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버스 - 욕망의 세계
단요 지음 / 마카롱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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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책이 금융자본주의를 마냥 예찬하기만 했으면 이 책에 몰입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돈의 속성에 관하여, 도박에 빠지는 사람의 심리에 관하여, 그걸 허용하는 합법적인 시스템과 정부,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나열된 불법적인 일과 그 경계에 있는 일에 관하여, 어떻게 이렇게 잘 드러낼 수 있는지, 그마저도 옳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도 휘말려들어가는 사건을 쓰는 힘에 놀랐다. 장편인데 지루한 곳 하나 없이 끝까지 책을 놓지 못하고 읽었다.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컴플렉스나, 소망 등이 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적응하지 못한 본래의 삶에서 느낀 좌절감도, 스스로 한 말을 번복해야 하고 사람들을 실망시켜야 하는 그런 과정들도... 상황을 통제하려 하지만 매번 실패하는 좌절감도. 그럼에도 계속 그가 바라는 삶을 놓치 못하는 것도, 바라는 삶을 놓아버릴 정도로 수단에 집착하여 주객전도가 되는 모습도, 내가 봐왔고 겪었던 일들과 비슷했다. 나는 금융자본주의가 지닌 속성을 경멸하기만 해왔던 사람이라, 이 욕망이 이토록 좋고 나쁜 의미에서 인간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해할 생각을 전혀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니까 전통적 의미에서 인간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인간성을 몰살하고서라도 쫓는 욕망과, 그 욕망의 파괴적인 속성, 그 파괴적인 욕망을 좇은 이유가 인간적인 욕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앞으로도, 그가 걸었던 길과 비슷한 길을 전혀 갈 생각이 없으므로, 이 책은 내게 완전한 판타지 소설 속의 이야기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판타지 소설은 현실의 은유이므로. 이토록 선명하게 현실을 비틀어 만들어낸 판타지를 판타지소설이니 뭐니 하는 표현으로 말하는 것조차도 이상한 것 같기는 하다. 여러 의미에서 이 소설에서 극단적으로 묘사하는 이 사태에 이 시대에 사는 다수가 한 번쯤은 얉게나마 발을 담궈보았을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다수의 사람들이 주식을 한다고 말을 했었기도 하고... 나는 노동수익으로 삶을 꾸려갈 수 없어서 주식을 하는 사람들이 회사의 발전과 안정을 통해 수익을 얻으려고 하는 거라고 믿고 있었기 떄문에, 이는 위험부담을 개인이 어느정도 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돈으로 돈을 버는 일이고, 불로소득과 어떻게 다른지 잘 알지 못한다. 모든 불로소득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아예 노동을 할 수 없더라도, 그를 위한 수입은 필요하다. 투자자, 또는 피투자자가 되어야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건 이상하다. 투자자나 피투자자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은 버려진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이 어느정도 노동을 할 수 있을 때, 이들의 노동력을 그렇지 않은 사람과 동등하게 놓고, 해낸 만큼만 수입을 준다고 하면, 임금 노동자의 수입이 능력에 따라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최소기준에서 조금씩 더 주어진다는 사실이 잊혀진다....  누군가는 크게 차등을 두는 게 옳다고 여길지는 모르겠으나, 노동한 가치만큼 주는 것도 측정이 어렵다는 측면에서 불가능하다. '능력주의'를 표방한 곳마저도 그렇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사업가'로 일해야만 하는가? 이것 역시도 이상하다. 모두가 사업가가 되면, 모두가 사업가로 살아남을 수는 있는가? 대다수는 대기업에 병합되거나 하청업체가 되지 않던가?
편향적으로 주어지는 불로소득, 사회 구성원으로서 존재하고 역할을 하는 개인과는 무관하게, 그 시스템이 괜찮지 않아도 시스템에 따라 행위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불로소득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어떤 종류의 불공정이 유리한 인간에게 비인간성을 유발한다는 사실에도 부정적이다. ….이 분배 시스템은 노동강도에 따라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빈익빈부익부에 따라서 제도 활용에 따른 유불리가 나누어질 뿐. 지구 온난화를 심화시킨 이산화탄소 배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투자자본'인 만큼이나, 정부의 눈먼 돈을 활용하는 건 더 많이 감시받고 검증해야 하는 빈자가 아니라 부자라는 점에서도 비판적인 입장이다. 따라서 금융자본주의를 한 인간이 도박처럼 활용하는 모습을 묘사한 이 소설이,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진 우리 시대 사회상을 잘 그리고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모두가 비슷하게 바라는, 인간다운 삶을 살리라는 소원을 이루려고 금융자본주의를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결국 나쁘지 않은 결말을 얻었기 때문에도, 시스템이 인간을 착취하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고, 따라서 권장하기는 어렵다. 신랄하게 비판하는 서술어 사이에 선명하게 살아있는 욕망이 나와 닮아서 어쩔 수 없이 몰입해서 읽고 말았다, 종종 매력적이고 분석적인 문장들과 묘사와, 이야기 구성 측면에서도. 잘 만든 이야기라서, 이런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작가가 부러워졌다. 그렇지만... 역시 이 길에 눈꼽만큼도 발을 들이고 싶지는 않다. 그럴 능력도 없고. 욕망을 이룬 사람이 지고 있는 반대편의 그늘이  무섭고 섬뜩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이런 식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건, 아마 내가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이라 그렇기도 한 것 같다. 내가 과연 내가 바라는 대로 계속 조심하면서 살 수 있는 인간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나 살자고 다른 것들에 눈감으며 살면 어떡하지 항상 무섭다. 그래서 이렇게 리뷰를 쓰고 나서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소설은 인물의 욕망이 계속 끌고나가는 세계이지 않나 싶어서,  하여튼 이 소설은... 잘 썼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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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버스 - 욕망의 세계
단요 지음 / 마카롱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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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다. 읽는 처음 순간부터 미쳤다는 말부터 했다. 피비린내 나는 금융자본주의를 이용하여 인생역전하려는 한 사람과,돈을 벌려는 욕망을 이용해 돈을 버는 사람들. 돈으로 돈을 벌어서라도 존엄과 영혼을 사려는 게 시대의 욕망이라지만, 욕망의 궤적에 홀리는 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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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개의 단상 세라 망구소 에세이 2부작
세라 망구소 지음, 서제인 옮김 / 필로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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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다른 내용으로 시작하면 그게 뭐든 그저 지루한 배경 설명이 되어버릴 것이다."p5


'300개의 단상'에는 자신이 했던 말이든, 타인이 했던 말이든, 그와 그 주변의 타인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관습이든 간에, 우선 뒤집는 말들이 담겨있다. 어떤 사람은 솔직한 글이 가학 혹은 피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는데, 수치스러운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좋다고 선언한 건 그가 솔직한 글을 쓰고자 한다고, 솔직한 글이 지루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로서 그가 느끼기에 부끄러울 일조차도, 적어내겠다는 뜻처럼 들렸다. 수치스러운 일을 고백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 누구든지 그에게 지루해하지 않고 공감할 누군가가 존재할 거라고 믿는 것 같았다. 당신에게 공감할, 누군지 알지 못하는 독자를 만나려고 손을 내미는 듯한 그의 발언이 도발적으로 들렸다.


한편으로 사람이 수치심을 느끼는 순간은, 자신이 익숙히 괜찮다고 믿었던 사실이 뒤집힐 때라고 한다면, 위의 문장은 무언가를 뒤집으면서 시작하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앞과 뒤를 뒤집어, 놀라게 하라는 것. 이 단상의 재미는, 이 뒤집힘에서 오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렇다. 


"어떤 사람들은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 빚은 갈등을 해소하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편이 더 쉽기 때문에 오랜 친구와 연인을 버린다. 갈등을 해소하려면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인정하거나 상대를 용서해야 하는 경우에 더욱 그렇다. 나는 지금 어떤 멍청한 인간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멍청한 인간이 자기가 나라는 멍청한 인간을 버린 거라고 생각하면 어쩌지?"p7


그러니 어떤 인물을 멍청한 사람으로 평하고서, 상대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 가능성을 생각한다는 것. 이점은 재미있지 않은가? 어쩌면 자신이 그런 사람일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자신은 부정하고 있지만, 혹여 그렇게 보일 수 있겠다고, 그런 점이 자신에게 있을 수 있겠다는 의심을 거두지는 못한다는 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로서, 확신에 찬 발언을 불확실한 상태로 내버려둔다. 도로 발언하는 자신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말을 늘어놓는다. 자신의 발언을 모순으로 뒤섞는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집힌 말은 어느새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는 이런 모순을 삶에서 발견하고 글로 옮긴다.


'300개의 단상'에는 모순을 폭로하는 듯한 짧은 글들이, 내용연결 없이 연이어 나열되어 있다. 그런데 계속 읽다보니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한 사람의 삶으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마치 쓴 일기를 읽을 때의 기분이었다. 일기를 쓸 때 연이어 이어진 사건을 쓰기 보다는 계속 끊임없이 주어지는 생각을 쏟아내기 바빴다. 이후 읽어보면 그 생각이 이어지지 않을 때가 많았다. 무언가 깨달은 것들이 스쳐지나가는데 받아적기 바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나치게 솔직한 이야기들은 누가 읽지 않으리라는 생각없이는 쉽게 쓸 수 없는 글이었다. 이 단상은 그런 의미에서 일기처럼 느껴졌다. 일기보다는 압축적이고, 사건이 구체적으로 상상되지만, 축약되어 있는, 내밀한 이야기들. 길게 쓰면 한 편의 단편이 될 듯한 인상들이, 계속 연이어 나열되고 있었다. 나열된 글들은 규정된 무언가를 억압으로 느끼고 계속 탈주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가 탈주를 하려는 이유는, 이 단상에 잠깐 언급되듯이 그가 가진 장애가 내내 그를 괴롭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 장애로부터 사유를 이용하여 간헐적으로 탈출하는 것으로 숨을 돌렸을 지도 모르겠다.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 그 느낌을 즐기기 위해 나는 섹스, 약물, 우범지대처럼 사람들이 흔히 빠져드는 것들에 빠져들곤 했다. 그 갈망을 마침내 충족시킨 건 모성이었다. 모성은 멈추는 법도, 알아차리는 사람도 없는 자기 소멸의 한 방법이다." p97

삶을 그저 견디려 애쓰는, 책임을 하나도 져버리지 못한 듯한 모습, 아슬아슬하게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자신의 병을 견디고 엄마가 된 자신을 견디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서, 그의 삶이 힘겨워보였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넘나드는 사유와, 그 사유대로 사는 삶이, 무기력하고 자유로워보였다. 다른 모든 일탈보다도 낭비하고 있다는 갈망을 충족시킨 것은 모성이었으며, 알아차리는 법도 멈추는 법도 없는 자기소멸의 방법이라고 묘사한 데 있어서, 그가 탈출하지 못한 그 자신의 몸이, 그가 짊어진 책임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는 책임을 지는 것으로, 일탈을 하며 갈망했던 죽음에 가까워졌고, 역설적으로 삶에 닻을 내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그가 실은 단상 첫 페이지에 쓴, 그의 말은 실현된 것일까? 그는 그가 닻을 내린 그의 삶을 부끄러워하는건가? 아니면, 그 이전의 삶을 부끄러워하는 걸까? 그가 무게를 두는 게 어느 쪽인지는 나는 모르겠다. 그가 버티고 있는 삶을 그대로 말한 건 남들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그저 그는 고백하는 것 같았다. 


몇 문장 밖에 안되는 글에 함축된 생각의 일부를 듣고 있는데, 그 사이에 숨어있는 서사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어쩌면 그건 그의 서사가 아니라, 내 내면에 불러일으켜진 서사일 수도 있다. 문장들은 너무 짧아서, 모든 사안을 유추하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읽었을 때 바로 어떤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건 내가 듣고 보고 경험한 일에서 오겠지만,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단상들은, 단상을 왜 적었을까, 이 단상의 배경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나라면 이런 생각을 언제 할 지 상상해보면서 이 사람의 삶을 그려봄으로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연속적인 단상의 나열은, 그 생각을 통과하여 연속적인 삶으로 살아있다. 자기자신으로부터 세상을 구하려 애쓰는 사람으로서. 싸우는 모습이 보였다.

만약 이 책을 읽으면서 자기 안의 서사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저자의 서사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 책은 별로 재미없는 책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발견한 서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재미없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소 평범하지는 않은 생각인 것 같기 때문이다. 


이전에 정영문의 검은 이야기사슬을 읽을 때도 단편으로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 집합을 책으로 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단편, 혹은 장편에 등장할 수 있는 인물의 단면들을 읽는 기분으로 읽었다.


이 독후감을 이렇게 쓴 것이 조금은 후회된다. 왜냐하면, 이렇게 요약될 수 있는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둘러 읽기 위해 읽느라 흘려보낸 글들이 많아서, 오히려 아쉽다. 빠른 속도로 읽을 수 있는 글은 아니며, 오래 두고 읽는 시집처럼 읽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다른 내용으로 시작하면 그게 뭐든 그저 지루한 배경 설명이 되어버릴 것이다. - P5

어떤 사람들은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 빚은 갈등을 해소하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편이 더 쉽기 때문에 오랜 친구와 연인을 버린다. 갈등을 해소하려면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인정하거나 상대를 용서해야 하는 경우에 더욱 그렇다. 나는 지금 어떤 멍청한 인간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 멍청한 인간이 자기가 나라는 멍청한 인간을 버린 거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 P7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 그 느낌을 즐기기 위해 나는 섹스, 약물, 우범지대처럼 사람들이 흔히 빠져드는 것들에 빠져들곤 했다. 그 갈망을 마침내 충족시킨 건 모성이었다. 모성은 멈추는 법도, 알아차리는 사람도 없는 자기 소멸의 한 방법이다." - P97

우울증은 그 병에 걸린 사람에게서 즐거워하는 능력만 훔쳐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한 적 없는 모든 일과 할 수 있었던 모든 일을 장막으로 덮어버린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기 위해 죽는다. 이런 경우 우울증(depression)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그는 내리(de) 누름(press)을 당하는 것이다. 영원히.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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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적으로  시집을 한 권 샀다. 나는 시를 이해하지 못해서 시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시가 무엇인지 여전히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글이든 나를 뒤집어 엎는 듯한 글은 좋아한다.

머리털이 쭈뻣 서게 만드는 글, 아무리 세세하게 설명해도 설명할 수 없다 느꼈는데, 단숨에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글을 좋아한다. 나는 마치 방관자처럼 수치심에 확 달아오른 나를 건너다본다. 저 글 뒤에 숨어서, 마치 내 몸집이 글자 뒤에 숨겨지는 것 마냥. 숨길 수 없었던 것을 이야기하는 말에 어떻게 숨어있는 건지… 내가 한 말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타인의 서사라는 이유로 부끄러움 위를 한 겹 덮은 천 뒤에서 몰래 관찰하는 느낌이다. 

타인의 고통을 목격자로서 바라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 고통의 당사자로서 어떤 일을 겪기도 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던 누군가가 아직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고민하며 살아가는 흔적을 보는 듯 해서, 나는 여기 실린 시들에 위로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그는 목격자로서의 고통을 말하기도 하고 자신의 고통을 진술하기도 하지만, 그걸 과장하지 않는다. 고통보다 자신이 더 앞서서 취해있지 않다. 내가 내 고통에 취해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한 명의 친구가 생일을 맞아 새만금 신공항 백지화에 힘을 보태려, 자신의 생일선물 대신에 후원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친구의 요청 없이도, 나는 후원을 할 생각이었지만, 그 친구의 요청글을 읽으니 한편으로는 부끄러워졌다. 나 역시 내 생일선물을 바란 적은 없었지만 그건 내가 태어난 일을 기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었지, 자신에게 올 복을 자신이 뜻하는 바에 전하고 그 일이 또 다른 생명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기를 바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후원을 요청하며 설명했다. 기후위기 시대에, 이산화탄소 배출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공항을, 현재 있는 공항조차 잘 이용되지 않는데 새로 짓고, 그 자리에 살고 있던 생명을 파괴하겠다는 것이 그에게 너무 큰 고통과 슬픔이라고. 그러니 자신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고 싶다면 그가 슬퍼하는 지점에 힘을 모아달라고 했다. 여태 내 발언이 당연히 먹히지 않을 것이고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하며 몸을 사리는 데 너무 익숙해서, 사랑받는 사람이 하는 이런 행동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나는 비건지향이고, 페미니즘의 연장선상에서 동물권에 관심이 있고, 동물해방을 꿈꾼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행동하지만, 그는 그걸 밖으로 잘 표현하고, 그를 위한 삶을 살아간다. 단지 먹히기 위해 끊임없이 임신을 강요당하고, 태어난 아이를 빼앗기고, 운신조차 힘든 우리에서 전염병에 걸렸을 위험이 있으리란 이유 하나 만으로 살아있는 채로 매장당하는, 동물들의 고통에 절망한다. 단지 전쟁을 위해 죽어나가야 하는 생물들의 고통에 화를 낸다. 나는 그가 한 행동을 닮고 싶었다. 

나는 어쩌면 과거에 페스코베지테리언을 시도하다가, 바쁘고 신경쓸 것이 많다는 이유로, 동물권에 관심을 가지고 싶다는 스스로의 마음을 이전에 스스로 부수었기 때문에, 아마 그게 부끄러워서, 그 상처가 회복되지 않아 내가 동물권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기도 하다. 오래 실천을 지속하다보면 자신감이 생기리라고 믿고 싶다. 비건을 시도하게 된 건 환경운동을 하고 싶어하고,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고 싶어하면서(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79377.html) 육식을 지속하는 게 창피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는 게 무서워지니, 쓰는 일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를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변명하는 글을 남기면, 내가 그 변명에 안주하게 될까봐.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안주하기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전달하고 싶은 말도 사라졌다. 연결되고 싶다는 갈망이 쓰기라면, 나는 그 시기, 나를 지키기 위해서 단절을 원했던 것 같다. 

나는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연결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라고 생각했다. 안주하지 않고, 자신에게 계속 말을 걸고, 전달하려는 노력을 하는 글들... 그래서 읽는 데 오히려 안주하기도 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쓰는 일로 어떻게 삶을 살아가게 만들지 고민하면서 쓴 시처럼 보였다. 살기 위해 쓰고, 헛되지 않으려 노력하고, 그럼에도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던 이야기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돌이켜보는데 그치지 않는 시들. 어떻게 하면 자기자신을 더 많이 자신안에 포함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살수록 포함시켜야 하는 천진한 나와, 많은 실수와, 잘못이 늘어가고 있다. 고통에 방관하거나 목격자가 되거나, 감당할만한 고통의 당사자가 되거나, 이리저리 휘둘리는 사이 내가 내뱉은 말이 얼마나 먼지처럼 가벼운지 생각했고 먼지처럼 흩어지지는 못하고 습기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옭아매는 점을 생각하고, 그래서 자꾸 망각한다는 것도 생각한다. 

지금 내가 포함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천진함이다. 꽉 막힌 상황에 무엇이든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더 나은 것들을 끌어오고 싶어서이다. 내 기대치에 어긋나는 나를 포함시켜서, 더 나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가능주의자라는 제목에 이끌려 이 시집을 집어든 이유도 이와 같다. 절망스러운 일에 절망하기도 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 것, 그 힘을 믿고 싶었다. 나는 내 모든 역량을 다해서 나를 수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므로.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아마 어디서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게 될 것이다. 

달리는 기관차를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가 혁명이라면, 혁명을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비폭력적인 혁명이었으면, 이걸 꿈꾸는 것조차 천진하여 그런 것이다. 이산화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일에 기여하고 싶지 않다. 내가 먹고 사는 일이 앞으로의 미래를 망치지 않기를 바라서. 그리고 지금 이산화탄소 배출을 막을 수 있는 잠시멈춤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고 싶어서... 천진함으로 끝나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었다. 

누가 그랬다. 사람들이 전부 칼럼을 썼으면 좋겠다고. 그 칼럼으로 자신을 검열하게 될 테니까. 

그렇지만 또 누군가는 그렇게 말한다. 네가 아무리 뾰족하게 글을 써도 무딘 글일 뿐이라고, 글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고. 

매일 망각하고 새로 쓰고 생각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으로, 이미 잊은 걸 계속 삶에서 이어갈 수 있기만 해도 좋을 것 같다. 결국 쓰는 게 자기만족일 거라면 쓰는 일로 나를 계속 노력하게 할 수 있었으면. 

언젠가는 검열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도 어긋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내 작은 행동이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 








타인의 시선들로 가득찬 방,
책상과 의자와 침대가 수치심에 떨고 있다

이제 이곳은 내 방이 아니다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지만
출구는 없는 방

문의 공포는
열 수 없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잠글 수 없다는 데 있다 - P18

여행에서 돌아오자
미루어둔 불행이 일제히 들이닥쳤다.
벽장문 사이로 쏟아져내리는 잡동사니들처럼

예외적인 날들은 끝났다고
그것 보라고
이게 바로 도망칠 수 없는 네 몫의 삶이라고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 P122

벤야민은 혁명을
기차 탄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브레이크라고 말했지만
달리는 기관차를 멈춰 세우는 것이라고

달리는 기관차를 멈추게 하는 장력은

얼마나 고요해야 하는지
얼마나 자유로워야 하는지
또는 얼마나 천진해야 하는지

아내의 방에 와서도 점점 어린애가 되어갔다던 김수영처럼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어버렸다던 김수영처럼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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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7 2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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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8 1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3-03-17 1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어본 시집 리뷰중 가장 근사한 리뷰입니다. 저도 시를 잘 읽지 못하지만 이 시집은 읽어보겠습니다. 이 시집을 읽어도 이렇게 근사한 리뷰는 써내지 못할것 같지만요.

우끼 2023-03-17 11:26   좋아요 1 | URL
와앜 엄청난 칭찬이네요 ㅎㅎㅎㅎ 감사합니다 다락방님께도 좋은 책이었으면 좋겠어요

잠자냥 2023-03-21 13: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점심 먹다 울컥합니다.....;

우끼 2023-03-21 16:26   좋아요 1 | URL
ㅜㅜ 고맙습니다.. 제가 모순적인 인간이라 저 자신한테 화내고 세상에 화내느라 혼자 사는게 아니라 같이 사는 거고 마음도 통할 수 있다는 걸 요새 자주 잊고 살았어요.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층적응 - 기후대혼란, 피할 수 없는 붕괴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젬 벤델.루퍼트 리드 지음, 김현우 외 옮김 / 착한책가게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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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스템으로는 기후붕괴를 막을 수 없으리란 절망감에 내내 잠식되어 있었다. 때문에 기후붕괴 이후의 사회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핵발전소 멜트다운으로 인한 지역오염, 자급자족, 농사기술의 필요성, 어쩌면 농사조차도 불가능할 환경에 마주할 가능성, 공동체와의 새로운 방식의 연결. 내게 자산이 없고, 땅을 산 이후에 이를 준비하기 시작하겠다고 한다면, 그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내게 없어보였다, 그럼에도 나는 내 안전을 보장받기를 원하고 발언과 행동의 자유를 원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 것인지는 모르는 채로.

기후정의에 관하여 고민하는 사람들조차도 누구는 비건을 하고 누구는 육식을 줄이는 데 머문다. 에너지문제에 있어서도, 누구는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더라도 어떤 땅에 지을 것인지 고민해야하며, 에너지 사용량 자체를 줄여야 한다고 하고, 누구는 남반구를 재식민화하여 에너지를 조달하는 유럽의 방식을 따라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온도차는 그렇다 하더라도, 아예 고민조차 안하고 일회용컵에 매일 커피를 마시고 배달음식을 생각없이 주문하거나, 육식을 세끼 지속하는 사람들도, 아직도 기후위기를 거짓말이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괴로운 건, 내가 먹는 먹거리조차도 스스로 생산하지 못하며, 따라서 아무리 텀블러를 들고 다닌다고 할지라도, 나 역시도 누군가가 생산한 음식을 구매해서 먹어야 하고, 거기서 발생하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막지 못한다는 점이다. 야채를 포장할 때도 플라스틱 부산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래서 가급적 시장에 가서 직접구매를 하려고 한다고 할지라도, 완전한 제로웨이스트는 사실상 너무 품이 많이 든다. 그리고 내게는 그게 가능할 만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그런 맥락에서 기후위기에 계속 기여하고 있고, 그 사실이 우울을 유발한다는 점도 생각한다. 만약 이 모든 것을 다른 방식으로 실천가능했어도 우울했을 것 같기는 하다.. 혼자 실천한다고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개인의 실천도 문제지만, 그보다도 심각한 건 단 한번의 결정으로 일반 노동자 몇십만명이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내보내는 자들을 막지 못하는 게 더 문제니까.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소비시스템도 그렇고, 이토록 여유없이 살아야만 하는 이 상황도... 그리고 이것은 강압적으로 이루어져서는 곤란하다. 다양한 목소리들이 정의의 이름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 붕괴를 막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할 시간이 우리에게 남아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누군가가 피해를 일방적으로 감수하게 할 수 없다. 정의의 이름에 포함되지 않는 목소리가 많을 수록, 기존 시스템이 하던 일과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구독 ai이야기를 한다. 사람은 필요없고 데이터와 자본이 있으면 되는데 이 자본을 끌어오려고ai를 구독방식으로 만들어서 돈을 벌겠다는 거다. 사회복지사가 해왔던 노인과의 대화도 이제 ai가 한다고 한다. 사람보다 더 친절하고 다정하니,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은 걸까? 이들은 ai가 사람처럼 행동하기만 해도 괜찮나? 노인이 되어서 ai와 소통하고 싶은 노인이 되고 싶은건가? 차라리? 나는 이들이 내놓은 대안이라는 게 당신들은 이렇게 살지 않으리라는 확신때문인 것 같다.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나라면 사람을 만나지 않고 AI와만 접촉해야 한다면 삶에 의미를 잃을 것 같다. 아닌가, 지금도 딱히 삶의 의미를 못느끼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걸까? 어찌되었건, 이 시선은 노인을 철저히 관리대상으로 보는 입장으로밖에 안 읽힌다. 

게다가 이들이 연구개발을 진행하지 못하는 이유를 정부규제 및 투명성을 요구하는 세력을 이유로 들던데, 여기서 투명성은 '윤리성'을 의미하는 건가? 이루다의 실패 이후에도 사람들의 사고라는 블랙박스를 필요로 하는 건가?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든, 그들이 사용하는 데이터라는 건 사람들이 인터넷에 퍼올린 말들이고 그들의 삶이 담긴 자원이다. 저작권이 있는 것만 저작료를 내면 끝나는 게 아닌데 마치 저작료정도는 감수할 만한다는 듯이 말하는게 당혹스러웠다. 이들 모두에게 혜택을 제공할 것도 아니면서, 무얼 위해서 AI개발을 한다는 건지... 우리가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부 역시도 연결되어 있다면, 단지 다른 사업자가 더 빨리 무언가를 개발하여 상품화할 것이라는 점에만 매달리지 않아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이 일을 하기 위해 소모하는 에너지는 기후위기에 역행하는 일일지 아닐지도 궁금하다. 

예술이 예술일 수 있는 건, 법과 규칙으로는 다 포용되지 않는 삶을 잘라내지 못하고, 다시 삶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인데, AI가 만들어낸 '예술'이라는 것이 이러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까? 데이터들의 집합이 무엇을 도출해낼지 알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모른다는 건 어쩌면 더 나은 가능성을 도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더 나은 가능성조차도, 인간이 AI의 결과물을 보고 만들어낸 가능성이지 AI가 만들어낸 가능성이 아니다. AI는 결과물에 반응하지 않고, 인간이 AI의 결과물에 반응하는 것이므로. 데이터가 편향적인데 도출된 결과물이 이루다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사람도 추상화를 하면서 필요없는 데이터들을 걸러내는데, AI는 더 정량적으로 데이터를 걸러내지 않을까? AI는 인간사회가 무엇을 좋아하도록 제도화했는지 걸러낼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러나 AI가 만든 결과물이 예술로서 감동을 일으킬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 좋아한다고 도출된 것만 계속 전달한다고 해서 사람이 그것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니까. SNS를 하고 책을 읽는 건 너머의 어떤 삶을 상상하며 소통하려 하기 때문이라 여겨서, AI와의 소통을 누가 바랄까도 궁금하다. AI가 인간의 확장으로 작동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를 인격으로 느낄 때, 그럼에도 우리가 그를 도구로 대할 때, 나는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어서 두렵다...

AI가 대신할 수많은 일자리들이 없어지는 세상도 두렵다. AI를 윤리적으로 작동하게 하려고 폭력적인 데이터를 걸러내는 보이지 않는 노동자들의 노동이 지속되는 세상도 두렵다. 



특히나 우리의 목표가 사회와 자연 세계를 더 많이 구하고 피해를 줄이는 것이라면 이 어려운 순간에 무엇을 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소중한 시간을 몽땅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고 남은 삶을 그것에 맞추어 갈 기회를 지연시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거대한 사회적 혼란에 직면하여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을 탐색하기 시작조차 하지않는 것은 패배주의라고 간주한다. 이것이 우리가 사회 붕괴를 예견하는 것에 담긴 다양한 의미들을 논의하는 책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 이유다.
심층적응 Deep Adaptation은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인한 산업소비사회의 잠재적이거나 가능한 또는 불가피한 붕괴에 대응하기 위한 의제이자 틀framework이다. ‘사회 붕괴 societal collapse"
라는 용어로 우리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지속성, 보호, 건강, 안보, 즐거움, 정체성과 의미에 관한 산업소비주의 양식의 불균등한 중단이다.
환경적, 경제적 또는 정치적 붕괴보다 이 ‘사회‘라는 단어가 중요한 이유는 이런 불균등한 중단들이 사회에 두루 퍼지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우리 처지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붕괴‘라는 용어는 반드시 급작스러울 것 같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시스템이 포괄적으로 그리고 그 전의 모습으로 돌이킬 수 없도록 파괴되는 형태를 함축한다. ‘심층‘이라는 용어에는 기후 영향 적응에 관하여,
우리 자신들 그리고 우리 조직과 사회들 내의 원인과 잠재적 대응들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감으로써 주류적 접근들의 의제와 대비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Klein et al, 2015). - P19

"멸종반란은 생태적 이유로 인한 문명 붕괴와 대량 멸종을 막기 위해 수천 명의 사람들이 기꺼이 채포될 용의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 P16

우리의 일반적 생활방식의 취약성은 2020년 한 바이러스가 처음의건강상 영향을 넘어서서 일련의 연쇄적 효과들을 촉발시켰을 때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를 시작으로 의약품과 보호장구, 식량 부족을 겪었고,
경제 활동의 둔화, 국내적 정치 격변, 외교적이고 지정학적인 갈등, 그리고 경제적 충격을 줄이거나 지연시키기 위한 엄청난 국가 부채가 초래되었다. 여러 곳에서 생겨난 자원활동가 주도의 상호부조 활동은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주는 지표다. 코로나-19는 지구화된 경제에 스트레스 테스트가 되었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무엇이 심층적으로 중요한지를 가감 없이 일깨워주기도 했으며 미래의 재난들과 심리적 불안에 대한 실시간 예행연습이기도 했다(Read 2020:ch. 26; Gray 2020). 일부 사람들이 사회 붕괴를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문제로 생각할 때, 유엔이 잠재적으로 코로나-19보다 더 심각한 것을 포함하여 코로나바이러스의 발병이 환경 파괴와 기후변화 모두로 인해 발생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경고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UnitedNations 2020). 이러한 분석은 기후변화의 간접적 영향들에서 비롯하는혼란들이 이미 세계 대부분의 사회에서 느껴지고 있음을 뜻한다. - P20

2019년 11월, 일곱 명의 유력한 기후과학자들이 <네이처>지의 기고를 통해 사회 붕괴가 불가피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지구의 상태를 조절하는 알려진 지구 기후 티핑 포인트 15개 중 9개가 이미 작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Lenton et al. 2019).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우리의 기후 상황에 대한 과학자 다섯 명의 의견이 생물과학지에 실렸고 인류에 대한 경고로서 11,000명이 넘는 전 세계 기후과학자의 서명을 받았다. "기후 위기가 다가왔고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가속화되고 있다. ..… 예상보다 심각하며, 자연 생태계와 인류의 운명을 위협하고 있다…."(Ripple et al. 2019). 기후변화가 인류에게 그토록 위험스러운 이유들은 2장에 설명되며, 기후과학자들이그 위험성에 대한 진술에서 왜 보수적인지는 1장에서 설명된다.
2020년에는 2백 명의 과학자가, 다른 기후 및 환경적 인자들이 상호작용하며 서로 증폭하는 방식 때문에 ‘지구의 시스템적 붕괴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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