 만들었고, 둘이 함께 아이를 묻었다. 아이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애그니스는 한편으로 실을 감듯 시간을 되돌려 감고 싶다. 물레바퀴를 반대로 돌려 햄닛의 죽음, 유년기, 유아기, 출생의 타래를 되감아 자신과 남편이 그 침대에서 한몸이 되어 쌍둥이를 만들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전부 풀어헤쳐 원래 양의 상태로 되돌리고 그 순간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낸 다음, 일어서서 별을, 하늘을, 달을 올려다보며 햄닛의 앞날을 바꿔달라고, 다른 결과를 만들어달라고, 제발, 제발, 호소하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하늘이 원하는 무엇이든 할 것이고, 무엇이든 내어줄 것이고, 무엇이든 포기할 것이다. - P388
돌아갈 길은 없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무를 수는 없다. 아들은 떠났고 남편은 떠날 것이고 애그니스는 남을 것이고 돼지는 날마다 먹이를 주어야 하고 시간은 한방향으로만 흐른다. - P389
셔츠에 얼굴을 묻는다. 바지를 가슴에 꼭 안는다. 신발 안에 손을 넣어 아이 발의 텅 빈 모양을 느낀다. 옷깃을 여미는 끈을 묶었다 끄른다. 단추를 채웠다 다시 푼다. 옷을 개었다가 펼쳤다가 다시 갠다. - P390
주디스는 자기 자신에게, 고양이들에게, 머리 위 골풀 지붕에 노래를 부른다. 라라–라라–라–라–라, 음을 이어가며 계속 불러 소리가 마음속의 빈 곳을 찾게 한다. 노래가 그 자리를 찾아 쏟아져들어가 안을 채우고 또 채우지만, 물론 아무 형체도 한계도 없는 그 공간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 P399
다른 여자가 자기 아들은 장작을 영 마음에 안 드는 방식으로 쌓는다고, 딸이 청혼을 거부했다고, 그러니 이 애들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한다. 바보들,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어리석은 사람들. 애그니스는 새어머니로부터 약간 거리를 두고 선다. 고개를 숙이고 벌집의 반복되는 무늬를 쳐다본다. 벌 크기로 줄어들어 그 사이로 들어 가고 싶다. - P400
애그니스는 이런 곳들에서 기다린다. 귀를 세우고 다른 더 시끄러운 존재의 소리와 요구와 불평을 가려내보지만 아이의 소리만은, 유일하게 듣고 싶은 소리만은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다. 침묵뿐. - P403
주디스는 그러나 바닥을 쓰는 빗자루 소리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담 너머에 내려앉는 새의 날갯짓에서 본다. 조랑말의 흔들리는 갈기에서, 유리창을 두들기는 우박에서, 굴뚝 아래로 팔을 뻗는 바람에서, 은신처 지붕의 골풀이 바스락거리는 것에서 느낀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마음에 간직한다.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한다. 네가 보여, 소리가 들려, 어디에 있니? - P403
딸들이 할머니를 배웅한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반짝이는 새 같다. 날개를 펼치고 방을 한 바퀴 돌아 저 밖 하늘로 날아가는 새들. - P406
아이들, 이 아가씨들이 어떻게 애그니스에게서 나왔을까? 이 애들이 한때 애그니스가 젖을 먹이고 어르고 씻겼던 작은 존재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애그니스에게 삶은 점점 낯설고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되어간다. - P407
런던에서 바쁜 삶의 중심에 있기만 하면 어떤 것도 그를 건드릴 수 없다. 여기, 이 배 안, 이 도시, 이 삶 속에 있는 동안에는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이 예전 그대로 고스란히 변함없이 존재하리라고, 침대에 세 아이가 잠들어 있으리라고 믿을 수도 있을 것 같다. - P411
죽는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피할 수 없는 뭔가가 다가오는 느낌? 이런 생각이 느닷없이 머리에 떠오르더니 포도주 한 방울이 물에 떨어진 것처럼 생각에 진한 물을 들인다. - P412
수재나는 할머니가 슬퍼하는 것도 적당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걸 안다. 슬픔을 다지려고 애써야 하는 때가 있다고. 너무 과한 사람이 있다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 P413
수재나는 한 손으로 천을, 다른 손으로 바늘을 꽉 쥔다. 똑같은 크기의 바늘땀을 계속 만들어갈 수만 있다면, 이것도 다 지나갈 거라고 생각한다. - P414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커진다. 침묵이 부풀어올라 둘을 감싼다. 형체와 모양과 촉수가 생기고 공중에서 끊어진 거미줄이 흩날리듯 흔들린다. 그의 몸안으로 숨이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게, 그가 팔짱을 끼고 팔꿈치를 긁고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게 느껴진다. - P422
"일 년은 아무것도 아니야." 애그니스가 땅에 떨어진 캐모마일 꽃송이를 주우며 말한다. "한 시간이나 하루나 마찬가지야. 평생 그 아이를 찾아야 할 수도 있어. 나는 그만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 P425
"뭘 찾았어?" 그가 묻는다. "아무것도." 애그니스가 답한다. "당신 심장." "그게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화난 척하며 말한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어떻게 그런 말을?" 애그니스는 희미하게 웃음을 짓는다. 그가 애그니스의 손을 확 당겨 자기 가슴에 갖다댄다. "이건 당신 심장이야." 그가 말한다. "내 것이 아니라." - P427
애그니스는 자기가 분리된 것 같은 느낌이다. 몸이 분리되고 녹아내려 이게 누구 살인지 누구 다리인지 입안에 들어온 게 누구 머리카락인지 누구의 숨이 누구의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된다. - P429
"그 애는 여기 없어." 애그니스가 드디어 입을 연다. 등을 쓸던 그의 손이 멈춘다. 애그니스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써 억누르지만 말 사이사이로 고통이 새어나온다. "사방을 찾아봤어. 기다렸어. 지켜봤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기엔 없어." - P433
"조운은 절대 만족할 수가 없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이 만족하는 것도 못 견뎌. 다른 사람도 자기만큼 불행해야 기분이 좋지. 영원한 불만을 친구로 삼았으니까. 그러니 뭐가 널 행복하게 만드는지를 감춰. 그 반대의 것을 원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그러면 전부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거야. 두고 봐." - P438
애그니스는 그 생각에 푹 빠진다. 그 생각을 고이 싸서 보물처럼 마음에 간직해두었다가 혼자 있을 때, 거대한 집에서 밤에 돌아다닐 때 꺼내어 윤을 내고 감탄하며 들여다본다. - P442
주디스는 아버지가 머무는 동안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다. 아버지가 새집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니면서 굴뚝과 상인방을 올려 다보고 문을 하나씩 열었다 닫는다. 아버지가 개라면 내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을 듯하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안마당에 나가 우물에서 첫 물을 떠서 마신다. 여기 물이 지금껏 마셔본 물 중에서 최고로 신선하고 달콤하다고 말한다. - P444
주디스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주위에서 맴돈다. 어머니 가까이에 있으면 뭐가 보장되기에 그러는 건지, 수재나는 알 수 없다. 안전? 생존? 목적? - P447
타운에 한밤이 찾아온다. 깊고 검은 침묵이 거리에 내려앉고, 들리는 건 짝을 찾는 부엉이의 공허한 울음소리뿐이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들어갈 곳을 찾는 강도처럼 집요하게 거리를 훑는다. 나무 꼭대기를 건드리고 이쪽저쪽으로 휘어박는다. 교회 종 안에서 바르르 떨며 놋쇠를 울려 나지막한 음을 낸다. 교회 근처 지붕 꼭대기에 앉은 외로운 부엉이의 깃털을 흩뜨린다. 바람이 몇 집 건너에 있는 집의 느슨한 여닫이창을 흔들자 안에서 자는 사람들은 침대에서 뒤척이고, 덜덜 떨리는 뼈와 다가오는 발걸 음과 말발굽 소리가 나오는 꿈을 꾼다. - P450
이곳 땅은 한때 습지였다. 축축하고 물이 많고 반은 강이고 반은 땅인 곳이었다. 집을 지으려고 사람들이 물을 빼고 바다 위의 배처럼 건물을 떠받칠 골풀과 가지를 땅에 덮었다. 축축한 날이면 집은 기억한다. 오래된 부름에 이끌리듯 아래쪽으로 기운다. 징두리가 삐걱거리고 굴뚝이 갈라지고 문틀이 느슨해지고 터진다.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P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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