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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살, 흙 - 페미니즘과 환경정의 ㅣ 몸문화연구소 번역총서 1
스테이시 앨러이모 지음, 윤준.김종갑 옮김 / 그린비 / 2018년 10월
평점 :
1.
이 책을 읽고 느낀 첫 번째 감상은, 뻗어 나갈 수 있는 이야기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따라서 할 수 있는 말로 축소해야 했다.
이 책은 농사에 관한 책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소농과 관련하여 읽을 수밖에 없다. 이는 앞으로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과 연관되어 있고, 말,살,흙은 우리가 폄하하고 분리해온 ‘비인간자연‘, 흙, 공기, 물, 동물, 식물, 물질등이 우리 몸과 끊임없이 교통하며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임을 말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소농의 삶은 ‘비인간자연’이 어떻게 몸에 침투해들어오는지, 우리가 분리하여 생각해왔던 ‘환경오염‘이 언제고 내 바깥에 분리되어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겪는 삶이다. 오늘날 농촌의 삶은, 논밭 옆에 송전탑이 있어, 보다 많은 농부가 암에 걸리기 쉬운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양수발전소 건설 예산 확정으로 인하여 미래에 산을 깎고 파괴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삶이고, 골프장을 건설한다며 산이 다 깎여나가는 것을 막으려 싸우는 삶이고, 도시에 공급할 전기를 대량 생산하기 위하여 논밭에 태양광발전을 깔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정부를 향해 반대투쟁을 하는 삶이다. 밭을 조금 멀리 걸어나가면 공장이 있고 폐수나 오염물질이 흘러나온다. 도시 사람들에겐 ‘흙‘이 더러운 것이므로, ‘흙‘없이 농산물을 생산하는 ‘스마트팜‘에 밀려 소농에게는 지원이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나마도 생태적 삶을 지향하며 토종씨앗을 널리 보급하려는 일부 농부는 농진청에게 씨앗채종시기에 최저임금을 받고 씨앗을 넘긴다. 그리고 농진청은 씨앗들을 개량하여 종자회사와 계약하고, 종자회사는 대량생산을 하는 ‘농업‘인들에게 씨앗을 비싼 값에 ‘판매‘한다. 그 종자는 본디 값을 매기지 않고 농부들이 손에서 손으로 전하던 씨앗이다. 파종에서 채종까지 손에서 손으로 이어진 씨앗이 종자기업의 이윤논리에 따라 한 해만 열매를 맺고 씨앗을 남기지 않는다. 흙과 교감하며 흙을 살려 식물을 기르며, 자연농을 연구하는 소농은 이 틈바구니에서 식민화되고 착취되는 존재로 남아 있다. 소농은 도시 사람들이 바깥이라 여기고 착취하는 공간에서, 외부자로, 자연으로 취급당하는 존재이다. 마치 재생산노동,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자본주의는 유급노동이라 지정되고 비용지급을 강제하는 상황이 아니고서는 가장 많이 돌봄과 재생산, 토지 등 필수적 공공성을 약탈해간다. 그러면서 자유를 제로섬게임이라 말한다.
그렇기에 소농을 포기하고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 다른 삶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이제와서 다른 존재를 식민화하는 사람으로 남아있을 수는 없는데, 어떤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어떤 삶을 상상하든, 비인간자연이 외부에 있고, 우리와 단절된 것이라는 시선으로, 비인간자연을 대상화하는 것이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쓰레기를 만들고, 주변을 황폐화하여 지금 당장 편리함을 찾고, 쓰레기를 투척하는 한, 우리와 함께 호흡하는 비인간자연이 우리자신을 어떻게 함께 오염시키는지 기억하는 게 좋겠다. 이 문제를 쉬운 말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를 오염시키는 구조 안에서 숨쉬고 있는 한,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사람들과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의 소통을 논의하고, 삶을 바꿔나가지 않는 한, 이 책의 시사점은 도로 무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비인간자연이 인간에게 항상 친절하고, 안전한 존재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비인간자연을 격리하여 인간을 고립시켜 살아갈 수는 없고, 그러한 시도는 실패로 드러났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지금 기후재난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배출한 이산화탄소가 지구의 온도를 올리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계속 바깥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기술‘로 해결하려고 태양을 가리는 시도까지 연구되었으나, 그 정도를 인간이 조절할 수 있을 것인지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는 데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낙관이다.
암 치료법이라 말해지는 방사선치료도, 인체의 면역력 이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한다. 일정정도 이상 치료법을 이용시, 방사선에 노출되는 일은 암을 증식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산화탄소 배출을 대기가 ‘희석‘할 것이라고 믿었던 간에, 산업혁명 이후 낭비적 생산을 가능하게 한 ‘자본주의 시스템‘은 100년 간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했다. 100년 전에 비해 1.5도씨를 넘는 것이 현재로선 막을 수 없는 일이라는 IPCC의 보수적인 보고서가 2023년에 나왔다. 이는 비인간자연이 더 이상 외부에 있지 않고, 늘 인간과 함께,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받으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언제까지고 이 신호를 공포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 이러한 위기의 시국에, 비인간 자연과 어떤 경계로 어떻게 살아갈지 나는 다시 배워야 했다. 나는 무엇인가든 해야 했고, 비인간자연에 지나친 영향을 주지 않으며 살아갈 방법으로, 자연농, 소농의 삶을 선택하려 한 것이다. 다만 소농의 삶을 고민하다 보니 얼마나 이제까지 도시의 삶이 비인간자연을 외부화하는 일이었는지, 그게 어떻게 미세먼지, 기온상승으로 되돌아오는지 깨닫는 일이기도 했다. 아무리 해도 혼자 실천을 잘 하며 살 수도 없다는 점을 다시금 깨달은 셈이다. 혼자만 잘 사는 건 불가능했다.
2.
책 속에서 인상적이었던 세 가지 에피소드를 꼽아 보겠다. 하나. 먹던 도리토스를 흙에 뿌리려던 에피소드다. 흙이 너무 소중하고, 도리토스가 흙에 쓰레기같아서 뿌리지 못하는 ‘화자‘는 그걸 맛있게 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르게 자각하게 된다. 흙이 식물을 길러내는 데 필요한 힘을 도리토스는 주지 않는다. 흙은 화자가 먹는 식물을 길러내는 존재다. 흙에서 난 것을 화자는 먹는다. 흙에서 난 것이 화자의 살이 된다. 여기서 글의 화자는 도리토스를 몸 안에 소화시키는 일이 쓰레기를 몸 안에 버리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낸다. 흙과 자신의 살을 동일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때부터 도리토스를 먹지 않는다. 흙에 뿌리지 않는 것을 몸 안에도 뿌리지(?) 않는다.
오늘날 어디서든 먹는 대상으로 대하는 동물은 운신조차 힘든 철장에서 지낸다. 혹여라도 집단감염되면 전부 죽여야 한다는 논리로, 항시적으로 항생제를 먹인 이들이 사람의 식탁에 오른다. 빨리 자라야 이윤이 되므로, 성장촉진제를 먹인다. 항생제를 먹지 않아도, 성장촉진제를 먹지 않아도, 동물을 먹는 것으로 우리는 성장촉진제 과다복용을 하며, 항생제 내성이 생긴다. 그리고 집단으로 죽인 동물들은 흙이 되고 물이 되고 자연 어디론가, 계속 흘러들어 우리에게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아니, 이미 사람 몸 속에 들어와 몸을 형성한, 동물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자신에게 무엇을 먹이고 있는가? 먹는 일이 자신을 돌보는 일이 되고 있는지?
둘. “동물성 지방과 유방암의 관련성을 공표하지 않는 미국암협회..“”환경을 청결히 관리하는 것보다 행복을 요구하는 것이 더 쉽다.“”우리는 이윤경제에 살고 있고, 암 예방에는 어떤 이윤도 없으며, 오로지 암 치료에서만 이윤이 생긴다”[말살흙]p212….. 인용한 문구는 오드리로드 개인의 몸에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후쿠시마 핵오염수가 바다에 투기되는 이유는 그 방도가 가장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사능물질은 노출정도에 비례하여 암을 발생시킨다. 현재는 영향력이 크지 않지만, 앞으로 100년 이상 투기될 경우는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 이 상황에서 핵폐기물을 증가시키는 핵산업을 부흥하려 보조금을 지급하는 윤석열 정부의 행태를 보라. 한 번 투기한 오염수, 또 빌미를 제공할까 걱정된다. 이미 투기가 시작되었지만 언제고 중단할 수 있도록 막아야 한다. 그러나 이윤논리로는 이를 막을 수 없다. 기후재난에도, 바다오염에도, 예방에는 이윤이 없다. ‘기술로 해결하겠다는 집단‘에게만 이윤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 기술로 해결하겠다는 집단은 자본을 가진 집단에게서 이윤을 얻는다. 현대사회에서 자본을 가진 집단은 누구인가? 처음 공장을 세워 스모그를 만들었던 집단. 석탄발전소를 세워 전기를 생산하여 부산물을 만드는 집단.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이산화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해온 집단이다. 기후재난에 기여하고서 기후재난을 막겠다 말하는 집단이다. 철저하게 이윤에 따라 움직이는 집단을 신뢰할 수 있는가? 사회를 파괴해도 이윤이 우선인 집단을 신뢰하고 정치를 내맡길 수 있는가? 우리는 그 집단의 일부인가 아니면 바깥에 있는가? 이윤을 우선시하는 집단의 바깥에서 생존하는 게 현재 상황에서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소농의 삶이 가능할 방도라고 여겼는데, 그마저도 이윤을 우선시하는 집단이 권력을 쥐고 있는 한, 가능하지 않아보인다. 정치, 정치밖에 없는 것 같다. 남에게 내맡기지 않는 정치.
셋. 화학물질과민증을 가진 사람을 탓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아프게 하는 환경을 만든 집단을 탓할 것인가? 조금 더 분명한 사실은, 화학물질과민증을 앓는 사람에게도 안전한 공간이 과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안전하다는 것이다. 이는 장애운동의 논리와 닮아있다. 장애인이 편하게 다닐 수 있는, 엘레베이터가 있는 곳이 비장애인에게도 편하다는 것. 다만 인간에 국한되지 않도록 논의를 확장해야 한다. 비인간자연에까지도. 오염되지 않은 공간에서 살 때 증상이 빨리 발현되지 않는 사람에게도 좋다.
3.
자급운동을 하고 싶다. 나는 농민들이 농협에 앞집, 옆집 5억씩 빚을 져가면서 자신을 갈아 농사를 짓고, 이주민을 식민화하고 착취하는 방식으로만 굴러가며, 석유산업에 의존하는 ‘농업‘이 지속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속되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지속하는 일이 나 자신도 오염시키는 일이라는 데 동의한다. 국가간 빈부격차로 인한 임금격차로, 이주민은 값싼 노동을 지속한다. 그들은 태어날때부터 가난한 국가에서 태어나 그를 감수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착취할 권리가 있는가? 태어날때부터 식민화된 곳에서 태어났으므로, 우리는 그들을 착취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같은 논리로 식민통치가 조선을 풍요롭게 했다는 논리도 있다. 돈이 되는 농사만 지어야,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단절된 도시의 정책을 비판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살아있는 땅에서 난 식물이 ‘고급‘식품이기만 한 많은 도시인에게는 아무 피해가 없는가? 그들은 도시에 산다는 이유로 영양가도 덜하고 맛없는 채소를 먹어야만 하는가?
제조업, 공업등 각종 개발로 대기, 물을 오염시키고도 아무 댓가도 치르지 않는데 보통의 많은 사람은 이 때문에 많은 기간을 미세먼지에 고통받는다. 언제까지 시달려야 하는가? 피해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공기청정기는 그 필터를 만드는 데도, 그를 돌리는 전기를 생산하는 데도, 또 다른 미세먼지를 발생시킨다. 우리를 병들게 하는 환경에서 살지 않을 자유가 제로섬게임이 맞는가? 아니, 아니다.
4.
정치를 남에게 맡기지 말자. 내 몸이 정치의 장이다. 이 몸을 통과해 비인간자연이 내 몸으로 들어오고 나는 비인간자연에 내 몸의 물질들을 내보내고 있다. 그렇기에 내 몸이 이 지구의 병을 함께 앓고 있다. 나는 이 몸을 신뢰하고, 이 몸으로 말하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이 몸으로, 남에게 맡기지 않는 정치를 배우는 중이다. 지역에서부터 삶을 바꾸고 지역을 바꿔야 이윤중심 사회에서, 공공성 중심 체제전환이 가능하고, 정치가 가능하지 않을까? 도시에서도 경작할 땅이 필요하다는 것도 함께 말하면서 농촌에서의 소농의 삶을 이야기하고도 싶다.
다른 고민을 하는 사람은 다른 방식으로 이 책을 읽고 소감을 남겨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