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는 너무 적지만 둘은 너무 많다.p77 (사이보그 선언문)
요약하자면 서구 전통에서는 특정 이원론들이 유지되어왔다. 이 이원론 모두는 여성, 유색인, 자연, 노동자, 동물 - 간단히 말해 자아를 비추는 거울 노릇을 하라고 동원된 타자-로 이루어진 모든 이들을 지배하는 논리 및 실천 체계를 제공해왔다. 이 골치아픈 이원론에서는 자아/타자, 정신/육체, 문화/자연, 남성/여성, 문명/원시, 실재/외양, 전체/부분, 행위자/자원, 제작자/생산물, 능동/수동, 옳음/그름, 진실/환상, 총체/부분, 신/인간과 같은 것이 중요하다. 지배되지 않은 주체이며, 타자의 섬김에 의해 그 사실을 아는 것이 자아다. ... 하지만 주체됨은 환상이며 그때문에 타자와 함께 종말의 변증법에 들어가게 된다. 반면 타자됨은 다양해지는 것, 분명한 경계가 없는 것, 너덜너덜해지는 것, 실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하나는 너무 적지만 둘은 너무 많다. p77
기원이 없는 사이보그. 뿌리를 잘라내는 사이보그. "타자를 거울 삼아 자아를 재생산하는" 인간과는 달리, 여성이라는 범주조차도 사라져버린. 신화조차도 없는. 언어가 나와 나 자신이 아닌 무언가로 분리하면서 하나보다 더 많지만 둘보다는 작은 것을 생성하듯이. 나는 이 사이보그 선언문으로 되고자 하는 인간이 자연으로서의 인간을 잘라내고 하나보다 더 많지만 둘보다는 작은 존재가 되려는 시도로 읽혔다. 그러나 그의 글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기계는 생명을 불어넣거나 숭배하거나 지배할 대상이 아니다. 기계는 우리이고, 우리의 작동방식, 체현의 한 양상이다. 우리는 기계를 책임감있게 대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를 지배하거나 협박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계에 책임이 있다. p83
그는 잘라낸 무중력의 관계에 책임을 넣는다. 그러니, 그가 꿈꾸던 것은 자연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관계의 재조립이었다. 구태의연하고 지킬 이유가 없는 고리를 끊고, 책임의 관계로 재창조하는 꿈. 그것이 사이보그의 꿈이었던 것.
첫째, 보편적이고 총체화하는 이론을 고안하면, 아마도 언제나, 지금은 확실히, 현실 전반을 놓치는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둘째, 과학기술의 사회관계에 대한 책임은, 반과학적 형이상학과 기술의 악마학을 거부함으로써, 타자와 부분적으로 연결되고 우리를 이루는 부분 모두와 소통하면서 일상의 경계를 능숙하게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p85-p86
그의 의견과 이상에 동의하나, 사이보그로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책임'이란 무엇인가? 반려종 선언에서 그 나머지 답을 찾는다.
2. 더불어 되기의 기쁨. (반려종 선언)
존재자들은 서로를 향해 뻗어나가며, "포착"이나 파악을 통해 서로와 자신을 구성한다. 모든 존재자는 관계에 선행해 존재하지 않는다. "포착"에는 결과가 있다. 세계는 운동 속의 매듭이다. p123
창발된 실천이 필요하다. 서로 다르게 물려받은 역사, 그리고 불가능에 가깝지만, 절대적으로 필요한 공동의 미래 모두를 책임질 수 있는, 부조화스러운 행위 주체들과 삶의 방식을 적당히 꿰맞추는 작업, 취약하지만 기초적인 작업 말이다. 소중한 타자성은 내게 이런 뜻이다. p125
<반려종 선언>은 개와 사람이 서로에게 소중한 타자가 되면서 함께 살아가는, 역사적으로 한결같이 특수한 삶 속에서, 자연과 문화가 내파하는 현상과 관련되어 있다. 다양한 존재자가 그 이야기 속으로 호명되고, 그 이야기는 위생적 거리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에게도 유익하다. 나는 독자들에게 기술문화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야기와 사실 모두의 차원에서, 자연문화의 공생발생적 신체조직을 가진 존재인 우리가 되었다는 점을 이해시키고 싶다. p136
이와 같은 연결 속에서는 자기 확실성이라는 신의 속임수나 영원한 합일을 택할 수 없고 반직관적인 기하학 및 부적합한 번역이 필요하다. p147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주문은 우리 대부분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바로 그것, 더 정확히 말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추상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일대일 관계, 연결된 타자성을 통해 개가 누구이며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p173
종 안팎에서 맺어진 모든 윤리적 관계는 관계-속의-타자성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라는 가늘고 섬세하며 질긴 실로 뜨개질한 편직물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며, 함께 살아감으로써 존재한다. 누가 있으며 누가 생겨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의무다. p178
이것은 존재론적 안무다. 참여자들이 자신들이 물려받은 몸과 마음의 역사를 통해 발견해내고, 그들을 그들로 만들어주는 육체적인 동사로 다시 만들어낸, 필수적인 놀이다. 이 게임을 발명한 것은 그들이다. 그리고 이 게임은 그들을 새로 만든다. 다시 한번, 메타플라즘. 우리는 이 중요한 말이 지닌 생물학적 맛을 언제나 다시 음미한다. 이 말은 필멸의 자연문화 속에 육신으로 만들어져 있다. p240
나이든 부모님을 마주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돌봄을 할 수 있을까?
참여하는 세미나에서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상호 돌봄"이라는 말. 자식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 하는 동안 나 역시도 나 한 몸 먹여 살리는 존재가 되었으며, 내가 자식을 돌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고. 당신 혼자였으면, 엉망으로 살았으리라고. 그러니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돌본 것이라고. 하지만 말 그대로 상호 돌봄이므로, 돌봄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끝없이 우울로 치닫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를 어떻게든 살게 하려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돌볼 수 있을지. 할 수 있는 게 있었겠는지. 아마도 아니었을 수 있다. 당신이 살아남은 것은 당신이 결심한 일이고. 내가 살아남은 것도 마찬가지로. 내가 결심한 일이다. 우리가 서로를 포기하지 않은 까닭에 살아남은 것이라고 생각하자. 적어도 나는 그렇다. 삶이 아무리 무의미해도, 당신의 마지막은 보고 끝내자고 생각했으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살아남았고. 그걸 다행으로 여기기로 하자. 지금은 살아남았지만, 언젠가는 자의가 아닌 이유로 이별하겠지.
우리는 어떻게 헤어짐을 준비할 수 있을까? 당신의 사소한 습관부터, 신경질적인 면모까지, 나는 당신을 닮아 있었으니, 나는 당신과는 다른 몸을 가지고, 어느 날에 다른 소통방법을 배워왔고, 우리는 어느 순간엔 말로 소통하는 것을 중단하고, 우선 포옹을 한다.
나는 품안에 들어오던 우리의 온기를 기억할거야, 살과 살이 맞닿지는 않아도, 옷 사이로 스미는 온기를 기억할거야. 맞닿은 것처럼 고요하게 박자를 맞추며 뛰는 심장소리를 기억할거야. 그 순간들이 당신을 돌보는 일을 해내도록 만들기를, 당신과의 이별을 내가 온전히 책임질 수 있게 만들기를 바라면서, 나는 매번 힘을 내기 위해 포옹을 준비한다. 억지로 붙들지도 않고, 꽉 매달리지도 않으면서, 느슨하게 마주안은 품 안의 온기를 내내 기억하면서, 이별 후에 내게 남은 삶을 힘내서 마저 살아가다가 나 역시 당신과 같은 이별을 준비할 수 있기를. 매 순간의 만남이 끝을 예감하는 일인 것처럼, 나는 슬퍼졌다가, 할 일을 도로 내일로 미뤘다가, 다시 오늘 해야할 일을 끌어온다. 이 온기를 기억하고 싶다. 할 수 있는 한 자주. 생각나는 때에는, 매달리고 싶을 때에는 당신의 품을 요청한다. 나는 자주 그렇게 당신 앞에서 아이가 된다. 그리고 그게 당신에겐 만족스러운 일처럼 보였다. 나는 당신의 것이 아니지만, 포옹하는 순간에는 당신의 것이니까. 당신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나는 그 순간에는 당신의 소유가 된다. 그리고 이 포옹이 우리가 찾아낸 놀이였다. 기쁨을 담아, 증오를 담아, 상대를 꽉 쥐었다가 놓고, 들어올리고, 키를 비교하고, 등을 토닥이거나, 어깨에 기대거나. 우리는 그때 그 순간 우리의 기분을 포옹이라는 틀 안에서 전달했다. 언젠가 내가 감당해야 할 노동도, 이 기쁨으로 감당해내기를 바랐다.
3. 죽여도 되게 하지 말지어다.p288 (반려자들의 대화)
절멸, 멸종, 종 학살의 시대에 진정한 책임을 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얼 뜻할까요?
"죽일 수는 있지만 살해할 수는 없게"뿐만 아니라 또 "죽이지 말지어다"가 아니라,... "죽여도 되게 하지 말지어다"가 됩니다. ...
'우리'의 '삶'의 방식 전체가 엄청난 규모로 '죽게 내버려두는 것'의 폭력으로 수식되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인 죽임이나 처형이 아니라, 분명히 죽일 수 있지만 살해할 수는 없게 만드는 관행을 통해 대대적으로 죽게 내버려두는 것 말이죠. 공장식 축산의 경우 처럼요. p286-289
인간이든 아니든 죽여도 괜찮은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죽이는 것이 가끔은 가장 책임 있는 행동, 심지어는 좋은 행동일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절대 무고한 행동은 아닐 거에요. 어떻게 하면 정말로 무고하지 않음 속에서 살 수 있을까요? 정말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이유로요. 저는, 생명우선 입장을 취하는 한은 책임감 있게 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고함에 대한 추구는 절멸주의와 마찬가지입니다. 제 생각에는 필멸이라는 우리 삶의 조건에서는 생명우선이 아닌 지속우선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291
사람이든 동물이든, 이 자본의 소용돌이에 묶여 자본을 생산하느라 자신을 죽여도 되는 존재로 인식하거나, 타자를 죽여도 되는 존재로 파악한다. 나는 여기 탈피하고자 내 죽음과 나와 연결된 사람의 죽음, 나와 연결된 동물의 죽음에 내 손이 닿는 한 책임을 다하고 싶다. 이 다짐에서부터 시작하자. 우리각자가 각자의 삶에서 죽여도 되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 쌓아올린 관계들을 발견하고 귀히 여기자.
4. 마무리하며.
요즘 집중하는 게 너무 힘들다. 그건 아마 내가 나를 보기 힘들어해서 그렇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문득 깨달았다. 내내, 사는 동안은 친구일 줄 알았던 친구와 관계가 단절되고 난 이후일 수도 있다. 아니 사실 그 이전부터, 책을 읽는 게 힘들었다. 내가 오래 좋아하던 친구는 행복할 때 연락하라고, 말을 남겼다. 그리고 나는 그가 그 말을 남겼다는 사실 자체를 감당하는 게 힘들었다. 계속 달라지고 싶었는데, 내내 나를 벗어나고 싶어했는데, 그게 나를 갉아먹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친구는 내가 고장난 자신을 인정하지 않아서 오히려 고장난 상태에서 머무른 게 아니냐 했다. 어찌되었건, 관계의 춤을 출 수 없었던 건 내가 고장난 사람이었기 떄문이다. 어차피 관계가 단절될 거라면 나는 무엇으로부터 달아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고장난 채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오늘에야 글자가 하나씩 읽힌다. 결론이 이상하지만, 이게 내가 존재의 춤을 추는 방식이라 인정한 이후엔, 나는 내가 지금 당장 존재하는 형태 때문에 나를 더 갉아먹지는 않을테니, 이제부턴 독서를 할 수 있을까. 내가 도망치려 했던 나를 도로 거둬들일 수 있으니, 나는 이제 준비가 된 것도 같다.
0. 여담으로 남은 의문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쩐지 제이슨 무어의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가 많이 생각난다 싶더니.. 296p에 인용하시더라. 제이슨 무어의 책에 해러웨이의 추천사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무어는 마르크스의 사고체계를 비판한다고 여겼기에 마르크스주의 정치생태학자로 분류되는 것을 보면서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자본을 비판하면.. 마르크스주의로 분류되는 겁니까? 맑스가 자본을 비판하던 틀을 비판해도? 맑스 세계관의 확장은 어디까지..? 아니면 내가 뭘 잘 못 읽었나.
맑스무식자 혹은 학문분류체계 무식자의 의문은 여기선 해결하기 어려운 것 같으니 우선 내버려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