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봄이 오는 소리가 언뜻 들리는 듯한 주일 오후,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별사탕 내리는 밤>을 읽고 있습니다. 간결하고 때에 따라서는 시크하게 느껴지던 그녀의 문체는 여전히 간결하기는 하지만 조금은 부드럽고 동글동글하게 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습니다. 워낙 오랜만에 읽는 에쿠니 가오리의 책인지라 어쩌면 제가 착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젊어서는 모가 났던 부분이 나이가 들수록 순하게 변하기도 하지만 내재해 있던 천성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강고해지고 고집스러워지기도 하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사와코는 지금껏 젊은 사람이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젊다는 건 어리다는 것이고, 젊음을 잃을까 겁내는 것을 꼴사납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만큼 위태로운,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하는 벌거벗은 소녀처럼 무방비한 조카를 보고 있자니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한 남자가 자신의 전부라고 믿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아젤렌은 심지어 완벽한 애정이나 완벽한 관계 같은 것도 존재한다고 믿을 것이다. 그런 젊음을 부러워한다는 건 가슴 저밀 만한 일이었다. 슬픔으로 그리고 아마도 위로와 동정으로."

 

우리는 종종 자신이 흘려보낸 세월만큼이나 자신도 역시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릅니다. 많이 변한 건 자신의 겉모습뿐이고 그것은 결코 바라지 않던 변화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를 열심히 닮으려 했던 우리 각자의 성격은 늘 그 자리에 붙박인 듯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에 실망하거나 낙담하기에는 이릅니다. 자신의 못된 성격이 늘 제자리를 지키기는커녕 나이가 들수록 더욱 심하게 나빠지는 경우도 태반이니까 말입니다. 어렸을 적의 성격을 늘 그만그만하게 유지하고 있다는 건 차라리 축복입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요.

 

낮잠을 한바탕 푸지게 자고 나면 자신의 못된 성격이 다소 느슨해지고 전에 없이 관대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성격이 못되게 변했다는 건 우리가 경험했던 많은 종류의 결핍을 어쩔 수 없이 꾹꾹 눌러 참았다는 걸 말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겨울 햇살이 쏟아지는 주일 오후, 졸리면 자도 된다고 누군가에게 말해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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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왕은 안녕하시다 1~2 - 전2권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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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능청스러움에 깜박 속아 넘어갔지 뭔가. 노량진역 헌책방에서 구입한 <국역 연려실기술> 전집 사이에 이 소설의 출처가 된 오래된 원고가 끼어 있었다나.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꾸준히 전해 내려오면서 여러 사람이 보태고 고쳐 쓴 낡은 원고를 바탕으로 작가는 그저 현대에 맞게 고쳐 썼을 뿐이라며 구라를 치는 바람에 순진하기 그지없는 나로서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작가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판인데 책이라면 사족을 못쓸 작가가 어느 날 우연히 구입한 책자 사이에서 낡은 원고 하나를 발견했고, 그 원고의 내용이 여간 탐나는 게 아니어서 현대에 맞게 번역과 각색을 하게 되었다는 말에 책을 400쪽이 넘는 두 권의 책을 다 읽는 동안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던 것이다. 사실이겠거니 생각하면서 말이다. 빌리가 애완지구인으로 트랄파마도어 행성에 납치되었었다는 커트 보네거트의 그럴듯한 구라에도 넘어가지 않았었는데...  

 

"이사를 하고 난 뒤 나는 틈날 때마다 '소설'을 노트북에 입력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원문에 들어 있는 감정과 감각, 시대정신을 손으로 직접 느껴보고 거리를 좁혀보려 했던 것이지만 과정이 길어지면서 나 또한 자연스럽게 내 나름의 편집과 번안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 소설은 원래 그런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불가해한 힘을 가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1권 p.13)

 

사실 지금 이 세상에 없는 역사적 인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 모두 케케묵은 역사서 속의 인물들이라는 인식을 독자들의 뇌리에서 지운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므로 역사소설을 읽는 독자와 소설 속 인물들 간에는 항상 일정한 거리, 혹은 괴리감이 형성되곤 한다. 그러므로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라면 누구나 그러한 괴리감을 없애기 위한 장치를 이중 삼중으로 설치한다. 그렇게 해도 눈치가 빤한 독자들을 속여먹기에는 역부족일 때가 많다는 얘기다. 성석제 작가는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 조치로 소설의 앞머리에서부터 구라를 친 것이다. 이 책이 마치 먼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야사일 뿐이고 자신은 그저 이야기의 전달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굳게 믿을 수 있도록.

 

각설하고, 조선 숙종 시절로 시간을 되돌려 보면 독자들은 소설의 화자가 되는 성형을 만나게 된다. 기생 할머니 밑에서 자라 '장안에 호가 난 알건달에 파락호'로 이름이 높은 '성형(成衡)'은 스승의 심부름을 갔다가 송시열의 집 앞에서 집을 지키는 하인배의 다리 밑으로 기어가는 수모를 겪는 것으로도 모자라 길바닥의 개똥을 먹어야 할 위기에 처한다. 그 위기를 구해준 인물이 장차 숙종이 될 세자인 소년 숙종이었다. 그 인연으로 소년 숙종과 성형은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고 급기야 의형제를 맺기에 이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에 오르게 된 세자 이순(李焞). 왕의 부름을 받은 성형은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미관말직으로 입궐하여 닳고 닳은 신하들 사이에서 어린 왕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된다.

 

성형은 양반의 자제이기는 하지만 북벌을 꿈꾸었던 임경업 장군을 따라 사라진 아버지로 인해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기생인 할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한양 제일의 기생집을 운영하며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였던 할머니 덕분에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성형. 세상 물정 모르는 천방지축의 성형이 권력을 놓고 암투를 벌이는 궁궐 깊숙이 뛰어들면서 보게 되는 남인과 서인의 당쟁, 대비와 대왕대비, 계비인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로 알려진 장옥정 간의 세력 다툼 등 숙종 치하 46년의 역사가 방대한 사료와 함께 생생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독자들의 시선이 성형에게로 과도하게 쏠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성형으로 인해 역사 속 실제 인물이 더 입체적으로 살아나고 성형 역시 여러 무술을 익혀 검계의 우두머리가 되는 설정을 취함으로써 오래전 무협지를 읽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도 한다.

 

"아버지라는 스승을 통해 배운 무공이 어느 경지에 다다르게 되자 세상이 달라 보였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작고 미미한 것들의 움직임이 환하게 눈에 들어왔고 그런 것이 대국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빠르다고 생각했던 것이 느리게 보였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은 곧 따라잡을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몸은 금강석처럼 단단해지고 머릿속은 차곡차곡 정리된 지식과 논리로 빠르게 돌아갔다." (2권 p.126)

 

열네 살에 즉위하여 46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신권(臣權) 세력을 자주 교체하는 '환국(換局'을 유도한 것으로 잘 알려진  까닭에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숙종 재위 기간은 어쩌면 독자들에게도 익숙할지도 모른다. 책이 아니더라도 영화와 드라마, 연극이나 뮤지컬을 통해 여러 번 접해보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진부하다거나 낯익게 느껴지지 않았던 까닭은 성형이라는 가공의 인물이 약방의 감초처럼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역사 속 인물들을 작가의 재치와 유머로 재탄생시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명이든 아니든 허구적으로 변용되거나 창작되었으며 역사상 실재했던 인물과는 같지 않음을 분명히 밝혀둔다. 그럼에도 당대의 창작물과 기록물에 힘입은 바 큰데『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 이긍익의『연려실기술』, 김천택의『청구영언』, 작자 미상의『 인현왕후전』『박태보전』『박태보실기』 등이 대표적이고 그 외의 수많은 문집과 내가 어릴 때 단편적으로 만난 사랑방에 떠도는 이야기들이 소개가 되었다. 그 기록 속의 격렬하고 치열하고 오욕칠정에 사로잡힌 인정을 숨김없이 묘사하는, 가혹하리만큼 아름다운 문장들이 이 소설을 계속해서 쓰게 만들었다." (2권 p.418~p.419 '작가의 말' 중에서)

 

성석제의 소설 <왕은 안녕하시다>를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익숙했던 시대적 배경과 인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역사적 재발견의 시간을 갖게 된다. 남인에서 서인, 서인에서 다시 남인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왕은 숱한 목숨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두려운 존재로 변해가고 의형제였던 성형과 왕의 관계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마음에 두었던 여인 장옥정이 왕의 여자가 되는 과정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성형의 마음을 그려냄으로써 소설은 권력과 부에 대한 욕망의 그러데이션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을 펼친 독자가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까닭은 성형이라는 가공인물을 통해 역사 속 인물을 생생하게 되살릴 뿐만 아니라 작가의 능청스러움에 독자 역시 깜빡 속아 넘어가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허구라는 걸 까맣게 잊고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인 양 느꼈던 건 내가 남보다 더 순진하기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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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우리는 배보다 배꼽이 커진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예컨대 구입한 물건의 가격보다 택배비가 더 많이 나오거나 신품을 구입할 때의 가격보다 수리비가 더 많이 나와서 난감했던 경우 등 본말이 전도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현실에서 거래되는 사물에 국한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우연찮게 엮이게 되는 여러 일들에서 발생하는 과한 대가들, 이를테면 오랫동안 공부를 하다가 그저 잠시 쉬었을 뿐인데 엄마로부터 심한 꾸지람을 듣게 되는 경우 혹은 업무를 보다가 잠시 나갔다 왔을 뿐인데 하루 종일 자리를 비운 것으로 오해를 산다거나 하는 경우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어떤 일에서 본전도 찾지 못한 듯한 느낌이 든다는 건 예상했던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결과를 받아들었다는 걸 인정하는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와 같은 일들에 대해 모름지기 사람들은 판단력이 부족해서 그리 된 게 아니냐고 말하곤 합니다. 일의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거나 오해를 살 만한 일은 하지 않으면 되는 게 아니냐는 말이지요. 그러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게 우리네 안목이고 보면 그런 타박은 너무 과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생각한 대로 예측한 대로 살아지는 인생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읽는 이야기의 대부분이 사람들의 잘못된 예측이나 헛된 이상에서 비롯되는 한 사람의 실패담일 뿐이지요. 그럼에도 그와 같은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고 공감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나도 그와 같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소소한 일상을 경험하기 위해 너무나 귀중한 시간을 소비하는 까닭에 우리 모두의 인생은 실패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부조리마저 탄생과 함께 신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면 달리 도리가 없을 듯합니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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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체험판)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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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아무도 없는 계단을 올라본 사람은 알 것이다. 계단의 난간과 난간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는 1층 로비의 여린 불빛, 그것은 어쩌면 까마득한 높이에 대한 공포이자 기우뚱 난간 옆으로 쓰러짐으로써 삶과 죽음의 아득한 거리를 단숨에 뛰어넘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강한 유혹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삶의 한쪽 끝을 부여잡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 그와 같은 불안은 우리 곁에서 조용히 거닐다가 농밀한 침묵이 내려앉는 순간 아득한 공포로, 혹은 강한 유혹으로 우리를 일깨우곤 한다.

 

김영하의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에는 '여행'이라는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박사학위를 준비하면서 대학에서 시간강사를 맡고 있는 한선과 짧았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수진. 말하자면 그들은 오래 전의 연인이었다. 지금은 상대방의 생일마저 기억에서 희미해진. 그러나 수진은 자신이 결혼한다는 사실을 한선에게 알린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게 예의라고 생각해서. 한선은 수진에게 같이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담긴 끈끈하고 강한 미련을 수진에게 어필하면서.

 

그러나 결혼을 이 주 앞두고 마지막 이별 여행을 가겠다고 했던 수진은 연락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한선은 수진의 집으로 찾아가고 백화점에서 산 혼수품을 들고 귀가하던 수진을 불러 세운다. 예상치도 않았던 한선의 출현에 수진은 들고 있던 쇼핑백을 놓쳐버리고 만다. 그 바람에 쇼핑백 안에 들었던 그릇이 와장창  깨져버리고, 주차 공간이 없어 잠시 이중 주차를 했던 한선의 차를 빼 달라는 경비 아저씨의 요청에 수진은 어쩔 수 없이 한선의 차에 오른다. 가까운 데서 차나 한 잔 하자던 한선은 느닷없이 고속도로로 내달렸고 수진은 자신의 엄마와 예비 남편으로부터 여러 통의 문자 메시지를 받는다.

 

"전화를 끊자 한선과 자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어떤 얇고 끈적이는 막을 찢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태연히 거짓말을 했고 다른 남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것이다. 수진은 눈을 감은 채 그동안 꼿꼿하게 긴장하고 있던 머리를 등받이에 기댔다. 고단한 하루였다." (p48)

 

들어가야 한다는 수진의 요구를 무시한 채 납치하다시피 하여 동해안에 다다른 수진과 한선. 둘은 차에서 내려 인적이 없는 포구의 방죽을 걷게 된다. 한선이 벌인 돌발행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던 수진은 한선에게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른다. 그러는 수진을 힘으로 제압한 한선. 어쩌면 한선은 자신과의 관계를 정리한 채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수진이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시련? 그런 게 아니라 모래언덕에서 아래로 계속 미끄러져 내려가는 기분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힘을 내서 다시 올라가고 싶은 기분도 아니라는 거야. 올라가봤자 모래언덕일 뿐이야. 그 너머엔 또다른 모래언덕이 있겠지." (p.42)

 

"내 인생이 TV 드라마였다면 벌써 시청자들의 항의가 인터넷 게시판에 빗발쳤을 거야. 지루한 연장 방영을 즉각 중단하라고." (p.51)

 

인적이 없는 포구에서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둘 사이에 갑자기 낯선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배를 타지 않겠느냐 권하고 싫다며 달아나는 두 사람을 앞질러 가 한선의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한선을 향해 마구잡이로 폭력을 행사한다. 한선은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수진은 낯선 남자를 향해 경찰에 신고를 했으니 그만두라고 말한다. 수진의 말에 그 사람은 마을을 향해 달아나고 수진은 119에 신고를 한다. 심하게 다친 한선을 앰뷸런스에 실은 구급대원이 동행할 것을 수진에게 요구하였으나 수진은 모르는 사람이라며 거부한다. 그리고 수진은 택시를 부른다.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은 채.

 

"택시에서는 뽑은 지 얼마 안 되는 새 차 냄새가 났다. 지친 몸을 뒤로 기대며 발을 뻗는데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깨진 그릇이 담긴 백화점 쇼핑백이었다. 이제는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었고 한쪽 옆구리는 찢어지기도 했다. 그녀는 쇼핑백 안에서 사금파리 하나를 꺼내 손에 쥐었다. 택시는 어느새 고속도로로 들어서 있었다." (p.61)

 

헤어진 남자 친구의 리벤지 폭행을 연상시키는 이 소설은 마치 서늘한 공포영화처럼 긴박하게 돌아간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에는 이와 같은 불안이나 공포가 상존하지 않던가. 비록 언제라는 기약은 없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매일 반복적으로 경험되고 익숙해지는 일상에 의해 꾸려지는 것만은 아니다. 게다가 세상을 흔들고 지배하는 것은 흔한 일상이 아니라 전혀 본 적도 없고 예상하지도 못했던 '블랙스완'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안정화시키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구축하도록 한다. 김영하의 단편소설 '여행'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보이지 않는 '블랙스완'의 존재를 강하게 믿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 서늘한 공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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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인 시인으로부터 시집<가벼운 입술소리>를 선물로 받은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생각이 번다하여 시구는 그저 마른 낙엽처럼 흩날린다.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을 건조하게 살아가는 까닭에 몸보다 앞선 마음이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져 풀풀 먼짓내만 풍기고 있다. 메마른 시구는 가슴에 남지 않는다. 그저 눈으로만 훑고 지나쳤던 시는 시인에 대한 미안함으로 남는다. 머잖아 봄이 오고 메마른 대지에도 봄처럼 초록물이 오르면 벙그러진 미안함을 내 눈에 가득 담아 한 자 한 자 눌러가며 읽어야겠다. 

 

눈송이

 

먼 우주에서 날아온 눈송이가

나비처럼 날아서

모닥불에 내려앉았다

 

흐드러지게 핀 꽃이여!

하늘하늘 흔들리는 불꽃에

넋을 잃었다

 

꽃잎 깊숙이 몸을 들이밀자

이내 불꽃이 되었다

 

사랑은

온전히 주었을 때 찾아온다

 

 

개구쟁이 휘파람새

 

휘파람새가 놀려 댄다

열여섯 살 꽃님이

 

중 중 까까중

중 중 까까중

 

복숭아빛 수줍음 붉게 타는

꽃님이 볼 때마다

얄미운 휘파람새가 놀려 댄다

 

또래 애들 학교길 훔쳐볼 때

경전 펴고 사르르 눈꺼풀이 풀리면

 

중 중 까까중

중 중 까까중

 

개구쟁이 휘파람새가 놀려 댄다

부끄러워 할수록 재미있다고

자꾸자꾸 놀려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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