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꼭 하나 배우고 싶은 기술이 있습니다. '과거를 다루는 기술'입니다. 인생 전체를 통해서도 결코 완벽해질 수 없는 기술이기도 하고, 아무리 갈고닦아도 타인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충격이나 외부 환경의 변화에 의해서도 아주 손쉽게 무뎌질 수 있는 허약한 기술이기도 하지요. 예컨대 질병이나 죽음, 경제적 파산이나 돌이킬 수 없는 사고 등으로 인한 충격은 아름답기만 하던 과거를 무지막지한 괴물로 변신시키는가 하면 그 괴물이 한 사람의 잔여 삶 전체를 통째로 삼켜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과거라는 괴물 앞에서 아주 미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지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통제하고 언제든 과거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꼼꼼히 기록함으로써,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무시함으로써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곤 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벌어진 가수 정준영의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전자 기계에 남겨진 자신의 기록으로 인해 그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무너지거나 큰 타격을 감수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과거 기록을 철저히 소각하거나 지우려 했던 전두환에게서 보는 것처럼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따금 자신의 과거 속으로 한없이 빠져들게도 되고, 자신의 과거를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마치 남의 일인 양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나의 과거이지만 나의 의지만으로는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 나는 과거라는 게 그 자체로서 생명을 가진 별개의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과거라는 존재와 나는 내가 생명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 서로 협조하고 상생하면서 잘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다루는 기술'은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 누구에게나 필요한 기술이지만 아무도 연마할 수 없는 허황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명력을 과거라는 존재에 조금씩 빼앗기다가 마침내 모든 것을 넘겨줌으로써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아닐지... 봄볕 완연한 휴일 오후, 아슴아슴 졸음이 밀려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안한 하루가 또 그렇게 아슬아슬한 시간 속으로 사라집니다. 문명의 역사를 살아간다는 것은 적과 아군,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뚜렷이 한다는 것이고, 그와 같은 경계를 높이 세울수록 우리 곁에서 평화는 멀어진다는 것이요, 생명에 대한 우리의 도덕성은 한없이 추락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금 문명의 공간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위태로운 시간들을 함구한 채 비겁의 시간을 견뎌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2003년 노밸문학상 수상 작가인 J.M. 쿳시의 대표작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문명의 역사를 쓰고 있는 우리들 각자의 뒷모습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입니다. 현재 생존해 있는 영어권 소설가 중 가장 유명한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쿳시는 그의 다른 작품 <추락>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품위와 야만성을 가장 밑바닥까지 드러내어 보여줍니다. 때로는 그의 묘사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참혹한 것이어서 질끈 눈을 감고 싶을 때도 더러 있지만 작가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습니다.

 

"문명이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나는 문명에 반대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러한 입장에서 행정 업무를 수행했다. (지금은 야만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p.66)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어느 제국의 변경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소일하는 시골 치안판사이자 관리입니다. 세금을 거둬들이고 공동 경작지를 관리하며, 주둔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고 변경의 하급 관리를 감독하며, 교역을 감시하고 일주일에 두 번씩 법정업무를 주재하는 게 '나'의 주된 업무입니다. 조용한 시대에 조용한 삶을 살다 가는 것 이상을 바란 적 없는 소박한 야망의 소유자이기도 한 '나'는 야만인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변경의 치안판사로서 야만인들에 대한 경계보다는 상생의 평화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모든 피조물이 정의에 대한 원초적 기억을 갖고 세상에 태어난다.'고 믿는 '나'의 철학에 기초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가 누리던 평화는 야만인 부족들이 무장을 하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야만인 부족들이 연합전선을 펼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징후와 함께 산산이 부서지게 됩니다. 변경의 불안한 징후를 잠재우기 위해 수도에서 파견한 보안청 소속의 졸 대령과 경찰들은 변경의 유목민들이나 원부민들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고, 특별한 죄목도 없이 고문을 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취조를 합니다. 졸 대령이 보고를 하기 위해 수도로 돌아간 후'나'는 졸 대령이 끌고 왔던 야만인 여자를 돌봐주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고문을 당해 눈이 멀고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비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나'는 야만인 여자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과 동정심, 남자로서의 성적 욕망을 동시에 느낍니다. 졸 대령이 수도로 떠난 후 겨울, '나'는 야만인 여자를 '나'의 숙소에 머물게 합니다. '나'는 예전처럼 고전을 읽고, 수집한 유물의 목록을 작성하고, 호숫가에서 영양을 사냥하는 등 평화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녀를 어루만지는 행위를 하다가 도끼로 찍힌 것처럼 잠에 압도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녀의 몸 위에 엎어진 채 망각 속으로 빠져들다가 한두 시간 후에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목이 마른 상태로 잠에서 깬다. 꿈조차 꾸지 않는 이 상태가 나에게는 죽음, 혹은 시간 밖에 존재하는 텅 빈 황홀경 같다." (p.54)

 

변경에서 삼 년간의 복무연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병사들을 대체할 징집병 파견부대가 도착을 했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나'는 야만인 여자를 그녀의 부족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두 명의 파견병과 사냥꾼 한 명을 대동하고 말이죠. 잔혹한 날씨와 험한 지형을 뚫고 마침내 '나'는 여자를 그녀의 부족에게 인계한 후 무사히 되돌아 옵니다. 그러나 보고도 없이 여러 날 자리를 비웠던 게 화근이 되어 '나'는 곧바로 수감됩니다.

 

"나는 처음 감방에 들어와 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채워질 때 웃었다. 일상적인 삶의 고독에서 감방의 고독으로 옮겨가는 건 큰 고통이 아닌 듯했다. 생각과 기억을 갖고 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자유라는 게 얼마나 기본적인 것인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어떤 자유가 남았는가? 먹거나 배고플 자유, 침묵을 지키거나 혼자 지껄일 자유, 혹은 문을 두드리거나 비명을 지를 자유이리라. 그들이 나를 여기에 감금했을 때 내가 불의, 경미한 불의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피와 뼈와 고기가 뭉쳐진 불행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p.142)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나'는 잔인한 고문과 갖은 수모를 겪게 됩니다. 내가 수감되어 고초를 겪는 동안 졸 대령이 이끄는 정규 부대는 야만인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을 합니다. 마을에 남겨진 군인은 많지 않았습니다. 원정을 떠난 부대로부터는 연락이 없고 야만인들의 반격이 있은 후 마을에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게 됩니다. 야만인들의 공격으로 농사를 망친 까닭에 사람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서둘러 마을을 떠납니다. 간수들도 이제 '나'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떠나지 못한 사람들과 함께 겨울을 대비합니다. '나'는 이제 치안 판사의 모습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리고 야만인들에게 패한 후 졸 대령 일행이 초라한 모습으로 복귀하는데...

 

"그들은 언젠가 자기들도 아버지처럼 강해지고 어머니처럼 아이들을 잘 낳을 것이며, 그들이 태어난 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잘 살다가 늙어가리라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물속의 고기들이나 허공의 새들이나 아이들과 같은 시간 개념 속에 사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걸까? 그건 제국의 잘못이다! 제국은 역사의 시간을 만들어냈다. 제국은 부드럽게 반복되는 순환적인 계절의 시간이 아니라 흥망성쇠와 시작과 끝, 그리고 파국이라는 들쭉날쭉한 시간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p.219)

 

문명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우리는 언제나 '야만인'이라는 가상의 적을 상정하곤 합니다. 가까운 과거의 기록을 보더라도 우리는 이와 같은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이나 시리아 내전이 그러했고, 최근 뉴질랜드에서 발생한 총기 테러 사건이 그렇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의 남과 북 역시 각자의 마음 속에 가상의 야만인을 품은 채 서로에 대한 적대감만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쿳시는 소설 속 주인공인 '나'를 통해 말합니다. '우리는 타락한 존재이며, 정의에 대한 기억이 퇴색하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법을 지키는 것뿐'이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문명이 야만인들이 가진 미덕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만든다면, 나는 문명에 반대한다'고. '제국의 변방 오지에도 마음속에서는 야만인이 아니었던 자가 적어도 한 사람은 있었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 작가는 우리에게 긴 이야기를 들려주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우리는 역사의 바다에 저마다의 부표를 띄운 채 영역 밖 야만인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역사의 바다를 항행하는 우리들의 불안한 하루가 아슬아슬한 시간 속으로 또 그렇게 무참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제 국회에서 나경원 원내대표의 연설이 있어서 하는 얘기지만 공인이라면 누구든 피해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가족관계나 친일의 이력, 혹은 성형과 같은 사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감추고 싶었던 비밀도 대중에게 그 일단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그로 인해 붙여지는 별명은 일종의 낙인찍기와 진배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끝없이 전파된다는 점에서 비밀의 탄로보다 더 괴로울지도 모른다. 나경원 원내대표가 대통령을 향해 '김정은의 수석 대변인'이라고 했던 것에 대해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닐까 싶다.

 

나경원 원내대표 역시 이와 같은 별명에서 자유롭지 않다. 일본식 냄비요리 나베를 포털에서 검색하면 '나경원 나베'가 연관 검색어로 뜨기도 하고, '자위녀', '국썅' 등 입에 담기도 좀 뭣한 별명들이 검색어에 줄줄이 올라온다. 나베는 일본 극우 아베 자민당을 벤치마킹하자는 나경원 원내대표를 합친 말이고, 자위녀와 국썅은 2004년 서울의 모 호텔에서 개최된 일본 자위대 창설 기념행사장에 참석하면서 얻게 된 별명이다.

 

사실 어제의 원내대표 연설은 연설문이라기보다 그동안 쌓아온 감정의 배설이나 다름없었다. 연설문을 본인이 썼는지 아니면 보좌관이 써줬는지 알 수 없지만 초등학생의 반장 선거 연설문 수준에도 못 미치는 수준 낮은 연설문이었다. 물론 나경원 원내대표의 어제 모습으로 봐서는 연설문의 격이나 수준은 전혀 문제 될 게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일본의 거대 커뮤니티 5CH(5 채널)에서는 나경원 원내대표의 국회 연설로 난장판이 됐다는 소식이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고 한다. 나경원 원내대표의 발언에 대한 혐한 성향의 일본 네티즌들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말하자면 어제 있었던 나경원 원내대표의 연설은 그녀 스스로 자신이 친일 자위녀임을 제대로 시인한 셈이었다. 그런 면에서 어제의 국회 연설은 자위녀의 커밍아웃 현장이나 진배없었다. 이와 같은 사실에 본인도 만족했는지 그녀는 환한 얼굴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퇴장했다. 국민들의 생각이야 어떻든 간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레삭매냐 2019-03-13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베의 프레임에 말려들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선거법 개정 패스트트랙에 태울 테니
공언한 대로, 모두 총사퇴해주시면 좋겠네요.

꼼쥐 2019-03-16 19:10   좋아요 0 | URL
선거법을 패스트트랙에 태우는 것도 만만치 않은 듯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들이 총사퇴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말이죠.
 
보노보노, 오늘 하루는 어땠어?
이가라시 미키오 지음, 고주영 옮김 / 놀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렸을 때의 기억을 끝없이 반복하며 되새기게 되는 이유는 뭘까? 되새김질하듯 반복하는 그 기억 속에서 우리는 어렸을 때는 미처 몰랐던 숨겨진 의미나 깨달음을 새로 발견하기도 하고, 이제는 영원히 되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나 향수를 가슴에 품기도 한다. 그 시절에 자주 찾던 앞산의 언덕이나 산자락의 공터, 불투명 유리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던 만화방, 온갖 잡동사니를 팔던 학교 앞 문방구...

 

이가라시 미키오의 만화 '보노보노'에 대한 추억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가지런히 꽂혀 있던 친구네 집 책꽂이에서 우연히 보고 꺼내 읽었던 '보노보노'. 책을 펼쳤을 때 나는 퀴퀴한 종이 냄새 대신 학창 시절 사내아이 방에서 풍기던 시큼한 땀냄새와 만화에서만 맛볼 수 있는 나른한 휴식, 그리고 만화에 정신없이 빠져드는 날이면 유난히 빨리 찾아오는 저녁 어스름.

 

"『보노보노, 오늘 하루는 어땠어?』는 <보노보노>의 베스트 컬렉션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30년 넘게 꾸준히 연재해 온 에피소드 중에 특별하게 고른 이야기만을 모았으니까요. 보노보노와 숲속 친구들이 모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모았기 때문에 <보노보노>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 입문용으로 읽기에도 좋습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들을 골랐지만, 인기가 많았던 이야기들도 염두에 두었습니다." (p.10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만화의 주인공인 보노보노와 절친 포로리, 숲속 개구쟁이인 너부리,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보게 되는 야옹이 형,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명랑한 성격의 홰내기, 너부리와는 숙명의 라이벌이면서 포로리의 누나인 아로리 등 성격도, 생김새도, 사는 환경도 다 다른 숲속 친구들은 때로는 티격태격 서로 다투기도 하고 또 금세 화해를 하기도 하면서 삶의 의미를 깨우쳐 간다.

 

책에 수록된 에피소드에서 너부리는 자신의 꼬리를 떼어내 군더더기 없는 멋진 몸이 되겠다는 엉뚱한 결심을 내보이는가 하면, 모두가  요즘 뭔가 신통치가 않고 재미가 없다는 너부리의 말에 여러 기발한 놀이를 생각해내기도 하고, 모두 쓸쓸하니까 시시한 얘기라도 하고 싶은 거라는 포로리의 말에 정말 그런지 쓸쓸해지기도 하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한다는 건 풍경을 보면서 걷는 것과 비슷하구나' 하는 멋진 말을 남기기도 한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만화에 익숙해진 요즘 독자들에게 이 만화는 어쩌면 시시하거나 밋밋하다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탈도 많고 사건도 많은 현대인들에게 보노보노와 그의 친구들이 펼치는 단순하고 순진한 일상들이 말할 수 없이 푸근한 안식처가 되고 가슴 따뜻한 위로가 되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습관처럼 마주치는 자극에 자신도 모르게 지쳐가고 있었던 건 아닐까. 밥은 먹었느냐? 와 같은 일상적인 물음이 나도 모르게 어느새 그리워진 것은 아닐까.

 

종일 어둡기만 하던 하늘에선 오후가 되자 결국 몇 방울의 비가 되어 떨어졌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찬바람이 불었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저물고 있다. 우리의 삶에 행복을 더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일을 무작정 기다릴 게 아니라 특별한 일을 스스로 찾고 다 함께 만들어가야 하는 것임을 보노보노와 숲속 친구들은 우리에게 말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언제나 서글프거나 서글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상 과거에 대한 진한 향수를 지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과거를 강하게 부정함으로써 자신이 저지른 지난날의 과오를 덮으려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상반된 행위는 모두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서글픈 것이다. 과거를 부정하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염두에 둔 것이기에 더욱 쓸쓸하고 그 행위자에 대한 연민과 애처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잘못 살아왔다고 판단하는 사람의 대체적인 반응은 자기부정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까닭에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을 수는 없고,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까닭에 자신이 죽고 난 후 자신에 대한 세간의 판단이 두려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얼마 남지 않은 삶의 기간 동안 자신의 과오를 적극적으로 부정함은 물론 자신의 행위에 동조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집착함으로써 자신이 죽은 후에도 그들이 자신을 대신하여 세간의 평가를 바로잡아줄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는 것이다. 통렬한 반성을 하는 사람은 오히려 용기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당당한 사람은 잘 살아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어제 전두환 씨의 법정 출두 장면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감정은 그에 대한 연민이었다. 얼마나 나약하고 추한 모습이었던가.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고, 대중 앞에서 반성조차 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 그럼에도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난 후 내려질 세간의 평가에 대해서는 몹시 두려워하는 이율배반적인 상황. 그는 딱 그 지점에 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 역시 많지 않았던 듯하다. 대중을 향한 적개심은 나약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공포를 드러낸 단 한 마디의 문장. "이거 왜 이래!" 공포와 적개심이 한데 뭉쳐진 언어 밖의 언어. 가장 나약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자기부정의 언어. 그리고 공포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한 더욱 과장된 몸짓. 그 모든 감정이 하나에 응축되어 터져 나온 말, "이거 왜 이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