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먼즈란 무엇인가 - 자본주의를 넘어서 삶의 주권 탈환하기
한디디 지음 / 빨간소금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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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숲속에 있는 치료제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것이 쓸모없다고, 단지 숲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불이 숲을 사라지게 만들면 내가 가진 풍요로운 지식은 그것으로 끝이 난다. 이 모든 불이 나를 슬프게 한다.” P71
장소가 인간과 관계맺는 방식중 하나. 도시에 사는 나는 장소와 관계맺는 방법은 잊고, 오로지 사유한 물건과만 관계한다. 존재의 공허감은 그 물건들과도 제대로 관계맺지 않을 때 발생하는 것 같다. 모든 물건과 똑같이 무거운 무게의 관계를 맺어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버리는 게 지나치게 쉬운 삶의 양식도, 버린 것들이 어디로 가는지 은폐되는 삶의 양식도 책임과는 무관해보인다. 나와 연관된 삶의 순환을 감각하지 못하니 내 삶도 분리되어 고립된 채로 떠도는 게 아닐까. 고립에서 서사가 발생하지 않는다. 때문에 내가 살아내고 싶은 커먼즈, 관여하고픈 커먼즈에 함께하고 싶은 것 같다. 나를 감각하게 하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과 어울리고 싶은 것이다.
커먼즈라는 삶의 양식은 저자도 말했다시피 진보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나는 진보라는 개념 역시 선형적 발전에 기초한 개념이기에, 이성중심,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이 아닌가 싶어서, 다시 고민하고 싶다. 진보와 보수가 한 쌍으로 재개념화되었을때에는 모호해지는 측면이 있는데, 발전이라는 개념과는 동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진보라는 개념을 어찌 해석할지 모르겠다.
관계라는 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고, 상호적인 것이고 변화하는 것인데 선형적 발전은 장소성이 남아있나? 모르겠다. 적어도 자본주의가 성장하게 했던 것을 선형적 발전이라 일컬은 것이라면, 자본의 성장은 착취에 기반해있으니, 자본주의에서 권력을 쥔 사람에게도, 권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장소성이 없어 보인다. 권력을 쥔 사람에게는 장소성보다는, 돈으로 환산가능한지가 중요하고, 권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자본의 논리 하에선 장소와 관계맺는게 어렵다.

때문에 커먼즈가 있으면 다른 변화를 꽤할 수 있는 것 같다. 다만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가 가능한 커먼즈는 항상 일어난 일은 아니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가부장제와 위계적 폭력은 존재했다. 따라서 커먼즈 자체가 중요하다가 보다는, 어떤 커먼즈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가가 중요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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