깻잎 투쟁기 -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한 1500일
우춘희 지음 / 교양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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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는 화가 나서 작성했습니다. 다소 편향적인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

“계약서대로 하면 아무도 농사 못 짓고, 얘네들 전부 보따리 싸서 고향에 가야 해.“ “임금 체불 신고액 1천억원.”

이런 환경에서도 이주 노동자들이 일하는 건 국가 간 빈부격차로 인한 임금차이 때문이다.

질문 하나. 농장주가 주장하는 대로 임금을 제대로 주면 농사를 못 짓게 되는 것이라면 이는 지나치게 값싼 농산물 가격 때문일까?

질문 둘. 이 가격은 시장경제가 만들었을까 아니면 국가가 만들었을까?

값싼 농산물이 있어야 한국인 노동자가 받는 월급으로도 농산물을 구매하는 데 부담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 노동자의 월급은 최저임금 이상을 주게 되어 있다. 최저임금은 노사합의라는 이름으로 매년 정해진다. 아마 월급 대비 농산물 가격이 오르는 순간 최저임금이 올라야 한다는 요구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질문 셋. 누가 이것을 막고 싶을까? 사업주?

질문 넷. 왜 사람들이 월급노동자 대신 사업주가 되고 싶어할까?

임금생활자로 살면 노동의 제값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업주가 되는 순간 노동이 제값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보다도, 노동의 값을 절감해야만 사업 지속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더 중요하게 맞닥뜨린다. 사업이 지속되어야, 임금을 줄 수 있으므로, 노동자의 생계가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는 점만 생각하며 노동자를 사업자가 먹여살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손해가 생기면 임금을 체불하되, 이득이 생기면 나누지 않는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는다.

2020년 기준 31,998명의 이주노동자는 이 틈새에서, 임금체불을 당한다.p89 그럼에도 밥상에는 채소가 싼값에 올라온다. 따라서 임금체불을 하고도 이주노동자는 노동을 하고, 농장주는 고용을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들을 일러 왜 임금체불에 저항할 제도를 활용하지 않느냐고 이주노동자에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질문 다섯. 제도를 만들어도 그걸 알고 활용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 제도는 의미가 있는지? 제도를 몰라 활용을 못하면 제도를 확실히 알았는지 확인하는 절차도 필요한 게 아닌지? 제도를 활용해도 구제받지 못하는 제도가 제도로서 역할을 하는 건 맞는지?

이 책에 따르면 해마다 임금체불을 당한 사람과 임금 체불액은 늘어나고 있다.

질문 여섯. 그렇다면 해마다 얼마나 많은 농장주가 임금체불을 하고 있을까?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얼마나 더 많은 농장주가 이런 상황 속에서 임금을 적게 주도록 강요당하거나, 적게 주는 유혹에 빠지게 될까? 이들은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종 혹은 출신국 차별을 하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국가간 빈부격차로 임금을 다르게 주려고 하는 것은 국가간 차별일까 아닐까? 피부색으로 드러나지 않는 흔적을 찾으려는 공무원들을 본 적이 있는지?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한국이름을 갖고 있음에도 다른국가에서 온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건 인종차별일까? 빈국부국에 따른 차별일까?

다른 근거를 찾지 않더라도 국제 노동기구가 정한 8가지 기본적인 협약에는 '고용 및 직업상의 차별에 대한 협약'이 있다. 고용과 직업에서 모든 형태의 차별은 철폐되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고용노동부는 2019 업종 지역 연령별 최저임금 차등적용은 타당하지 않다고 입장을 내놓았다. (오 이럴수가 성별은 여기 없네요_)





질문 일곱. 그렇다면, 왜 이 협약은 지켜지지 않는가? 왜 고용노동부의 발언은 지켜지지 않는가? 

질문 여덟. 왜 이주노동자는 미등록 이주민이 되기를 선택할까? 


합법 체류자는 단기간의 노동만 제공하도록, 다시말해 한국에 정착해 살지 못하도록 여러 법적, 제도적 장치가 설계되어 있다. 이들은 사업장을 옮기는 데도 횟수가 정해져있고, 고향에 돌아가기 않고 돈을 벌려고 여러 억압들을 견딘다. 미등록 이주민은 그들을 원하는 일자리가 있는 한 일할 수 있다. 미등록이기 때문에 협박을 하든 안하든 돌아가야한다는 위험을 항상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원하는 일자리를 선택할 수 있다. 농사일은 때가 있어서 일을 해야 하는 시기에 일을 해아한다. 미등록 이주민은 원하는 만큼 일자리를 옮기는 편이라, 꼭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되므로 협상력이 생긴다. 협상력이 생기므로 제대로 된 돈을 받고 일하며, 생각하는 기준에 따라 일할 곳을 정할 수 있다. 어떤 경우 여러 제도때문에 발이 묶여 합법체류자일때 가족과 함께 살며 일할 수 없었던 때에도, 미등록 이주민 일 때는 가능하다. p153~179


질문 아홉. 왜 미등록자가 된 이주노동자를 사업주는 고용할까? 


(내국인) "청년층 건설현장 유입문제는 앞으로 장기간 개선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단순히 처우개선이 문제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자기 자식 공부시켜서 노가다 보낼 부모가 누가 있겠습니까? ... 수주산업이라는 것은 일정 기간 내에 건물을 완공해야 하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공사 일정 못 맞추면 안 되니까 불법 고용을 하는 것이 편한 해법이겠지요. 미등록 체류자를 못 쓰게 하면 공사가 멈출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불법 고용 하지 말라고 해도, 현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p179


질문 열. 합법 고용이든, 불법 고용이든, 여성 이주노동자의 경우, 이들의 인권은 지켜지고 있을까? 


"남녀고용평등과 일 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남녀고용명 동법) 제39조에 따르면, 사업주가 직장 내 성희롱 행위를 한 경우에는 1천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 이주노동자들은 법적인 구제를 받지 못했다.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제조업 분야 여성 이주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를 보면, 설문 조사에 응한 385명 가 운데 45명(11.7퍼센트)이 성희롱과 성폭행을 겪었다고 대답했 다. 같은 해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농업 분야의 여성 이주노동자 성폭력 실태 조사를 했는데, 응답자 202명 가운데 25명(12,4퍼센트)이 성폭력 피해를 당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성폭력 가해자는 한국인이 80퍼센트를 차지했는데, 고용주를 비롯해 고용주의 가족, 관리자, 직장 동료, 이웃 등이었다. 나머지는 한국 외 타국 동료(12퍼센트)와 같은 나라 동료(6퍼센트)였다".p189


질문 열 하나. 이런 실상에, 이주노동자의 건강권은 지켜지고 있을까?


2019년 7월 16일 이후 6개월 이상 체류하는 이주노동자는 건강보험료를 내도록 되어있다. 소득과 재산으로 산정되는 내국인 보험료와 달리, 이들은 내국인 평균 건강보험료를 낸다. 이는 그들의 소득수준보다 높게 산정된 금액이다. 보험료를 내지 않으면 체류자격에 문제가 생기며, 이들은 접근성문제로 의료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p200~203


질문 열 둘. 그러니까, 국가간 빈부격차를 이용하여 이주노동자를 농업,공장,건설업에 종사하도록 만든 이는 누구일까? 누가 아직도 이들을 필요로 하는가? 이들의 자발적 노동이 자발적일까? 언제까지? 


p242"한국에서도 이주민, 특히 미등록 노동자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더 늦지 않게 이야기를 해야 한다."


임금체불을 막을 제도적 장치가 허술한 것도 문제지만 방한도 안되고 냉방도 안되는 비닐하우스에서 거주하면서 거의 거주비만 달에 2백을 낸다는 것도 부당하다. 거주 조건이 좋은 것도 아닌데다 혼자 사는 것도 아니고 같이 사는데 합해서 그 정도 금액이라니. 주거지 조건이 안좋아서 병이 악화되어 2020년에 죽은 이주노동자도 있었다. 그 노동자가 죽은 지역만 기숙사가 더 좋은 곳으로 바뀌었다. 그 후 기숙사비가 2배 비싸져서 이주노동자들이 비닐하우스가 더 싸니까 낫지 않나 하는 식으로 이야기한다는데, 그걸 비닐하우스가 더 살기 좋다는 말로 받아들이는 것도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은 여러 이유로 차별에서 무관한 국가가 아니다. 법의 테두리, 제도의 태두리 내에서 살 수 있도록 여러가지로 논의가 필요한 문제인 것 같다. 


P.S. 질문 열 셋. 그래서 국가간 빈부격차가 왜 생겼다고?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화 때문에? 



원인이 뭐든 간에, 이 일이 잘 논의되어서, 사람이 건강하게 살면서 노동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이 상황이 제국주의시절의 식민지와 얼마나 많이 다를지 의구심이 들었다. 한강의 기적 이전의 노동자들의 여건과 어떻게 다를지도 궁금했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지속될 수 있는 걸까도 궁금했다. 이러한 질문들은 아마 많은 것들을 생략한 후에 할 수 있는 질문이기는 하다, 다만 이들이 일하는 환경이 바뀌는 게 더 중요하게 보였다. 내가 그들이 키운 야채를 먹을지도 모르는 한, 이 일은 나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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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2-14 18: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결국 문제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체제가 가진 폐단이라 여겨집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혹은 저개발국가의 차이는 제국주의로 인한 식민지 침탈로 가속화되어 지금의 차이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의 자본으로 선진국과 타국가의 격차가 심화되었죠.
그 이후 자본주의 체제의 심화로 현재 우리가 목도하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이 첨예해집니다. 자본가는 노동자로부터 잉여가치의 극대화를 위해 여러가지 수단을 쓰는데 가장 악질적인 것이 임금체불인 것이죠.
자본주의의 심화는 사람(노동자)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없는 체제이기에 복지나 노동친화적인 사회주의 정책들을 도입하여 그나마 숨은 쉬고 살 수 있는거죠.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 얘기지만 이쯤에서 줄이겠습니다. 좋은 리뷰를 쓰셨는데 댓글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에 주절주절 떠들었습니다.

우끼 2023-02-17 19:17   좋아요 2 | URL
답글 감사드립니다 ㅠㅠ 뭐라 답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답이 늦었어요. 같이 고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식민침탈에 보상이 이루어져야,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요? ㅜㅜ 이 일이 무 자르듯 답이 나오지 않는 건 이미 유지하고 있는 생활에서 무엇을 포기하고 포기하지 않을지 서로 논의하는 것조차도 어떻게 가능할지 알 수 없어서일까요?? 말할 수록 답을 모르겠지만, 같이 고민해주셔서 힘이 났습니다 감사드립니다

DYDADDY 2023-02-17 19:28   좋아요 2 | URL
우로보로스처럼 세계적으로 모두가 맞물린 초연결사회에서 오히려 ‘이것이 답이다‘라고 외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은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환경과 입장에서 조금씩 실천하면서 타인의 실천을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않는 것이 현재로는 그나마 대안인 것 같습니다. 실천이라는 것이 대단할 필요도 없이 길가다 재활용품 있으면 주워서 재활용품 장소에 버리거나 환경단체에 매달 소액 후원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이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추운 밤을 나는 펭귄들처럼 모여 버텨나가다보면 더 많은 펭귄들이 모이고 그러면 좀더 나은 세상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우끼 2023-02-18 10:40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저는 그정도로 충분한 일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ㅠ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이 경감되는 게 아니고. 공적 발언은 계속 필요한 것 같아요. 그와 더불어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앞서서 찾는 사람도 필요하고, 그를 지지하여 함께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개인이 자신의 실천방향을 어떻게 할지는 대신 결정할 수 없지만, 공적발언이 누군가에게는 가닿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DYDADDY 2023-02-20 12:26   좋아요 1 | URL
며칠간 우끼님의 공적발언에 말씀을 고민해봤는데 최근 읽은 법고전 산책에서 ‘법규나 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행위는 이 같은 모든 이해관계자들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같으며, 수많은 촉수로 단단히 들러붙은 해파리를 제거하는 일과 같다.‘ 라는 글을 읽고 간단히 해결하거나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완전비례대표제에 대한 것도 고민해보았습니다. 양당제로 구성된 국회가 아닌 기본소득당, 녹색당 등도 원내 구성을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목소리가 공적으로 인증 즉 법제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저도 여러모로 고민하고 실천해보겠습니다. 깊은 물음을 던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야기의 힘을 다시 믿게 된 건 <나는 신들의 요양보호사입니다.> 라는 책을 쓴 분이 하신 인터뷰 때문이다. 그분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다시 일궈낸 분 같았다. 돌봄노동을 그렇게 즐겁고 기쁘게 이야기하는 분을 처음 봤다. 아프고 무력한 순간이 민폐로만 취급되지 않는다는 게 구원받는 느낌이었다. 그분께 감사하는 만큼 나도 내가 가진 모든 역량을 끌어내서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한 내 삶을 긍정하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이다..
한편으로는 그분이 출연한 인터뷰에 나온 대로, 요양보호사 제도가 개선되어야 한다는 점도 생각했다. 그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사람의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일을 하고 싶어서 시작한 사람은 없을 지라도, 최소한 이들이 자신의 일이 의미가 있다고 상호작용하는 게 가능한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최저임금을 받고, 적은 숫자의 요양보호사가 너무 많은 인원을 케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더군다나 요양보호사는 사람들이 나이들어 죽기 전에 간 요양원의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하지 않나. 이 문제는 지금 현역으로 일하는 노동자에게도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정부의 세금을 착복한다는 요양원의 비리는 제도적으로 막을 수 없을까? 

인간의 조건을 함께 읽기로 했다. 예전에 읽을 때는 아렌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려고, 언급한 대목 하나하나 어디서 가져왔고 그게 원래는 어떤 맥락이 있고 아렌트는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려 이걸 가져왔는지 찾다가 중단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읽게 되면 아마 시간이 없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을 것 같다.

자급 노동을 하려는 건 하는 일에 연결된 누군가의 희생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자괴감을 덜 느끼려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자급 노동을 하면서 쓰는 시간을 보장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백수가 될 것이라 고백하는 일은 내가 이 사회에서 아직 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잘 아끼면서 버틸 수 있을때까지는 돈을 벌고 싶다. 당장 백수가 되면 내가 마음을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 돈이라는 매개도 전달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은 백수야말로 환경보호를 앞장서서 하는 사람이 아니냐고 했다. 백수라는 이유로 소비를 덜하고 교통도 거의 이용안하고. 걸어다니니까.. 그러나 기부금을 끊기는 싫고, 경력도 단절되는 게 두려우니 돈을 벌어야 할 것 같아서, 일을 구할 것이다. 매주 이야기를 몇천 자씩 써서 글 공모를 해보려고 했는데, 일 구하는 데 집중할 시간도 모자라서 포기했다. 이야기를 쓰지 않더라도 일기는 계속 쓸 것 같다.

















나오미 클라인의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이것도 다른 스터디에서 함께 읽기로 했다. 기후정의가 중요하다고 모였는데 도대체 다들 기후정의가 뭔지 모르겠다고 해서... 얼씨구나 좋다 나도 모르니 함께 책을 읽을 수 있어 신났다. 먼저 책 한 권이라도 읽은 분이 추천해주신 책을 읽기로 했다. 읽다 보면 뭔가 축적되겠지 싶다. 브루노 라투르 책을 장바구니에 내내 넣어놓고 이제서야 스터디 한다 하니까 주섬주섬 같이 읽자고 링크를 보냈다. 사라질 수 없는 사람들이랑 빈곤 과정도 같이 읽자고 하고 싶었는데, 사라질 수 없는 사람들만 언급하고 말았다. 다들 너무 바빠서 뭐라 말하기도 그랬다. 지난달에 빈곤 과정 새벽책스터디 하려고 했는데 사람을 구하는 데 실패했다. 당분간은 아마 새벽책 스터디는 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일단 사라질 수 없는 사람들을 읽고 나서 나도 사람들과 함께 인터뷰를 모으는 걸 목표로 삼았다. 이게 얼마나 성과가 있을지 가늠이 어렵다. 남에게 맡겨버리는 정치 말고, 직접 목소리를 내고 그게 어떤 방식으로든 가시화된다는 게 어떤 반향이 있을지 가늠할 만한 지식이 없다. 민주주의라는 책에 실린 예시에선 직접민주주의 형식으로 의사결정을 한 거랑 엘리트가 의사결정을 한 거랑 동일한 결과가 나왔다고는 하는데, 지금은 눈앞의 밥그릇만 쳐다보는 정치인 엘리트가 더 많아보여서... 할 수 있는 말이 있는 건 할 수 있는 말을 배운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일단 뭐라도 시도해보고 싶었다. 기후 위기를 겪는 사람들의 말을 모으고 싶었다. 말을 하는 사람 앞에서, 듣는 사람이 있는 게 중요할 것 같았다.

기후 위기 때문에 농사에 실패하고 사람이 죽어도, 석탄화력발전으로 돈을 번 삼척블루파워는 회사채1300억을 내놓았다고 했다. 전혀 팔리지 않을 줄 알았건만 개인투자자에게 50억을 팔아치웠다는데, 화가 났다. 이산화탄소 배출로 얻은 부는 그대로 두고 책임을 민간투자자에게 미루는 것처럼 보였다. 이걸 또 얼마나 끼워팔기로 내놓을지 상상하면... 이건 민간의 부를 빼앗는 일이지만, 자산조차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얼마나 많이 지워져 있을지? 말로 표현되지 않은 그림자 속에 있는 일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곳을 계속 살피고 싶었다. 나도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깻잎 투쟁기는 얇으니까 2/5일까지 재빨리 읽을 예정이다. 읽으려고 다짐한 지가 두어 달은 된 것 같다.
토베 디틀레우센 코펜하겐 3부작은 계속 1권만 다시 읽고 다시 읽고 하고 있다. 이 사람이 정말 얼마나 우울한지 느껴져서 집중하는 게 어렵지만 번역된 문장이 너무 아름답고, 감정의 맥락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1권을 맴돌고 있다. 이것도 일요일 내로 다 읽... 일요일에 다 못 읽으면 이달 안에 읽는 건 포기하는 걸로..
마틴에덴 이것도 문장이 예뻐서 읽는 걸 계속 미루고 있다. 한 번 읽을 때 몰입해서 읽고 싶다. 대충 읽는 게 너무 아깝다. 아마 이건... 이달안에 못 읽지 않을까. 일요일에 해야 할 일도 많은 데 책 5권을 다 읽는 건 무리일 것 같다.

























































나머지 책은 2월에 못 읽는다. 아마 2월에는 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조금 건드리다 말 것 같다. 소개글에서 좋아한 문장은 이것이다. ...

상실을 겪거나 배반당하거나 어리석은 결정을 내려 수치스러울 때면 나는 책상으로 가서 읽거나 쓰면서 마음을 달랠 것이다. 삶을 바꾸고 싶을 때, 다른 삶을 간절히 원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언젠가, 한 시간쯤 뒤에 혹은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는, 반드시 기분이 다시 좋아질 것이다. 나는 빛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섬을 갖는다. 하나의 오두막을, 하나의 정원을 갖는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평화를 느낀다. 물이 나를 들어올리듯이 그것이 나를 들어올리고 있음을 느낀다. p110-p111

이외에는 인간의 조건과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이 두 권만 남은 시간에 조금씩 읽지 않을까 싶다. 베르그송 농담은 언제부터 읽고 싶어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도 농담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었는데 아직 못 읽었다. 그때 왜 농담을 읽으려고 했더라? 소설에 도저히 농담을 넣기가 어려워서? 어떤 작가는 우울하고 끝없이 무의미한 이야기를 웃기게 쓰는데 나는 왜 자꾸 우울한 이야기를 힘주고 쓰나 자괴감 들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이 책만 읽을 시간이 필요해서 못 읽었다. 인물이 하는 행동의 맥락을 좇아가는 데 힘이 많이 들었다. 올해 내에는 읽을 시간을 낼 것이다.

좌파의 길은 자본주의도 잘 몰라서 읽고 싶었다. 자본 첫권을 과거에 구매했지만 다른 일로 의지력을 모두 소모하고 나면 읽을 여력이 남지 않아서 아직 못 읽었다. 그래도 지금은 공부를 더 미룰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다. 얼마나 진정성을 가졌는지 스스로 의심이 들지만.

쿼런틴도 읽고 싶다. 쿼런틴은 누가 밑줄그은 문장들을 읽었는데 너무 충격적이었다. 밑줄긋기에 나온 사유가, 이전에 이야기로 만들어보고 싶다 여겼던 사유와 닮아보였기 떄문이다. 사유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걸 이야기로 만드는 건 다른 문제이기도 하다. 심지어 재미있다고 하니... SF를 많이 안 읽어서 이런 작품이 있는지 몰랐다. 올해 안에는 꼭 읽어야지 싶다. SF로 잘 알려진 작가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가고 싶다. 필립 k 딕도 읽고, 할란 엘리슨도 읽고 해야 하는데. 그나마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로저젤라즈니도 아직 다 읽지 못했다. 밀란 쿤데라도 전집이 다 재밌지는 않겠지만 읽었던 몇 개는 재미있었으니 한번 다 전집을 읽어보려고 했는데 이것도 계속 미뤘고. 카뮈 시지프신화, 페스트도 추천받은 지가 몇 년인데 이인 말고는 안 읽었다.

실비아 플라스도 읽고 싶고. 페터 한트케 시 없는 삶도 읽어야 하고. 읻다 시인선 10권 이후 나온 책들도 아직 안 샀고. 코스모스 읽고 다시 되팔려고 했는데. 산 책보다 역시 살 책이 더 많고 안 읽은 책은 더 많다.

읻다, 워크룸프레스, 글항아리, 두 번째 테제가 내는 책은 계속 따라가면서 확인하고 싶었고, 두 번째 테제 책을 우선 리스트에 올렸다.

기후 위기 시대에 책 산업이 얼마나 더 오래 지속될지 자꾸 생각하게 된다. 내 경제력으론 책을 사고 보관하는 걸 감당할 수 없는데, 출판사가 계속 좋은 책을 내주기를 바라고 있어서 죄송하다. 도서관이 잘 정비되면 좋겠다. 빌려보고, 더 오래 읽고 싶은 책을 조금씩이라도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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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지혜씨 2023-02-11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저는 재밌게 읽어서 단숨에 읽어내려갔어요.글자수가 많고 두껍긴하더라고요.배수아님 신간 궁금해서 들어왔다가 책장 구경하고 갑니다.엄청 많이 읽으시네요.저도 분발해보렵니다.좋은 주말 보내세요!

우끼 2023-02-11 12:17   좋아요 0 | URL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저도 읽는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배수아님 신간을 아직 읽지는 못해서 말을 많이 못했네요.. 즐거운 독서시간 보내시길 바라요!!
 
사라질 수 없는 사람들 - 소외된 노동계급의 목소리에서 정치를 상상하기
제니퍼 M. 실바 지음, 성원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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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혐오와 계급배반투표는 계급격차를 줄일 수도 없고 삶이 나아질 수도 없다는 절망감에서 발생하는가? 노동계급을 인터뷰하고 분석한 책인데, 기후위기 시대의 정치 방향과 맞물려 생각해보고 싶은 점이 있어 읽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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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 페란테 글쓰기의 고통과 즐거움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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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은 정체성이 없고, 때때로 여성혐오적이기도 하고, 독자가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글이지만, 글을 쓸 때 가장 즐겁다. 생업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데 글을 쓰기 위해 생업을 유지하려 하거나, 유지하고 있다. 생업과 글쓰기가 자꾸 주객전도가 되어서 고민이다. 백수가 될 자신은 없는데. 이대로 살다간 계약기간이 끝난 후 다른 곳에 취직 못하고 곧 백수가 될 것 같아서... 미래의 백수에게 미리 미안하다고 편지를 써 보자. 미안. 미래의 네가 알아서 잘 다시 일을 구해서 돈 벌면 되지 않을까? 미래의 내가 뭐라고 답할지 아직은 모르겠다. 열받을 것인지, 아니면 니가 그렇지 뭐 하고 체념할 것인지. 과거의 반응을 봤을 때는 둘 다 일 것 같다.

글쓰기가 생업이 된 사람들이 부럽다가도, 그 대신 얻은 쓰는 자유를 생각하면 그래도 괜찮다고 자기위안을 한다. 팔리는 이야기와 써낸 이야기는 조금 결이 다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쓰고 싶은 글을 쓰는 대신 글만 쓰고 살고 싶다는 마음 속 아우성을 닮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알바를 하면서 쓰는 시간을 늘리며 사는 게 내게 도움이 되는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살 자신이 없다. 내 글이 팔릴 것이라 믿을 자신이 없다. 글만 쓰고 살 정도로 이야깃거리가 풍부하거나, 할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던가 하면 그건 아니고 그저 정의내리지 못한 어떤 상황에 예민하여 이야기에 잘 홀리는 사람일 뿐이라서. 많은 이야기를 읽을 독자는 될 지언정, 쓰는 사람이 되면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를 쓸 자신은 없다. 나는 이미 누군가가 했던 이야기를, 이미 더 잘 쓰여진 이야기 옆에서 쓰는 것처럼 보인다. 잘 쓰여진 이야기의 흔적을 다른 사람의 글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순간에는 읽는 책이 종종 지루하다. 이런 태도로 안주하고 있어서 출판한 글보다 더 나쁜 글만 쓰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역시 다독가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페란테가 언급한 이야기처럼, 나는 누군가가 이미 써낸 글을 뒤섞어서, 재배열하여 쓴다. 써낸 이야기는 내가 많이 읽었던 문학의 형식을 닮아 있다. 한때는 리얼리즘에 관한 강박 때문에 글쓰는 게 너무 어려웠다. 나는 내가 쓴 글이 내가 진두지휘하는 글이 아니기를 바란다.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를 바란다. 내가 나서서 다 말해버리면, 그 순간부터 글은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글이 되어버린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해버리게 된다. 단지 그걸 쓰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무언가를 아는 사람인 척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쓰는 욕구는 아는 척 하는 데서 오지 않나. 내가 타인이 되고자 하는 욕구. 왜 타인이 되고자 했는지도 모르게 타인의 그 고통을 서술해야만 할 것 같아서. 그것이 윤리에 어긋나는지 아닌지 계속 논쟁을 거치다 쓰거나 못쓰거나 하더라도 내 이야기만 하려고 쓰게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게다가 글의 화자는 그가 처한 상황의 한계 때문에 세상을 왜곡해서 보고, 내가 하지 않은 행동으로 고립되는데 내 삶은 갖은 윤리로 빽빽하게 행동을 제한한다.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수정하라고 요청할 때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다. 그 글은 화자의 한계에 갇혀 있었다. 다른 조건이 개입되지 않는 한 그 화자가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신뢰하지 않았으므로. 내가 묘사한 것은 특정 조건 하에 있는 화자였으므로. 그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 그대로가 그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 자신만이 존재하고 타인이나 그 밖의 존재물은 자신의 의식속에 있다고 하는 생각”(엘레나 페란테의 글쓰기의 고통과 즐거움 p81)에 빠진 인물이 된다. 조언한 사람이 말한 대로 수정을 하려면 화자를 바꾸든지, 아니면 새로운 화자를 등장시켜야 했다. 그가 그대로 머물기를 바라서, 다른 괜찮은 수단을 찾지 못했으므로 글은 다시 어둠 속에 묻힌다.

여러 이유로 삶과 글의 화자를 별개로 둘 방어벽이 필요하여, 익명으로 글을 쓰는 삶을 꿈꾸지만, 현실의 독자가 한 두 명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글의 형태를 직접 듣고 싶어서이다. 어떻게 읽히는지, 선을 넘지는 않았는지, 괜찮은 부분이 있는지. 등등. 현실에서 독자를 찾는 것은 어렵고, 온라인 상에서도 거의 독자는 없다. 그러니 내 쓰기가 윤리적인지 아닌지를 걸러내는 것이 어렵다. 윤리에 집착하는 건, 내가 만난 사람이든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든. 현실의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쓰지 않는 게 낫다. 왜 쓰는가 다시 생각하면, 아무래도 쓰지 않고 살기란 어려워서 그렇다고밖에 할 수 없다. 어떤 사건, 어떤 고통, 보았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있는 그대로 쓴다는 건, 윤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으리란 점도 내포하고 있다. 그 경계선을 계속 탐색하는 데 힘이 많이 든다. 인물을 포기하지 않는 것으로 윤리를 지키려고 한다고 해도. 내가 화자의 한계에 갇혀 있다면 윤리적일 수 있는지. 혹여 잘못 표현하여 윤리에서 어긋났는지,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 재현의 윤리를 어기지는 않았을지. 여러차례 검열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한때 내린 결론은, 재현한다는 게 윤리적일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한동안 글쓰기를 중단했다.

다시 쓰기 시작한 건 이기적인 이유 때문이다. 내가 나이려고 할 때 관계맺는 것이 어려웠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서이다. 예민한 사람이 느끼는 감정들을 담을 그릇이 필요해서이다. 삶의 어떤 것에도 의욕을 잃었기 때문이다. 다시 쓰기로 하면서 윤리적인 글쓰기란 무엇인지 생각하기보다 무엇이 써도 괜찮은지 고민했다. 현실과 있는 그대로 닮지 않게 하여 현실의 삶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는데,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마음을 이끌어낸 것은 현실에 있다. 아름다운 것을 꿈꾸고 닮으려는 모습을 지향하지만, 정작 써낸 글은 아름다운 이야기이기 보다는 욕망때문에 좌절하고 실수하고 허둥대는 인간의 이야기이다. 출판된 글이 이끌어내는 아름다운 감성은 내 몫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아직 훈련부족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 쓸 수 없는 글을 나중에라도 쓸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은 내게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해낸 일조차도 매번 겨우겨우 해내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일도 드물게 해내고, 해낸 일은 겨우 해낸 일이라 판명되는데, 지금 할 수 있다 마음먹기도 어려운 일을 해낼 자신이 없었다. 이런 마음은 아마, 여러 실패 이후 최소한의 것이라도 보수적으로 해내서 삶을 유지하려는 마음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게 작가들이 단명한다는 사실을 자꾸 언급했다. 그러나 내가 앓고 있는 우울증은 쓰는 나를 유지할 때만 자취를 감춘다고 여겼다. 우울하기 때문에, 기후위기로 인하여 구조적으로 피해입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태어날 때부터 여러 신체, 환경적 조건이 열악한 생명을 위한 제도를 만드려고 노력하거나, 일선에서 이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이들에게 약간의 돈과 여유시간을 보태는 것, 그리고 글쓰는 것 그 이외의 삶에서는 삶을 유지할 이유와 행복을 거의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말씀에 속으로 어쩔 수 없겠다며 대답할 수밖에 없다. 길게 살아야 할 만큼 제 삶이 가치있냐고, 저울질하는 태도가 썩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삶의 방식이 가능한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작가라는 이름을 독자가 있을 때 붙일 수 있다면 나는 아직 작가가 아니고, 설령 단명한다고 해도 어쩔까 싶다. 작가가 되어 독자가 있어도 마냥 행복할 것 같지는 않다. 내 삶이면서 내 삶이 아닌 어떤 물성으로 낱낱이 해부당하는 경험이 즐겁기만 하지는 않을 테니까. 내게는 구원이었던 것들이 어떤 파편으로 누구에게 영향을 미칠지 상상하는 건 별로 즐거운 일은 아니다. 어떤 글을 쓸 때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기를, 어떤 영향도 그에게 미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내가 말하려던 것과 다른 것들을 종종 사람들은 전달받고. 우리는 종종 소통불가능한 영역을 마주하므로. 마주보고서도 그렇고. 글로서 대면해도 그렇고. 내가 전달하려던 것을 그대로 전달받아서도 곤란하다고 느낄 때도 많았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내가 말하려던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라기도 했기 때문에. 무엇이든 침범하지 않은 채로,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제도적인 것들을 바꾸려 행동하는 일이 최선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도는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 행동하는 사람이 제도를 보완하기를 기대했다.

그래서인지, 엘레나 페렌테처럼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작가가 진실을 추구하려 애썼다는 이야기를 읽으니 마냥 즐거웠다. 그리고 그 진실이 소통가능한 영역에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쓰는 사람이 쓴 것은 읽은 것으로부터 오며, 그대로 쓰기 보다는 계속 더 진실을 표현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점도. “허구로 장식된 거짓말들이 서로 충돌하여 틈을 드러내고, 예상치 못한 진실이 수면 위에 떠올라, 독자 이전에 쓰는 사람부터 놀라게 해주기를 바랐던 점도(128p)” 좋았다. 그리고 무언지는 모르나 여성의 글쓰기를 하려고 노력했다는 점도 좋았다. 내 글이 여성혐오적이었던 것은 내가 읽은 것이 여성혐오적인 줄도 몰랐던 글로 배웠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살려고 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지려고 쓰는 소망이 이루어지려면, 써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일단은 쓰기로 했다.

세상에 재능있는 사람은 많고, 너무 많아서, 누가 있든 없든 빈 태도 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고 쓰기 시작하기 때문에. 나는 안 써도 되는 글일지도 모를 것을 매번 쓴다. 그건 내가 어느 직장에서 일을 하든 내가 하는 일이 그들에게 누가 해도 되는 그 정도의 가치였던 것 만큼이나 비슷하다. 그러니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한다. 약간 배째라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겠나 싶다.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수 있다는데 어쩔 것이냐고..

언젠가는 자급자족 공동체 내에서 살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착취구조 바깥에서 일할 방법을 찾고 있다. 이건 비겁함일까? 분명 일선에서 일하면서 구조내에서 구조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고.

나는 그러지 못했으니 자발적으로 일할 곳은 정할 수 있으면 했다. 그 날이 오면 더 이상 안 써도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도 안주할 진실이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진실이 뭘까. 그가 진실이라 말하며 일컫는 건 무엇인지 이 책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 사회에서 지워진 여성의 모습이었을까? 그렇다면 내가 발굴할 수 있는 진실은 뭘까.


P.s. 다 좋은데요 여성 작가를 여류작가라고 하는건 이제 그만 해도 되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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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3 2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2-03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래가 불타고 있다 - 기후 재앙 대 그린 뉴딜
나오미 클라인 지음, 이순희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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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를 뚫고 피어난 꽃에 수록된 나오미 클라인의 글을 읽고 읽은 글이다. 기후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하여 어떤 정치가 필요할지 고민하는 글이라고 생각했다. 원자화된 개인으로는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없으니 혼자 다 하려고 너무 많은 책임감 갖지 말라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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