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서문
"근대와 근대적 인간은 주지하다시피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는 기호를 달고 탄생하였다. 그것은 세계의 중심이 인간과 지구로 옮겨졌음을 뜻한다. 이와 같은 인간중심주의는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만든 것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작위성의 이데올로기를 동반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서술할 수 없는 신을 배제하면 모든 관심이 우리가 알 수 있고, 만들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집중된다. 이런 관점에서 근데의 이데올로기는 '가능한 것은 만들고, 가능하지 않은 것은 가능하게 만들어라.'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전체주의적 믿음을 가지고 근대인은 자신과 이 지구를 하나의 실험장으로 만들었다.
... 전체주의의 핵심적인 체계는 전체주의적 정권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것이라고 진단한다."p31-32
인간의 삶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인간조건을 파괴하는 기술의 근본악을 이해할 수 있는가? p34
인간이 실존하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의 생명으로서 살아 있어야 하며, 둘째,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자연의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난 영속적인 자신의 세계가 있어야 하며, 셋째, 말과 행위를 통해 이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 생명, 세계성, 다원성(신판:다수성)을 인간 실존의 세 조건이라고 명명한다... 탄생성과 사멸성은 이들을 근본적으로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선험적 성격을 띠고 있다.p35-36
전체주의는 그것이 정치적이든 기술적이든 간에 인간의 탄생성과 사멸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영구화하고자 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전체주의는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삼기 떄문에 궁극적으로 수단만을 영구화할 뿐이다. 목적이 없으면 시작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전체주의는 인간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창조라는 새로운 시작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p36
정신은 본래 신에 의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신을 추구하는 자기애는 이미 올바른 이웃사랑과 동시에 신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 한편으로는 인간이 세상을 초월해 있는 신을 추구할 때에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정신을 추구할 때에만 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를 거부하는 어떤 완전성의 추구도 결국은 탄생성의 조건을 스스로 파괴하기에, 한나 아렌트의 철학은 이 유한한 세계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할 수 있는 행위양식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다. p37
노동이 인간의 유일한 활동이 아니라 다른 여러 활동양식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다시 말해 탄생성의 회복은 인간조건에 대한 성찰로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 나치의 전체주의를 겪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우리에게 공동체 의식을 일깨워줄 '공통의 공포'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유하지 않음"이라고 단언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가를 사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적 활동을 제외하고 신체적 활동(Vita activa)을 '노동', '작업', '행위'로 범주화하여 해명함으로써 일종의 정치철학적 인간학을 발전시키고 있다.
한나아렌트에 의하면 전체주의는 근본적으로 정신적 차원에서의 '사유하지 않음'과 실천적 차원에서의 '정치적 행위능력의 상실'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진단한다.p38-39
언제부터 할 수 없다는 느낌을 존중하지 않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내면의 나와 화해하지 못한 채로 결국 스스로 내 인생을 망가뜨린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돌봄이 가능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할 수 없다는 느낌을 존중하지 않기로 하고 나를 최대한 갈아넣었다. 노력의 결과물을 얻지 못한 채로 건강만 망친 채로 살던 와중에, 돌봄을 행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에 누군가를 돌보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그는 마땅한 직업도 가지지 못할 나이부터 돌봄을 시작하여, 늘어나는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빚을 지다가, 그의 돌봄을 받던 사람의 허락 하에 생명유지장치를 껐고, 그떄문에 살인죄로 재판장에 섰다. 그 기사를 보고, 그것이 내 미래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내내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설령 그게 내 미래가 되지 않더라도, 그 일을 겪어야만 했던 그 동시대에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왜 그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했나. 그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서 죽였겠는지. 그는 그 순간에 이미 몇 년을 미친 상태로 버텼는데. 그리고 사법부가 그런 판단을 내린 것도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어떻게, 누구도 그를 그 순간까지 도울 수 없었는지. 왜 우리에겐 돌봄을 행할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왜 돌봄이 오롯이 개인의 몫이기만 한 것인지.
기후정의라는 책을 쓴 저자가 쓴 서문이 어렴풋이 기억났고, 여기 적기 위해서 찾아보았다. 기후위기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자신은 어떠한 희망도 가지지 않는다고, 애를 써야겠지만, 자신할 수 없고,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강연을 하고 나서, 자신의 강연을 듣던 청소년의 눈을 보게 되었다고. 그제서야, 아, 자신이 잘못하고 있구나 깨달았다고 했다. 겁을 줘서 사람들을 일깨울 수 있다 생각했던지, '기후우울증'을 배설하고 있었던 것인지. 무슨 권리로 그들 앞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일지 싶었고, 그 이후로 기후위기 비상행동에 합류하여 사회운동을 했다고 했다. 나는 요즘에야 이 말이 무슨 뜻이었는 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나는 기후우울증을 배설하지만, 이것이 널리 퍼지기를 바라지는 못했다. 같이 우울하기를 바라지도 않고, 아예 기후위기가 아무 일도 아니라 여기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의 삶이 소중한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라지만, 그냥 내가 너무 우울한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사람을 만나기에 적절하지는 않았다는 걸 나도 알아서, 공감했던 것 같다.
나는 내내 기후우울증을 앓고 있던 사람이다. 이렇게까지 매일 기후위기를 느끼기 이전에는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잡식가족의 딜레마라는 영화를 본 이후에는 동물을 먹는다는 사실에 우울했고, 안티 페미니즘 사태와, N번방 사태를 맞닥뜨린 이후에는 그에 관한 우울을 앓고 있었다. 내내 우울할 이유가 있었던 것은, 내가 우울한 사람이라 우울을 끌어들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 사건들을 외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다. 어쩌다 보니 그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때문에 나는 내 우울을 감당하지 못하여 사람들에게 내 기후우울증을 전시했던 사람이면서, 동시에 무엇을 해야할 지 갈피를 못잡던 사람이었다.
내가 몇년 전에 살던 곳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이 너무 많은 쓰레기를 하루만에 배출했는데, 대부분이 배달음식쓰레기였다. 아무도 그릇을 씻어서 내놓지 않고, 음식물과 분리하지 않고 배출했으며, 매일 플라스틱 컵을 새롭게 버렸다. 분리수거만으로 해결될 일인가 싶을 정도로 하루만에 몇봉투의 쓰레기가 쏟아졌다. 그곳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나는 매립장이 곧 찬다는 뉴스를 보았고, 배달음식 쓰레기를 수거하다 과로하는 청소노동자에 관한 이야기가 실린 뉴스를 보았다. 또 생분해 컵이 친환경이려면 이것을 6개월간 특정 온도를 유지하며 묻을 장소가 필요한데, 그런 처리를 위한 시설이 또 필요한데 국내에는 없으며, 그냥 매장시에는 플라스틱과 같이 썩지 않아서, 결론적으로 순환할 겨를도 없다는 뉴스도 보았다. 나는 쓰레기를 마구 양산하는 행동이 미웠다. 왜 사람이 버리는 쓰레기에, 어떤 생물들은 먹이가 아닌 것을 먹고 죽어야 하는 건가 싶어졌다. 친하다고 생각한 사람에게는 내가 느끼는 심각성을 같이 이야기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부담스럽다는 말과 함꼐 나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쓰레기를 계속 많이 버리는 것을 선택했다. 내가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져주어서 고맙다고 언제까지 고개를 숙여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건 우리의 문제인데. 왜 나만 노력하는 건지. 내가 이들을 질투하여, 이렇게 편하게 쓰레기를 버리며 사는 것을 질투하여 이런 마음을 가지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마 이 무렵부터 누군가와 이와 관해 대화를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신뢰하는 사람이 점차 줄었다. 사람을 믿지 않았다. 편리함 앞에서는 공동의 책임도 무시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는 게 괴로웠다.
그 무렵 하던 일을 결국 그만두게 되었다. 성과가 잘 나오지 않았는데 몸이 버텨주지 않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사를 했다.
우울증이 더 심해졌다. 어차피 우울할 거, 무엇이든 해보자 싶어서, 체제전환과 기후정의라는 이름을 달고 하는 강연을, 반쯤은 냉소하면서 들으러 갔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간 것이었고. 나는 거기서 강의 중반부부터 눈물을 쏟았다. 지금와서 기억나는 건 많지 않다. 광물을 캐기 위하여 파헤쳐진 땅. 거기 남은 거대한 구멍. 돈을 벌기 위해서 하나둘씩, 마지노선이라 생각했던 도덕성을 철회하고, 그 이후로 자연이 얼마나 많이 파괴된 채로 방치되었는지. 과거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가 어떻게 수탈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수탈당하고 있는지. 기후위기로 인한 가뭄과 홍수가 어떻게 식민지였던 국가들에 더 많은 피해를 입히는지. 그리고 이윽고, 에너지 및 식량을 통해서 사람을 종속시켜 돈을 벌려고, 우리 삶의 필수품까지 수탈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 관하여 들었다.
이전에도 거대종자회사에서 1년만 생산할 수 있는 종자를 매년 비싸게 판매한다고 농사짓는 분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는데, 한국 어딘가에 설치된 태양광발전에 해외자본이 투자되었으며, 이윤이 나지 않으면 이 자본을 철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그렇게 되면, 여기서 나는 이윤 이상으로 빚이 나면, 한국정부가 우리 세금을 또 빚 갚는데 써야 하는 형국이 될 수 있단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 이 사람은 진짜 체제전환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구나. 깨달았다. 우리의 문제가 다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강연자에게는 다가가지 않았다. 무엇이든 하려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무서워했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이토록 절박한 까닭에, 자신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다가가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걸까? 이미 행동하는 사람은 나를 비난할까봐 믿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은 미워했다. 사람 자체가 미운 게 아니고, 행동이 미웠다. 그렇지만 그게 구별되어 표현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아서,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면서, 나를 보호하려고 했다.
4.14 기후정의파업을 설명한다는 사람의 강연을 들으러 간 건 또 울려고 간 건 아니었다. 그저 의무감으로. 함꼐하기 위해서 간 것이었다. 언제부터 그 운동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나를 밀어넣어서, 어떻게든 그들로부터 다른 동력을 얻으려고 했던 것 같다. 꿀벌이 노동하는 시기와 올해 꽃이 피는 시기와 겹치지 않을 수 있어서, 꿀벌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부터였을까. 삼척화력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피켓을 들고 화력발전소를 없애야 한다고, 자신의 일터를 없애고, 그들 자신에게도 일자리를 마련하는 정의로운 전환을 이뤄야 한다는 마음으로 4.14 기후정의파업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부터였을까.
언젠가부터 나는 간헐적으로 울고 있었지만 울컥 눈물이 터져나왔을 때가 기억난다. 2021년 선진국 국가 17개국을 대상으로 '무엇이 당신의 삶을 의미있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했을 때, 다른 국가들은 대부분 가족인데 한국만 물질적 풍요로 답했다고 했다. 강연자가 이게 한국인이 속물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사회적 안전망이 하나도 없어서, 물질적 풍요로만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어서 그런거라고. 공공재로, 기본재로 있어야 하는 게 전부 사유화되고, 경쟁체제로 내몰렸기 떄문이라고. 그렇게 말을 하는 순간 그냥 눈물이 쏟아졌다. 다행히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마스크에 눈물이 흡수되었고, 나를 굳이 보고 뭐라 할 사람이 없었어서, 그냥 울고 있었다. 그리고 강연자는 말했다. 개인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투자자본으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는 것을 막는게 더 중요하다고. 개인이 발생시킬 수 있는 이산화탄소는 한계가 있지만 거대자본이 발생시키는 이산화탄소는 한계가 없다고. 그래서 이 기후위기 시대에, 금융기업,포스코,두산 등 대기업들이 투자한 석탄화력발전소가 새로 지어지고 있지 않느냐고. 이들이 핵발전소, 육식산업, 생명자본주의에 투자할 때,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투자한 것이라 절대 감축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이들에게 책임을 묻게 해야 한다고. 이번에 민간에서는 에너지 비용이 상승했는데, 거대 투자기업들은 횡재세도 내지 않고 이익을 취득하지 않았느냐고. 내내 공기업이 적자라고 말하는 내막에는, 주주배당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고. 당신은 아직 희망을 믿는다고. 행동하면 그게 당신의 말이 되고, 설득력이 생긴다고. 그 말을 듣고 나는 화를 내기만 했지, 믿고 기다리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음을 생각했다. 누구든지 속도는 다르다는 생각으로, 여유를 가지지 않았다. 현실을 보고 절망할 때면 먼저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기후붕괴의 속도를 늦출 가능성이 되려고 그들이 노력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했다.
이산화탄소는 대기중에 100년 유지되고, 메탄은 25년이니, 우리는 지난 세기의 이산화탄소와 우리가 현재 내뿜은 이산화탄소의 총체로 현재를 살고 있고, 앞으로 우리가 할 행동이 누적되어 미래세대의 대기환경이 결정된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넷제로. 즉 탄소 중립이 아니라,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0으로 만들어야 하는 목표를 마주하고 있다. 돈을 벌 수 있는 자본을 가진 사람들은 멈추지 않을 테니까. 이것은 불가능해보이지만, 사회가 경쟁체제로 가지 않으면, 산업부문의 에너지를 확 줄일 수 있으니 가능할 수 있다고. 그러니,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가능해지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고.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모두 실어서, 반자본 대정부 투쟁으로,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려고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점...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할지 어떻게 어그러질지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배우고 싶다.
지금 당장 완벽할 것을 요구하는 건 불가능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안되는 것을 되게 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그건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운 전체주의적 태도였다. 내내 할 수 없다 여긴 걸 스스로에게 강요해왔고, 그걸 마찬가지로 타인을 대할 떄도 그렇게 행동한 거다. 그러니 타인을 대할 떄도 사유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 나도 변하는 존재고, 타인도 변하는 존재니까.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변할 지는 알 수 없고, 알 수 없기에 나는 긍정적으로 아직은 변화가능하다고 믿고. 그 방향으로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행동해보고 싶었다. 우리의 작은 행동이 긍정적인 나비효과가 되기를. 우리 자신을 살리기를. 이 믿음에는 근거가 없다. 나는 나를 초월한 것을 믿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