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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의 성정치 - 여혐 문화와 남성성 신화를 넘어 페미니즘 - 채식주의 비판 이론을 향해 ㅣ 이매진 컨텍스트 68
캐럴 J. 아담스 지음, 류현 옮김 / 이매진 / 2018년 10월
평점 :
˝평등은 관념이 아니다. 평등은 실천이다.…우리는 원칙을 포기하는 ’결정자‘가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모든 일이 다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관여자’가 필요하다˝14-15p
말은 쉽지만, 평등을 관념이 아니라 실천으로 행하기 위해서는 어느정도까지 자신을 숙고해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든다. 평등하다 여긴다 한들, 상대도 역시 관계가 평등하다고 여기고 있을지는 또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평등을 말로만 배우고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학습한 것은 의무교육과정을 졸업하고 난 이후였던 것 같다. 발달장애인 시설에 갔을 때, 한 사람과 6개월간 매주 만났을 때, 나는 6개월이라는 기간이 끝나가는 그 즈음에서야 이 사람과 내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그 이전까지 이 사람이 반응하는 데에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이 사람을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공부해야 했으니까. 살아온 삶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므로. 우위에 서지 않고, 그렇다고 끌려다니지도 않으려면, 계속 살펴야 했다. 이때의 경험을, 나는 평등을 처음 학습한 때로 기억한다. 우리가 그 순간 평등하다 여긴게 나의 착각이었을 지라도, 나와 조건이 매우 다른 사람과 오랜 기간이 걸려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경험은 이 경험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경험을 어떻게 다른 평등과 연계지어 생각할 수 있는지, 그에 관해서는 아직 모르겠다. 원칙을 포기하는 결정자가 되지 않고, 모든 일이 연결되어 있다는 관여자로 자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속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방식으로는 가능해보이지만, 언제까지 그 방식을 지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매 순간 숙고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대로 사는 경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동물은 자기의 운명이 다른 어떤 존재나 그 존재가 놓인 운명의 은유로 사용되면서 부재 지시 대상이 된다. 은유적으로 부재 지시 대상은 원래 의미가 그 단어하고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위계 관계에 동화되면서 반감되는 무엇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동물의 운명이 지니는 원래 의미는 인간 중심적 위계 관계에 흡수되고 만다. 특히 강간 피해자나 구타당한 여성에 관련해 동물이 경험하는 죽음은 피해 여성의 뼈저린 아픔을 대신 표현하는 데 사용되면서 의미가 반감된다." 105p
"여성이 자신을 고깃덩어리로 느낄 수 있고 현실에서 고깃덩어리로 취급받을 수도 있지만, 감정적으로 도살되고 물리적으로 구타당하는 동물은 정말 고깃덩어리가 된다. 급진 페미니스트 이론에서 사용되는 이런 은유들은 적극적인 상징적 행위와 글자 그대로 동물의 운명을 무시하는 소극적인 폐쇄, 부정, 생략 행위 사이에서 교차한다. 은유 자체는 억압이라는 겉옷 안에 받쳐 입은 속옷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p113
페미니즘 책을 벌써 6권 이상 거쳐왔는데(제대로 꼼꼼히 읽지는 못해서 거쳐왔다고 표현했다) 아직도 페미니즘이 내 삶에 자연스러운 관념인지 의문이 든다. 육식과 페미니즘을 연결짓는 다큐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오로지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임신과 출산을 반복해야 하는 동물의 삶이 착취란 사실을 깨닫게 되어 놀랐고, 폭력에 가담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동물에 가해지는 폭력을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은유로 사용하는 일이 또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 은유가 함께 쓰여질 수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겠지만, 헷갈리기 시작했다.
실상 비거니즘에 관하여 접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2014년경이지만, 페스코 베지테리언으로 한동안 살다가 사정상 식단을 선택할 수 없을 때에 2-3년간 육식도 했으므로, 나는 알게 된 것을 삶에서 실천하지 않은 기간이 꽤 길다. 이때의 부채감이 근 1년간 비건을 도전할 때 스스로를 좀먹기도 했다. 그렇지만 비건을 실천하는 기간이 길어지자 한편으로는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다. 더이상 동물을 소비할 때 하던, 자신을 갉아먹는 사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미각에 졌다고 스스로를 경멸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비건을 하시는 분들 앞에서, 스스로가 생각하는 바대로 살고 있지 않다고 주늑들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내가 비건을 1년 가까이 지속한 건, 엄밀히 말하면, 비건을 지속하면서 비거니즘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분들 덕분이다. 이들의 존재가 처음에는 괴로웠지만, 지금으로서는 이분들이 없이 비거니즘을 지속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결국 동물의 고통이 내가 비거니즘을 지속하게 만들었다기 보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네트워크가 나를 비거니즘으로 이끈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육식의 성정치>에서 동물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은유로 쓰이는 것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더 집중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장 부주의한 부분이 이 부분일 테니까. 동물과 함께 살아가지 않는 한, 나는 내내 이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할 것이기에. 나와 함께 하는 비인간동물인 고양이는, 어쨌거나 타자의 살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종이니까. 나는 부재지시대상이 된 다른 동물을 계속 무시하는 방식으로 삶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이들을 부재하는 것으로 생각치 않았다면, 아마 일상생활을 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 같다는 점에서도, 이 과정이 내 삶에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나는 무결하지 않다. 다만 내가 직접 죽일 수 없으니, 먹지는 않을 것. 도살제도는 인간사회에만 있고(p119), 나는 이 제도가 생산한 것을 먹지 않고 싶다.
'죽여도 되게 하지 말지어다'라는 헤러웨이 선언문에 나온 문장을 자꾸 들고 오는 것도, 내 감수성이 그정도까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 안주하고 싶지 않다. 내게 감수성이 부족하다면, 감수성이 있는 사람을 따라해서라도, 죽여도 되지 않는 방식대로 살고 싶다. 그걸 위해서 동물권 관련 책들도 한동안 읽었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성경을 읽듯이, 나도 동물권 감수성을 불러일으켜서 일상에서 실천을 지속하려고 책을 읽었다. 지금은 감수성을 부르지 않고, 그저 규칙이기 때문에 따르고 있지만 말이다.
<육식의 성정치>는 어쩐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설명하는 듯 하다.
"채식주의와 평화주의는 필연적으로 결부돼 있다는 믿음이 생겨난다. 동물이 인간의 소비를 위해 존재한다는 지배적 에토스에 저항하는 행동은 전쟁 상태에 있는 세계에 저항하는 행위다. p272
따라서, 채식주의는 어떤 생명을 포기해도 괜찮고, 감수할만 하다는 전쟁을 명령내리는 입장에 있는 결정자가 아니라, 모든 일이 연결되어 있다는 관여자가 되려는 시도라고. 신체를 해체하여, 토막내고,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요리한 죽음이 담긴 고기를 먹는 행위를 거부하는 것으로. 나와 저 죽음의 연결고리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그로서 마찬가지로 부재 지시 대상이었던 여성을 다시 연결되게 하는 것. 죽여도 되는 존재라 죽이는 게 아니라, 불가피할 경우를 가르고 가르는 노력들이 담긴 것이라고. 따라서 육식은 포기해야 하는 욕구가 아니라, 연결고리를 잃어버린 상태이며, 채식주의는 그 연결고리를 되찾아 다시 발언권을 획득하고자 하는 시도인 것이다. 이로서 평등을 다시금 실천하는 일이다.
나는 육식을 포기한 적이 없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고기를 향한 어떤 욕구나 갈증도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 p282
동물의 신체는 의미를 수반한다. 이런 의미는 동물이 고기로 전환될 때도 지각될 수 있다. 우리의 신체는 음식 선택을 통해 의미를 발산한다. 음식을 얻으려고 동물을 죽이는 행위는 페미니즘의 문제다. 페미니스트들은 음식 선택의 긴장도니 분위기와 부재지시대상의 구조 때문에 이런 문제를 제대로 주장하지 못했다. 채식주의 신체를 가까이 하면 부재 지시 대상을 , 그리고 신체에 매개된 지식을 회복할 수 있다. p312
채식주의는 육식사회를 향한 비난을 넘어선다. 육식이 남성 권력에 연관돼 있다는 점에서 채식주의는 가부장제 사회를 향한 비난이기도 하다. 만약 당신이 소고기 취식, 남성 통제, 식민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식민주의자인 영국인 육식인들은 당신을 온전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p335
채식주의의 현상학은 동물들 또는 동물의 운명을 여성의 상태하고 동일시한다. 그리고 접합의 문제들, 곧 크게 말해야 할 때 또는 침묵해야 할 때의 문제, 음식 선택을 통제하는 문제, 육식을 승인하는 가부장제 신화들에 도전하는 저항의 문제를 동일시한다. ... 우리가 핵 절멸을 위해 행사할 권력 또는 경직된 사회의 관행에 근거한 개개인의 잔혹 행위에 맞서 행사할 권력을 고려하게 되면서 채식주의가 가부장제의 도덕 질서를 바로잡는 핵심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p344-345
인간동물이나 비인간동물이나 고통받을 때는 별개의 존재로 대해야만 부재 지시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가 연결되어 있을 때는 우리는 다른 위계 속에서도 어쩌면 평등을 실천하는 관계일 수도 있다. 나는 아직 이 간극을 잘 설명하지는 못하겠다. 앞으로 더 고민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