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왕은 안녕하시다 1~2 - 전2권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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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능청스러움에 깜박 속아 넘어갔지 뭔가. 노량진역 헌책방에서 구입한 <국역 연려실기술> 전집 사이에 이 소설의 출처가 된 오래된 원고가 끼어 있었다나. 과거의 어느 시점부터 꾸준히 전해 내려오면서 여러 사람이 보태고 고쳐 쓴 낡은 원고를 바탕으로 작가는 그저 현대에 맞게 고쳐 썼을 뿐이라며 구라를 치는 바람에 순진하기 그지없는 나로서는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작가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판인데 책이라면 사족을 못쓸 작가가 어느 날 우연히 구입한 책자 사이에서 낡은 원고 하나를 발견했고, 그 원고의 내용이 여간 탐나는 게 아니어서 현대에 맞게 번역과 각색을 하게 되었다는 말에 책을 400쪽이 넘는 두 권의 책을 다 읽는 동안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던 것이다. 사실이겠거니 생각하면서 말이다. 빌리가 애완지구인으로 트랄파마도어 행성에 납치되었었다는 커트 보네거트의 그럴듯한 구라에도 넘어가지 않았었는데...  

 

"이사를 하고 난 뒤 나는 틈날 때마다 '소설'을 노트북에 입력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원문에 들어 있는 감정과 감각, 시대정신을 손으로 직접 느껴보고 거리를 좁혀보려 했던 것이지만 과정이 길어지면서 나 또한 자연스럽게 내 나름의 편집과 번안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 소설은 원래 그런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불가해한 힘을 가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1권 p.13)

 

사실 지금 이 세상에 없는 역사적 인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 모두 케케묵은 역사서 속의 인물들이라는 인식을 독자들의 뇌리에서 지운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므로 역사소설을 읽는 독자와 소설 속 인물들 간에는 항상 일정한 거리, 혹은 괴리감이 형성되곤 한다. 그러므로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라면 누구나 그러한 괴리감을 없애기 위한 장치를 이중 삼중으로 설치한다. 그렇게 해도 눈치가 빤한 독자들을 속여먹기에는 역부족일 때가 많다는 얘기다. 성석제 작가는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하 조치로 소설의 앞머리에서부터 구라를 친 것이다. 이 책이 마치 먼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야사일 뿐이고 자신은 그저 이야기의 전달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굳게 믿을 수 있도록.

 

각설하고, 조선 숙종 시절로 시간을 되돌려 보면 독자들은 소설의 화자가 되는 성형을 만나게 된다. 기생 할머니 밑에서 자라 '장안에 호가 난 알건달에 파락호'로 이름이 높은 '성형(成衡)'은 스승의 심부름을 갔다가 송시열의 집 앞에서 집을 지키는 하인배의 다리 밑으로 기어가는 수모를 겪는 것으로도 모자라 길바닥의 개똥을 먹어야 할 위기에 처한다. 그 위기를 구해준 인물이 장차 숙종이 될 세자인 소년 숙종이었다. 그 인연으로 소년 숙종과 성형은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고 급기야 의형제를 맺기에 이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에 오르게 된 세자 이순(李焞). 왕의 부름을 받은 성형은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미관말직으로 입궐하여 닳고 닳은 신하들 사이에서 어린 왕을 지키는 임무를 맡게 된다.

 

성형은 양반의 자제이기는 하지만 북벌을 꿈꾸었던 임경업 장군을 따라 사라진 아버지로 인해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 채 기생인 할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한양 제일의 기생집을 운영하며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였던 할머니 덕분에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성형. 세상 물정 모르는 천방지축의 성형이 권력을 놓고 암투를 벌이는 궁궐 깊숙이 뛰어들면서 보게 되는 남인과 서인의 당쟁, 대비와 대왕대비, 계비인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로 알려진 장옥정 간의 세력 다툼 등 숙종 치하 46년의 역사가 방대한 사료와 함께 생생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독자들의 시선이 성형에게로 과도하게 쏠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성형으로 인해 역사 속 실제 인물이 더 입체적으로 살아나고 성형 역시 여러 무술을 익혀 검계의 우두머리가 되는 설정을 취함으로써 오래전 무협지를 읽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도 한다.

 

"아버지라는 스승을 통해 배운 무공이 어느 경지에 다다르게 되자 세상이 달라 보였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작고 미미한 것들의 움직임이 환하게 눈에 들어왔고 그런 것이 대국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빠르다고 생각했던 것이 느리게 보였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은 곧 따라잡을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몸은 금강석처럼 단단해지고 머릿속은 차곡차곡 정리된 지식과 논리로 빠르게 돌아갔다." (2권 p.126)

 

열네 살에 즉위하여 46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신권(臣權) 세력을 자주 교체하는 '환국(換局'을 유도한 것으로 잘 알려진  까닭에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숙종 재위 기간은 어쩌면 독자들에게도 익숙할지도 모른다. 책이 아니더라도 영화와 드라마, 연극이나 뮤지컬을 통해 여러 번 접해보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진부하다거나 낯익게 느껴지지 않았던 까닭은 성형이라는 가공의 인물이 약방의 감초처럼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방대한 사료를 바탕으로 다양한 역사 속 인물들을 작가의 재치와 유머로 재탄생시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명이든 아니든 허구적으로 변용되거나 창작되었으며 역사상 실재했던 인물과는 같지 않음을 분명히 밝혀둔다. 그럼에도 당대의 창작물과 기록물에 힘입은 바 큰데『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 이긍익의『연려실기술』, 김천택의『청구영언』, 작자 미상의『 인현왕후전』『박태보전』『박태보실기』 등이 대표적이고 그 외의 수많은 문집과 내가 어릴 때 단편적으로 만난 사랑방에 떠도는 이야기들이 소개가 되었다. 그 기록 속의 격렬하고 치열하고 오욕칠정에 사로잡힌 인정을 숨김없이 묘사하는, 가혹하리만큼 아름다운 문장들이 이 소설을 계속해서 쓰게 만들었다." (2권 p.418~p.419 '작가의 말' 중에서)

 

성석제의 소설 <왕은 안녕하시다>를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익숙했던 시대적 배경과 인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역사적 재발견의 시간을 갖게 된다. 남인에서 서인, 서인에서 다시 남인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왕은 숱한 목숨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두려운 존재로 변해가고 의형제였던 성형과 왕의 관계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마음에 두었던 여인 장옥정이 왕의 여자가 되는 과정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성형의 마음을 그려냄으로써 소설은 권력과 부에 대한 욕망의 그러데이션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을 펼친 독자가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까닭은 성형이라는 가공인물을 통해 역사 속 인물을 생생하게 되살릴 뿐만 아니라 작가의 능청스러움에 독자 역시 깜빡 속아 넘어가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허구라는 걸 까맣게 잊고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인 양 느꼈던 건 내가 남보다 더 순진하기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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