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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동안 조금씩 어른이 되었다
라비니야 지음 / 모티브 / 2026년 7월
평점 :
말과 글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는 마치 말과 글의 감옥에 갇혀 평생 말과 글로 하는 고문을 받게 된 느낌이다. sns에서 오가는 온갖 종류의 글과 유튜브 동영상에서 퍼지는 많은 말들. 그것뿐만이 아니다. 1인 출판이 활성화되는 바람에 시중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출판사의 책들이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며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이렇게 많은 말과 글에 갇혀 살아본 적이 있을까 싶다. 그러나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법,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심지어 sns를 멀리하려는 사람도 있다. 음성 통화를 하지 않고 회식이나 모임도 피하곤 한다. 말과 글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말과 글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이런 현상이 지속되는 까닭인지 최근에는 연인 사이에도 카톡 문자를 자주 하지 않거나 평상시에도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무뚝뚝한 남자가 오히려 더 각광을 받기도 한다. 다정도 병이 되는 세상인 것이다. 고려 후기 이조년이 읊었던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라는 말을 비로소 실감하게 된 것일까.
"매일 스트레칭으로 굳은 근육을 풀어주듯, 마음의 결을 빗고 하루를 기록하는 시간은 중요하다. 스쳐 지나가는 상념에 이름을 붙이고, 엉켜 있던 사유를 풀어내며, 흩어진 감정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들어가는 일. 글 속에서 자유롭게 감정을 풀어쓰고, 집요하게 욕망을 그러모아 들여다보다 보면 삶은 조금씩 선명해진다. 그 과정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자신과 마주하게 되고, 오래 외면했던 마음의 목소리를 듣게 되기도 한다." (p.8 '서문' 중에서)
나도 이따금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까닭에 나 역시 글을 통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엄한 사람들을 글 감옥에 빠트리는 주요 범인 중 1인이라는 생각은 들긴 하지만,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내가 올리는 글은 사람들이 읽어도 좋고 읽지 않아도 상관없는, 그저 나만의 취미생활을 통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 까닭에 상업적인 목적을 가진 글과는 구별되는 게 옳지 않을까 싶기는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뜩이나 글이 넘쳐나는 세상에 글 하나를 더 얹는다는 게 염치없고 마뜩잖은 일이라는 건 모르는 바 아니다. 라비니야 작가의 책 <쓰는 동안 조금씩 어른이 되었다>는 단순한 글쓰기 책은 아니다. 말과 글이 넘쳐나는 세상에 또 하나의 쓰레기와 같은 글을 세상에 내놓음으로써 어지러운 세상을 더 어지럽게 만들라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나도 경험하는 바이지만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글을 쓴다는 건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일이기에 마음이 어지럽거나 안정이 되지 않을 때 명상을 하듯 매달리기에는 더없이 좋은 취미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인간의 성숙으로 직결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경험상 나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글쓰기였다. 기록으로 옮겨 적은 감정은 마음속에서 한 번 걸러지고, 나는 자신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내 감정을 능숙하게 조절하거나 타인의 감정을 섬세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각자가 품고 있는 감정의 스펙트럼과 표현 사이의 간극을 충분히 이해하는 이들일 것이다. 그 간극 때문에 우리는 서운한 것인데 화가 난 척 말하고,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굴며, 부끄럽다는 이유로 고마운 마음조차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이 모든 문제는 자기감정을 충분히 들여다보고,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해본 경험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p.153~p.154)
1부 '쓰고 싶다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가', 2부 '쓰는 사람만 알게 되는 것들', 3부 '글은 결국 삶에서 나온다', 4부 '오래 쓰는 사람이 된다는 것'의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들이 글 전체를 차지하고 있지만 우리가 글쓰기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을 버리고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 이 책은 작게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은 대체로 '글쓰기'가 책상 앞에서 하는 고루한 작업이며, 생각만 해도 골머리가 딱딱 아픈 고리타분한 작업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다른 일도 그렇지만 한 번 갖게 된 선입견은 직접 겪고 깨닫지 않는 한 쉽게 바뀌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해가 갈수록 오히려 강화되는 현상을 보인다. 그러나 진지하게 글쓰기를 체험한 사람은 누구나 알게 된다.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서 마음을 정갈하게 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글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큰 집중력이 요구되는가 하는 문제를. 그러므로 글을 쓴다는 건 수행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살아가다 보면 내가 나를 잃어버리는 때가 있다. 중심을 붙들기 어려운 날도 있고, 어떤 기억을 오래 붙잡고 싶어지는 시기도 있다. 마음을 비우고 싶을 때조차 삶은 이상하게 자꾸만 새로운 감정을 건네 온다. 그 모든 상황과 감정은 결국 나만의 영감이 된다. 그런 순간을 마주했다면, 그것은 조용히 펜을 들라는 신호일 수도 있다. 바로 그때, 한 번도 써보지 못했던 문장을 어색하게나마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천천히 고개를 들 것이다." (p.206)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들 하지만 실은 글쓰기의 계절이라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도 모르게 우수에 젖거나 기쁘거나 슬펐던 기억이 나도 모르게 떠오르곤 하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왔던 그 흔적들을 사람들은 유독 '가을'이라는 이 계절에 더 선명하게 떠올리기도 하고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는 소망도 품게 되는 것이다. 빛바랜 사진과 함께 한 줄 메모를 남기는 일쯤이야 누군들 할 수 없으랴. 그러므로 가을은 '글쓰기의 계절'이 아닐 수 없다. 한 편의 매끄럽고 완성된 글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삶의 흔적이 묻은 글이 이 가을에 추억처럼 남는다면 그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 기록되지 않은 누군가의 일상이 바람처럼 흩어지는 주말 오후, '언젠가 돋아날 날개 때문에 겨드랑이가 간질거린다'면 주저 없이 펜을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