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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색인
이상문 지음 / 책만드는집 / 2012년 11월
평점 :

황색인 / 이상문
건너가는 차는 앞에서 끊겼다. 강가의 어시장에는 새우, 우렁이, 피라미 새끼들이 무덕로 쌓여 있었다. 농라를 쓰고 응애에 검정 파자마를 입은 여자들이 부지런히 파리를 쫓고 있었다. 이 햇빛 속에서 저것들은 모두 썩고 있을 텐데. 여자들의 때에 전 모습이 새우나 우렁이들과 함께, 그들도 썩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
한쪽 하늘을 성곽이 치받고 있었다. 그는 성곽의 끝에서부터 시선을 끌어 내렸다. 부서진 성곽이었다. 전체가 흑갈색이었는데 지붕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고, 돌기둥과 부서진 벽돌만 남아 있었다. 강가의 언덕 위에 성이 하나 전설에서처럼 서 있었겠군..... 그는 턱없는 감상에 젖어들었다. 차례가 되어 다리를 건너면서도, 손으로는 총허리를 부여잡고 눈으로는 몇 번씩 부서진 성곽을 돌아다보았다.
-P.25-
1.
베트남을 여행할 때, 베트남 친구를 사귀게 되면 베트남 전쟁에 대해 꼭 한번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그 전쟁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토록 잔인한 만행을 저지른 한국인들에 대한 감정이 어떤지에 대해서 말이에요. 생각보다 기회는 쉽게 찾아왔습니다. 한국군이 주둔했던 아름다운 도시 나쨩의 해변가에서 저는 친구 Truc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질문을 해야겠다 마음먹은 데에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습니다. 제 큰 할아버지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셨던 분입니다. 호랑이 할아버지라고 불릴정도로 무서웠던 그분께서, 어느날 술에취해 자식들에게 그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 자신이 죽였던 베트남 병사의 눈을 잊을수가 없다고 말이죠. 아버지께 전해들은 그 말이 마음 한구석에 짐처럼 남아있었나 봅니다. 모두가 불행했던 전쟁속에서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싸워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저는 꼭 풀고 싶었습니다.
속이 깊은 친구 Truc은 어설픈 영어로 던진 질문에 한참을 고민한 뒤 답해줬습니다. 물론 그 전쟁은 모두에게 피해를 준 있어서는 안될 비극이였다고 말이죠. 그렇지만, 그 일로 내가 미안해 할 필요는 없다고 답했습니다. 단지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고 말하며, 나와 자신은 한때 총뿌리를 겨누었던 다른 민족이지만, 지금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며 이렇게 웃을수 있지 않냐고 대답하는 Truc에게 저는 알 수 없는 감정들로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Truc의 말처럼 단순히 과거는 과거로 묻을 수 있는걸까요? 그러기에 우리는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건 아닐까요. 저는 Truc 개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뿐, 그것이 모든 베트남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는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이야기는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저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읽게 된 <황색인>은 제 생각을 더욱 깊게 만들어 줬습니다.

월맹군 춘계공세', '미군과 한국군 3백 명 사상', '캄ㆍ월 접경서 베트콩 가세', '캄군 베트콩 2백 명 사살', '태국군 접경으로 공산군 침투에 대비', '라오스 각의 파테트라오안案 거부' 큰 제목들만 훑어보았다. 월남, 라오스, 캄보디아가 한 솥에 든 빨래처럼 뜨겁게 삶아지고 있었다. 이들 국가들은 한데 섞여 베트민(월맹)이니, 크메르루즈니, 파테트라오니 하는 공산 세력들과 극심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왜 싸워야 하는가? 세계 평화를 위해서 싸우는 것인가? 싸움을 위해서 싸우는 것인가? 공산 세력은 왜 생겨난 것인가? 이런 세력들이 없을 때도 국가도 있었고 민족도 있었는데..... 결국은 두 세력의 싸움이 아닌가.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인가.
-P.228-
2.
<황색인>은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입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보다는 베트남 전쟁을 겪고있는 미군과, 한국군, 베트남인 개개인의 이야기에 중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단순히 감성적인 측면에서 이야기 하지 않고, 그 객관적인 사실들을 담담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작품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것도 주인공들개개인의 시각이라기 보단,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바라보며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기에, 이러한 효과는 더욱 배가되어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박노하 병장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황칠성 상병의 후임으로 보급지원부대에 파견되는데요. 그가 파견된 '벅 컨택'은 전장이라고 하기엔 사뭇 여유롭고 윤택한 분위기 입니다. 더불어 자신과 마음이 잘맞는 김유복 중사의 존재는 타지에서의 파병생활에 큰 힘이 됩니다. 새로운 부대에서 생활하며 그는 베트남의 비참환 환경을 접하게 됩니다. 군인들을 대상으로 몸을 파는 베트남 여성들, 전장의 비참함 속에서 누군가의 품에 안기지 않으면 미쳐버리는 군인들의 모습을 말이죠. 그런 중에 박노하 병장은 베트남군 띠엔의 여동생이자 시내의 카페 주인이기도 한 띡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겉으론 베트남군이지만 실제로는 왕정복고를 준비하고 있는 띠엔, 전쟁의 그늘에 가려 이유 없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느끼고 결국 미쳐버린 친구 허만호 상병, 임신한 몸으로 윤락가에서 일하고 있던 베트남 여성을 동정해 그녀에게 아낌없는 도움을 주는 김유복 중사 등의 인물들은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고통스러워하지 마세요. 돌아가세요. 한국은 당신의 나란데요, 뭐. 작은 체격과 누런 얼굴이 같고, 가난해서 설움 받는 것이 같고, 또 교활한 원숭이들이 제 몫을 늘리기 위해 가진 자들한테 두 손 싹싹 비벼대는 통에 허리 부러진 나라에 살게 된 사실도 같지만, 이곳은 당신의 나라가 아닌 월남이에요."
-P.432-
3.
1987년 출간된 책은 25년만에 복간되어 다시 우리에게 베트남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 합니다. 책이 복간된 지금에 과연 세계는 과거와 달라져 있을까요? 물론 한국과, 베트남이라는 국가는 당시에 비해 많이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시야를 조금만 넓게 가지면 그때의 후유증이 쉽게 눈에 들어옵니다. 독하디 독한 고엽제로 수많은 기형아가 탄생했고, 이제 성인이 되어버린 라이따이한의 문제는 묵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일본이라는 국가를 무척이나 미워합니다. 역사적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으며,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 뻔뻔함에 화를 내는 것이지요. 저 역시 이러한 태도에 무척이나 화가 납니다. 역사를 배우다 보면 그 잔혹한 역사를 감추려하는 원숭이들이, 물에 잠겨버렸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니까 말이죠. 하지만 베트남을 생각해보면, 우리역시 같은 가해자의 입장에서 무척이나 뻔뻔하게 살아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역시 베트남에 해서는 안될 만행을 저질렀고, 그를 바탕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을 역사교과서에서 매우 가볍게 다루고, 라이따이한이나 고엽제 문제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계대전 이후 남아도는 무기처리장과, 제초제의 시험장이 되어버린 베트남전에서 과연 총구를 겨누었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풍요에 대한 이기심이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졌던 전쟁이였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전쟁들은 종교와, 종족이라는 교묘한 이름으로 위장한채 벌어지고 있습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일까요. 읽는 내내 마음이 쓰렸습니다.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하는데, 왜 인간은 똑같은 범죄를 되풀이 하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