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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4
김시습 지음, 이지하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평점 :

그러나 저 신의 없는 도련님이 한 번 가 씨 집안의 향을 훔친 뒤로 원망이 천 갈래로 생겨났습니다. 여리디여린 몸으로 서러운 고독을 견디다 보니 그리운 정은 나날이 깊어 가고 큰 병은 나날이 더해 가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장차 한 맺힌 귀신이 될 듯합니다.
부모님께서 저의 소원을 들어 주신다면 제 남은 목숨을 보존하게 될 것이고, 만약 간곡한 청을 거절하신다면 그저 죽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생과 저승에서 함께 노닐지언정 맹세코 다른 가문으로 시집가지는 않겠습니다.
-P.49-
1.
책을 읽다보면 종종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과연 '소설'의 기준이 무엇일까에 대한 그 명확한 정의와, 범주에 대한 의문입니다. 허구성이 짙게 드러나는 에세이도 있고, 수필처럼 보이는 소설들도 있습니다.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라는 사전적 지식에 근거해 봤을때, 소설의 정의는 무척이나 모순적입니다. 제가 앞에서 말했던 이야기들이 모두 기존의 상식과 대조되는 사례이니까요. 이렇듯 모호한 기준속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라는게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 궁금해졌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라 불리는 「금오신화」가 탄생하게 된 것은 사상사의 흐름에서 그 요인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 조선은 일부의 지배층이 지배질서를 확립하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집권층의 생활기반을 확립하고자 했던 신분제가 존재하는 나라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외된 일부의 지식인들은 민중의 처지에 동조하면서 새 왕조의 이념적 모순과 사회적 폐단을 비판하고 새로운 사상을 모색했는데요. 그러한 소외된 지식인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김시습'입니다. 세조의 왕위 찬탈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경험하며, 그는 스스로 벼슬을 포기합니다. 높은 이상과,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평생을 방랑하게 되는 김시습의 삶은, 「금오신화」라는 작품 속에 은근히 녹아들어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이가 폭력으로 백성을 위협해서는 안 될 것이오. 백성들이 두려워서 따르는 것같이 보이지만 마음속으로는 반역할 뜻을 품고 있어서 날이 가고 달이 가면 큰 재앙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오. 덕이 있는 사람은 힘으로 왕위에 올라서는 안 되오. 하늘이 비록 거듭 말해 주지는 않아도 행사로 보여 주니, 처음부터 끝까지 상제의 명령은 지엄한 것이오. 대체로 나라라는 것은 백성의 나라요, 명이라는 것은 하늘의 명이오. 그런데 천명이 떠나가고 민심이 떠나가면 임금이 비록 제 몸을 보전하고자 한들 어떻게 가능하겠소?"
-P.102-
2.
「금오신화」는 다섯편의 이야기가 실려있는 이야기집입니다. 다섯편의 이야기는 모두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기이한 이야기들 인데요. 이러한 전기소설적 요소는 현실을 우의적으로 표현하는 우화 같기도 하고, 괴담 같기도 합니다. <만복사저포기 : 만복사에서 저포놀이를 하다>, <이생규장전 : 이생이 담 너머를 엿보다>, <취유부벽전기 : 부벽정에서 취하여 놀다>, <남염부주지 : 남염부주에 가다>, <용궁부연록 : 용궁 잔치에 초대받다> 각각의 이야기는 남원, 송도, 평양, 경주 등 조선 각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요.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이야기가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은 생사를 초월한 남녀간의 애정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사실 비슷한 스토리의 이야기입니다. <만복사저포기>는 왜구의 난에 희생된 처녀의 환신과 불우한 서생간의 짧은 사랑과 운명적인 생사의 이별을 그리고 있는데요. <이생규장전>은 비극성과 현실성이 강화되었습니다. 가문의 지체를 달리하는 남녀 주인공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쟁취하였으나 홍건적의 난으로 여주인공이 비명에 죽자 그 피란했던 남편이 아내의 환신과 더불어 미진한 사랑을 더 나누고 마침내 유명을 달리한다는 이야기로 <만복사저포기>보다 좀 더 구체적입니다.
<취유부벽정기>는 고조선․고구려의 유적지인 평양 부벽정에서 회고의 상념에 젖어들던 개성출신의 청년이, 위만의 찬탈 후 단군의 신력으로 선녀가 된 기자조선의 마지막 공주와 만나 하룻밤의 시정을 나눈 뒤 그녀를 따라 선계로 올라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망국민의 우수와 한을 품은 남녀 주인공의 현상에는 불의와 폭력으로 유린당한 역사과정과 현실에 대한 작가의 고뇌와 비분이 투영되어 있는데 두 주인공의 결합을 매개하고 있는 회고적인 역사의식과 이에 따른 애상적인 정조가 작품의 구도와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남염부주지>는 강직한 성품과 비판적 사상의 소유자인 주인공이 꿈에 염부에 가서 염라왕과 더불어 정치․철학․사회적 제문제에 대한 문답과 토론을 나누고 돌아온 후 염왕의 선위를 받아 이승을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과 염왕 사이의 대화와 논변을 통해 당시 민중을 현혹하고 있던 불교의 천당․지옥설과 귀신숭배 및 각종 미신에 반대하는 합리적․현실주의적 사상을 제창하는 한편, 국가의 기본이 백성에게 있으므로 봉건군주와 지배층이 폭력으로 백성을 억압하거나 권력을 탈취하면 민중의 항거가 불가피해진다는 민본사상을 피력하고 있는데요. 국가에 대한 비판의식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있는 작품이였습니다.
<용궁부연록>은 불우한 문사인 주인공이 꿈에 용궁으로 초대를 받고 가서 자신의 문재를 한껏 휘해 전각의 상량문을 써주고 기이한 용궁의 별경을 구경하며 그곳의 군신들과 극진한 환락을 맛본 후 후한 상금까지 받아가지고 현실계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임금과 신하가 갈등없이 화합을 강조하는 이야기는 도교적 색채가 많이 묻어나는 작품이였습니다.

"음계와 양계가 길이 달라서 서로 다스릴 수 없으나 용왕께서 위엄이 있으신 데다 사람을 알아보는 눈도 밝으시니 그대는 반드시 인간 세상의 이름 높은 문장 대가일 것이오. 용왕님의 청이니 거절하지 마시오."
-P.112-
3.
'김시습'의 작품세계는 현실과 환상의 절묘한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체험을 당대인의 삶 속에 용해시켜 좌절과 소외 속에 고통받는 인물의 형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이는 불합리한 봉건사회 현실을 비판적으로 제시합니다. 동시에 작가는 좌절된 당대인의 요구와 자신의 이상을 여기에 투영시켜 환상적․낭만적 사건을 연출함으로써 당대 사회에서 실현될 수 없었던 그의 사회․윤리적 이상을 구현하고 이상을 추구합니다. 유교, 불교, 도교의 각기 다른 종교가 하나의 작품에 모두 등장한다는 점 역시 이러한 화합적 이상으로 볼 수 있을겁니다.
「금오신화」가 발견된 것은 사실 얼마 되지 않았는데요. 당시 사회에서는 왕을 비판하는 소설이 용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김시습 스스로가 작품을 숨겼고, 이후 행방이 묘연했던 것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작품은 400년뒤 일본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원본이 아닌 필사된 이본입니다. 우리나라의 첫 소설이 일본에서 처음 발견되었다는 점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금오신화」는 중국판 요재지이같은 기이한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배경을 알고 본다면 무척이나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로 느껴집니다. 작품속 주인공들은 모두 작품의 마지막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합니다. 산으로 들어가거나, 죽음을 맞이한다는 설정은 자신의 힘으로는 바꿀수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아니였을까 추측해 봅니다. 김시습의 생애와 연관지어 살펴보면 더욱 재미있는 의미있는 이야기 「금오신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