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쓰기
김연수 외 지음 / 물결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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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서 '철들다'는 말은 절기, 제철을 알고 산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계절의 순환을 알고 그에 맞춰 삶을 꾸려간다는 뜻이다. 계절의 순환을 안다는 게 무에 그리 어려울까 싶지만은 '철들자 망령'이라는 우리 속담에서 보듯 사람은 죽기 직전까지 계절의 순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걸 조상들은 은연중에 넌지시 암시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자연의 순리를 어느 정도 깨우친 듯싶은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는 이미 생을 마감할 시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농사를 짓던 조상들도 이럴진대 계절의 변화를 사무실이나 거실 유리창을 통하여 감지하는 나와 같은 도시내기들은 오죽할까 싶다.


그럼에도 계절의 변화를 남들보다 민감하게 느끼는 이들이 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음악을 하는 이들이 그러하다. 계절이 교차하는 그 순간의 특별한 느낌이나 감정을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하지 못하면 매번 우리는 그날이 그날 같은, 변하지 않는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는 것 같은 둔감하고 탁한 느낌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른바 예술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 익숙함이란 결국 죽음과 같은 것이다.


"요새는 알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50년을 살았는데, 다음 해에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요즘처럼 많이 한 적은 없다. 그런데 그것 또한 어쩌면 자연스러운 섭리인지 모른다. 나이 든 사람은 닥쳐오는 어두운 겨울을 애써 들여다보는 대신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는 것도, 이 가을에는, 다가오는 겨울을 생각하면서 아직 어린 것들을 거두어 건사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p.41)


소설가 김연수 외 7명이 공동 집필한 <계절 쓰기>는 각각의 계절에 대해 두 명씩 나누어 씀으로써 사계절을 아우르고 있지만, 글쓴이의 구성이 모두 문학가는 아니어서 책을 읽는 독자들은 다분히 '아, 이제는 인류학자도, 식물분류학자도 계절을 사는 일에 민감해졌구나.'라는 생각에 놀랄지도 모른다. 물론 이와 같은 변화가 최근에 벌어진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우리가 과거에 알던 계절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계절의 모습도, 계절이 찾아오는 시기도, 계절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모두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멈춰 선 게 아니라 지금도 꾸준히 진행 중에 있다.


"정원의 가구에 녹이 슬고 있다. 겨울을 맞아 치워두는 것을 잊은 것이다. 나무들이 뼈대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공기에 불 냄새가 감돈다. 온갖 영혼들이 사냥감을 찾아다니고 있다. 하지만 장미들이, 아직 장미들이 있다. 습기와 한기 속에, 생명이 사라진 듯 보이는 덤불 위에 활짝 핀 장미가, 아직 있다. 저 색깔 좀 봐."  (p.118)


우리는 점점 모호해지는 계절과 계절 사이의 경계를, 두 계절 또는 세 계절이 한 계절에 중첩된 듯한 낯선 계절의 이미지를, 그리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또렷한 사계절의 변화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난여름에 겪었던 혹독한 더위를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것이 끝이 아닐 것이라고, 어쩌면 올여름이 우리가 앞으로 마주하게 될 여름 가운데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지도 모른다고 전망한다. 화석 연료의 사용으로 인한 기후 변화는 히말라야 빙하마저 녹게 했고 네팔 대홍수와 같은 처참한 재난을 겪게 했다. 문제는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계절에 예민한 작가와 학자들로 하여금 예전과 달라진 우리의 계절에 대해 솔직한 느낌을 기술하게 한다.


"그렇게 우리의 여름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바람과 구름이 지나가듯이. 매일의 날씨가 달라지듯이.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고, 낮과 밤이 번갈아 찾아옵니다. 낮은 밤을 모르고 밤은 아침을 알지 못하지만, 여름은 그렇게 지나가고 또 돌아옵니다."  (p.24)


이웃나라 일본은 22일째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 사이에 우리나라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내가 사는 곳을 포함하여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았다. 연일 끈적끈적한 습도로 더 큰 더위를 느끼게 했던 여름에서 벗어나자마자 칼로 무를 자르듯 단칼에 습도를 끊어낸 느낌이다. 그렇게 이어진 건조한 날씨는 등산로의 크고 작은 물웅덩이마저 씨를 말렸고, 그 덕분인지 이맘때면 기승을 부리던 가을 모기도 올가을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샤워를 하고 선풍기를 틀지 않아도 금세 보송보송한 피부로 전환된다. 가을을 만끽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가 이어지고는 있지만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기상이변이 언제 시작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불안의 싹이 움트는 것은 이제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상시적인 현상으로 진화했다. 기상이변을 두려워하면서도 우리는 그 근본 원인에 대해서는 두 눈을 감고 있다. 편안함의 뒷면엔 우리의 불안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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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때의 등산로는 여뀌와 달개비의 세상입니다. 다른 풀과 나뭇잎이 시들시들  말라가는 시기에 여뀌와 달개비는 내 세상입네,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그들 무리 속에 키가 껑충한 미국자리공과 돼지감자도 이따금 한 자리를 차지한 듯 보이지만 여뀌와 달개비의 푸른 생명력에 묻혀 잔뜩 움츠러든 모습입니다. 가을을 노래하는 귀뚜라미 소리가 고즈넉한 숲의 고요를 깨우고 여뀌와 달개비에 맺힌 새벽 이슬이 등산객의 바짓가랑이를 적십니다. 추석 명절이 가까워지면서 가을 느낌이 한층 깊어지는 요즘입니다.


활동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 찾아왔건만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을 생각하면 마음은 한없이 무겁기만 합니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30% 초반대를 보이고 이것이 바닥이라는 징후도 전혀 보이지 않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까닭인지 오는 18일에 대통령의 기자간담회를 갖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18일을 기점으로 대통령의 지지율이 바닥을 찍고 반등에 성공할까요?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지지율은 계속해서 하락할 것이라고 봅니다. 근본적으로 대통령의 자세나 여론을 대하는 태도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며칠 전 자신의 sns에 올린 글에서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은 개혁의 이름으로 개혁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뜻에 반하여 바른말을 하는 사람은 개혁을 방해하는 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른바 윤석열이 자신의 뜻에 반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반국가 세력'이라고 칭했던 것과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자신의 뜻에 반하는 사람들을 향해 '개혁을 방해하는 세력'이라고 하면 민주 대통령이고 '반국가 세력'이라고 하면 반민주 대통령일까요?


전에도 밝힌 바 있지만 나는 성인 된 이후 꾸준히 민주당을 지지해 왔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내가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과 압도적인 차이의 여대야소 정국에서 대통령과 민주당 당대표의 뻘짓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5년의 임기 내내 '명비어천가'만 읊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취임 후 2년도 되지 않은 임기 초반에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정말...


사람은 대체로 자신의 마음속에 억울함이 있으면 그 억울함을 풀기 위해 외부의 적을 세우게 마련입니다. 하나의 억울함이 있으면 한 사람의 적을, 두 개의 억울함이 있으면 두 사람의 적을, 세 개의 억울함이 있으면 세 사람의 적을... 이렇게 자신이 품은 억울함의 개수에 비례하여 외부의 적도 끝없이 늘려가게 마련이지요. 대통령이 지금 그런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나서서 직언을 하면 그 사람의 말에 대해 억울함을 품는 것은 물론 그 즉시 그를 적으로 돌려버립니다. 그리고 속으로는 '나는 잘하고 있는데 왜 저렇게 말할까? 나는 억울하다.'라고 앙심을 품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는 국정 지지율을 끌어올릴 방법이 없습니다. 민주당의 당대표라는 자도 대통령과 뜻을 같이 하여 감찰을 하겠다는 둥 공천을 주지 않겠다는 둥 지지자들을 하나둘 적으로 돌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반등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비판에 대해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이 개선할 점을 살피는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대통령과 그 권력에 기생하는 여권의 정치인들은 그렇게 할 의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지율은 계속해서 하락할 수밖에...


낮에는 제법 올랐던 기온이 빠르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처럼 말입니다. 일교차가 어찌나 심한지 주변에는 감기 환자가 급격히 늘었습니다. 일상에서 우리도 자신의 내부에 억울함을 품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결국 손해를 보는 쪽은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내부에 품은 억울함이 누군가로 향한 증오가 되고, 그것이 분출되면 결국 분란만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니까 말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비판의 말이나 직언을 할라치면 자신의 행동을 살피고 개선점을 찾는 성숙한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정신건강에도 도움이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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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시간 속에서도 음악은 여전히 - 이윤석 산문집
이윤석 지음 / 레가토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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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시기에 학교를 다녔던 나는 당시의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개인의 취향이나 기호는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진로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았다. 예컨대 누군가가 자신의 소질이나 적성에 따라 작가 혹은 연주자, 사진작가나 화가 등 이른바 예술 쪽의 진로를 선택하겠다고 하면 "얘, 그걸로 밥이나 빌어먹을 수 있겠니?" 하는 식의 퉁박을 받기 일쑤였다. 그것도 면전에서 말이다. 물론 그 모든 수모를 무릅쓰고 자신의 의사를 끝끝내 관철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웬만한 사람들은 처음에 가졌던 자신의 생각을 꺾고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뜻에 따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기술보다는 지식을 우선시했던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법대와 상경대의 인기가 압도적으로 높았고, 공대나 예체능 대학을 선택하는 비율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과도하게 공대 진학 비율이 높은 지금의 분위기와는 저절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시대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이윤석 하모니시스트가 쓴 <그 모든 시간 속에서도 음악은 여전히>를 읽으면서 문득 나의 청소년기가 떠올랐던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국가나 기성세대가 개인의 진로를 강제적으로 지정한 것은 아니지만,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의 상황과 개인의 의사가 무제한적으로 수용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윽박지르거나 강압에 의해 진로가 결정되지는 않는 지금의 상황은 모든 게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언제나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기성세대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른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지만 말이다.


"전환점은 초등학교 시절 참가한 아시아 태평양 하모니카 대회에서 찾아왔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크로매틱 하모니카'를 만났다. 반음계를 자유롭게 구사하며 클래식 작품을 완벽히 소화하는 외국 연주자들의 모습은 어린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수소문 끝에 그 악기를 구했고 운명처럼 지그문트 그로븐의 음반을 만났다. 맑고 청아하면서도 단단한 힘이 느껴지는 선생님의 하모니카 소리에 나는 단숨에 매료되었다."  (p.14)


훌륭한 연주자는 많은 연습을 통한 뛰어난 연주 테크닉에서 비롯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걸 나는 유명 연주자들의 인터뷰나 그들의 일대기를 다룬 자서전이나 평전을 통해 잘 알고 있다. 훌륭한 연주자는 테크닉도 테크닉이지만 결정적인 건 내면의 성숙도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윤석 하모니시스트의 산문집을 꽤나 꼼꼼하게 읽었다. 사실 어쭙잖은 연주자나 음악가가 쓴 자서전 형식의 산문집을 읽어볼라치면 자신이 연주자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쳐왔으며, 세계적인 지휘자나 유명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몇 번을 했다는 둥 자랑 일색으로 꾸며지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아서 읽는 데 거슬리거나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이야기를 비교적 솔직하고 담담하게 써 내려감으로써 저자가 특별한 직업인이 아닌, 평범한 이웃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솔직한 속내를 풀어내는 듯한 편안함이 느껴지게 했다.


"사실 이 글의 첫 문장을 쓰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일단 첫 줄을 적고 나니, 그다음 문장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연주와 달리 글은 나중에라도 돌아가 고치고 다듬으며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된다. 물론 끊임없이 수정하고 싶은 욕망이 또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을 완전히 없애는 초인적인 능력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기꺼이 껴안고도 시작하는 용기다. 첫 소리를 내는 용기, 첫 문장을 쓰는 용기, 첫 발걸음을 내딛는 용기. 그것이 연주를, 글을,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p.71~p.72)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피아노는 웬만한 집에선 구경하기 어려운 악기였다. 반면에 기타와 하모니카는 비교적 많은 아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친숙한 악기였다. 나 역시 잘 연주하지는 못하지만 시간이 날 때면 하모니카를 간혹 불어 봤었다. 그럼에도 악기 연주에 영 소질이 없었던 나는 몇 번 만져본 것으로 그쳤을 뿐 연주자로 나서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저자는 국내에 전공조차 없던 시절에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노르웨이 음악원 하모니카 전공자로 입학하여 세계 무대의 심사위원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을 텐데 저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한다. Part I. '선택의 발자국', Part II. '무대 위의 순간들', Part III. '마음이 닿는 순간', Part IV. '음악이 삶을 닮아갈 때'의 총 4파트로 구성된 이 책은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온 한 예술인의 삶의 궤적과 깨달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리가 겪는 사건 자체가 절대적인 행복이나 불행인 경우는 드물다. 당시에는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라 믿었던 일이 시간이 흐른 뒤 성장의 소중한 밑거름으로 재해석되기도 하고, 지금 누리는 달콤한 행운이 훗날 나를 정체시키는 족쇄였음을 깨닫기도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 즉 '마음의 조성'이다. 오늘 하루가 유독 고단하게 느껴진다면 마음의 조성을 살짝 바꿔보자. 당신의 오늘이 전혀 다른 음악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p.147~p.148)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했던지 계절의 발걸음이 유난히 빨라진 느낌이다. 그 바람에 감기 환자가 부쩍 늘었다. 이 좋은 계절을 미처 느낄 새도 없이 감기와 씨름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다. 친구의 하모니카를 한 번만 불어보자며 사정사정해 겨우 건네받고는 가득 찬 침을 털어내느라 애를 쓰던 내 어릴 적 모습이 떠오른다. 그 시절에는 감기가 옮기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하모니카 하나로 온 동네 아이들이 각자의 손에서 손으로 옮겨가며 서툰 솜씨로 생각나는 동요를 온종일 연주하곤 했었는데... 하모니카 하나로도 온 동네 아이들이 종일 행복했던 그 시절이 언제였는지 하모니카의 떨리는 소리처럼 아련하기만 하다. 그 시절에 듣던 '섬집아기'를 누군가 옆에서 하모니카 연주로 다시 들려준다면 어떤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금세 잠이 들 것만 같다. 그리움은 한낮의 꿈처럼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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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생각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 우리들 대부분은 삶의 중심부를 향해 단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한 채, 말하자면 삶의 테두리를 의미도 없이 빙빙 겉돌기만 하다가 주어진 삶을 마감하는 까닭에 어차피 그렇게 될 것이라면 어떤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살다 죽는 것이 매사에 노심초사하면서 사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로운 삶을 전혀 경험해 본 바 없거나 그것에 대해 극히 제한적인 경험을 갖고 있는 게 전부여서 자유로운 삶을 어떻게 구현하고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우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조르바의 삶이 자유로운 삶의 원형 또는 그와 유사한 어떤 것이라고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다. 이런 얄팍한 지식으로는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자유로운 삶을 현실에서 구현하기는 어렵다.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 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남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모나지 않게 사는 것이 안전하다는 뜻이다. 조금 구질구질하기는 해도 말이다.


나희덕 시인의 산문집 <마음의 장소>를 읽고 있다. 시인이 쓴 산문은 한 꼭지 한 꼭지가 마치 한 편의 시처럼 짧고 단정하다. 전할 말만 남기고 기타의 군더더기는 모두 제거한 느낌이다. 사실 나는 시인이 쓴 산문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이처럼 간결하기 때문이 아니라 유려하고 멋진 표현력 때문일 경우가 많다. 나희덕 시인은 나의 그런 바람을 충족시켜 주기는커녕 그 반대에 가까운데 나는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한 채 계속하여 읽고 있다. 달콤한 과자가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하여 손이 가는 것처럼 말이다.


"누구에게나 특별한 마음의 장소라는 게 있다. 살면서 지치고 외로울 때 오래된 친구를 찾아가듯 몸과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 나에게도 그런 장소가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전남 강진에 있는 백운동 별서정원이다. 그곳과의 인연은 꽤 긴 편이다. 십여 년 전 지인의 안내로 월출산 아래 멋진 동백숲이 있는 집터를 가보게 되었다. 그 후로 낮은 돌담과 작은 오두막이 있는 그곳에 이따금 혼자 찾아가 앉아 있곤 했다. 집터를 구입할 사정은 안 되지만, 마음으로는 그곳에 수없이 집을 짓고 허물기를 반복했다."  (p.190 '마음의 장소' 중에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한 편의 시가 고픈 것은 순전히 계절 탓이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나처럼 뻣뻣하고 감정이 무딘 사람에게도 한 편의 시를 읽게 하는 걸 보면 '가을의 마법'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나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시를 읽었다. 서점 가판대에서 시집은 제법 인기 있는 코너였다. 세월이 무상하게도 요즘 사람들은 시를 잘 읽지 않는다. 유행 때문은 아니지만 나 역시 시와는 한참이나 멀어졌다. 계절을 핑계로 시집 한 권쯤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순전히 계절 탓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간절히 시가 고픈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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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동안 조금씩 어른이 되었다
라비니야 지음 / 모티브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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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는 마치 말과 글의 감옥에 갇혀 평생 말과 글로 하는 고문을 받게 된 느낌이다. sns에서 오가는 온갖 종류의 글과 유튜브 동영상에서 퍼지는 많은 말들. 그것뿐만이 아니다. 1인 출판이 활성화되는 바람에 시중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출판사의 책들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며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이렇게 많은 말과 글에 갇혀 살아본 적이 있을까 싶다. 그러나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법,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심지어 sns를 멀리하려는 사람도 있다. 음성 통화를 하지 않고 회식이나 모임도 피하곤 한다. 말과 글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말과 글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이런 현상이 지속되는 까닭인지 최근에는 연인 사이에도 카톡 문자를 자주 하지 않거나 평상시에도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무뚝뚝한 남자가 오히려 더 각광을 받기도 한다. 다정도 병이 되는 세상인 것이다. 고려 후기 이조년이 읊었던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라는 말을 비로소 실감하게 된 것일까.


"매일 스트레칭으로 굳은 근육을 풀어주듯, 마음의 결을 빗고 하루를 기록하는 시간은 중요하다. 스쳐 지나가는 상념에 이름을 붙이고, 엉켜 있던 사유를 풀어내며, 흩어진 감정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들어가는 일. 글 속에서 자유롭게 감정을 풀어쓰고, 집요하게 욕망을 그러모아 들여다보다 보면 삶은 조금씩 선명해진다. 그 과정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과 마주하게 되고, 오래 외면했던 마음의 목소리를 듣게 되기도 한다."  (p.8 '서문' 중에서)


나도 이따금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까닭에 나 역시 글을 통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엄한 사람들을 글 감옥에 빠트리는 주요 범인 중 1인이라는 생각은 들긴 하지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내가 올리는 글은 사람들이 읽어도 좋고 읽지 않아도 상관없는, 그저 나만의 취미생활을 통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 까닭에 상업적인 목적을 가진 글과는 구별되는 게 옳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뜩이나 글이 넘쳐나는 세상에 글 하나를 더 얹는다는 게 염치없고 마뜩잖은 일이라는 건 모르는 바 아니다. 라비니야 작가의 책 <쓰는 동안 조금씩 어른이 되었다>는 단순한 글쓰기 책은 아니다. 말과 글이 넘쳐나는 세상에 또 하나의 쓰레기와 같은 글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어지러운 세상을 더 어지럽게 만들라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나도 경험하는 바이지만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글을 쓴다는 건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일이기에 마음이 어지럽거나 안정이 되지 않을 때 명상을 하듯 매달리기에는 더없이 좋은 취미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인간의 성숙으로 직결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경험상 나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글쓰기였다. 기록으로 옮겨 적은 감정은 마음속에서 한 번 걸러지고, 나는 자신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내 감정을 능숙하게 조절하거나 타인의 감정을 섬세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각자가 품고 있는 감정의 스펙트럼과 표현 사이의 간극을 충분히 이해하는 이들일 것이다. 그 간극 때문에 우리는 서운한 것인데 화가 난 척 말하고,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굴며, 부끄럽다는 이유로 고마운 마음조차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이 모든 문제는 자기감정을 충분히 들여다보고,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해본 경험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p.153~p.154)


1부 '쓰고 싶다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가', 2부 '쓰는 사람만 알게 되는 것들', 3부 '글은 결국 삶에서 나온다', 4부 '오래 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의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들이 글 전체를 차지하고 있지만 우리가 글쓰기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을 버리고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 이 책은 작게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은 대체로 '글쓰기'가 책상 앞에서 하는 고루한 작업이며, 생각만 해도 골머리가 딱딱 아픈 고리타분한 작업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다른 일도 그렇지만 한 번 갖게 된 선입견은 직접 겪고 깨닫지 않는 한 쉽게 바뀌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해가 갈수록 오히려 강화되는 현상을 보인다. 그러나 진지하게 글쓰기를 체험한 사람은 누구나 알게 된다.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서 마음을 정갈하게 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큰 집중력이 요구되는가 하는 문제를. 그러므로 글을 쓴다는 건 수행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살아가다 보면 내가 나를 잃어버리는 때가 있다. 중심을 붙들기 어려운 날도 있고, 어떤 기억을 오래 붙잡고 싶어지는 시기도 있다. 마음을 비우고 싶을 때조차 삶은 이상하게 자꾸만 새로운 감정을 건네 온다. 그 모든 상황과 감정은 결국 나만의 영감이 된다. 그런 순간을 마주했다면, 그것은 조용히 펜을 들라는 신호일 수도 있다. 바로 그때, 한 번도 써보지 못했던 문장을 어색하게나마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천천히 고개를 들 것이다."  (p.206)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들 하지만 실은 글쓰기의 계절이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도 모르게 우수에 젖거나 기쁘거나 슬펐던 기억이 나도 모르게 떠오르곤 하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왔던 그 흔적들을 사람들은 유독 '가을'이라는 이 계절에 더 선명하게 떠올리기도 하고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는 소망도 품게 되는 것이다. 빛바랜 사진과 함께 한 줄 메모를 남기는 일쯤이야 누군들 할 수 없으랴. 그러므로 가을은 '글쓰기의 계절'이 아닐 수 없다. 한 편의 매끄럽고 완성된 글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삶의 흔적이 묻은 글이 이 가을에 추억처럼 남는다면 그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 기록되지 않은 누군가의 일상이 바람처럼 흩어지는 주말 오후, '언젠가 돋아날 날개 때문에 겨드랑이가 간질거린다'면 주저 없이 펜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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