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제일 어렵다 - 남에겐 친절하고 나에겐 불친절한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
우르술라 누버 지음, 손희주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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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위범(不作爲犯)'을 아시는지. 우리나라 형법에 등장하는 법률용어입니다. 형법 제18조에 보면 '위험의 발생을 방지할 의무가 있거나, 자기 행위로 인해 위험이 발생했는데도 그것을 방지하지 않았을 경우 그 결과에 대해 처벌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적극적인 행위를 한 건 아니지만 위험을 방지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단순히 방치만 했다고 하더라도 부작위범으로 처벌받는다는 뜻입니다.

 

갑자기 웬 어려운 법률용어를 꺼내들어 모르는 사람의 기를 죽이느냐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일 최고의 심리상담사로 잘 알려진 우르술라 누버의 저서 <나는 내가 제일 어렵다>를 읽은 독자라면 누구라도 '부작위범'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라면, 또는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연인 관계에 있는 남자라면 '부작위범'의 혐의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방치한 것은 아니지만 여자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었기 때문이라는 변명만으로 그 혐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런지는 의문이지만 말입니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독자가 남자라면 자신의 그러한 범죄 혐의에 대해 적어도 도덕적 반성은 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남에겐 친절하고 나에겐 불친절한 여자들을 위한 심리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여자보다는 오히려 남자들을 위한 필독서라고 하는 게 옳을 듯합니다. 저자는 남자와 여자의 사회화 과정으로부터 촉발된 남자와 여자의 특성과 여성이 우울증 발병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저자 자신이 상담했던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회로부터 자율성과 독립성을 요구받는 남성과는 달리 관계를 중요시하고 공감과 배려를 통하여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계속하여 유지하려고 하는 여성을 비교할 때 여성에게 우울증은 필연적인 결과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게다가 우울증을 악화시킬 수 있는 환경, 예컨대 경제적 상황의 악화나 남편의 외면 등은 여성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그러나 관계를 중시하는 여성은 '타인을 잃어버리지 않고자 하는 소망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리고 마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앞서 소개한 브리기테처럼 여자들은 대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만두고 상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들어준다. 그후에 찾아오는 상심과 우울이 상대방의 태도나 흐름 때문이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차단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실망했으며 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울한 여자에게 진실은 결코 밝혀져서는 안 되는 두려운 무엇이다." (p.69~p.70)

 

그동안 나는 우울증에 관련된 여러 권의 책을 읽어왔으나 그것들은 대개 단순한 지식의 차원에서만 읽었을 뿐, 지금처럼 가슴으로 공감하며 읽었던 적은 아마 없었지 싶습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아내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아내에게 나란 인간이 얼마나 모질고 냉혹한 인간으로 비쳤을까 생각할 때 미안한 마음이 절로 들고 죄책감과 후회의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남녀의 삶을 각각 관찰해보면 특정 상황에서 여성을 우울증으로 내모는 관계장애가 남자의 '냉정함'과 '몰인정', 그리고 여성의 '욕구'와 '의존'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파악할 수 있다. 이렇듯 남자가 여자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는 듯 보여도 사실 이 둘은 한 배에 올라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이다." (p.201~p.202)

 

관계와 배려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여성이 어느 날 절망에 빠져 모든 것을 내려 놓는 상황이 되면 어느 집이건 그 상황을 수습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듯합니다. 우울증을 앓는 당사자가 제일 힘들겠지만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도 당혹스러움에 우왕좌왕하는 것은 물론 이로 인하여 가정 전체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 문제일 테지요. 그렇다면 우울증은 꼭 나쁘다고만 말할 수 있을까요? 저자도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를 내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회복을 전제로 하는 말일 테지만 말입니다.

 

"우울은 여성을 헛된 노력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신호이다. 우울한 여성은 자신의 정신상태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병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우울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위한 준비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때까지 몰랐던 우울의 원인을 찾아내고 특정한 행동방식과 목표가 과연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p.261)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여성들은 대개 '다른 이들의 욕구와 바람을 충족시키기 위해 불가능한 과제들을 너무 많이 떠맡고, 본인의 진정한 감정은 숨긴 채 불행한 관계를 이어나가는' 듯합니다. 그렇게 과제들을 떠맡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 반드시 한계 상황에 봉착하게 되고,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 과제들을 보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보다는 먼저 자신의 무능을 탓한다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다른 누군가를 위해 충분히 노력하고 헌신했음에도 말이지요.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어느 한 페이지 허투루 넘겼던 적이 없었던 듯합니다. 시중에는 남성과 여성을 비교하는 책도 많고, 우울증의 발병 원인과 처방에 대해 쓴 책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 책들이 지식의 측면에서는 유용할지 몰라도 남성과 여성이 상대방의 삶을 진심으로 이해하도록 만들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사춘기의 서로 다른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가 공감하는 부분이 점차 줄어드는 상태로 성장하는 바람에 남자인 나로서는 아내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그것은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 테지요. 그런 까닭에 나는 서두에서 꺼낸 '부작위범'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내의 원망에 대해 지금으로서는 여자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궁색한 변명을 할 수밖에 없겠지만 앞으로의 삶에서는 조금쯤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적어도 '부작위범'이 되고 싶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 참고로 저자가 제안하는 여성이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한 5가지 방법을 적어둔다.

1.내 우울의 정체를 파악하라.

2.일단 몸을 움직이면서 적극적인 인간으로 변신할 준비를 하라.

3.주위에 S.O.S 타전을 보내라.

4.내가 나를 위하지 않으면 누가 날 위해줄 것인가.(자기 공감: 1.자기 자신에 친절하기. 2.다른 사람과 연대하기. 3.지금 내 상황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인식하기.)

5.(항상 착하고 완벽하며 친절하게 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만인에게 친절한 나는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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