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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믿어지십니까? 그 당시 저의 제일가는 친구가 10엔 동전으로 말을 하는 수수께끼의 존재였다는 것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무서운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체도 모르는 존재에게 마음을 완전히 허락하고 있었다니. 실제로 어느 친구에게도 말 못할 비밀까지 사나에에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P.33-
1.
우리는 참으로 많은 금기 속에서 살아갑니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려서는 안되고, 물건을 훔쳐서도 안 된다는 사회적 질서 확립을 위한 법규적 금기도 존재하지만, 혼자서 귀신을 불러서는 안 된다, 사람이 죽어 무덤을 팔때 자리를 여러개 파면 그 자리수만큼 사람이 죽어나가기에 무덤자리는 하나만 파야한다는 비이성적인 금기도 존재합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의 목적으로 이해가 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최첨단 시대에 이런 비이성적인 금기는 우리에게 호기심과 공포를 동시에 불러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금기들을 과연 얼마나 잘 지키고 있을까요? 저는 종종 신호등에서 무단횡단을 하기도 하며, 아무데나 침을 뱉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소한 행동들은 보통 별 악의 없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다는 생각에 무심코 금기를 어긴 그 순간. 세상은 내 생각과 전혀 다르게 바뀌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무단횡단을 하다 빠르게 달려오는 차에 치일수도 있을 것이며, 바닥에 침을 뱉는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결벽증 환자에 의해 살해당할수도 있습니다. 지나친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금기라는 것은 빈번하게 발생되었던 사건을 근거로 만들어진것이 대부분 입니다.
일본의 호러소설 작가로 잘 알려진 '오츠이치'의 <베일>은 이러한 금기에 관한 중.단편분량의 이야기들 입니다. 책에 실린 두 편의 이야기는 각기 비이성적인 금기와, 현대의 법규적 금기를 어긴 이들이 겪는 끔찍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데요. 어둡지만, 차갑지만은 않았던 이야기들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였습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언제부터 저는 분노나 증오와 같은 인간다운 감정을 잊고, 그저 상처 입히는 데에 기쁨을 느끼는 짐승이 되어버린 걸까요. 하느님. 그 말만이 가슴속에서 되풀이되었습니다. 제 안에 잠자고 있던 파괴 충동은 대체 얼마나 무거운 죄악일까요. 하늘에 뜬 달을 우러르며 용서를 빌고, 그리고 물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어느 쪽이란 말입니까. 인간? 아니면 다른 생물일까요?
-P.111-
2.
주위에 도움을 청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혼자 남은 시각. 어둠과 위험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찾아옵니다. 베일은 이렇게 혼자된 이가 금기를 어겨 생기는 기이하고, 끔찍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첫번째 이야기 <천제요호>는 사건이 끝난 시점. 야기의 고백이 담긴 편지 한통으로 시작됩니다. 남달리 허약한 몸을 타고난 어린 야기는,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호기심에 ‘코쿠리 상’ 놀이를 시작하게 됩니다. 처음엔 그냥 장난이였습니다. 학교 친구들이 하는 비이성적인 행위에 관심없는 척 했지만, 어느순간 혼자남은 야기는 코쿠리상에 손을 올려 놓습니다. 영혼을 불러 질문을 하는 초혼술인 이 놀이의 절대적인 룰은 반드시 두 명 이상이 같이 해야만 하며, 한 번 부른 귀신은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 입니다. 하지만 룰을 자세히 알지 못한 소년은 혼자서 귀신을 부르게 되고, 그의 엇나간 소원은 끔찍한 비극을 불러일으킵니다.
두번째 이야기 <가면 무도회 A MAXKED BALL>은 인적 드문 학교 화장실을 배경으로 이루어집니다. 몰래 담배를 피기 위해 사람들이 자주 찾지 않는 화장실을 찾은 주인공. 그는 화장실에서또박또박한 글씨로 적힌 기묘한 느낌의 낙서를 발견합니다. 낙서를 금지하는 낙서. 그 아래 누군가가 의문을 표하는 낙서를 하면서부터 화장실의 타일 벽은 얼굴도 알지 못하는 학생들끼리 낙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공간으로 변하게 되는데요. 교칙을 어긴 학생을 학교에서 ‘배제’하겠다는 최초의 낙서가 단순한 장난이나 위협이 아님이 밝혀지면서 가장 안전한 장소였던 학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때까지는 그 화장실을 늘 나만 쓰는 줄 알았다. 언제 가봐도 사람이 없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드나들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 외에 이용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입학한 뒤로 이 화장실에서 처음 사람의 기색을 느꼈다.
그런데 같은 날 저녁에 다시 한 번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낙서가 두 개 더 늘어 있었다.
-P.132-
3.
두 이야기의 색깔은 전혀 다릅니다. 과연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매력의 이야기가 펼쳐지지요. 첫번째 작품이 비극적인 운명에 초점을 맞춘 초자연적 존재의 이야기라면, 두번째 이야기는 추리물에 가까운,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 입니다. 하지만 그 마무리에 있어서 두 작품은 비슷한 느낌을 풍깁니다. 어둡지만, 결코 차갑지만은 않은 그런 모순적인 느낌 말이죠.
인간이 금기를 어겨 발생한 사건들은 되돌릴 수 없는 과오가 되어, 인간을 속박하는 덫이 되기도 하지만 '오츠이치'가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렵지만은 않습니다. 결국 그 어둠역시 함께라는 조건에서는 큰 힘을 발하지 못하거든요. 전에 읽었던 <암흑동화>의 색깔 역시 또 다른 맛이지만, 그 끝이 차갑지만은 않았다는데 그 공통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짧기만 강한 '오츠이치'느낌의 소설집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